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83화 (83/653)

83화

“그 꼴은 무엇이냐.”

글렌은 어설픈 자세로 부복한 리메르를 보며 턱을 틀어서 들어 올렸다.

“육체와 기의 균형이 더 어긋났군. 또 무슨 짓을 벌였느냐.”

“제가 벌인 건 아닌데요.”

“하여튼.”

글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매를 좁히자, 그의 오러가 털실처럼 갈라져 리메르의 육체로 파고들었다.

우우웅.

검계를 열었던 후유증으로 생겨났던 마나 회로와 단전의 통증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허….”

리메르가 헛웃음을 흘렸다.

‘또 강해지신 건가?’

그저 오러를 운용한 것으로 육체의 어긋남을 맞추다니, 글렌은 이제 반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원래부터 저 정도셨지.’

글렌은 10여 년 전부터 제 실력을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강해졌다기보다 본 실력을 조금 드러낸 게 맞을 거다.

우우웅.

근육과 뼈, 장기까지 어루만져주던 글렌의 오러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몸 상태가 훨씬 더 좋아졌다.

“감사합니다.”

리메르는 건들거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제대로 고개를 숙였다.

“되었다. 가뜩이나 허약한 녀석이 그렇게 부들거리는 건 별로 보고 싶지 않으니까.”

“후후, 앞으로도 신세 좀 져야겠네요.”

“시끄럽고, 찾아온 용건이나 말해라.”

“아, 그렇죠.”

그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가주님이 학수고대하시는 손자들의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

글렌은 대답 없이 무심한 눈으로 리메르를 내려다보았다.

“빨리 말이나 하라는 표정이시네요.”

리메르는 킥킥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사실 임무 중에 꽤 재밌는 일이 있었습니다.”

“재밌는 일?”

“예. 세부 마을에 에덴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반신의 경지에 오른 글렌에게도 그 이야기는 놀라운 모양이다.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세무 마을과 세부 산을 미리 살펴보았던 지부도 파악하지 못한 걸 보니, 그들의 조사 이후에 찾아온 모양이더군요.”

“본론만 말해. 빨리.”

“알겠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시작하죠. 제가 먼저 그곳에 도착했을 때 홍안귀를 발견했습니다. 어찌할까를 고민하다가 아이들을 한 번 믿어보기로 했죠. 그래서….”

리메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세부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차례로 말했다.

“…제가 도착했을 때 라온은 몸이 망가진 상태에서도 광혈귀 앞에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리메르의 진녹색 눈동자가 선명한 빛을 발했다.

“광혈귀? 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고….”

“맞습니다. 말이 안 되죠. 검사의 칭호도 받지 못한 15살짜리 수련생이 녹전귀를 가르고, 광혈귀의 주먹에서 살아남았다? 그 누구에게 말해도 욕을 얻어먹을 이야깁니다. 하지만!”

그가 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사실입니다. 제가 보았고, 수련생들이 보았으며, 마을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주님도 라온을 본다면 아시게 될 겁니다. 녀석은 이미 소드 익스퍼트 하급에 올랐습니다.”

“살아남았다고 했지. 그럼 몸은 괜찮은 것이냐?”

초월자에 오른 글렌의 눈에서 의문과 걱정이 비쳤다.

“이런 놀라운 이야기를 전했는데, 몸부터 걱정하시다니, 괜히 피붙이가 아니군요.”

“시끄럽고, 말이나 해라.”

“왼팔의 뼈와 부러지고, 근육이 찢어졌습니다. 그 마을의 촌장을 구하려다가 첫 일격에 당했다고 하더군요.”

“음….”

그 말을 들은 글렌이 입매를 살짝 비틀었다.

“그런 표정은 오랜만에 보네요. 손자가 자랑스러우면서도, 걱정되시는 모양입니다.”

“지금 상태는?”

“엘브린의 수액을 주었습니다. 더 단단해져서 돌아올 겁니다.”

“그건.”

글렌이 눈매를 좁혔다. 엘브린은 두 번째 세계수의 이름. 그 수액은 천금을 주고도 사기 힘든 보물이었다.

“부상 정도가 너무 심해서 빠르게 조치하지 않았다면 완벽하게 회복하지 못했을 겁니다. 거기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상하게 조금도 아깝지 않더군요.”

리메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수련생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내일모레면 가문에 도착할 겁니다.”

“그 아이들이 돌아오는 대로 가문 회의를 열겠다. 대주들을 소환하도록.”

“알겠습니다.”

글렌이 눈을 감으며 지시를 내리자, 경악하여 가만히 있던 로엔이 앞으로 나왔다.

‘라온. 거하게 뜯어낼 수 있겠다.’

리메르는 글렌의 표정을 보며 히죽 웃었다.

“리메르.”

“아, 예?”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글렌의 목소리가 훅하고 들어왔다.

“다른 교관을 보내지 않고, 왜 네가 그곳에 간 거지?”

“그냥.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가….”

글렌은 턱을 긁적이면서 말을 이었다.

“잘했다. 그리고 수고했다.”

“오? 이, 이게 얼마만의 칭찬입니까? 거의 20년….”

“네 녀석이 헛짓만 하지 않았어도 몇 번은 더 들었을 것이다.”

“하하하! 그건 그렇죠.”

리메르가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가주 앞에서 진심으로 웃었던 게 언제였는지, 가주가 드러나는 미소를 지었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라온 덕분에 계속 멈춰 있던 가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     *      *

라온과 수련생들은 보름이 지나고서야 지그하르트 정문 앞에 도착했다.

쿠구구구!

지축이 뒤틀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은색의 문이 활짝 벌어졌다.

그 뒤로 성벽과 문을 지키는 문지기 검사들이 우뚝 서 있었다.

임무에 나갈 때와 같은 모습.

하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석상처럼 묵직했던 문지기 검사들의 눈빛에 놀람과 의문이 깃들어 있었다.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경비 대장의 목소리도 달라졌다. 애송이 수련생을 보는 게 아니라, 임무를 완수하고 온 검사를 마주한 듯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문지기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눈매를 좁혔다.

‘리메르가 퍼뜨렸군.’

뻔하다. 지부 사람들은 아직 세부 마을에 있으니, 리메르가 여기저기 퍼뜨린 게 분명했다.

“쉬고 싶겠지만, 먼저 들려야 할 곳이 있다. 너희 모두 가주전으로 가라.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네?”

“가주전?”

“가주님이?”

가주가 부른다는 말에 수련생들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바로 가도록.”

경비 대장은 가주전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문을 닫으라 지시했다.

“가자.”

라온은 이미 그럴 거라 예상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수련생들을 이끌고 가주전으로 향했다.

가문의 대로를 지나며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멈춰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감각이 좋아진 덕분에 그들이 속삭이는 소리도 들려왔다.

“저 녀석 맞지? 라온 지그하르트.”

“저렇게 작은데 녹전귀를 잡았다고?”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광혈귀의 공격을 버텼다잖아.”

“근데 기세가 별로 안 느껴지는데? 정말 익스퍼트 맞아? 유저 상급 정도인 것 같은데.”

“리메르가 또 헛소리를 퍼뜨린 거 아닐까?”

“리메르는 게으르지만, 거짓 소문을 만들 정도로 타락하진 않았지.”

그들은 리메르가 퍼뜨린 소문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진짜니, 가짜니 신나게 떠들어 댔다.

“하아.”

라온은 가는 한숨을 뱉고, 가주전 안으로 들어갔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글렌의 집사인 로엔이 고개를 숙였다. 그를 따라 사용인들 모두가 머리를 조아렸다.

‘확실히….’

여긴 진짜들이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이전과 반응이 달라지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모두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두라면….”

“가주님만이 아니라, 대주님들도 함께 계십니다.”

“음….”

“대, 대주들도?”

“이런….”

얇게 들린 신음에 뒤를 돌아보니, 수련생들 모두가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 있었다.

“긴장할 필요 없어. 가서 있었던 일만 말하면 그만이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여러분들은 임무를 행하며 보고 겪은 것을 그대로 전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로엔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다르군.’

글렌의 옆에 서서 수많은 인재를 봐왔지만, 라온 같은 아이는 처음이다.

어려서 이 자리의 중요함을 모르는 게 아니다. 전부 알면서도 저리 여유로운 것을 보면 마음가짐이 보통이 아니다.

“오시지요.”

로엔은 고개를 꾸벅이고 널찍한 복도를 안내했다.

“가자.”

라온은 로엔의 바로 뒤를 따라 알현실로 향했다. 알현실의 문은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무시무시한 기운들이 뿜어지고 있었다.

“후욱.”

숨을 뱉어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판별식과 달리 의자는 단상 위의 옥좌 하나뿐이었고, 그 아래엔 처음 보는 검사들이 일렬로 줄을 서 있었다.

‘저게 지그하르트의 단주와 대주들.’

줄을 서 있는 자들의 기세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가진 기운과 기질 자체가 평범한 인간과는 달랐다.

‘그리고….’

익스퍼트에 오르니 더욱 확실하게 느껴진다. 글렌 지그하르트. 그의 기운은 너무도 거대해서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알현실을 넘어 지그하르트 영지 전체에 닿아 있는 것 같았다.

‘무섭군.’

강자들이 모인 이 안에서도 그는 홀로 다른 차원에 서 있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라온이 알현실 중앙에 멈춰 서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수련생들은 그를 따라 같은 자세로 머리를 조아렸다.

“일어나라.”

모두는 글렌의 묵직한 목소리를 가슴으로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예.”

“네가 세부 마을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고 들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아라.”

“알겠습니다.”

라온이 생각을 정리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세부 마을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가 감시를 하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처음엔 교관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서….”

가장 뒤에 있는 단주부터 대주. 얄밉게 하품하는 리메르를 지나 글렌까지. 모두와 눈을 마주친 뒤 입을 뗐다.

“광혈귀를 막다가 힘이 빠져 죽음을 각오한 순간 리메르 교관이 와주어서 살 수 있었습니다.”

“…….”

라온의 이야기를 들은 알현실 전체에 쇳덩이를 얹은 듯한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가주님.”

버렌의 아버지이자, 글렌의 둘째 아들인 카룬 지그하르트가 인상을 턱을 치켜들었다.

“저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고작 15살에서 16살이 된 아이들입니다. 녹전귀에게 몰살을 당할 수준인데 광혈귀에게 버텼다니! 헛소리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형님. 지부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에덴의 행적이 곳곳에 나타났다고.”

글렌의 셋째 아들이자, 마르타의 아버지 데니어 지그하르트가 그의 옆을 막아섰다. 그는 예전부터 이쪽의 편을 들어주었다.

“내가 봤다니까. 더럽게 못 믿네.”

리메르가 귀를 후비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것부터가 문제다! 폐인이 된 너 따위가 어떻게 광혈귀를 잡았다는 거냐! 그 증거를….”

떨그렁!

갑작스럽게 들린 쇳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라온 앞으로 돌아갔다.

그의 앞에 두 개의 쇳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녹전귀와 광혈귀의 투구였다.

“녹전귀와 광혈귀의 투구….”

“지, 진짜였다고?”

“으음….”

투구를 본 대주들이 눈을 부릅떴다.

“에덴 놈들의 투구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너희들이 그걸 어떻게 잡았냐는 거다! 기습? 네놈이 암살자도 아닐 텐데, 어찌 그게 가능하다는 말이냐!”

암살자였는데? 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가주님.”

라온은 카룬이나 다른 대주들을 보지 않고, 정면에 있는 글렌을 올려보았다.

“검을 뽑아도 되겠습니까?”

글렌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숙이고서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뽑았다. 날이 상한 은빛의 칼날 위로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다.

화르르륵!

용광로를 태우는 진한 불길처럼 검날을 덮은 불길이 알현실 전체를 밝혔다.

“거, 검기. 그것도 저런 불꽃이라니….”

“분명 작디작은 불꽃이라고 들었는데?”

“소드 익스퍼트라고? 저 나이에?”

“마, 말도 안 돼….”

“저 정도라면 녹전귀와 자웅을 가릴 수준은 되겠어.”

대주들은 라온의 검기를 보고 놀라 눈을 부릅떴다.

“내가 말했잖아. 저 녀석 괴물이라니까.”

리메르는 경악하는 대주들을 보며 낄낄 웃어댔다.

글렌 지그하르트는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다만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입꼬가 씰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후우우욱!

라온은 뻘건 불길로 타오르는 검을 내리며 턱을 틀었다.

“이 정도면 설명이 됐습니까?”

그 말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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