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89화 (89/653)

89화

레이든 지그하르트는 별관에 도착하자마자 활짝 미소 지었다. 실비아와 별관의 시녀들이 정원을 정리하고 있는 덕분에 길과 주변이 전부 흙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시비를 걸기에 딱 좋군.’

집사인 메르킨이 먼저 가서 보내지도 않은 서신 이야기를 꺼냈을 거다.

직계인 자신이 오는데도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이니 시비를 걸 방법은 수없이 많았다.

‘그놈이 나올 때까지.’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망신을 주고, 무릎을 꿇리기 위해서 직접 이 좁고, 더러운 곳까지 찾아왔다. 놈이 싸움을 걸어 올 때까지 도발할 생각이었다.

실비아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행패를 부리러 왔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눈빛은 침착했다.

레이든은 제대로 가문에 남았다면 고모가 되었을 그녀를 비웃으며 도발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무던했다. 말을 놓고, 가래 침을 뱉고, 잘 가꾼 꽃을 더러운 신발로 짓밟았음에도 도발에 넘어오지 않았다.

실비아의 인내심은 생각 이상으로 강했고, 표정 역시 무서울 정도로 덤덤했다.

‘젠장….’

레이든이 입매를 비틀었다.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실비아를 직접 건드리는 건 위험할 수 있었다.

‘이대로 갈 수는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할 때 실비아와 함께 흙을 치우는 시녀들을 보았다. 그녀들의 표정은 평온했지만, 손이 떨리는 걸 숨기지는 못했다.

‘저거군!’

어떻게 도발에 넘어오게 할지 가닥이 잡혔다. 저들은 실비아와 달리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다.

카악 퉤!

레이든은 히죽 웃으며 바닥을 치우는 실비아의 손 위로 가래침을 뱉었다. 그걸 본 가장 늙은 시녀의 눈동자가 훼까닥 돌아갔다.

“심하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직계라고 해도 이렇게 대놓고 시비를 걸어온다면 본관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예상대로 시비에 넘어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내뱉었다.

짜악!

레이든은 막으려는 실비아를 밀치고 시녀의 앞에 다가가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저 시녀의 말대로 집법부에서 나올 건 분명하지만, 자신은 직계. 벌이라고 해봤자 며칠 근신이 고작이다.

“참 주제들을 몰라. 너희들은 이 집안의 떨거지일 뿐이야.”

킥킥 웃으며 덜덜 떠는 시녀를 밟아버리려고 할 때였다.

고오오오!

별관 쪽에서 남자아이 하나가 나타났다. 조화롭다 못해 완벽에 가까운 이목구비를 가졌다.

‘저 새끼가 라온 지그하르트….’

짜증이 나올 정도로 잘생긴 외모를 보자 속이 더 뒤집혔다.

스르릉.

라온이 검을 뽑았다.

‘저렇게 살기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놈이 녹전귀를 잡고, 광혈귀와 싸웠다고? 웃기는군.’

라온은 자신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검을 뽑는 걸 보았음에도 코웃음만 나왔다. 놈이 정신이 있다면 저걸 휘두를 리가 없으니까.

“설마 그 무서운 걸 휘두르려고? 난 직계인데?”

놈의 눈을 보니, 아직 정신은 있어 보였다. 조금 더 자극하려고 할 때 라온의 입이 열렸다.

“어쩌라고.”

그 말이 귓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시야에 붉은빛이 번쩍였다.

“헉!”

기겁하며 물러서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놈의 검은 자신의 목을 향해 질주해왔다.

쩌어엉!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꽉 감았을 때 바로 앞에서 강렬한 충격음이 울렸다.

눈을 뜨니, 집사 메르킨이 자신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하지만 라온은 멈추지 않았다. 메르킨이 검격의 충격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틈을 노리고 주먹을 내질렀다.

뻐억!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메르킨이 뒤로 그대로 쓰러져,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이 미친놈!”

레이든이 이를 갈며 검을 뽑아 들었다.

“네가 지금 누구에게 검을 휘두른 건지 알고 있는 거냐!”

“알고 있다.”

라온의 목소리엔 자그마한 떨림도 없었다. 정말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뜻이었다.

“내 영역을 침입한 강도잖아.”

“무슨 개소리를! 난 이 집안의 진짜 주인이다!”

“여긴 너희 집이 아니야.”

놈은 또 미친 소리를 중얼거리며 검을 내리그었다.

“좋다! 적당히 놀아주려 했는데, 아예 모가지를 찢어주마!”

레이든이 검을 내질렀다. 라온의 검을 튕겨내고, 놈의 목에 칼을 박아넣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놈의 검에서 일어난 기이한 회전이 역으로 자신의 검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 무슨!”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검을 뒤틀어 간신히 라온의 검을 튕겨냈다.

후우웅!

라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겁 없이 다가와 사선으로 검을 그었다.

“끄윽!”

레이든이 신음을 흘렸다. 라온의 검을 막아내는 손이 덜덜 떨린다. 한 번 밀리기 시작하자, 공격권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가, 감히 직계에게 검을 휘두르다니, 너도, 네 어미도 목이 날아갈 거다!”

“그 전에 네 모가지를 따면 되겠지.”

그 말과 함께 지독할 정도로 서늘한 검격이 어깨를 스쳤다.

쩌엉!

목을 향해 내리꽂히는 놈의 검을 간신히 막아냈다.

“끄으으윽!”

뭐 이런 놈이!

파도처럼 밀어닥치는 라온의 검술에는 틈이 없었다. 도발이 먹힌 건 분명한데 손이 어지러워지는 건 이쪽이다.

‘빌어먹을!’

단전의 오러를 끌어 올려 반격을 하고 싶지만, 그 시간을 주지 앉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방어밖에 할 수가 없었다.

‘시간만. 시간만 있으면!’

오러를 움직일 여유만 있다면 이런 놈을 단번에 죽일 수 있다. 놈은 그걸 알고 절대 시간을 주지 않았다.

으득!

레이든이 이를 악물었다.

‘어쩔 수 없어!’

내상을 입더라도, 이 상황을 벗어나야 했다. 라온의 검을 막아내며 억지로 단전의 오러를 끌어 올렸다.

쿠구구구!

마나 회로가 타들어 가는 통증이 일었지만, 막강한 오러가 전신을 휘감았다.

“끝이다! 이 미친 새끼!”

하체와 상체의 근육을 팽창시킨 뒤 검신 위에 쌓아 올린 오러를 그대로 내리쳤다. 라온과 놈의 검을 동시에 갈라버릴 위력.

하지만 라온은 그 막강한 검격이 떨어지기 직전 눈앞에서 사라졌다.

“허억!”

그야말로 허깨비 같은 움직임. 어디로 갔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네가 끝이겠지.”

등 뒤에서 들린 라온의 목소리에 소름이 오싹 돋아올랐다. 재빠르게 뒤를 돌았지만, 놈의 주먹은 이미 자신의 복부에 닿아 있었다.

뻐어억!

강렬한 충격에 레이든의 허리가 꺾였다.

“너.”

“아직 안 끝났어.”

라온의 검이 자신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으어어억!”

레이든은 빛살처럼 날아오는 칼날에 질려 눈을 감고 비명을 질렀다.

*     *      *

라온은 레이든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지 못했다. 놈의 가슴에 닿기 직전에 칼을 세웠다.

이유는 두 가지.

첫 번째는 실비아의 멈추라는 소리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레이든 앞에 별관을 지키던 가주 직속 천검대 검사 두 명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헬렌이 당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나오는 건가?”

라온의 서늘한 목소리에도 천검대 검사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물러나십시오.”

그들은 레이든을 보호하겠다는 듯 자세를 낮추고 더 단단하게 벽을 세웠다.

“흐어억!”

레이든은 본인이 살았다는 걸 알자마자, 뒤로 넘어갔다. 칠을 질질 흘리며 라온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주, 죽여! 저 미친 새끼 죽여버려!”

“…….”

“뭣들 하는 거야! 직계인 내가 저 망아지 놈에게 공격을 받았다니까!”

천검대 검사들은 레이든의 지시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석상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다.

“비켜.”

“물러나십시오.”

“후….”

라온이 오러를 끌어 올리며 이 사이로 김을 뿜어냈다. 천검대 검사는 레이든의 집사와 다르다. 기습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라온. 그만해!”

“도련님….”

만화공 십화를 운용하려는 때에 실비아와 헬렌이 다가와 팔을 잡았다. 그녀들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자, 가슴과 머리를 가득 채웠던 분노가 봄 눈처럼 녹아내렸다.

“이, 이 새끼들이 진짜! 내가 누군지 몰라?”

레이든이 악을 지르며 일어섰다.

“진무전주의 아들이라고! 저 새끼 죽여! 아니야. 내가 죽인다! 비켜!”

“레이든 도련님. 물러나십시오.”

우측에 서 있던 천검대 검사가 뒤를 돌아 레이든을 막아섰다. 그들은 라온과 레이든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저희는 오직 가주님 명령만을 듣습니다. 두 분 다 물러나십시오.”

“끄윽, 집 지키는 개새끼 주제에! 내가 맞았단 말이다!”

레이든이 이를 바드득 갈면서 검을 들어 올렸다. 오러를 전부 운용하여 천무대 검사를 공격하려 할 때 기절해 있던 집사 메르킨이 그의 뒤로 달려와 어깨를 잡았다.

“도, 도련님. 안 됩니다!”

“닥쳐!”

이를 갈며 난동을 부리는 모습이 그야말로 미친개 같았다.

“도련님. 이건 오히려….”

메르킨이 레이든에게 귓속말을 하자, 난리를 치던 그의 팔다리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놔.”

레이든이 메르킨을 밀어내고서 천검대를 지나 라온과 눈을 마주쳤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의 눈빛이 짐승처럼 번들거렸다.

“네놈에게 죽음보다 더한 굴욕과 고통을 새겨주마! 기다리고 있어라.”

“나도 마찬가지다.”

라온의 눈에 시뻘건 뇌광이 튀겼다.

“네놈이 이곳에서 벌인 일은 절대 잊지 않는다. 언제 그 목이 날아갈지 모르니, 겁먹고 눈부터 감는 버릇을 고치는 게 좋을 거야.”

“끄으윽! 이 버러지 새끼! 기습만 아니었다면 넌 이미 저 흙바닥에 묻혔어!”

레이든이 광기를 불태우며 달려들려 했지만, 메르킨의 제지에 막혀 팔과 다리만 버둥거렸다.

“도, 도련님! 지금은 가셔야 합니다!”

“절대 용서하지 않아! 이 별관 자체를 부숴버릴 거다!”

“도련님!”

메르킨은 억지로 레이든을 끌고, 별관을 떠났다.

천검대 검사들은 레이든과 메르킨이 사라지고 한참이 지난 후에서야 방어 자세를 풀고, 라온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번 일은 가주님에게 보고될 겁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준비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조언인가? 직계 말고는 관심 없는 거 아니었나?”

“라온. 그만해.”

오른팔을 잡은 실비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라온은 혀를 차고서 검을 검집에 넣었다.

“…….”

천검대 검사들은 대답 없이 고개만 숙인 뒤 사라졌다.

“마님. 도련님. 죄, 죄송합니다. 제가 참지 못했어요. 나잇값도 못 하고….”

헬렌이 라온과 실비아의 앞으로 와 무릎을 꿇었다.

“아니야. 네가 앞에 나서주었을 때 얼마나 용기가 났는지 몰라.”

실비아는 힘이 빠진 얼굴이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헬렌을 일으켜 세웠다.

“헬렌은 잘못 없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를 일으킨 놈이 버젓이 있는데,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이 용서를 구할 필요는 없었다.

“라온.”

실비아가 뒤에서 라온을 끌어안았다.

“많이 강해졌네. 엄마 앞에 섰을 때 다 얼마나 든든했는지.”

그녀의 목소리에 웃음기와 물기가 동시에 흘러내렸다.

“이번 일은 걱정하지 마. 엄마가 다 해결할 수 있으니까.”

“아니, 내가….”

뒤를 돌아서 말을 하려 했지만, 실비아가 어깨를 꽉 안고 있어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괜찮아. 엄마만 믿고 있어.”

실비아는 그렇게 말하고서 더러워진 바닥과 뜯겨나간 꽃과 수풀을 치우기 시작했다. 평온한 표정에 겁에 질렸던 시녀들의 얼굴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강해.’

지금 누구보다 불안한 사람이 실비아일텐데, 그녀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인지, 원래 강했기 때문인지 그녀의 마음은 이곳의 누구보다도 단단했다.

‘하지만.’

라온은 주저앉아서 실비아와 함께 더럽혀진 곳을 치우며 눈을 내리감았다.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해.’

경험과 본능이 모두 같은 말을 속삭인다.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실비아가 아니라, 나라고.

‘그리고….’

실비아를 모욕하고, 헬렌을 건드린 그 망아지 새끼도 저대로 놓아둘 생각도 없었다.

후우욱.

누구도 보지 못했지만, 라온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새빨갛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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