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라온이 숨을 멈췄다.
‘기연이다.’
대륙 최강의 무인이 직접 전수해주는 보법이라면 패 따위로 얻을 수 없는 기연 중의 기연이었다.
이게 만약에 소문이 난다면 지그하르트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엄청난 일이었다.
고오오오!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살짝 멍했던 정신이 찬물을 뒤집어 쓴 듯 맑아졌다.
“준비는 된 모양이군. 그럼 시작하마.”
글렌의 발이 바닥에 깔린 은은한 달빛을 가른다.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로운 움직임이었지만, 그 흐름을 잡을 수 없었다.
좌측에서 불꽃처럼 빨갛게 피어났다가 우측에서 물처럼 아롱져 흘러내린다. 그의 발이 이뤄내는 기묘한 흐름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글렌의 보법은 너무도 난해했다. 빠르면서, 느리고, 부드러우면서 단단했다.
‘그래도 끝까지 봐야 해.’
어렵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글렌의 가르침의 10분의 1만 얻어도 큰 소득을 얻을 수 있으니까.
라온은 글렌의 발이 멈출 때까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았다.
너무도 짧고, 황홀한 시간이 끝나고 글렌이 라온의 앞에 멈춰 섰다. 천고의 보법을 보여줬음에도 그의 호흡은 여유로웠고, 옷깃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보았느냐?”
짐승의 그것처럼 날카로운 붉은 눈이 묻는다. 제대로 보았냐고. 어디까지 파악했냐고.
“…죄송합니다. 보지 못했습니다.”
라온이 입술을 깨문 채로 고개를 숙였다. 그야말로 격이 다른 보법. 네 개의 불의 고리로는 파악할 수 없는 수준의 무학이었다.
“…….”
글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볼 뿐이다.
“네가 깨달은 만큼만 해보아라.”
그가 손으로 바닥을 가리키고서 뒤로 물러섰다. 지금 그 보법을 다시 해보라는 것 같았다.
‘실망시키겠군.’
많은 흐름을 보았고, 깊은 무학을 느꼈지만, 지금의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건 티끌에 불과하다. 벌써 글렌의 차가운 눈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면….’
라온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설프게 많은 것을 보여주기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재연하기로 했다.
‘그건.’
첫 일보.
오른발을 앞으로 왼발을 뒤로 뺀 평범하지 않은 자세에서 뻗어나가는 첫 걸음.
달빛을 가르고 공간을 꿰뚫었던 그 일보를 재연하기로 했다.
“후….”
라온은 왼발을 뒤로,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발과 발 사이는 어깨너비. 불의 고리를 돌리며 관찰한 자세였기에 글렌과 조금의 차이도 없었다.
‘그 걸음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어.’
빠르고, 느리고, 강하고, 부드럽고, 변화무쌍했다. 그 어디로도 갈 수 있는 한 걸음이었다.
왼발을 들었다.
글렌의 보법을 보고 느낀 것과 쌓아 올린 무학의 묘리를 담아 앞으로 내뻗었다.
쿵!
바닥에 깔린 금색 달빛이 삼각형으로 이지러지며 알현실 전체에 진한 울림이 일어났다.
글렌과는 비교할 수 없이 미약한 걸음이지만, 그 흐름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떤 방향으로도, 어떤 방식으로도 움직일 수 있는 첫걸음이었다.
“…….”
“허!”
글렌의 눈매가 가늘어지고, 로엔의 입이 벌어졌다.
“후….”
라온이 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감았다. 고작 한 발을 걸었을 뿐인데, 현기증이 일었다. 너무 긴장하고, 집중했던 것 같다.
“그 한 걸음이 전부인가?”
글렌이 몸을 돌리며 앞에 나와 있는 라온의 왼발을 바라보았다.
“예.”
라온은 간결하게 대답하며 눈을 떴다.
“더 많은 것을 보았을 텐데?”
“완전은커녕 10분의 1도 따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 할 수 없다?”
“가주님께서 보여주신 보법은 무신의 걸음처럼 너무도 많은 게 담겨 있었습니다. 미숙한 제가 다 파악하기엔 무리입니다.”
“그럼 첫걸음이 제일 쉬웠다는 건가?”
글렌의 목소리가 혹한의 바람을 담은 듯 차가워졌다.
“아닙니다.”
라온은 앞으로 내밀어져 있는 왼발을 보며 말을 이었다.
“가주님께서 보여주신 첫 번째 걸음이 가장 중요했고, 인상 깊었습니다. 그 이후에 보여준 그 어떤 보법보다도 뇌리에 깊게 박혔기 때문에 첫걸음을 따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첫 번째 걸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지?”
“어디로도, 그 어떤 순간에도, 어떤 방식으로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능자의 걸음을 보는 듯한 전율이 일어나 아직도 그 걸음이 그려집니다.”
무학으로 글렌을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 보고 느꼈던 감정을 솔직하게 말했다.
“흠.”
글렌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벌렸다.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알현실의 분위기가 약간 부드러워진 느낌이다.
“감이 좋구나.”
그가 처음과 똑같이 왼발을 뒤로 오른발을 앞으로 내민 자세를 취했다.
“네게 보여준 보법의 이름은 태화보다. 첫 번째 걸음 ‘진천’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반은 왔어.”
덤덤한 목소리와 함께 다시 일보를 걷는다. 세상 그 어디로도 나아갈 수 있는 그 걸음을 본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섰다.
우우웅!
단전이 진동하며 오러가 일어난다. 마나 회로를 질주하며 육체를 이끌었다.
쿠웅!
라온은 본인도 깨닫지 못한 채 글렌이 보여준 태화보의 진천을 그대로 재연했다.
“아까보다 낫구나.”
글렌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뒤를 돌았다. 단상 위로 올라가 다시 옥좌 위에 몸을 파묻었다.
“네게 줄 보상은 이걸로 끝이다.”
“그 첫 번째 걸음 하나로 말입니까?”
“보여준 건 많았다. 네가 가져간 게 하나였을 뿐이지.”
그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것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런 보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개안을 했다.
“이건 네가 가져가라.”
글렌이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던졌다. 라온은 가슴 앞으로 떨어지는 빨간색 보석을 잡았다.
“아.”
아까 글렌에게 주었던 고블린 왕의 마석이었다.
“물건에는 각기의 주인이 있는 법. 네가 얻은 물건이니, 네가 가져가도록.”
그는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듯 손을 털고서 다시 눈을 감았다.
“여기에 담아가십시오.”
로엔이 검은색 천을 내밀었다. 마석의 기운을 막는 천이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고블린 왕의 마석을 천에 감싼 후 품에 넣었다.
‘이걸 다시 돌려주다니….’
연구를 하거나, 부수거나 혹은 창고에 넣을 줄 알았다. 돌려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저 사람의 모든 움직임은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그만 돌아가라.”
“예. 감사합니다.”
라온이 뒤로 물러났다. 알현실 문을 열려다가 이번에 많은 것을 받은 게 생각나서 그냥 가기 좀 뭐 했다.
“저….”
“뭐냐.”
“거, 건강하세요.”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아서 어른에게 할 법한 가장 기본적인 인사말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
글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인상을 찌푸렸고, 로엔은 입을 막고 손을 떨었다.
“…가보겠습니다.”
쩝 입맛을 다시며 알현실을 나왔다. 아무래도 말을 잘못 고른 것 같다.
-건강하세요라니! 그 잘 돌아가는 머리도 이럴 때는 돌이 되는구나!
‘끙….’
어른들에게 진심을 담은 말을 한 적이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에휴.”
한숨을 내쉬며 가주전 복도를 걸어갈 때 눈앞으로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불의 고리>가 완벽에 이른 <태화보>를 관찰했습니다.]
[<태화보> 습득이 빨라집니다.]
* * *
라온이 떠난 알현실은 여전히 달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로엔은 바닥에 깔린 달빛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태화보를 꺼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글렌이 라온을 아끼는 건 알고 있어서 특별한 보상을 내리리라 생각했지만 그게 태화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태화보는 가주님이 직접 만든 보법이니까.’
글렌 지그하르트가 마에서 벗어난 후 처음으로 만든 보법이 바로 태화보다.
금패를 주고도 얻을 수 없고, 아들들에게도 전수하지 않은 태화보를 가르쳐주다니, 글렌은 예상 이상으로 라온을 아끼고 있었다.
“봤나.”
글렌이 천천히 눈을 떴다. 차가움만이 담겨 있던 조금 전과 달리 그의 눈빛에 달큰한 빛이 어려 있었다.
“고작 두 번을 보고서 진천을 따라하더군.”
“예?”
“라온. 그 녀석 딱 2번을 보고서 태화보의 절반을 가져갔어. 대단하지 않나?”
눈빛만이 아니라, 목소리도 평소보다 한 톤 높았고, 입매는 바짝 올라갔다.
“허….”
로엔이 입을 떡 벌렸다. 수십 년 동안 글렌의 그림자로서 살아왔지만, 저 남자가 저렇게 기뻐하는 건 첫째 도련님이 태어났을 때 이후 처음이었다.
“녹전귀를 베었고, 광혈귀에게서 버틴 게 운이 아니었다. 눈썰미도, 육체와 오러의 통제도 범인의 수준이 아니야.”
“그건 그렇습니다.”
경악스럽게도 라온은 이 짧은 순간에 태화보의 요체를 파악했다.
“다만 내 마음에 와닿는 건 다른 부분이다.”
글렌의 입매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깊어졌다.
“판단력 말씀이시군요. 놀라운 일이죠. 15살 아이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파악하다니. 기회가 있다면 제가 키워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단순히 오늘 일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 광혈귀의 앞을 홀로 막았던 것.”
글렌이 라온의 발자국이 미세하게 남은 카펫을 보며 말을 이었다.
“라온은 감이 좋다. 광혈귀를 본 순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을 거다.”
“그럴 겁니다.”
“녀석은 그런데도 끝까지 앞을 막았다. 촌장을 구하느라 몸이 망가진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마을 사람과 수련생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었지.”
라온이 버티지 않았다면 그 마을과 수련생은 광혈귀의 손아귀에서 핏물이 되었을 거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거기다 그게 15살 아이라면 대륙 전체를 뒤져도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거다..
그런 대단한 녀석이 자신의 손자라는 것이 감격스러워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렇게 웃으시는 건 오랜만에 보는군요.”
로엔이 빙긋 웃었다.
“커험, 기쁘기는 무슨.”
글렌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내려갔다. 평소보다 더 많이 입매를 내려 늙어 보일 정도.
“백혈교의 지부를 홀로 부수고 돌아온 레이든 님에, 녹전귀를 벤 라온 님. 아주 경사가 겹쳤네요.”
“뭐. 그렇게 대단하고, 특별한 일은 아니지.”
손주들의 칭찬에 글렌의 입가가 다시 살짝 올라갔다.
“흐흥.”
로엔이 그런가요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는 여전히 방글거리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라온 도련님이 건강하세요라고 할 때 가주님이 웃음을 참지 못하셨습니다. 냉정한 척을 하시려면 조금 더….”
“척이 아니다!”
글렌이 드물게 호통을 쳤지만, 로엔의 웃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 * *
“이게 뭐지?”
라온은 별관으로 돌아와서 아까 보았던 메시지를 가리켰다.
후우욱.
앵무새처럼 팔찌에 매달려 있던 라스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학습이다.
“학습?”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특별한 능력이나, 뛰어난 무력을 가진 놈들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시스템의 한 요소다. 이걸 보니 또 하나 생각나는군. 본왕에게 덤비는 건방진 놈 중에….
“간단히 말해서 학습 능력이 올라간다는 뜻이로군.”
-말 좀 끊지 마라!
“어쨌든 맞지?
-후, 비슷하다.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데?”
-그걸 말해줄 리 있겠느냐. 본왕의 분노를 받아 간다면….
“됐어. 뻔하니까.”
라온이 픽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태화보의 습득 능력이 상승한다는 말이잖아. 이게 무슨 비밀이라고.”
-건방진 놈!
라스가 짜증이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바로 시작해야겠어.”
라온은 조용히 창문을 열고 다시 방을 나왔다.
-내일 날이 밝았을 때 하도록 해라. 따라 나가기 귀찮도다.
‘시간제한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런 게 있을 리가….
‘말하는 거 보니 있네.’
-어, 어떻게 알았느냐.
‘네 반응이 이상했거든.’
평소의 라스라면 분노를 뿜어냈을 텐데, 가벼운 짜증만 뿌린 것을 보고,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말했잖아. 넌 내 손바닥 안에 있다고.”
-건방 떨지 마라! 본왕은 마계의 군주이니라, 인간 따위가 가늠할 수 없는….
라스가 무시무시한 냉기를 퍼뜨리며 눈을 부라렸다.
‘그래. 그거.’
라온이 손가락으로 점점 부풀어가는 라스의 냉기를 가리켰다.
‘처음부터 그렇게 나왔으면 이상하다는 것도 몰랐을걸. 너 참 다루기 쉽네.’
오른손에 만화공의 불길을 담아 라스를 밀어냈다.
-빌어먹을! 네놈은 본왕이 만났던 생명체 중 최악의 존재다!
‘마왕이 최악이라는 소리를 한다는 건 칭찬이겠지?’
-크으으윽! 네놈만큼은 죽인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죽인….
‘그래. 나중에.’
라온은 라스의 저주 같은 비명을 들으며 연무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