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실비아는 어제 마무리하지 못한 정원을 정리하고 있었다.
익숙한 손놀림에 지저분했던 수풀이 폭신한 쿠션처럼 동그랗게 변해갔다.
“다행히 많이 망가지진 않았네요.”
뒤에서 보조하던 헬렌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게. 조금만 고생하면 예전보다 나을지도 모르겠어.”
실비아가 옅게 웃으며 가위를 들었다. 그녀는 레이든이 와서 부렸던 행패의 흔적을 모두 지우려는 듯 지저분했던 곳들을 말끔하게 치웠다.
“저기 마님.”
“응?”
“도련님을 저대로 두어도 괜찮을까요?”
헬렌의 얼굴빛은 재처럼 회색이었다. 걱정으로 인해 잠도 제대로 못 잔 것 같았다. 다른 시녀들도 비슷했는지 동시에 두 눈을 끔뻑였다.
“어떻게 해서든 검투를 막는 게….”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
실비아가 가위를 헬렌에게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절대 검투를 진행하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 바로 아버지께 찾아가려 했어.”
“그런데 왜….”
“라온이. 그 어린아이가 어느새 검사의 얼굴이 되었거든.”
“아….”
“첫 임무를 떠나기 전에 그 아이에게 전한 말이 있어. 당당하게 예전 지그하르트의 검사처럼 살아가 달라고.”
그녀는 뒤를 돌아, 헬렌과 눈을 마주치고 시녀들을 보며 웃었다.
“라온은 내가 해줬던 말보다 훨씬 멋지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어. 지금의 내가 부끄러울 정도로.”
“마님….”
“아이가 그런 얼굴을 하는데, 엄마가 믿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어. 그리고….”
실비아가 입매를 가늘게 올리며 라온이 있을 별관 뒤편을 보았다.
“헬렌도 느꼈듯이 라온이 괜찮다고 말했을 때 정말 다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 우리가 할 일은 저 아이를 믿고, 웃으며 기다리는 거야.”
* * *
라온은 주디엘이 주었던 레이든에 관한 정보를 모두 외운 뒤 태워버렸다.
실제로 레이든의 연검술을 본 적은 없었지만, 내용이 상세해 마치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듯했다.
‘이대로 수련하면 되겠어.’
평범한 검술과 보법인 연성검법과 가람보법으로 레이든을 압살하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이런 정보가 있으면 훨씬 편하게 대련을 준비할 수 있다.
주디엘의 정보를 바탕으로 보법과 검술의 흐름을 조금 바꾸어 수련을 시작했다.
적의 움직임을 상상하며 검을 휘두르고, 보법을 운용하니 움직임이 훨씬 체계화되었다.
후우우!
한창 수련에 빠져 있을 때 얼음꽃 팔찌에서 가느다란 냉기가 피어올랐다.
-참으로 애잔하구나.
라스가 끌끌 혀를 차며 비웃음을 흘렸다.
-쓰레기 따위를 상대하는 데 그런 노력을 해야 하다니, 불쌍할 정도이니라. 본왕이라면 입김 하나로 뼛속까지 얼려버렸을 터인데.
“지금 당장 싸워도 놈을 이기는 건 간단해.”
라온이 호 하고 입김을 뿜어내는 라스를 밀어냈다.
“중요한 건 놈을 압도적으로 이기는 거지. 놈의 검이 내 몸에 닿지도 않을 정도로.”
-이해를 못 하겠군. 이기면 그만 아닌가?
“아니야.”
고개를 저었다. 단순한 대련이라면 어떻게 이기든 상관없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내가 레이든을 건드리게 되면서 나와 별관이 직계와 직계를 따르는 추종자들의 목표가 되었어. 이번 검투에서 승리해서 진무전의 위험을 벗어난다고 해도 다른 놈들이 노릴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어떤 가문이라도 직계와 방계 사이에는 높고 두꺼운 벽이 있다. 지그하르트 정도의 명가라면 그 벽을 뚫을 수 없을 정도로 두껍다.
그런 가문의 직계와 추종자들은 방계들이 자신의 위치에 도달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게 한때 직계였던 자들이라고 해도.
‘그렇기에 보여줘야 하지.’
글렌에게 내가 직계 이상의 쓸모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야 한다.
-고대부터 인간들은 조상의 피를. 그것도 더 진한 피를 따져댔지. 똑같은 빨간색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 제 놈들이 흡혈귀 놈들도 아니고. 추레하고, 지저분한 전통이다.
“처음으로 네놈과 의견이 일치하는군.”
매 순간 화만 터트리는 이 악마 놈과 생각이 같다니,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열심히 해라. 어차피 네놈의 모든 것은 본왕의 것이 될 테니까.
라스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팔찌로 들어갔다.
“이야. 한마디 만에 다시 정떨어지게 하는 것도 능력이야.”
라온이 차게 웃으며 일어섰다. 다시 수련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주디엘은 아닌데.’
실비아나 헬렌도 아니었지만, 기척이 굉장히 친숙했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때 작은 인형이 나타났다.
“어?”
맹한 눈동자, 나풀거리는 은발과 새하얀 피부. 공터로 다가오는 사람은 루난이었다.
“루난?”
“응.”
루난은 무언가가 들어 있는 보자기를 껴안고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걸어왔다.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나무 옆에 폴싹 주저앉았다.
“네가 왜 여기에….”
“싸움.”
루난도 라온이 레이든과 싸운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단순한 싸움은 아니고, 검투였지만.
“그래서 왔어.”
그녀는 작은 손은 꼼지락거리며 가지고 온 보자기를 풀기 시작했다.
“음….”
루난을 보고 있던 라온은 많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벽과 바위, 나무 뒤에서 실비아와 헬렌, 시녀들이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여튼 저 사람들은.’
좀 진지해졌나 했더니, 금세 풀어졌다. 정말이지 이상한 사람들이다.
“됐다.”
루난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잘 감싼 보자기 안에는 그녀가 보물처럼 가지고 다니던 아이스크림 상자가 있었다.
탁.
루난이 상자의 뚜껑을 열자, 이전에 본 것보다 더 크고 반짝이는 구슬 아이스크림 다섯 개가 허연 냉기를 피워냈다.
“먹어.”
루난은 뚜껑을 연 상자를 그대로 내밀었다. 맹하게 가라앉았던 그녀의 눈동자가 아이스크림과 똑같이 반짝였다.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먹으라는 뜻 같았다.
“음.”
라온은 손을 대지 않고 잠시 아이스크림을 바라보았다.
“먹어.”
가만히 있자, 루난이 손을 휘휘 저었다. 저 눈을 보니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다만 루난이 좋아하는 분홍색 아이스크림을 제외하고 다른 것을 골라야 했다.
-무얼 하는 것이냐! 빨리 먹거라!
조금 전에 팔찌에 들어갔던 라스가 두더지처럼 튀어나왔다.
-본왕은 저기 초록색이 끌리노라! 초록색에 초콜릿이 박힌 저걸 먹어라! 어서!
라스는 라온이 손을 대지 않자 본인이 더 불안해져서 미친 듯이 냉기를 뿌려댔다.
‘시끄럽네.’
인상을 찌푸렸다. 라스가 원한 초록색 아이스크림은 보지도 않았다. 뭘 고를까 입맛을 다실 때 루난의 손이 자신의 머리 쪽으로 향했다.
‘뭐지?’
그녀의 손을 피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살기도 적의도 없었다. 전신의 근육을 풀어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대비했다.
톡톡.
그 긴장감이 무색하게 루난의 손은 자신의 머리를 정말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루난?”
라온이 입을 벌리며 시선을 올렸다. 루난은 간신히 티가 날 정도로 입매를 올린 채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다시 머리를 만졌다.
“괜찮아.”
잔잔하게 빛나는 은빛 눈동자와 차분한 목소리를 듣자, 가슴이 저릿했다.
‘이 녀석….’
이제야 루난이 왜 이곳에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는 예전에 오크와 대련할 때 괜찮다고 말해주었던 걸 되돌려주기 위해서 별관 온 것이다.
“하.”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꼬맹이에게 또 걱정을 받다니, 어이가 없다.
다만 그게 또 그리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둥글게 만든 느낌이다.
“왜 웃어?”
“아니야.”
고개를 젓고서 상자에 있던 검은색 구슬 아이스크림을 꺼내 입에 넣었다. 지금의 감정처럼 달달하면서 씁쓸한 맛이 입안을 휘감았다.
-오! 초콜릿! 초콜릿에 설탕과 커피를 넣은 뒤 오랜 기간 숙성을 시킨 것 같구나.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커피를… 뭐, 뭐 하는 거냐!
‘시끄러.’
긴 수다를 시작한 라스를 팔찌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
“맛있어?”
“맛있네. 고마워.”
“더 먹어.”
“아니 충분해.”
정말 충분했다. 배가 찼다기보다는 마음이 찬 느낌. 더 이상은 필요없었다.
“그래.”
루난은 우측에 있던 빨간 구슬 아이스크림을 꼴딱 삼키고 일어섰다.
“갈게.”
그리고 그대로 떠났다. 할 일은 마쳤으니, 수련 방해하지 않고 간다는 것 같았다.
“나 참.”
라온은 올 때보다 경쾌해진 루난의 걸음을 보며 가는 미소를 지었다. 이젠 저 녀석의 뒤통수만 봐도 웃음이 나온다.
“라온.”
루난이 떠나자마자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실비아가 다가왔다.
“엄마 생각에는 친구보다는 조금 더 가까워 보이는데? 저거 평범한 아이스크림이 아니야. 아주 비싼 간식이라고.”
“저도 궁금하네요. 대충 보니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은 게 처음이 아닌 것 같은데요.”
“라온. 엄마는 저 아이랑 얘기 한 번….”
“둘 다 그 이상 말 하지마.”
라온이 손을 휘휘 저었다. 축 쳐져 있는 것도 별로지만, 저렇게 장난기 담긴 눈빛은 더 싫었다.
“제발….”
* * *
다음날.
별관에 두 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흠….”
라온은 툴툴거리는 느낌으로 걸어오는 손님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솔직히 말하면 루난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는 자신의 훈련 방식을 따라하거나, 배우고 싶어 하니까.
다만 저 녀석은 정말 의외였다.
“버렌.”
라온은 귀족처럼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버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녀석이 이곳에 온 이유는 정말이지 알 수가 없었다.
“레이든과 검투를 한다고 들었다.”
버렌이 입을 삐죽 내밀며 멈춰섰다.
“너도 알게 됐나.”
“가문 전체에 소문이 파다하다. 건방진 네놈이 대형 사고를 쳤다고.”
“대형 사고라….”
“방계 주제에 직계에게 검을 날리고, 검사의 자격도 없으면서 검투를 요청했으니, 높은 곳에 계신 분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지.”
버렌은 앉아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놀리러 왔냐고 물어보려고 할 때 녀석의 입이 다시 열렸다.
“다만 난 네가 잘했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든다.”
“뭐?”
버렌의 입에서 나오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말에 벙쪄서 입이 절로 벌어졌다.
“레이든은 직계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지그하르트의 이름에 먹칠만 하는 쓰레기다. 강하기만 할 뿐 놈에게는 명예도, 신념도 없어.”
그의 목소리는 분노에 차오른 듯 뜨거웠다.
“너와 레이든이 문제가 생겼다고 듣자마자, 그 망할 놈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생각했다. 예상대로였어.”
“음….”
저 말은 버렌이 자신을 믿고 있다는 뜻이다. 녀석은 오늘따라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
버렌은 뒷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상자를 하나 꺼내서 내밀었다.
“이게 뭔데.”
“부상에 바르는 약이다. 난 쓰지도 않는 싸구려지만, 너한테는 어울릴 거 같아서 가져왔다.”
“어….”
“받아라. 빨랑!”
버렌은 자신의 손에 억지로 약을 쥐어주고서 등을 돌렸다.
“넌 5 연무장의 수석이다. 책임감을 느끼고, 절대 지지 마라.”
그는 그 말을 마치고 왔던 길로 돌아갔다. 웃기게도 걸음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귓불이 빨간 걸 보니 이번에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흐음.”
라온은 손에 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화악하고 청아한 약 향이 풍겨 나왔다.
약을 살짝 덜어서 부상을 입었던 손목에 발랐다. 뜨끈한 기운과 함께 손목의 통증이 사라졌다.
‘이게 싸구려라고?’
청아한 향과 약의 색을 볼 때 절대 싸구려가 아니다. 뚜껑 뒤쪽을 보니, 사이만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이만은 약효 높은 약을 만들기로 유명한 길드. 이 약은 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뭐가 뭔지.”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약을 주머니에 넣었다.
“라온. 너 언제 버렌이랑도 사이가….”
“도련님. 친구분이 또….”
버렌이 사라지자, 또 구경을 하고 있던 실비아와 헬렌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좀 오지마!”
* * *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수련하는 라온 덕분에 분주한 별관과 달리 진무전은 조용했다.
승리를 확신하는, 라온과의 검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분위기였다.
레이든 역시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 훈련 따윈 하지 않고, 평소보다 더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저 도련님.”
집사 메르킨이 레이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왜?”
적발의 시녀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던 레이든이 고개를 틀었다.
“이제 수련을 좀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검투가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수련? 지금 나한테 한 소리야?”
레이든이 큭큭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딴 놈을 상대하는데 웬 수련? 당시의 내가 연검을 썼으면 그 새끼는 이미 생선 조각이 되어 땅에 묻혔을 거다.”
“하, 하지만 그놈의 움직임은 보통이 아닙니다. 검은 예상하고 막았지만, 주먹은 뻗어오는 걸 제대로 보지도 못했습니다.”
메르킨이 라온에게 얻어맞은 곳을 매만졌다.
“내가 너랑 똑같냐? 앙!”
레이든이 테이블에 있던 술이 담긴 잔을 던졌다. 포도주가 들어 있던 잔이 깨지며 바닥에 피처럼 붉은 물이 흘러내렸다.
“그 새끼가 쓰는 건 뻔해! 나도 다 아는 연성검법에 가람보법이다. 연검만 사용하면 그따위 놈은 눈 감고도 찢어버릴 수 있어!”
“음….”
“수련은 너나 해. 중요한 순간에 눈 까뒤집고 기절한 새끼가.”
“죄송합니다.”
“꺼져!”
레이든이 악을 지르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메르킨은 고개를 숙인 뒤 레이든의 방을 나갔다.
‘글렀군.’
메르킨이 깔깔 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레이든의 방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라온에게 당했다는 굴욕감 때문에 아예 수련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수련 따위 하지 않아도 그를 꺾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자존심을 챙기는 게 분명했다.
‘라온 지그하르트.’
반면 별관에 있는 라온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수련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그놈 진짜 보통이 아닌데.’
라온의 움직임은 기묘했다. 암살자처럼 기척이나, 움직임을 읽기 힘들었다.
“에휴….”
메르킨이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이번 검투의 결과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 * *
마르타는 별관 공터가 내려다보이는 북망산 초입의 나무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쯧.”
그녀는 볼을 스치는 검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뱅뱅 돌리며 가늘게 혀를 찼다.
“인기 더럽게 많네. 뭐 저렇게 찾아오는 인간이 많아.”
마르타의 시선은 공터에 앉아 5연무장의 수련생들과 대화하는 라온을 향해 있었다. 이곳에서 보고 있는 동안 벌써 7명의 수련생이 라온에게 다녀갔다.
정확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검투에서 이기라고 응원을 해주는 것 같았다.
“흥, 언제부터 친했다고.”
연무장에서 소 닭 보듯 하다가 지난 임무를 통해 조금 가까워졌다고 친한 척하는 수련생들을 보니 배알이 꼴렸다.
“모조리 한심한….”
“너도 가보지 그래?”
“꺄악!”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마르타가 비명을 내지르고 나무에서 떨어졌다.
“어우, 넌 놀리는 맛이 있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리메르가 허공에 발장구를 치며 킥킥 웃고 있었다.
“라온은 이런 거 해도 놀라질 않아서 재미없는데.”
“이 망할 엘프….”
마르타가 이빨을 갈며 몸을 일으켰다. 검은 눈동자가 빨갛게 물들려 할 때 리메르가 손을 붕붕 저었다.
“그래도 돼? 다 들켰는데?”
그의 턱짓을 따라 뒤를 돌았다. 공터에 있던 라온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으으, 일부러 이런 거죠….”
“찾아왔으면 얼굴도 보고, 응원도 해주면 좋잖아.”
“응원해주려고 찾아온 거 아니에요!”
“어? 그럼 그 주머니에 있는 것들은 뭔데? 나 주려고?”
“이, 임무에서 구해준 거 때문에….”
마르타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콧등을 찡그렸다.
“응원해줘. 분명 힘이 될 테니까.”
리메르가 미소를 지으며 공터쪽을 가리켰다. 라온은 지금도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마르타는 입술을 꽉 깨물다가 산 아래로 내려갔다.
“흐흥!”
리메르는 마르타가 떨어진 나뭇가지에 드러누우며 콧노래를 불렀다.
“어리숙하네. 뭐, 그게 아이들의 특권이지만.”
* * *
라온은 북망산에서 내려오는 마르타는 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녀가 저 위에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려오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리메르가 장난을 친 모양이다.
“야.”
마르타가 작은 유리병과 보자기에 싼 네모난 상자를 던져주었다.
“어?”
라온은 가슴팍을 향해 날아오는 상자와 유리병을 잡았다.
“그때의 보답이다. 검투 시작하기 전에 먹어.”
“음….”
“독 아니야. 체력이나, 정신력을 깨끗하게 회복시켜주는 청심수니까. 먹든 버리든 알아서 해.”
유리병을 쳐다보고 있자, 마르타가 한 걸음 더 다가오며 인상을 찌푸렸다.
“고맙다.”
라온은 유리병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 원숭이 새끼 자꾸 앵기길래 언젠가 밟아주려고 했는데, 네가 선수 쳤네. 싸울 거면 확실하게 죽여놔. 다시는 네 엄마에게 개기지 못하도록.”
“그래.”
“그딴 원숭이 새끼한테 지면 너와 한 약속도 취소할 거야.”
고개만 끄덕이고 있자, 마르타가 이제 어깨 아래까지 내려간 검은 머리칼을 홱 돌렸다.
“간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연무장을 떠났다.
“이건 왜 이야기 안 해줬지?”
라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르타가 주고 간 상자를 열었다.
“소고기?”
안에는 소고기가 들어 있었는데, 평소 별관에서 먹던 고기보다 훨씬 질이 좋아 보였다.
‘이 녀석이었군.’
실비아가 가끔 별관 앞에 좋은 등급의 소고기가 놓여 있다고 했었는데, 마르타의 선물이었던 모양이다.
-저 검은 눈깔이 그 맛 좋은 소고기를 놓고 갔다는 게냐?
‘그래.’
-음, 좋다. 본왕은 군주답게 이해심이 넓지. 오늘부터 검은 눈깔을 소고기 소녀라 칭하겠노라.
‘…….’
라스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소고기를 챙길 때 수풀 속에서 실비아와 헬렌이 땅 위로 올라온 두더지처럼 솟구쳤다.
“소고기에 청심수라, 라온 생각으로 가득하네.”
“그럼요. 고기도 고기지만, 청심수 같은 비싼 물건을 주신 것만 봐도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거죠.”
“라온. 나중에 마르타를 식사에 초대….”
“아, 제발 좀 가요!”
라온이 머리를 흔들었다. 두 사람은 귀신처럼 다시 수풀 속으로 들어간 뒤 별관으로 돌아갔다.
‘정말이지….’
며칠 전에는 너무 축 처져서 걱정됐는데, 지금은 너무 가벼워져서 감당이 안 된다.
‘뭐, 지금이 낫지만.’
실비아와 헬렌은 자신이 이기리라 믿고,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서 저리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원래가 저렇게 밝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웃음을 지키기 위해서 해를 끼치는 것들은 그림자조차 닿지 못하게 해야 한다.
라온은 천천히 숨을 고르고 일어나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수련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고, 그렇게 어느덧 검투 날 아침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