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84화 (84/653)

84화

“검기….”

카룬은 라온의 검에 어린 불길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익스퍼트 하급의 경지에 오른 게 정말이었다고?’

이상하게도 라온의 경지는 추측하기 어려웠다. 오러 유저 상급 정도라 생각했는데, 익스퍼트의 상징인 검기를 사용할 줄은 몰랐다.

15살이라는 나이에 검기를 사용하다니, 대륙 역사상 손에 꼽을 만한 천재 혹은 괴물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익스퍼트라고 해도 광혈귀와 겨룰 수는 없어.’

익스퍼트는 분명 강자라고 불릴 수 있는 경지지만, 대륙 전체로 보았을 때는 그리 대단한 수준이 아니다.

“아무리 익스퍼트에 올랐다고 해도 광혈귀의 무위는 마스터. 네 수준으로는 절대 버티지 못한다. 녹전귀를 잡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실대로 말….”

“아버지.”

라온의 뒤에 부복해 있던 버렌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제가 보았습니다. 라온은 녹전귀를 베었고, 저희와 마을 사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 한팔을 다친 상태에서도 혼자 광혈귀의 앞을 막아섰습니다.”

“맞아.”

루난도 버렌의 뒤를 따라 나와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우측에 서 있는 그녀의 아버지를 로칸 슬리온을 향해 있었다.

“너희들에게 입을 열라고 허락하지 않았다!”

카룬은 아들이 아닌, 사육한 짐승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버렌을 노려보았다.

“허, 참 아들이 말해도 믿지를 못하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네. 앞뒤가 아주 꽉꽉 막히셨어. 밥은 어디로 먹고, 똥은 어디로 싸나 몰라.”

“입 닫아라. 리메르.”

카룬은 어깨를 으쓱이는 리메르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네놈이 한 일이 가장 큰 문제다. 그 망가진 육체로 광혈귀를 잡았다니, 사기를 치지 않고서야….”

“그럼 한 번 붙어볼까요? 중무전주의 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오랜만에 보고 싶은데?”

“좋다. 그 얇은 목을 당장에 베어….”

“그만.”

리메르와 카룬의 목소리 사이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묵직한 음성이 끼어들었다.

“흡!”

“윽….”

“끄으….”

그 거대한 존재감에 알현실에 있는 모두의 척추가 바짝 섰다.

“수석 수련생 라온 지그하르트. 그리고 5 연무장의 수련생 모두 들어라.”

글렌은 괴고 있던 턱을 떼고, 모두를 굽어보며 말을 이었다.

“훌륭했다.”

“어?”

“아버지?”

“가주님….”

생각지도 못한 글렌의 칭찬에 대주들도, 봉신가문의 가주들도, 수련생까지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알현실의 모두는 넋이 나간 눈빛으로 글렌을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글렌 지그하르트는 그 누구보다 칭찬에 인색하고, 냉혹한 인물이었으니까.

아무리 어려운 임무를 완수해도 수고했다는 말 정도였는데, 훌륭하다는 말이 나온 건 십수 년만에 처음이었다.

“리메르에게 1차로 보고를 받았고, 세부 지역을 조사한 지부장에게 2차 그리고 너희들에게 3차로 받은 보고는 모두 일치한다.”

글렌은 턱을 괴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적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섣불리 움직이지 않은 점이 첫 번째.”

그가 검지 하나를 접었다.

“되돌아와서도 바로 달려들지 않고, 적을 파악하려 했던 것이 두 번째.”

이번엔 중지를 내렸다.

“최적의 순간까지 기다리다가 한 번의 기습으로 적을 약화시키고, 숨겨둔 일격으로 녹전귀의 숨통을 꺾은 게 세 번째.”

글렌의 손가락이 접힐수록 대주들의 눈동자가 커졌다.

“마지막으로 이길 수 없는 적을 만났을 때 그 앞을 막아서고, 동료와 민간인을 도망칠 수 있게 한 게 네 번째다.”

그는 올라간 네 손가락을 접으며 붉은 눈을 빛냈다.

“경험 많은 무인처럼 하나하나의 판단이 적절했다. 수련생 그리고 마을 사람들 중 사망자가 없던 것은 네 정확한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렌이 라온의 뒤에 있는 수련생들을 보았다.

“너희들 역시 지그하르트의 검사다운 모습을 보였다. 지그하르트가 지금 이렇게 설 수 있는 건 밑에서 받쳐주는 사람들 덕분이다.”

“음….”

“가주님….”

로엔과 리메르는 글렌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우리는 왕국은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북방에 군림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지키고 보호를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우릴 따르지 않겠지. 모두 수고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버렌과 루난, 마르타 그리고 수련생들은 고개를 바닥에 박으며 우렁차게 외쳤다.

“으으!”

“가주님!”

신이 내리는 칭찬에 수련생들은 덜덜 떨었다. 특히 버렌은 눈물까지 글썽였다.

“너희들 모두에게 동색의 패를 내리겠다.”

“감사합니다!”

수련생들은 이마에서 피가 터져 나오도록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만들고, 정리했던 라온 지그하르트. 네게는 은색의 패를 내리겠다.”

“감사합니다.”

라온도 다른 수련생들을 따라 다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칫.”

“쯧.”

라온이 은패를 받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대주들도 있었지만, 글렌이 직접 움직였기에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로엔.”

“예.”

로엔이 우측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널찍한 판을 들고 글렌이 앉아 있는 단상위로 올라갔다.

글렌이 판을 덮은 천을 걷자, 42개의 동색의 패와 하나의 은색의 패가 놓여 있었다

“버렌 지그하르트부터 올라오거라.”

“아, 예! 알겠슴닷!”

버렌은 대답하다가 혀를 깨물었지만, 티를 내지 않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우리가 보호해야 할 자들을 위해서 나선 것은 옳은 행동이다. 하지만.”

하지만이라는 말에 버렌의 입매가 굳어졌다.

“적의 무력을 파악하지도 못하고 달려드는 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 더 넓은 시야를 쌓아 상황을 대국적으로 보도록 해라.”

글렌은 버렌을 넘어 그 뒤에 서 있는 수련생들 모두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 모두에게 하는 말이다.”

“예!”

그는 루난과 마르타 그리고 모든 수련생들에게 동패를 내어준 후 마지막으로 라온을 보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올라와라.”

“예.”

라온은 고개를 깊게 숙인 뒤 일어서서 단상으로 올라갔다.

‘시선이 느껴지는군.’

등 뒤에서 짜증이 묻어난 시선이 심장을 뚫듯이 쏘아졌다. 카룬과 다른 방계 출신 대주들의 시선이었다.

다만 카룬의 아들인 버렌과 방계 수련생들은 질시나, 짙투의 시선을 보내지 않고 자랑스럽게 지켜보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라온 지그하르트.”

글렌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고, 건조했다. 한겨울에 얼어붙은 들판과도 같았다.

하지만 분명 이전과 다른 점이 있었다.

눈이 쌓인 그 들판 위에 피어난 한 송이 꽃처럼 눈빛 속에 작은 빛이 어려 있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네 덕분에 많은 사람이 살았다. 그 공로를 인정하여 네게 은색의 패를 내린다. 앞으로도 육체와 정신적인 수련에 힘을 쓰도록.”

“잠시만 괜찮겠습니까.”

라온은 글렌이 들고 있던 은패를 받지 않고 멈춰섰다.

“뭐지?”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할 말?”

“예. 에덴의 목적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음?”

글렌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놈들이 세부마을에 찾아온 이유. 그리고 현재 무엇을 노리고 있는 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그런 거짓말을 내뱉느냐!”

뒤에 악에 받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룬의 음성이었다.

“에덴의 귀신들은 사지를 뜯어내는 고문을 해도 입을 열지 않는 지독한 놈들이다. 너 따위가 그걸 어떻게 알았다는 거냐!”

“음….”

“확실히….”

“고문이 통하지 않는 놈들이니까.”

다른 대주들도 카룬의 말에 공감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할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다만….”

라온은 슬쩍 뒤를 돌아서 불판처럼 달아오른 카룬과 눈을 마주쳤다.

“의심하는 자들 앞에서 그 사실을 밝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뭐, 뭐라!”

“저 건방진!”

“검사의 칭호조차 받지 못한 주제에 감히!”

카룬을 따르는 대주들이 강렬한 기세를 뿜어냈지만, 라온은 위축되지 않았다.

전생의 자신은 저들보다 약했지만, 더 대단한 업을 쌓았으니까.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지금 이순간은 리메르와 글렌이 깔아준 판이다. 임무에 대한 대가를 더 크게 키울 수 있는 판. 방해꾼 따위가 끼어들게 할 수는 없었다.

“닥쳐라! 여기가 어디라고….”

“카룬 지그하르트.”

단상 위에서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에 카룬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입 닫으라고 말했을 텐데.”

“흡!”

오싹하다.

자신에게 향한 기세가 아님에도 온몸이 꽁꽁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 아버지?”

“나가라. 조금 전 떠들던 놈들 모두.”

글렌은 카룬을 보지도 않았다. 그는 가문의 중책을 맡은 아들에게도 자비가 없이 냉혹했다.

“으….”

카룬과 함께 떠들던 다섯 명의 대주, 부대주들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들은 라온을 죽일 듯 노려보고서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이제 말해라. 그곳에서 무엇을 본 거지?”

에덴의 주구들은 독종들이라 어떤 고문을 해도 입을 열지 않는다. 라온이 에덴 놈들의 목적을 알았다고 하니, 대주들만이 아니라, 글렌도 그의 입만을 바라보았다.

“광혈귀가 절 죽이고, 다른 수련생들도 학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본인들의 목적을 밝혔습니다.”

“목적?”

“에덴은 몬스터들의 마석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라온은 품에 있던 고블린 왕의 마석을 꺼냈다. 그 붉고 뜨거운 빛이 어둑해진 알현실을 밝혔다.

“보통의 마석이 아니라, 흔히 네임드라고 불릴 만한 몬스터들입니다. 이건 세부 산에서 수백 년 전에 죽었던 고블린 왕의 마석입니다.”

그 말을 하며 마석을 앞으로 내밀었다.

우우웅.

고블린 왕의 마석이 저절로 떠올라 글렌의 손으로 흘러갔다.

“음.”

글렌은 눈매를 좁힌 채로 마석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

대주와 단주들은 침조차 삼키지 않고, 글렌과 라온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글렌은 마석의 확인을 끝낸뒤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보통의 물건은 아니군.”

그는 자신을 보며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냈다. 그건 대견함을 담은 것 같기도 했고, 너 따위가 이걸 알아왔다고 조롱하는 것 같기도 했다.

“누구도 하지 못한 업적을 이뤄냈구나.”

글렌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로엔에게서 은패를 받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느리게 손을 뻗어서 글렌이 내려주는 은패를 받아들었다. 다만 고개를 숙인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잘못 생각했나?’

글렌이 자신과 실비아를 싫어하더라도 공은 확실하게 챙겨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은패 하나를 더 주거나, 운이 좋으면 금패를 수여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달랐다. 그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대놓고 달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아쉽지만 지금에 와서 더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입술을 살짝 깨문 채로 단상을 내려왔다.

“모두 돌아가라. 내일 아침. 대회의를 열 테니, 모두 참석하도록.”

“예!”

대주와 단주들은 알현실이 떠나가라 대답한 뒤 고개를 숙였다.

‘쯧.’

-그런 정보를 주고도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다니, 멍청하기 그지없도다.

라온은 들리지 않게 혀를 찼고, 라스는 비웃음을 흘렸다.

*     *      *

‘내가 그를 너무 믿었어.’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화공 이후 글렌에게 약간의 신뢰를 가졌는데, 헛짓이었던 모양이다.

이곳 지그하르트는 정글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의 것은 자신이 챙겨야 한다.

“라온 님.”

발걸음마다 짜증을 담으며 가주전을 나가고 있을 때였다. 우측 복도에서 로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로엔은 조금까지만 해도 알현실 안에 있었는데, 어느새 이곳에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느끼지 못했어.’

상승한 감각으로도 그의 기척을 파악하지 못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무인. 그것도 전생의 자신과 같은 암살자였던 것 같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인자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오늘 밤 자정에 별관으로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예? 갑자기 왜 오신다는….”

“가주님께서 라온 님을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로엔은 손가락으로 방금 나온 알현실의 거대한 문을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두 번째 선물을 주시려는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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