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푸른 달이 세상을 굽어보는 밤.
라온이 공터에 서서 팔과 다리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완벽하게 회복한 건 아니지만, 살이 거의 다 차올랐다. 수련을 시작해도 별문제 없을 것 같았다.
‘그럼.’
만화공의 오러를 끌어 올린 뒤 미끄러지듯 땅을 박찼다.
공터에 있던 라온의 순식간에 호수 근처에 이르렀다. 그림자조차 따르지 못한 쾌속의 보법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쯧.”
라온이 길게 혀를 차며 다리를 좁혔다.
‘이게 아니야.’
글렌이 보여준 첫걸음은 대륙 어디라도 닿을 듯 광활했고, 어떤 움직임도 이뤄낼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웠다.
방금 자신이 펼친 태화보 진천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보라고 했었지.’
글렌은 태화보를 전능이자, 만능이라 말했다. 오만하고 거만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속으로도 반박할 수 없었다.
‘지금은 속도나, 힘을 생각할 때가 아니야.’
자신의 무력은 글렌과 비교해서 티끌조차 되지 않는다. 지금은 그를 따라 할 게 아니라, 큰 그림을 위한 바탕을 세워야 할 때다.
‘그럼 다시.’
라온이 만화공을 운용하며 다시 태화보를 밟았다. 느리지만 무거운 걸음. 사나운 들소의 돌진 같았다.
“이것도 아니야.”
라온은 고개를 젓고서 다시 자세를 잡았다. 반복, 반복 그리고 또 반복. 달이 쓰러지고, 해가 일어설 때까지 태화보를 운용했다.
“젠장….”
라온이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학습 능력을 올려주는 재능이 생겨났음에도 태화보를 익히는 건 쉽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 실마리도 잡지 못한 기분이다.
‘아니, 당연한 건가.’
태화보는 대륙 최강자인 글렌의 심득이 들어간 보법. 그런 절대의 무학이 쉽게 문을 열어줄 리가 없었다.
-본왕의 잠까지 방해하면서 수련했음에도 아직 그 보법을 익히지 못한 건가? 한심해서 눈물이 나오려 하는군.
밤새 조용하던 라스가 팔찌에서 튀어나오며 비웃음을 흘렸다.
-본왕은 그 보법을 보자마자 깨달음은 얻었건만, 정말이지 인간의 하등함은 불쌍할 정도이니라.
‘그래. 너 잘났다.’
라온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몸이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밤새 수련을 했기 때문인지 피로가 밀려왔다.
-훗, 땅바닥을 기는 지렁이가 하늘을 올려보려니, 어려울 수밖에. 벌레는 벌레에 맞는 하늘이나 보아라.
‘벌레는 벌레에 맞는 하늘이라….’
라온은 라스의 험담을 중얼거리며 별관 뒤에 있는 북망산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북망산에서 리메르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속성에 대해 말할 때 자신의 속성이 어떻게 흐를지는 본인이 결정해야 한다고.
‘그렇다면 이 보법도 마찬가지인가?’
태화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글렌의 태화보는 무언가를 초월해 있었다. 현실의 보법이 아니라, 이 한 걸음으로 시공간을 뛰어넘을 듯 신비로웠다.
‘난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런 건 원하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원하는 건 그런 비현실적인 일이 아니다.
그저 딱 두 가지. 이 별관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고, 데루스 로베르트의 목에 칼을 박아넣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걸 위해선….’
라온이 허리를 펴며 눈을 감았다. 언제 어떻게 해서라도 지켜야 할 사람들과 이 몸이 갈라져도 죽여야 할 놈을 생각하며 발을 내디뎠다.
쿵!
울림이 다르다.
발바닥의 마나 회로에서 시작된 격렬한 흐름이 천공을 가르는 벼락처럼 전신을 꿰뚫었다. 뻗어나가는 육체에 자유가 담긴다.
자신만의 그림이 그려진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원수의 목을 꺾을 자유가 새겨진 발걸음이 그 그림의 밑바탕을 채웠다.
후욱.
라온이 두 눈을 떴다. 떠오르는 태양처럼 눈동자가 선명하게 타오른다.
“…….”
고개를 내려 바닥을 보았다. 첫 번째 걸음을 걷고 몸은 이동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움직였다.
이 걸음은 심(心). 즉, 마음을 담아야만 이룰 수 있는 무학이었다.
오늘 이루고자 했던 태화보의 밑그림이 한순간에 완성되었다.
[태화보를 습득하셨습니다.]
[태화보(1성)가 특성에 생성됩니다.]
라온이 양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절대 얻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태화보를 익히자, 성취감과 희열이 평소의 배로 찾아왔다.
[태화보 성취 속도가 원상태로 돌아갑니다.]
딱 맞게도 태화보를 습득하자마자, 성취에 도움이 되던 학습 능력이 사라졌다.
태양이 천천히 떠오르는 모습을 보니, 예상대로 하룻밤의 능력이었던 모양이다.
‘바로 나오길 잘했어.’
만약 저 능력이 없었다면 하루는커녕 1년이 지나도 태화보를 습득하지 못했을 거다. 부상이고 뭐고 다 제쳐두고 나와 수련한 게 정답이었다.
-이 무슨….
라스의 냉기가 바람 앞 촛불처럼 격하게 흔들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네 말이 열쇠가 됐어.”
-열쇠?
“네가 말했잖아. 벌레는 벌레의 하늘을 봐야 한다고.”
-그게 어쨌다는 거냐.
“그 말대로 내겐 내 뜻과 목표가 있고, 글렌에겐 그의 뜻과 목표가 있지. 내가 그 사람을 그대로 따라 할 필요는 없었어. 그래서 그 보법에 내가 이루고 싶은 뜻을 담았다.”
얄미운 표정으로 그러니까 되더라고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해도 그 보법은 그렇게 쉽게 익힐 만한 것이 아니었다.
“맞아. 네 시스템이 보법의 습득 능력을 올려준 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지. 그러고 보니 둘 다 네 덕분이네. 진짜 고맙다.”
-끄으윽, 본왕은 그런 적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라스의 냉기가 푸르딩딩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열 받지 말아. 난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니까.”
라온이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라스가 분노를 터트리게 만들기 위해서 조금 더 자극하려고 할 때였다.
“라온!”
실비아가 별관 뒷편의 창문을 뛰어 넘어왔다. 민첩함이 리메르와 다를 바가 없을 정도였다.
“쉬라고 했잖아! 이 꼴은 또 뭐야!”
“어우.”
라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계의 군주도 무섭지 않지만, 어머니에게는 맞설 수가 없다.
* * *
라온은 라스보다 더 분노한 얼굴의 실비아를 따라 그녀의 방에 끌려갔다.
“라온. 엄마가 뭐라고 했지?”
“그, 글쎄….”
라온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실비아의 눈을 피했다.
“부상이 회복될 때까지 훈련을 쉬라고 분.명.히 말했잖아!”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그녀가 그렇게 말한 게 생생하게 기억났지만,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너 진짜!”
실비아가 팔짱을 낀 채로 콧등을 찡그렸다.
‘으….’
실비아가 화를 내니, 광혈귀와 싸울 때보다 더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저 잔소리를 듣는 게 이리 힘들다니,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라온.”
실비아가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걱정과 안쓰러움이 담긴 눈. 라온은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숙였다.
“응.”
“네가 왜 그렇게 수련에 열을 올리는지 알아.”
그녀는 라온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엄마랑 이 별관을 걱정해서 빨리 강해지고 싶은 거잖아.”
“…….”
라온은 말없이 입술을 살짝 떨었다. 엄마라서일까 아니면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기 때문일까. 실비아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지만.’
실비아나, 별관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것 외에도 복수에 대한 감정으로 움직이는 건 그 누구도 모를 거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전부 엄마 탓이니까.”
“그건….”
“네가 수석 수련생이 되고, 대련에서 이기고, 임무에서 큰 활약을 했다고 들을 때마다 얼마나 기뻤는지 넌 모를 거야. 하지만….”
실비아가 입매를 꾹 다문 채 자신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날 위해서 그런 활약을 할 필요는 없어. 엄마가 말했잖아.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널 위해서. 하고 싶은 걸 하라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조그마한 구김도 없는 웃음.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그렇기에 더 마음이 울렸다.
“다시 말하지만, 엄마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니까 네가 무리할 필요 없어. 라온 넌 네 보폭에 맞춰서 걸어가렴.”
사실 부상은 8할 이상 완치된 상태다. 지금 몸 상태면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이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다. 그건 자신도 실비아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런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알겠어.”
라온은 울렁이는 심장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한 거지?”
“응.”
“좋아!”
실비아가 손뼉을 치며 일어섰다. 조금 전과 달리 활짝 미소를 지었다.
“다 들어와!”
“네!”
그녀의 부름에 방문이 열리고, 헬렌과 별관의 시녀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왔다.
“어, 엉?”
라온이 입을 떡 벌렸다. 밖에 시녀들이 있는 건 알았지만, 안으로 부를 줄은 몰랐었다.
“전부 들었지? 오늘부터 라온이 수련을 하거나, 몸을 쓰는 걸 보면 바로 나한테 보고해.”
“예. 마님!”
시녀들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
라온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했어….”
-크하하하! 네놈이 당하는 꼴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하구나!
**
“후욱!”
버렌이 납덩이처럼 무거운 한숨을 뱉어냈다.
‘머리가 어지럽군.’
에덴과 부딪친 그 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뻘게진다. 목소리만 컸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라온이 아니었다면 죽었을 목숨이라 생각하니, 그저 부끄럽고 민망하기만 했다.
“몸이라도 좀 움직여야겠어.”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본관 구석에 세워진 소연무장으로 향했다.
작은 연무장이었지만, 관리는 깔끔하게 되어 있었다. 버렌은 검을 뽑아 그대로 내리쳤다.
후웅!
바람을 거칠게 가르는 소리에 마음의 답답함이 조금은 가셨다. 만족감을 느끼며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고 보법을 밟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연무장에 몇몇 검사와 수련생들이 보였다.
“후….”
버렌은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소매로 훔치고, 검을 검집에 넣었다.
‘잡념이 사라졌군.’
몸을 움직이는 게 정답이었다. 이전과 달리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돌아갈….’
몸을 돌려 중무전으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버렌 님!”
“오랜만입니다!”
5 연무장의 시험에서 떨어진 뒤 자존심이 상한다며 6 연무장에도 가지 않은 방계 아이들이 다가왔다.
“그리 힘든 일을 겪으셨는데 벌써 수련을 하시는 겁니까?”
“역시 버렌 님이십니다.”
방계들은 탄성을 내지르며 눈동자를 빛냈다.
“그냥 답답해서 나와봤을 뿐이다.”
“답답하시다니…. 아! 역시!”
우측에 있던 이마가 넓은 아이가 눈매를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가 잘못된 거였군요!”
“그 이야기?”
“라온이 녹전귀를 죽이고, 광혈귀와 싸웠다는 소문 말입니다. 그거 헛소문 맞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야비한 놈이 녹전귀를 베고 다른 사람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분명 리메르 교관이 다 처리해놓고, 라온에게 공을 떠넘겼을 겁니다. 리메르 교관은 녀석을 좋아하니까요.”
버렌이 한마디를 하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은 라온이 거짓말을 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진짜 추하네요. 별관에 있는 것들은 전부 부끄러움을 모르는….”
“어이.”
버렌이 이를 드러내며 두 수련생을 노려보았다. 살벌한 기세에 수련생들이 움찔 놀라 눈만 껌뻑였다.
“넌 우리 지그하르트가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공적을 퍼주는 어중이떠중이로 보이나?”
“예?”
“아,그, 그게….”
“라온 지그하르트는 녹전귀를 베었고, 광혈귀 앞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를 포함한 수련생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어.”
“으윽!”
방계들은 버렌의 으르렁거리는 음성에 기가 죽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앞으로 그딴 소리를 하는 놈이 있으면 내 앞으로 데려와. 주둥이를 직접 막아 줄 테니까.”
“아, 예!”
“죄송합니다!”
덜덜 떠는 수련생들을 노려보다가 연무장을 떠났다.
“아….”
버렌은 중무전으로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랬군.’
왜 그렇게 답답했는지, 왜 그리 속이 울렁였는지 이제야 알았다.
‘난 아직 녀석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야.’
라온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고, 녀석을 따라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라온은 그 이상을 달렸고, 자신보다 더 빨리, 더 멀리 나아갔다.
이전에 이뤄진 오웬 왕국과의 대련에서도, 오크와의 실전 훈련에서도 그리고 이번 임무에서도 자신은 크게 활약하지 못했지만, 라온은 항상 홀로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다.
‘질투였어….’
조용하면서도 지도력 있고,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보며, 무력까지 뛰어난 라온.
따라잡겠다는 말과 달리 속으로는 라온의 능력을 질투하고 있었던 거다.
“하하하!”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인간인 이상 질투는 어쩔 수 없는 법. 인정하고 나니 속이 편해졌다.
‘난 그리 큰 인간은 아니었어.’
다만 이 추한 감정을 드러낼 생각은 없다. 마음속에 간직한 채 라온을 따라잡기 위한 연료로 삼아야 한다.
‘말했지. 난 포기하지 않아.’
버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중무전으로 돌아갔다.
* * *
“도련님. 훈련하러 가시는 거 아니죠?”
라온이 방 밖에 나오자마자 헬렌이 웃으며 다가왔다.
“아냐….”
라온은 고개를 젓고, 로비로 걸어갔다.
“도련님. 어디 가시나요?”
다른 시녀가 날카로운 눈으로 라온의 옷을 살폈다.
“산책 좀 하려고.”
“음, 다녀오세요.”
손을 저어주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도련님? 설마 훈련을….”
“아니라고.”
별관 밖에서 창문을 닦던 사람도 보자마자 훈련 이야기를 꺼냈다.
“도련님….”
“훈련….”
별관 뒤편의 정원을 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이 행선지와 뭘 할지를 계속 물어보았다. 지겨울 정도로.
“그냥 산책 간다! 산책!”
빨래를 널고 있는 시녀들에게 인상을 쓰고서, 정원으로 도망갔다.
“어휴!”
라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실비아의 덫에 아주 제대로 걸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그녀에게는 여러모로 약해진다.
‘이래서는 무리인데….’
시녀들은 기회라는 생각에 여기저기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보법이라도 밟았다간 뻐꾸기시계의 뻐꾸기처럼 실비아가 뛰쳐나오게 될 거다.
‘뭐, 됐어.’
그나마 태화보를 익힌 후에 이런 일이 벌어져서 다행이다. 만약 태화보 습득 능력이 올라간 상태에서 이런 꼴이 되었다면 정말 한숨만 나왔을 테니까.
‘가끔은 머리 식히는 것도 좋겠지.’
정원 벤치에 앉아서 오랜만의 여유를 즐겼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지켜보던 시녀들의 눈도 사라졌다.
“도, 도련님!”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서 시원한 바람과 풀 내음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별관 쪽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자, 울먹이며 달려오는 시녀가 보였다.
“응?”
시녀의 표정과 다급한 목소리에 라온이 벤치에서 일어섰다.
“레, 레이든 지그하르트 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레이든?”
들어본 이름이다.
글렌의 넷째인 발데르의 아들이었고, 최근 공을 세우고 가문으로 돌아왔다 들었다.
“왜 온 건데?”
“자, 잘 모르겠습니다. 오자마자 마님께 행패를 부리기 시작해서….”
다른 단어는 들리지 않았다. 마님과 행패라는 두 단어만 들려왔다.
“그 새끼 어디 있어.”
라온의 눈빛이 암살자 시절로 돌아간 듯 어둑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