94화
“끄어억!”
레이든이 얼굴을 부여잡고 물러섰다. 동여맨 머리가 풀려 미친놈처럼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으으윽….”
극악의 통증에 신음이 나온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놈이 어떻게 목에 검을 대고 있었는지, 왜 얼굴이 아픈 건지. 단 하나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레이든이 바드득 이를 갈며 고개를 들었다. 라온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단해. 네 검을 피하고, 네 얼굴을 쳤다.”
그는 밥을 먹는 것처럼 평온하게 대답했다.
“그, 그걸 어떻게 했냐는….”
“방금으로 한 번이다.”
라온은 질문과는 상관없는 대답을 하며 검지를 들어 올렸다.
“뭐?”
“오늘 여덟 번을 죽을 거라고 말했지. 지금 건 보내지도 않고 서신을 주었다는 거짓말에 대한 대가다.”
“이, 이 새끼가….”
레이든이 찢어질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당장에 라온의 사지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여덟 번? 개소리 작작해! 넌 방금 검투를 끝내지 않은 걸 평생 후회하게 될 거다!”
레이든은 악을 내지르며 연검을 내리쳤다.
콰과과과!
오러가 실린 연검이 태풍처럼 몰아쳐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결정연검의 광휘풍이었다.
쿠구구구!
연검이 크라켄의 촉수처럼 요동쳤지만, 라온은 가람보법을 연속으로 밟아 쏟아지는 검기를 회피했다.
‘어딜!’
레이든이 주먹을 꽉 쥐며 연검을 휘돌렸다. 연검에 맺힌 검기가 파도처럼 출렁이며 라온의 앞길을 막기 시작했다.
‘한 번에 잡는 걸 노려선 안 돼.’
아직도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방심해서는 안 된다. 방안에 들어온 벌레를 몰아서 잡듯이 놈을 압박해야 한다.
손목만이 아니라, 팔꿈치와 어깨까지 써가며 연검의 긴 날을 끝까지 사용했다.
라온의 시야에서는 눈앞에 연검과 검기로 이루어진 벽을 보는 것처럼 느낄 거다.
“그대로 회를 쳐주마!”
레이든이 결정연검의 열 번째 형 적훼벽을 운용했다. 장미 덩굴처럼 꼬인 연검의 벽이 라온을 향해 쇄도했다.
“음….”
가람보법을 밟으며 연검을 흘려내던 라온이 몸을 돌렸다. 적훼벽을 피해 뒤로 물러선다.
“걸렸어!”
뒤로 물러서면 물러설수록 적훼벽에 가속도가 붙는다. 이제 놈은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였다.
터엉!
쭉 뒤로 물러서던 라온이 허공에서 몸을 돌린 후 땅을 박찼다.
‘이놈 무슨!’
검기의 벽에 그대로 달려들다니, 미친놈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았다.
“헉!”
레이든이 헛바람을 흘렸다. 적훼벽이 끝까지 밀려간 순간 놈이 촛불처럼 훅 꺼졌다.
“이런!”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전처럼 라온이 오른쪽에서 나타나리라 생각하고 연검을 끌어왔다.
‘없어?’
하지만 우측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왼쪽이다.”
그 말이 귀에 닿기도 전에 함께 왼쪽 얼굴에 끔찍한 통증이 찾아왔다.
“끄아아악!”
레이든은 왼쪽 광대뼈에 밀려온 충격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으으으윽….”
고통이 가시질 않는다. 광대뼈가 주저앉은 게 분명했다.
“으아아아악!”
레이든이 괴성을 질렀다. 연검에 오러를 주입해 세운 날을 땅에 박으며 일어섰다.
“바, 방금 뭘 한 거야…. 분명 앞에 있었는데!”
“이건 어머니가 키운 꽃에 침을 뱉은 대가다.”
“이 미친놈이!”
턱이 덜덜 떨렸다. 라온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저 또라이 새끼는 아까 말한 대로 여덟 개의 빚을 갚아주려는 것 같았다.
“내가 이대로 끝날 것 같으냐!”
레이든이 뒤로 물러서며 단전의 오러를 끌어 올렸다. 더 이상 장난이 아니다. 검투고 지랄이고, 지금 이 자리에서 저놈을 죽여 버리기로 결정했다.
고오오오!
끌어올린 오러를 마나 회로 전체에 내보내며 연검을 세웠다. 줄기줄기 뻗어나간 오러에 바람 없이도 옷깃이 펄럭거렸다.
“뼈까지 발라서 죽여주마!”
레이든이 빳빳하게 세운 연검을 내질렀다. 그야말로 섬전 같은 속도.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라온의 미간 앞에 도달했다.
후우웅.
라온이 방어를 위해 검을 내리치려는 순간 레이든이 오른팔 전체를 진동시켰다.
콰아아아아!
그 격한 떨림이 연검 전체에 전해지며 쫙 펴졌던 검날의 궤도가 똬리를 튼 뱀처럼 구부러졌다.
여덟 개의 촉수를 가진 크라켄이 바다를 짓이기는 것처럼 적의 전신을 찢어발기는 결정연검의 절기 연폭검이었다.
공기조차 갈라버리는 예리함 속에서 라온은 물러서지 않았다. 두 눈을 빛내며 자세를 낮췄다.
‘저 새끼 또!’
레이든이 이를 악물었다. 놈은 아까도 저런 눈빛을 보인 뒤 사라져서 오른쪽과 왼쪽에서 나타났었다. 이번에도 놓칠 수는 없었다.
“크아아아!”
전력으로 끌어 올린 오러를 이용하여 연폭검을 내질렀다. 풍선처럼 부푼 검기의 응집체가 라온을 휘몰아쳤다.
‘방심해선 안 돼.’
멍청이처럼 세 번이나 당할 수는 없었다. 라온이 연검의 벽을 뚫고 나올지도 모르니 감각을 극한으로 다듬었다.
콰콰콰광!
연폭검의 강력한 검기에 바닥이 종잇장처럼 깎여나갔다. 하지만 살을 가르는 손맛은 없었다. 놈은 또 사라졌다.
“어디냐!”
레이든이 기감을 펼쳐내며 당겨온 연검으로 주변을 막아냈다. 좌, 우 혹은 뒤에서 와도 막을 수 있도록 대비했다.
“앞이다.”
하지만 라온의 목소리는 왼쪽도, 오른쪽도, 뒤쪽도 아닌 앞에서 들려왔다. 긴급히 대비하려 했지만, 놈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뻐어어억!
빛살이 되어 솟구친 라온의 주먹이 레이든의 턱을 깨부쉈다.
“끄아아악!”
레이든이 턱을 부여잡은 채로 비명을 질렀다. 아프다. 뺨을 맞았을 때보다, 광대뼈가 주저앉았을 때보다 지금이 더 아팠다.
“으으….”
턱뼈가 조각나고, 피부가 찢어졌는지 피가 바닥에 줄줄 흘러내렸다.
“세 번째는 어머니가 키운 꽃을 밟은 대가다.”
라온이 레이든의 앞으로 다가오며 검을 털어냈다.
“네 검은 전부 파악했다. 이젠 피할 필요도 없겠어.”
“개소리….”
레이든이 벌떡 일어나며 입에서 허연 김을 뿜어냈다. 머릿속에서 놈을 죽여야겠다는 분노가 폭발했지만, 볼을 씹어 가라앉혔다.
‘도발이다. 도발.’
손가락이 떨린다. 이 이상 저놈에게 얻어맞으면 기절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진다면 모든 걸 잃게 된다. 절대 질 수 없었다.
“후우우욱!”
단전 전체를 진동시켜 전신에 오러를 퍼뜨렸다. 오래 버티지 못하지만, 이 순간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콰아아아아!
폭주하는 듯한 기운과 달리 마음을 안정시키고 차분히 결정연검을 펼쳐냈다. 이전보다 더 빠르고 예리하며 화려한 검기가 공간을 휘몰아쳤다.
‘이건 못 피해.’
지금까지 펼친 것 중 가장 정확한 검기가 라온을 향했다.
라온은 가람보법을 밟으며 검기의 파도 속으로 들어왔다.
지금의 결정연검은 라온이 상대했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놈은 그 자만심의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죽어라.’
휘어진 연검의 검극으로 라온의 심장을 찌르려 할 때 라온의 검이 사선으로 올라갔다.
캬아아앙!
라온의 부딪친 연검에서 팔이 휘청일 정도의 충격이 밀려왔다.
“뭐, 뭐야!”
분명 라온의 검을 흘려내고 놈의 심장을 노렸는데, 검술이 도중에 끊겨버렸다.
“이익!”
레이든이 걸정연검의 네 번째 형을 펼치며 라온을 압박했다.
하지만.
캬아앙!
라온이 검을 내리치자, 연검은 끊어진 고무줄처럼 축 늘어져 튕겨 나왔다.
“흐아압!”
기압을 지르며 다시 결정연검을 쏘아냈다. 하지만 라온이 검을 휘두르기만 하면 초식이 가닥가닥 끊어져 검술이 이어지질 않았다.
“마, 말도 안 돼….”
간신히 만들어놓은 안정된 정신이 깨져나갔다. 놈은 정말로 자신의 결정연검을 전부 파악한 것처럼 검술을 파훼했다.
“말했잖아. 네 검술은 전부 알았다고.”
라온이 연검을 길게 쳐내고 쇄도해왔다.
“꺼, 꺼져!”
레이든이 왼쪽 주먹을 내질렀지만, 라온은 가볍게 피해낸 뒤 검을 후려쳤다.
빠아아악!
검면으로 이마를 얻어맞은 레이든이 발로 찬 공처럼 뒤로 날아갔다.
“끄아아아악!”
고통이 심한지 레이든은 이마를 부여잡은 채 바닥에서 버둥거렸다.
“이, 이건 아니야!
극심한 통증에 기절할 것 같았지만, 입술을 짓씹으며 일어섰다. 지금은 누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말이 안 된다고!”
이 짧은 시간에 결정연검을 파악했다니,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어야 했다.
“네 번째는 헬렌을 때린 대가다.”
라온은 레이든을 무시한 채 천천히 걸어왔다.
‘이럴 수는 없어!’
레이든이 부러지도록 검병을 꽉 쥐고, 연검을 들어 올렸다.
“흐아아아!”
더 빠르고 예리하게 결정연검의 초식을 펼쳐냈다.
치이이잉!
강렬한 의지를 담은 연검이 화려한 궤적을 만들어내며 라온을 향해 짓쳐 들었다. 속도, 예리함, 위력. 모두 이전과는 격이 달랐다.
“…….”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라온의 걸음은 그대로였다. 산책을 나온 듯 가볍게 걸으며 연검의 폭풍으로 들어갔다.
캬앙!
라온이 검을 그었다. 파리를 쫓는듯한 가벼운 검에 연검이 크게 휘청였다.
지금까지 만들어낸 변화와 흐름이 그 한 번에 사라져버렸다.
“이익!”
레이든은 포기하지 않았다. 흐물해진 연검을 휘돌려 다시 한번 결정연검의 절기를 펼쳐냈다.
콰아아아!
연검에 맺힌 검기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라온은 검기의 비를 향해 연성검법을 이어 그었다.
쩡!
뭐라 말할 수 없는 가벼운 올려치기였지만, 결정연검의 절기가 끊어지고, 연검이 거칠게 튕겨 나왔다.
“뭐, 뭐야! 뭐냐고!”
레이든이 턱을 덜덜 떨며 뒤로 물러섰다. 고작 한 번의 휘두름으로 절기가 끊기다니, 직접 겪었음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잘못된 거야. 이럴 리 없다고!”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부여잡고, 연검을 내리쳤다. 결정연검의 두 번째 절기 폭아참이 펼쳐졌다.
캬아아아!
짐승의 송곳니같이 날카롭고 사나운 검격이 라온의 심장과 목을 노렸다.
라온이 멈춰 섰다. 당황의 눈빛은 없었다. 그저 올린 검을 내렸다.
우우웅!
대가가 그리는 그림처럼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내려간 검격에 폭아참이 녹아내린다.
검기가 사그라지고, 초식이 짓눌린다. 고작 한 번의 휘두름에.
“아….”
레이든이 헛바람을 흘렸다. 폭아참을 지우며 다가오는 라온을 보자, 심장이 꽉 우그러들었다.
연성검법에 가람보법.
대륙의 검사라면 누구나 알 법한 검술과 보법을 밟는데, 놈을 뚫을 수가 없다.
분명 알고 있는 초식이건만 막을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헉, 허억!”
호흡이 가빠온다. 라온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맹수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은 듯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재차 연검을 그어봤지만, 라온의 검에 튕겨 나가 땅에 박혀버렸다.
빠아아악!
모든 검기를 지우고, 다가온 라온이 검을 들어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큽!”
더 강해진 통증에 순간 말이 나오질 않았다. 사지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다.
“끅끄으!”
레이든은 비명조차 아닌 괴이한 신음을 흘리며 터져나간 뺨을 부여잡았다.
“일어나라.”
라온의 눈동자에서 타오른 분노의 불길은 아직도 꺼지지 않았다.
“아직 다섯 번째니까.”
* * *
검투는 처음부터 끝까지 라온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레이든은 도발에 넘어가 아직 완벽하게 익히지 않은 결정연검을 펼쳤고, 라온은 익숙해지다 못해 눈을 감고도 펼칠 수 있는 연성검법을 사용했다.
완숙되지 않은 뛰어난 검법을 익힌 검사와 누구나 아는 검법을 완벽하게 익힌 검사가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
대부분은 뛰어난 검법을 익힌 검사라고 생각할 거다.
하지만 아니다.
완성되지 않은 고급 검술을 익힌 검사는 강하고, 화려한 검격을 발휘할지언정 상황에 적절한 검술을 펼칠 수 없다.
반면 기본적인 검술을 완벽하게 익힌 검사는 단순한 검로일지언정 그 순간에 가장 적합한 검초를 펼쳐낼 수 있다.
처음엔 강한 검술을 익힌 검사가 우위를 점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시간이 지나며 차이가 벌어져 기본 검술을 완벽하게 익힌 검사가 점점 승기를 잡게 될 거다.
거기다 가장 중요한 건 검술이 아니라, 누가 검술을 사용하느냐이다.
기본 검술을 사용하는 사람이 불의 고리를 익히고, 주디엘의 정보를 받은 라온이니, 그가 레이든을 일방적으로 후려 패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라온은 피를 질질 흘리며 몸을 일으키는 레이든을 바라보았다.
“아, 아직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저, 절대 질 수 없어….”
눈동자에 담긴 건 지독한 살기. 무슨 짓을 해도 죽여버리겠다는 악의였다.
“크아아아!”
레이든의 오러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놈의 주변이 녹빛으로 물들고, 바닥에 진동이 일어났다.
“후.”
라온은 피부를 찢을 듯 살벌한 살기와 검기를 느끼면서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히고 검을 들었다.
중단세. 검을 복부 앞에 두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취했다. 적의 강렬한 기세 앞에서도 그의 검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뒈져!”
레이든이 폭발시킨 기운을 연검에 담아 내리쳤다. 하나의 칼날이 찰나의 순간 수십 개로 변해 라온의 전신 급소를 향해 쏘아졌다.
레이든이 아끼고 아껴두었던 결정연검의 마지막 초식 대풍우였다.
단 하나의 칼날만 맞아도 살아남을 수 없는 검기의 다발 속에서 라온이 검을 들어 올렸다.
빛살처럼 뻗어나가는 연검과 달리 지루할 정도로 느린 움직임. 하지만 검도, 라온의 눈빛도 흔들리지 않았다.
후우웅!
모든 것을 찢어발긴 검기가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라온이 검을 내리쳤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안에는 검술의 본의가 담겼다.
연성검법. 별을 이어붙인다는 의미대로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자연스럽게 연계되는 검술이 펼쳐졌다.
금방이라도 라온을 집어삼킬 것 같았던 대풍아가 연성검법의 거대한 흐름 앞에 갈라진다.
“아아….”
찢어지는 검기의 파도 속에서 핏발이 선 레이든의 눈동자가 보인다. 당황을 넘어 경악이 어린 얼굴이었다.
“이게 전부인가?”
“나, 난….”
“벌써 포기하면 곤란해.”
라온이 검을 털어내며 레이든을 향해 다가갔다.
“넌 세 번 더 죽어야 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