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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88화 (88/653)

88화

글렌 지그하르트의 넷째 아들 발데르 지그하르트가 기거하는 진무전의 분위기는 북해를 옮겨온 듯 지독한 냉기로 가득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오랜만에 가문으로 돌아온 발데르 지그하르트의 아들 레이든 지그하르트가 계속 저기압이었기 때문이다.

쿠웅!

레이든 지그하르트가 이를 바드득 갈며 주먹으로 벽을 후려쳤다.

“젠장!”

욕이 절로 나온다.

오마 중 하나인 백혈교 지부 하나를 깨부수는 공을 세우고 돌아왔는데, 자신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잊혀졌다는 생각이 들 정도.

레이든이라는 이름이 불리지 않는 이유는 그놈 때문이다. 별관에 사는 쓰레기. 라온 지그하르트의 이름이 가문 전체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연회장에서도, 수련장에서도, 식당에서조차 라온. 라온! 녹전귀를 벤 라온 지그하르트의 이름만 들려왔다.

“파리 같은 새끼가.”

평소 관심도 없던 작은 벌레 때문에 자신의 공이 묻혔다는 생각이 들자,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레이든 지그하르트는 짜증이 뚝뚝 흘러내리는 어긋난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외출하십니까?”

문 앞에 서 있던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보면 몰라?”

레이든이 쿵 소리가 나도록 방문을 닫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준비하겠습니다. 어딜 가시는지….”

“별관으로 간다.”

“예? 갑자기 거길 왜….”

별관이라는 소리에 집사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내 이름을 묻어버린 놈의 면상이 얼마나 잘났는지 보려고.”

레이든의 주홍빛 눈동자가 진득하게 타올랐다.

*     *      *

주디엘은 정원 손질을 하며 우측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곳에선 실비아가 직접 정원용 수목을 다듬고 있었다.

‘여긴 정말 이상한 곳이야….’

시녀가 없는 것도 아니건만, 별관의 주인인 실비아는 정원 일을 손수 행했다.

정원 손질만이 아니다. 라온을 위한 음식 준비나, 방 청소도 직접 하는 경우가 잦았다.

‘특이한 건 실비아만이 아니지.’

다른 곳에서 만난 시녀들은 표정은 숨겨도 눈빛은 숨기지 못한다. 대부분이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한다는 눈빛을 보이는데 이곳은 아니다.

모두 즐겁게 또 서로 신뢰와 진심을 담아 업무를 해냈고, 모두가 라온을 아들이나 친동생처럼 생각했다.

첩자로서 이곳저곳을 다닌 주디엘이 보기에도 이곳 별관은 특이하고 신기한 곳이었다.

“하아.”

주디엘이 별관 건물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가장 특별한 건 그 사람이지만.’

별관 안에 사는 괴물. 라온 지그하르트의 진짜 얼굴을 보았던 날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그날 밤의 악몽을 꿀 정도.

“후….”

주디엘의 입에서 찬 바람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그런 인간이 있을 수 있지?’

10대 초반.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반찬 투정할 나이에 라온은 세상 만물을 죽일 눈을 하고 있었다.

호수 위에 떠오른 붉은 눈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아오른다.

‘그런데….’

그 이후에 본 라온의 모습은 또 생각과는 달랐다. 이 별관의 사람들에게는 정말 아이처럼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시녀 하나하나를 가족처럼 챙겼다.

그건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중무전의 소식이나, 카룬의 소식을 물을 때가 아니면 라온은 자신도 다른 별관의 시녀들과 똑같이 대했고, 얼마 전에는 쓸모가 없어져서 복귀지시가 내려온 상황을 벗어나게 해주기도 했다.

가끔은 자신이 정말 이중첩자가 맞는지, 몸속에 레이지 웜이 있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릇이 너무 커….’

자신 같은 평범한 사람과는 그릇의 크기 자체가 다른 것 같았다. 사실 그에 대한 공포 때문에 반항이나 배신을 할 수 없기도 하지만.

“에휴… 음?”

주디엘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음 수풀을 정리하려고 할 때 검은 구두 하나가 바닥에 보였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넘긴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이자는….’

지그하르트 명부에서 본 자다. 진무전 소속이자, 레이든 지그하르트를 담당하는 집사 메르킨이었다.

“진무전 소속 집사 메르킨이라 합니다.”

그는 주디엘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실비아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무슨 일이지?”

실비아는 가지고 있던 정원 손질용 칼을 내려놓으며 앞으로 나왔다.

“어제 보낸 서신대로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을 하러 왔습니다.”

“서신? 무슨 서신을 말하는 건데?”

“오늘 레이든 지그하르트 님이 별관을 돌아보고 싶다는 서신을 보냈습니다만.”

“그런 서신은 받은 적 없어.”

실비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저었다.

“분명 별관의 시녀들에게 전했다고 들었습니다.”

레이든의 집사 메르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황하는 표정이지만, 눈동자는 잠잠하다. 거짓을 내뱉고 있음이 분명했다.

“음….”

실비아가 뒤를 돌아 시녀들을 보았다. 당연히 서신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언제 오지?”

“30분 뒤입니다.”

“30분이라니!”

실비아의 뒤에 있던 헬렌이 눈을 부릅뜨며 다가왔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준비하라는 겁니까!”

“저희는 어제 서신을 보냈습니다.”

레이든의 집사 메르킨은 실비아를 놀리듯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런 서신 따위는 받지도….”

“혹여나 받지 못했다고 해도 저희 도련님은 그런 걸 생각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메르킨의 표정엔 여유가 넘쳤다. 방계인 너희가 뭐 어쩔 거냐는 얼굴이었다.

검사의 자격을 얻은 직계는 부단주 급의 지위를 가진다. 저쪽에서 서신을 미리 보냈다는 핑계까지 쓰고 있으니, 거절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쯧.

주디엘이 메르킨을 보며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레이든이 저리 더럽게 나오는 이유는 불 보듯 뻔했다.

‘라온 때문이겠지.’

최근 레이든 지그하르트는 백혈교의 지부를 무너뜨리는 공을 세워왔지만, 라온의 활약에 묻혀 반쯤 잊혀진 상태였다. 그 화풀이를 하러 여기까지 찾아온 게 분명했다.

‘한심한 놈들.’

글렌의 넷째 발데르 지그하르트와 그의 자식들은 모두 흉폭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카룬과 중무전의 검사들은 난폭하지만 대놓고 앞에서 움직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무전은 다르다. 앞에서 시비를 걸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시도 때도 없이 넘나든다. 붉은 천을 본 황소와 다를 바가 없는 놈들이다.

‘이거 좀 귀찮겠는데.’

레이든은 발데르의 자식 중에서도 뒤가 없기로 유명하다. 실비아가 고모라고 멈출 성격이 아니니, 상황이 꽤 복잡해질 것 같았다.

‘거기다….’

지금 별관에는 라온이 있다. 혹시라도 레이든이 실비아나, 시녀들을 건드렸다가는 큰 문제가 벌어질 거다.

“헬렌. 이미 벌어진 일이야. 준비해. 그리고 라온은 절대 나오지 말라고 전해.”

실비아는 30분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정원 손질을 멈추고, 옷을 털며 헬렌과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라온이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그녀도 레이든 지그하르트가 오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헬렌이 입술을 깨물고, 별관으로 걸어갔다. 주디엘이 다른 시녀들과 함께 그녀의 뒤를 쫓으려 할 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귀티 나는 정복을 입은 금발 남자가 걸어온다. 어깨가 좁고, 선이 가는 체형에 얼굴과 코가 길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신발을 질질 끄는 모양새가 뒷골목 건달과 다를 바 없었다.

‘벌써….’

주디엘이 마른침을 삼켰다. 저 양아치 같은 놈이 바로 레이든 지그하르트다. 놈은 메르킨이 말한 30분은커녕 5분이 되기도 전에 이미 별관에 도착했다.

30분이라고 말한 것 역시 놈들의 술수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이런! 도련님이 제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메르킨이 눈을 찡긋하며 얄밉게 웃었다. 그 주인에 그 집사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행동이었다.

찍!

레이든 지그하르트가 정원의 꽃 위로 침을 뱉고, 실비아의 앞에 섰다.

“고모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도련님. 실비아 님은 방계 서열 최하위입니다. 그런 호칭으로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아, 그렇지. 그럴 필요 없겠네.”

레이든이 킥킥 웃으며 허리춤의 검을 툭툭 두드렸다.

“어제 온다고 말했는데도, 지저분하네. 못난 것들이 사는 곳이라 어쩔 수 없나 봐?”

그는 지금까지 실비아와 시녀들이 다듬은 정원의 꽃들을 진흙이 묻은 구두로 짓밟았다. 버릇인지 중앙도로에 다시 걸쭉한 침을 뱉었다.

“미안해요. 지금 정리 중이라.”

실비아는 버릇이 없다는 차원을 넘은 조카를 보고도 미소를 지었다. 담담한 눈빛으로 레이든을 바라본다.

“흥.”

레이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침을 찍 뱉어냈다. 우측의 꽃들을 걷어차며 앞으로 다가갔다.

“이런 지저분한 길을 나보고 걸으라고?”

그는 정리하느라 도로에 깔린 흙에 침을 뱉으며 인상을 구겼다.

“어이, 빨리 치워.”

“알겠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실비아는 미소를 유지한 채 허리를 숙여 손수 흙을 치우기 시작했다.

“저….”

“음….”

그 모습에 레이든도, 그의 집사인 메르킨도 눈을 부릅떴다. 이런 도발조차 견딜 줄은 몰랐던 표정이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나….’

주디엘이 눈매를 좁혔다. 첩자이자, 이곳에 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자신도 화가 나는데 저렇게 웃으며 참아 넘기는 모습을 보니, 실비아는 외유내강 그 자체의 인간이었다. 감탄이 나왔다.

실비아를 도와 흙을 치우는 시녀들의 표정은 침착했지만, 분노하여 떨리는 손을 숨기지는 못했다.

저들 모두가 끝까지 인내하는 건 라온을 위해서였다. 그가 여기서 레이든과 문제를 일으키길 바라지 않기에 저들의 도발을 참는 것이다.

“아,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레이든 지그하르트가 콧등을 찡그리며 실비아가 치우던 흙 위로 다시 한번 가래침을 뱉었다. 그 침이 실비아의 손에 흘러내렸다.

“도련님!”

그 모습을 본 헬렌이 별관으로 가다 말고 돌아왔다. 눈동자가 꺼멓게 일그러졌다.

“심하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직계라고 해도 이렇게 대놓고 시비를 걸어온다면 본관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실비아가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한 헬렌의 사고에는 이성이 아닌 감정의 세월이 차올라 있었다.

“헤, 헬렌!”

“아하.”

레이든이 길을 막으려는 실비아를 밀어내고 헬렌의 앞에 섰다.

“맞아. 맞는 말이야. 분명 문제가 생기겠지.”

레이든은 헬렌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히죽 웃으며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그리 힘을 주지 않은 것 같았음에도 헬렌은 나무에 부딪힐 정도로 밀려났다.

“흐윽….”

헬렌이 뺨을 움켜쥔 채 덜덜 떨었다.

“하지만 난 이 집안의 직계야. 즉, 주인이라는 말이지. 이딴 짓을 벌여도, 널 죽여도 방에서 이틀 정도 처박혀 있으면 그만이야.”

레이든의 기세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아가리를 벌린 짐승을 보는 듯 소름이 돋아올랐다.

“멈춰!”

그가 헬렌을 밟으려고 할 때 실비아와 시녀들이 그 앞을 막아섰다.

‘익.’

주디엘이 입술을 깨물고 실비아의 옆에 붙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맞을 상황이 오면 몸을 들이밀 생각이었다.

“멈춰가 아니라, 제발 멈추세요라고 해야지.”

“윽….”

실비아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흉폭한 기세를 퍼뜨리는 레이든의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꾸욱.

주디엘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첩자인 자신조차 화가 났다. 저 망나니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고민할 때였다.

“아….”

별관 쪽에서 솜털이 곤두서는 살기가 치솟았다.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무서워서 돌아보기 힘들었다.

“아, 이제야 보고 싶은 얼굴이 나오는군.”

레이든이 침을 찍 뱉고서 히죽 웃었다.

“윽….”

주디엘이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붉은 눈. 예상대로 걸어오는 사람은 라온이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으로 다가온다.

고오오오.

꿀꺽.

마른침을 저절로 넘어갔다.

‘살기가 약한 게 아니야….’

라온의 기세는 옅었다. 기운이 약해서가 아니다. 살기를 끌어모아 압축시켰기에 기세가 그리 크지 않은 것이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 잘난 얼굴 보고 싶었다.”

레이든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히죽 웃으며 앞에 있던 실비아와 시녀들을 밀쳐냈다.

“…….”

라온의 표정은 잔잔했다. 인형처럼 입매를 굳게 다문 채 천천히 걸어왔다.

스르릉.

그는 레이든과 거리가 열 걸음도 남지 않았을 때 검을 뽑았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청아한 소리가 울렸다.

“설마 그 무서운 걸 휘두르려고? 난 직계데?”

레이든은 라온이 당연히 검을 휘두르지 못하리라 생각한 듯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직계.”

라온이 걸음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크하하!”

레이든은 자신의 말이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웃음을 터트리고 라온에게 다가갔다.

“나는 레이든 지그하르트. 진무전주 발데르 지그하르트의 아들로….”

“어쩌라고.”

라온의 검이 레이든을 향해 붉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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