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검투.
이름처럼 검으로 하는 대련이지만, 거기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 번째는 두 사람 다 검사의 자격을 얻어야 한다는 것. 두 번째는 각자 승리 시 원하는 조건을 걸어야 한다는 것.
라온은 이 상황을 벗어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검투라고 생각하고, 어떻게든 그 단어를 꺼내놓았다.
“검사들의 대지이니, 검사의 방식으로 결정을 하게 해달라?”
글렌이 강렬한 기세를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내가 그런 말을 하긴 했지. 틀린 말은 아니로군.”
“가, 가주님! 저도 부탁드립니다!”
레이든이 옳다구나 손뼉을 치며 앞으로 나왔다.
“저 역시 저놈에게 갚아주어야 할 빚이 남아있습니다. 검투를 허락해주십시오!”
“흠.”
발데르는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검투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지 뒤로 물러나 입을 다물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네가 먼저 검투를 말했다는 건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라온은 자신감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든 지그하르트.”
이번에는 글렌의 시선이 레이든을 향했다.
“예!”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넌 처음부터 끝까지 라온에게 밀렸다고 들었다. 다시 싸운다면 이길 자신 있는 건가?”
“무, 물론입니다. 그때는 칼이 날아올 줄 몰라 방심했을 뿐입니다. 다시 싸운다면 압도적으로 꺾을 수 있습니다!”
레이든은 딱따구리가 나무를 찧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작은 유흥거리는 되겠군.”
드물게도 글렌의 입매가 살짝 올라갔다.
“레이든.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지?”
“라온 지그하르트의 단전을 부수고, 마나 회로를 끊겠습니다.”
“마나회로와 단전인가.”
“예. 그 둘 모두입니다!
“허가하지.”
살벌한 조건임에도 글렌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레이든의 얼굴빛이 마법등을 켠 듯 밝아졌다.
“라온 지그하르트.”
“예.”
“검투에서 승리했을 때 네가 원하는 것은?”
“레이든 지그하르트와 그의 집사가 제 어머니와 시녀들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물질적인 보상을 주는 것. 그리고 진무전과 관련된 그 무엇도 별관에 접근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죄와 접근금지라. 그것도 허가하지.”
“아버지! 사죄는 레이든의 일이지만, 접근금지는 진무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검투로 이룰 권한을 넘어서는….”
“발데르.”
글렌의 붉은 눈동자가 발데르를 향했다. 태양을 마주한 듯 발데르가 눈을 바닥에 깔았다.
“마지막이다.”
“죄, 죄송합니다.”
발데르는 뒤로 물러서서 머리를 깊게 숙였다.
고오오오.
글렌은 폭풍 같은 기세를 유지한 채 라온과 레이든을 차례로 보았다.
“너희 둘의 조건은 모두 허가되었다. 일주일 뒤 대연무장에서 검투를 열겠다.”
“예.”
“감사합니다!”
라온과 레이든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는 끝이다. 돌아가도록.”
“예.”
라온은 할 말을 모두 마쳤기에 그대로 알현실을 떠났다.
“검투라니, 결국 저희 편을 들어주시는군요.”
발데르가 앞으로 나오며 씩 웃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실비아의 아이라고 해도 그 아이는 방계. 직계와 방계의 차이를 확실하게 보여주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든. 자신 있겠지?”
“물론입니다. 이번 임무를 통해 익스퍼트 중급에 올랐습니다. 이제 막 익스퍼트 하급에 도달한 놈 따위는 한 손으로도 이길 수 있습니다.”
레이든과 발데르는 부자지간답게 얍실한 눈매를 좁히며 웃었다.
“아예 검투에서 놈을 죽여버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건방진 방계 놈들이 기어오르지 않게.”
“아니, 모두가 보고 있을 테니, 그건 좋지 않다. 폐인을 만들어서 희망을 꺾는 게 낫다. 어미와 아들 모두가 단전과 마나 회로가 끊어져 폐인이 되다니, 생각만 해도 재밌잖아.”
발데르는 사적으로 동생과 조카가 되는 라온과 실비아에게 악의만 가진 듯 낄낄 웃었다.
“확실히 그렇겠군요.”
레이든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부자는 이미 검투에서 승리하고, 라온이 손아귀에 있는 것처럼 떠들어댔다.
“너희도 돌아가라.”
“예.”
“일주일 뒤에 뵙죠.”
레이든과 발데르는 입가를 미소로 가득 채우고 알현실을 나갔다.
“가주님.”
모두가 나가고 나서야 로엔이 글렌의 앞에 섰다.
“라온 도련님은 익스퍼트 하급, 레이든 도련님은 이미 익스퍼트 중급에 안착하셨습니다. 두 도련님의 경지가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평소 라온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로엔이기에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검사들의 전투는 단순히 경지나, 익힌 검술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가 가장 중요한 요소지.”
“그건 저도 알고 있지만….”
“물론 둘의 경지가 차이 나는 건 사실이다. 다만 라온 녀석의 눈빛은 평온했어. 한 번 이겼던 적을 상대한다는 자만이나 과신이 아닌 자신감을 가졌다. 그런 눈빛을 봤는데, 믿어주지 않을 수가 있나”
글렌이 아까와 달리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손주의 재롱을 보는 듯 따스한 눈빛이었다.
‘거기다….’
레이든과 달리 라온은 조건을 말할 때 본인이 아닌 가족을 생각했다. 본인에 대한 보호나 보상 따윈 없었다. 볼수록 정이 가는 아이였다.
“로엔.’
“예.”
“어떤 핑계를 써서라도 다음 달 진무전의 예산을 반으로 줄여. 임무도 모두 회수하고.”
“반발이 있을 텐데요.”
“상관없다. 불만 있으면 내게 오라 해라.”
“음, 알겠습니다.”
로엔이 고개를 숙였다가 올리며 글렌을 보았다. 그는 드물게도 분노를 담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긴 아픈 손가락을 건드렸으니.’
글렌에게 실비아와 라온은 아픈 손가락이다. 아무리 다른 손가락이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점점 예전으로 돌아가시는 것 같군.’
로엔이 얼굴을 가린 채 미소를 지었다. 글렌의 모습은 할아버지가 손주를 때린 놈에게 복수를 해주는 듯해 절로 웃음이 나왔다.
* * *
라온이 별관으로 돌아왔을 때 실비아와 시녀들은 모두 밖에 나와 있었다.
“왜 나와 있어.”
“어, 어떻게 됐어?”
실비아는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을 떨었다. 본인의 일에는 당차도, 아들의 일에는 긴장하는 것 같았다.
“일주일 뒤에 검투를 열기로 했어.”
“거, 검투?”
“검투라니요!”
실비아와 헬렌이 라온의 어깨와 팔을 잡고 흔들었다.
“레이든 지그하르트와 검투를 하게 됐다고.”
“뭐? 뭐라고?”
“아니, 대체 뭐가 어떻게 되면 검투를….”
두 사람의 눈동자도 파랑을 맞은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시녀들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헉 소리를 흘렸다.
“여러 가지로 생각해봤지만 검투가 가장 좋은 방법이야.”
라온이 실비아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이 이상은 없어.”
적은 직계 그리고 우리는 방계다.
레이든을 무릎 꿇리는 것만이 아니라, 별관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검투를 해서 글렌의 인정을 받는 방법뿐이었다.
“하지만 라온. 네가 본 게 레이든의 전부가 아니야.”
실비아가 다가와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에서 전해온 떨림이 손목까지 올라온다.
“발데르 오빠의 무기는 연검이야. 레이든 역시 연검술을 배웠을 거라고. 제 실력을 드러내면 어제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거야!”
“마, 맞습니다. 도련님. 진무전 검사들의 검은 다양한 변화로 이름 높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해선 안 됩니다. 도련님이 꺾은 녹전귀보다 강할 거예요!”
“이번엔 방심하지도 않을 테고, 넌 아직 부상이 낫지도 않았잖아! 역시 안 돼. 아버지께 가봐야겠어! 지금이라도 부탁드리면….”
“엄마.”
라온은 자신의 손을 놓고 본관으로 달려가려는 실비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아. 날 믿어봐.”
옅게 미소를 짓자, 당장이라도 뛰려던 실비아가 몸을 돌렸다.
“가주님이 알려주신 게 있거든.”
“아, 아버지가?”
“응. 그걸 이용하면 이길 수 있어.”
“어….”
“그러니 엄마랑 약속한 훈련 금지 조항은 없던 걸로 할게.”
라온은 그 말을 마치고, 별관으로 들어갔다. 실비아는 멍하니 서 있을 뿐 라온을 막지 못했다.
“마님. 아, 아무리 가주님께 배웠다고 해도 도련님을 막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헬렌이 실비아의 옆에 서서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려고 했는데, 라온의 눈을 보니까. 뭔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어.”
“어음, 사실 저도….”
헬렌도 같은 감정을 느꼈다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사소한 거라도 라온을 위해서 할 일을 찾아보자.”
“예.”
시녀들이 한마음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가장 끝에 서 있던 주디엘은 실비아 그리고 라온이 들어간 별관을 보며 눈을 빛냈다.
* * *
라온은 방에서 수련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별관 공터로 향했다. 시녀들이 지나가면서 힐끔힐끔 쳐다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급한 건 검투니까.’
검투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질 거다. 어차피 시선은 끌었으니, 진무전 쪽에서 다른 짓을 벌이지 못하도록 더 많은 시선을 받는 게 좋다.
그걸 위해선 검투에서도 단순히 이기는 게 아니라, 압도적인 승리를 보여주어야 한다.
“연검이라….”
연검은 간단히 말해서 유연한 검이다.
탄성이 조금 강한 수준부터 채찍처럼 자유자재로 휘어지는 검까지. 연검도 종류가 다양하다.
그렇게 잘 휘어지는 검을 화려한 검술과 함께 조화시키는 자들이 바로 진무전의 검사들이다.
검사의 실력이 높을수록 연검의 휘어짐이 강해진다. 강한 연검의 검사 앞에 서면 흡사 검으로 벽을 만드는 듯한 광경도 볼 수 있다.
‘레이든의 연검도 탄성이 장난 아니겠지.’
연검으로 이름 높은 진무전주의 아들이니, 레이든의 연검술도 일반적인 연검술과는 궤를 달리 할 것이다.
다만 진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글렌이 직접 전수해 준 태화보를 익혔고, 전생에 뛰어난 연검사를 암살한 적도 있다.
레이든이 연검을 사용하든, 익스퍼트 중급이든 자신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챠앙!
라온은 실비아가 억지로 동여매 준 붕대를 풀고, 검을 뽑았다.
연성검법을 그으며 가람보법을 밟았다. 하나의 선처럼 부드럽게 피어나는 움직임. 이미 완성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성검법의 마지막 초식을 펼칠 때 라온이 가람보법과는 다른 움직임을 취했다. 오른발이 아니라 왼발을 뻗어내며 땅을 박찼다.
치이잉!
그 순간 라온의 몸이 먼지처럼 희미해진 뒤 세 걸음 앞에서 벼락처럼 튀어나왔다. 바로 앞에서 보았어도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듯한 모습이었다.
후우웅!
라온은 그대로 검을 내리쳤다. 허공이 사선으로 갈라지는 듯한 검격. 앞에 있는 건 그 무엇이라도 벨 수 있을 듯한 검기였다.
“후….”
라온이 숨을 내뱉으며 검을 멈췄다.
‘이게 태화보.’
태화보는 단순한 보법이 아니다.
다른 보법의 중간에 끼워 넣어 그 순간 가장 적합한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특별한 발걸음이었다.
실비아와 헬렌을 모욕한 적과 싸운다는 생각이 정신에 박혀 있으니, 훈련의 질이 높아지는 것 같았다.
이 시간을 최대한 이용한다면 분명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다.
“그럼.”
라온은 다시 검을 세우고, 발을 굴렀다. 떠오른 해가 어둠에 녹아들 때까지.
* * *
다음날에도 라온의 일과는 변하지 않았다.
새벽부터 공터에 나와서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남이 본다면 같은 걸 왜 자꾸 반복하냐고 할 수 있겠지만, 라온은 그게 옳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반복이 목숨을 살려주지.’
목숨을 건 전투에서 자신을 살려주는 건 새로 배운 검술도, 비싼 갑옷도 아니다.
끊임없이 단련하여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해진 무학만이 자신을 구해줄 수 있다.
라온은 쉬는 시간조차 가지지 않고 발을 놀리고 검을 휘둘렀다.
가람보법의 중간중간 태화보를 끼워 넣어 태화보의 성취도 상승시켰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주디엘이 흰색 천이 덮인 쟁반을 가지고 공터로 다가왔다.
“도련님. 점심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식사?”
라온이 수련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예. 간단히 드실 수 있게 샌드위치를 가져왔습니다.”
배가 출출했기에 검을 집어넣고, 주디엘이 쟁반을 내려놓은 테이블에 앉았다.
“방금까지 몸을 움직이셨으니, 체하지 않게 천천히 드세요.”
“고마워.”
“예.”
주디엘은 고개를 숙인 뒤 별관으로 돌아갔다.
라온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쟁반을 덮은 흰색 천을 걷었다.
“음?”
곱게 자른 샌드위치 접시 옆에 처음보는 얇은 책이 한 권 있었다.
‘이건 또 뭐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책자를 들었다. 책 이름은 없었고, 방금 만든 것처럼 표지가 매끄러웠다.
“허!”
책을 펼쳐 내용을 본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책 안에는 레이든 지그하르트가 배운 검술과 보법의 이름 그리고 특징이 적혀져 있었다.
그것도 보기 편하도록 정리나, 배치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이 책….’
분명 대단한 정보를 담은 책이지만, 아무리 보아도 기존에 있던 물건이 아니다.
‘새로 만든 거야.’
주디엘이 레이든과 진무전의 정보를 가지고 고작 하루 만에 만든 책이 분명했다.
시녀 업무를 보면서 이런 책을 만들다니, 보통내기가 아니다. 단순한 첩자로 놔두기엔 아까운 재능이었다.
“흐음.”
라온은 별관으로 걸어가는 주디엘의 뒷모습을 보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가 아니라, 생각 이상으로 쓸만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