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지그하르트의 대연무장은 직계나 대주급 혹은 가주에게 허가를 받은 인원만이 들어와 훈련을 할 수 있다.
몇 가지 예외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검투다.
검사와 검사가 자존심을 걸고 벌이는 그 대련만큼은 보고 싶어 하는 사람 모두가 대연무장에 들어올 수 있었다.
검투 시작까지 아직 한 시간 이상 남았지만, 워낙에 유명한 인물들의 대결이다 보니, 대연무장의 좌석은 이미 꽉 들어찼다.
의자에 앉지 못한 사람들은 연무장 외곽에서라도 좋은 자리를 잡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대연무장은 시장 바닥을 방불케 했지만, 그들 모두의 이야기는 비슷하게 흘러갔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특이한 검투야. 오늘 대결을 놓치는 놈은 평생 후회할걸.”
“그래. 다시 오지 않을 싸움이겠지.”
“하긴 직계의 검사와 방계의 수련생이니까.”
“그것도 요즘 가장 이름이 많이 나오는 애들이잖아.”
직계 검사와 방계 수련생의 대결. 그리고 최근에 가문에서 큰 공을 세운 두 명의 검투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은 최고조에 올라 있었다.
“라온과 레이든 도련님이 싸우면 누가 이기려나. 비슷해야 재밌을 텐데.”
“음, 검투가 특이한 거지 결과는 이미 나와 있잖아.”
“라온이 아무리 나이에 비해 강하다고 해도 절대 못 이겨.”
“하지만 녹전귀를 베었다고….”
“그걸 라온 혼자 한 게 아니잖아. 5 연무장의 수련생들이 함께 싸운 거지.”
“반면에 레이든 도련님은 혼자서 백혈교의 지부를 무너뜨렸지. 아무리 작은 지부라고 해도 그건 쉬운 일이 아니야.”
검사들 대부분은 라온의 소문이 부풀려졌다고 생각했기에 당연히 레이든이 검투에서 승리하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에이, 라온도 마스터인 광혈귀를 상대로 버텼잖아. 싸움은 해봐야 아는 거야.”
“그거 리메르가 헛소리 한 거라니까. 그냥 구라라고!”
“버티긴 했겠지. 몇 초 정도?”
“나도 레이든 도련님이 마음에 안 들고, 이번 일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어. 그분은 이미 익스퍼트 중급이야. 라온과는 너무 큰 벽이 있다고.”
“역시.”
“하긴….”
이미 분위기가 형성되었는지 라온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갔다.
대연무장에 있는 검사들의 머릿속엔 이미 라온의 패배가 그려져 있었다.
“난 라온이 적당히 버텨만 줘도 괜찮다고 생각해. 잘 싸우면 가주님이 내기 내용을 바꿔주실지도….”
“아주 뚫린 구멍이라고 개소리가 왈왈 잘도 나오네.”
“누가… 억!”
뒤에서 들려온 서늘한 목소리에 검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마르타 지그하르트가 고운 이마를 찌그러뜨리고 있었다.
“헛소리? 구라?”
마르타가 앞으로 몸을 내밀며 코웃음을 쳤다.
“그게 진짜 구라였으면 나나 버렌이 가만히 있었겠냐. 니들 대가리 장식으로 달린 거 아니잖아. 생각 좀 해라. 앙?”
단아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상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으음….”
“그게….”
검사들은 마르타에게 따지긴커녕 신음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어쩔 수 없다. 정식 검사라고 해도 데니어 지그하르트의 애정을 받는 딸을 건드릴 배짱은 없었으니까.
“그 동태눈깔로 봐 둬.”
마르타가 팔짱을 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너희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질 테니까.”
* * *
“데니어가 딸년을 잘못 키웠군.”
단상 위에 앉아 있던 발데르가 다리를 꼬며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아니, 잘못 키운 게 아니라, 잘못 주워온 건가.”
그는 저런 옹이구멍 같은 눈을 가진 놈이 무슨 재능이 있냐고 중얼거렸다.
다만 그도 마르타가 검사들을 함부로 대한 것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만큼 이 세계는 직계와 방계 혹은 그 아래와의 차이가 컸다.
“이미 끝난 싸움이거늘. 검투 따윈 빨리 끝내고, 그 건방진 놈의 비명이나 듣고 싶군.”
오늘 대결의 결과는 이미 뻔했다. 라온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연검을 겪어보지 않고선 레이든을 상대할 수 없다.
검투 이후 단전이 부숴지고, 마나 회로가 찢어져 비명을 지르는 라온을 볼 생각에 벌써 흥겨운 미소가 지어졌다.
“오! 오랜만이네요.”
“음?”
진중한 분위기의 단상과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음성에 발데르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리메르?”
붉은 머리 엘프가 히죽이는 미소를 줄줄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아, 지나가다가 보이길래 들렸습니다.”
“그럼 그대로 지나가라.”
“아하하. 농담도.”
사라지라는 말에도 리메르는 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발데르의 옆에 붙었다.
“너랑 내가 농담 따위를 할 사이인가?”
“재밌는 소리를 하셔서요.”
“뭐?”
“이미 끝난 싸움이라니, 누가 이겼다는 말이죠?”
“네놈의 망가진 눈깔로도 보일 텐데, 레이든의 기세와 네놈이 키운 떨거지의 기세가.”
“흐음, 확실히 차이가 나긴 하네.”
리메르가 대연무장의 양쪽에 서 있는 라온과 레이든을 차례로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근데 싸움이라는 게 꼭 기세와 무력으로 결정되는 건 아닌데.”
“흥, 그거야 버러지들의 싸움에서나 그렇지. 익스퍼트 급이 되면 경지의 차이를 넘기 힘들다. 거기다 레이든은 연검사다. 네놈의 제자는 살과 뼈가 발려서 뜯겨나갈 거다.”
“그럼 저랑 내기라도 하시겠습니까?”
“뭐?”
“그렇게 자신 있으면 내기 하나 하자구요.”
리메르는 빙긋 웃으며 양손을 내밀었다.
“광혈귀와 싸웠다는 헛소문처럼 또 무슨 술수를 부리려는 거냐.”
“오늘은 가주님도 보러오시는데 제 술수가 통하기나 하겠습니까.”
“음….”
발데르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리메르를 함부로 대하기 힘든 게 바로 이점이다. 놈은 아직도 가주인 아버지와 한 번씩 만나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이 있으시니, 서로 뭣 좀 걸어봅시다. 혹시 쫄리면 빠져도….”
“닥쳐라!”
발데르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발을 올리고 있던 발판이 우그러졌다.
“아하하, 농담입니다.”
“네놈은 뭘 걸 거지?”
“전 이겁니다.”
리메르의 품에서 잎사귀 모양의 단검이 나왔다. 태양 빛을 받자 진짜 풀잎처럼 청아한 향과 신비로운 빛을 발했다.
“이건….”
“뭔지 아시죠?”
“정말 이 물건을 내기에 걸겠다는 건가?”
“물론이죠. 내기는 한 방 아닙니까! 한 방!”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지? 내 용견검이라도 원하는 건가?”
“아뇨.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
리메르가 고개를 저으며 히죽 웃었다. 버렌을 골리고, 라온을 놀릴 때의 표정이었다.
“저는….”
* * *
라온은 손목과 발목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처음으로 온 대연무장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조금도 긴장되지 않았다.
‘약효가 좋은데.’
마르타가 준 청심수를 미리 먹고 온 덕분일까. 머리는 맑고, 심장은 평소처럼 느리면서 침착하게 뛰었다.
버렌에게 받은 약도 잘 받아, 이제 육체의 부상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공터나, 5 연무장에서 훈련할 때처럼 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온이 반대편에 서 있는 레이든을 보았다. 그는 검투를 앞두고서도 여유롭게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자신감을 보여주려는 거겠지.’
레이든이 저렇게 여유를 부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과 그의 차이를 보여주려고 일부러 저런 연출을 하는 중이다.
‘다만….’
저런 연출은 압도적인 차이가 나거나, 확실한 승리할 수 있을 때나 하는 행동.
라온이 시녀의 안마를 즐기는 레이든을 보며 서늘하게 웃었다. 그는 오늘 일을 평생 후회하게 될 거다.
“지그하르트의 하늘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경의를 취해주십시오!”
어깨를 풀고 있을 때 연무장 정문 앞에 서 있던 검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쿠구구구!
거대한 문이 반으로 갈라지고, 글렌과 천검대가 동시에 들어왔다.
사람은 많지만 보이는 건 오직 글렌 뿐이다. 그의 전율적인 기세에 연무장의 공기가 피부를 찌를 듯 날카로워졌다.
무력이 강해질수록 그가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 알게 되어 볼 때마다 소름이 돋아올랐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라온은 연무장에 있는 모두와 똑같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볼 때마다 무릎을 꿇고, 인사라니, 인간이란 것들은 참으로 귀찮도다.
라스가 짜증을 부리며 혀를 찼다. 다만 그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부러움이 느껴졌다.
마계의 군주인지 뭔지에서 이제 자신의 팔찌에 사는 초라한 임차인이 되었으니, 모두에게 존경과 공포를 주는 글렌을 질투하는 것 같았다.
‘하여튼 속이 좁다니까.’
-뭐라 했느냐.
‘아니야.’
라온은 고개를 숙인 채로 작은 미소를 지었다.
“모두 일어나라.”
그 사이에 단상의 중심에 있던 옥좌에 앉은 글렌이 입을 뗐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모두의 귓속에 똑똑히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지그하르트의 검사들은 다시 고개를 숙인 뒤 일어섰다.
“좋군.”
글렌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연무장의 서쪽에 있는 라온과 동쪽에 있는 레이든을 차례로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검투를 시작하라.”
“예!”
당상 아래에 있던 사회자가 글렌에게 크게 허리를 굽히고 뒤를 돌았다.
후우우웅!
그가 손을 올리자, 대연무장의 외곽에 서 있던 기수들이 화검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흔들었다.
동시에 깃발이 펄럭이자 연무장 전체가 불길이 출렁이는 장관이 연출 되었다.
“검투사들은 앞으로!”
“드디어.”
레이든이 히죽 웃으며 손을 뻗자, 뒤에 있던 시녀가 검집을 가져왔다. 창보다 더 긴 검집에서 흐물거리는 검을 뽑았다.
피이잉.
길고 얇은 연검은 살아 있는 뱀처럼 휘적이며 기이한 소리를 흘렸다.
라온은 살기 등등한 눈빛을 흘리는 레이든을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부러질 정도로 난간을 세게 부여잡은 채 입술을 깨문 실비아가 보였다. 그녀에게 눈으로 말을 전했다. 괜찮으니, 마음 놓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실비아 옆에는 두 손을 꼭 끌어모은 헬렌과 시녀들이 있었다. 신에게 기도하듯 어깨를 떨고 있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레이든과의 싸움이 아니라, 저들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다.
“후….”
라온은 숨을 뱉는 걸로 머리를 비우고 걸어가 레이든과 마주 섰다.
* * *
“흐아!”
레이든은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보았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가. 일주일이 일 년보다 더 길었다.
‘이제야 갚을 수 있겠군.’
별관에서의 굴욕. 자신을 볼 때마다 비웃음을 참는 듯한 검사들의 눈깔을 바꿔줄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다.
턱 끝까지 차오른 흥분을 참으며 연검을 고쳐잡았다.
‘자, 와라. 당장에…저 새끼가.’
레이든이 이를 갈았다. 라온은 자신이 아니라, 뒤에 있는 실비아와 시녀들을 보고 있었다.
전투 직전에 보인 무관심에 속이 뒤집어질 듯이 울렁였다.
‘아예 사지를 잘라주지.’
검투에서 라온의 팔다리를 자르고, 검투 결과로 단전과 마나 회로까지 끊어버렸을 때의 라온과 시녀들의 얼굴을 상상하자, 등골 사이로 희열이 올라왔다.
“준비하십시오.”
사회자의 준비 신호에 레이든이 손목을 돌렸다. 그저 가볍게 손목을 움직였을 뿐인데 연검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전 준비되었습니다.”
라온은 검을 뽑지조차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너처럼 건방진 놈은 정말이지 처음이다.”
레이든이 얼굴을 들이밀며 콧등을 찡그렸다.
“그날 네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를 알려주지.”
“운?”
라온은 검집을 매만지며 픽 웃었다.
“이 새끼가 정말….”
“물러나십시오.”
사회자가 레이든을 억지로 밀어냈다.
“팔이 잘려도, 단전이 찢어져도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보겠다.”
“그럼 평생 볼 일 없겠네.”
라온은 미소를 유지한 채 검병을 쥐었다.
빠득.
레이든은 부서질 듯 이빨을 갈고 뒤로 물러섰다. 저놈과 말싸움을 하기보다 빨리 검투를 시작하는 게 맞았다.
사회자는 눈빛으로 준비가 되었냐를 물었고,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레이든 지그하르트와 라온 지그하르트의 검투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가 레이든과 라온 사이를 가로막았던 손을 올리고 뒤로 물러섰다.
“크하하하!”
레이든이 광소를 흘리며 연검을 내리쳤다. 파르륵 소리와 함께 검이 리본처럼 빙빙 꼬이며 라온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피이잉!
라온은 나풀거리는 꽃잎처럼 몸을 비틀어 연검을 피해냈다.
“피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손목을 올려 치자, 연검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라온을 뒤쫓았다.
“큭….”
라온은 인상을 찌푸리며 가람보법을 밟아 연검을 피하려 했지만, 그 흐름은 이미 레이든이 모두 알고 있는 것이었다.
“말했지. 그때와 다르다고! 계속 도망쳐봐라!”
레이든이 히죽이며 결정연검의 세 번째 형 마결귀를 펼쳤다. 연검의 날이 지그재그로 휘어지며 라온의 다리를 노렸다.
치이잉!
라온이 검을 뽑아 아래로 내렸다. 마결귀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검으로 막으려는 것 같았다.
“크흐!”
레이든이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았다.
‘멍청한 놈!’
연검술은 공격 방향의 전환이 너무 빨라 수비하기 굉장히 어렵다. 눈에 보이는 곳을 수비했다간 다른 곳을 베이기 마련이다.
지금의 라온 역시 마찬가지다. 놈은 다리를 노린다는 생각에 하체에 검을 가져갔지만 그건 큰 실수였다.
피이이익!
레이든이 손목을 휘돌리자, 라온의 종아리를 향하던 연검이 덩굴을 탄 뱀처럼 위로 솟구쳤다.
‘경고한 대로 네놈의 팔을 가져가마!’
예리하게 쏘이진 검날이 라온의 팔을 가르고 놈이 비명을 지르는 모습이 그려졌다.
“어?”
레이든이 마른침을 삼켰다. 연검이 팔을 찢기 전에 눈앞에 있던 라온이 사라졌다.
“어, 어디…헉!”
레이든이 비명을 지르며 검을 쥔 손을 떨었다. 목젖에서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눈동자를 돌려보니, 사라진 라온이 자신의 목에 검을 대고 있었다.
“뭐, 뭐가 어찌 된….”
“첫 번째다.”
“처, 첫 번째? 뭐가 첫 번째라는 거냐!”
“넌 오늘 여덟 번 죽게 될 거다.”
그 말을 마친 라온의 주먹이 레이든의 얼굴에 작렬했다.
뻐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