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어휴.”
리메르는 수련생들이 마을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융통성 없다니까.”
그는 라온의 바로 뒤를 따라가는 버렌을 보며 눈을 흘겼다.
처음 봤을 때보다 조금 유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라온에게만인 것 같았다.
‘하긴.’
버렌이 변하게 된 계기는 라온의 노력을 확인한 뒤부터다. 그에게만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건 이상한 게 아니었다.
‘루난도 변했고.’
감정이 옅고, 티를 내지 않던 아이는 이제 확실하게 말하고,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그녀의 검술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르타.’
그녀의 눈빛도 확연히 달라졌다. 라온의 싸움과 의기를 보고 크게 감동한 것 같았다.
‘검계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도 라온을 따라잡고 싶어서일 테지.’
마르타가 검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라온을 쫓아가거나 혹은 그 옆에 서고 싶어서일 거다.
리메르는 그렇게 모든 수련생들을 살피며 그들 모두가 무력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성장했음을 느꼈다.
뿌듯하면서도 제때 오지 못한 미안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자, 그럼… 윽!”
수련생들의 뒤를 따라가려고 할 때 하복부에서 지끈거리는 통증이 일어났다.
“젠장….”
망가진 단전을 무리하게 사용하고, 검계까지 연 대가였다. 삶 그 자체가 줄어든 듯한 기분이었다.
‘수명이 더 줄었겠군.’
수련생들에게 제대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그하르트가 아닌 자가 검계를 열기 위해서는 체력을 넘어서는 생명력을 바쳐야 한다.
자신은 젊지도, 건강한 상태도 아니었기 때문에 수명이 꽤 줄어들었을 거다.
‘뭐, 후회는 없지만.’
어차피 살 만큼 살았으니까.
단전이 고장 났을 때부터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았다.
저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후부터 새로운 삶을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기에 줄어든 수명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후….”
리메르가 심장과 단전의 통증이 가라앉길 기다리다가 일어섰다.
마을 사람들이 라온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도 저 녀석이 위에 서는 모습은 보고 죽어야지.”
그는 홀로 낄낄 웃다가 그 자리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 * *
세부 마을과 세부 산의 보호는 지그하르트의 서남지부의 담당이다.
“쯧.”
지그하르트 서남지부장 부르카스는 세부 마을로 향하며 혀를 찼다.
‘에덴이라고?’
크레인이라는 수련생이 찾아와서 세부 마을에 에덴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홍안귀의 관찰을 알아냈다고 하는데 솔직히 말해 개소리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홍안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무인이 되려면 최소 익스퍼트 중급 이상은 되어야 한다.
이제 15살이 된 라온이 그걸 느낀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지부장님. 이거 말이 안 되는데 꼭 갈 필요 있습니까? 저희가 다 조사했잖습니까.”
부지부장 서비안이 옆으로 붙으며 툴툴거렸다. 세부 마을과 세부 산을 조사한 건 그였기 때문에 불만이 있는 것 같았다.
“라온이 문제가 아니다. 거기엔 버렌, 루난, 마르타가 있다. 셋에게 문제가 생겼다간 우리 지부 전체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어.”
“어우, 말만 들어도 끔찍하네요.”
“표정 관리해라. 무조건…어?”
부르카스는 마을로 향하는 길에 번져 있는 피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강처럼 흘러내린 핏줄기를 따라가자 거대한 녹색 몸체가 보였다.
“오, 오우거?”
둥글고 흉악한 얼굴. 통나무 몇 겹을 뭉친 듯한 두꺼운 몸체와 팔다리. 숲의 제왕이라 불리는 오우거의 시체였다.
“오우거다!”
“오, 오우거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것도 두 마리….”
지부의 검사들은 오우거의 시체 앞에 멈춰서서 마른침을 삼켰다.
“으음….”
부르카스는 오우거의 시체를 살피고 인상을 찌푸렸다. 단숨에 급소를 가른 검격. 고수의 일검이었다.
‘에덴은 몰라도 무슨 일이 있긴 했어.’
죽어있는 오우거의 시체와 피 그리고 인간의 피나 의복도 있었다.
“경계 태세를 최대한으로 높인다.”
부르카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그대로 마을 쪽으로 뛰었고, 지부의 검사들도 삼엄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거인이 짓밟고 간 듯 바스러진 마을 입구를 보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마을의 중심을 넘어서려 할 때 그들의 앞에 수련생들이 나타났다.
“너….”
부르카스는 가장 앞에 있는 수련생들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뭐야. 이건….’
라온 지그하르트.
연약해 보이는 소년의 왼팔은 걸레처럼 흐느적거렸고, 허리와 허벅지에 주먹만 한 구멍이 나 있었다.
다만 그런 심각한 상황에도 아이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고, 눈은 한밤의 호수를 보는 듯 맑았다.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전해지는 강렬한 기세.
많은 업적을 이뤄 격을 쌓은 연륜 있는 검사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5연무장 수석 수련생 라온 지그하르트입니다.”
라온은 정중하게 예의를 갖췄다.
“아, 그, 그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정말 에덴 놈들이 나타난 건가?”
부르카스는 라온의 정심한 기운에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렇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발밑으로 두 개의 투구를 던졌다.
오크 투사의 머리통이 그려진 녹전귀의 투구와 오우거의 머리를 그대로 새긴 광혈귀의 투구였다.
“과, 광혈귀와 녹전귀? 지, 진짜 에덴이 나타났다고?”
“녹전귀는 저희가 잡았지만, 광혈귀는 교관님이 잡았습니다.”
“교관?”
“리메르 교관입니다.”
“아….”
광혈귀는 마스터에 오른 것이 확실한 무인. 단전이 망가진 리메르가 그놈을 잡았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역시 대단하신 분이… 아, 잠깐!”
부르카스가 입을 떡 벌렸다. 리메르가 광혈귀를 잡은 것보다 더 놀라운 내용이 이제야 귀에 들어왔다.
“너, 너희가 녹전귀를 잡았다고?”
“예.”
라온은 덤덤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떻게? 너희가 어떻게 녹전귀를 잡을 수가 있지?”
리메르가 광혈귀를 잡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수련생인 이들이 녹전귀와 녹귀를 잡은 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잘 잡았습니다.”
“자, 자세히 좀 말해봐!”
“음, 뒤에 있는 저 녀석이 잘 알려줄 겁니다. 전 부상을 좀 치료해야 해서.”
“아, 그래. 그래야지.”
부르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라온의 부상 정도는 심했다. 평범한 이라면 울고불고 난리가 날 정도로.
“서비안. 라온을 치료해주어라.”
“아, 예.”
부지부장이자, 치료사인 서비안은 멍하니 서 있다가 라온을 따라갔다.
“그래서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하나도 빼지 말고 전부 말해봐.”
“믿으실지 믿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버렌은 부르카스에게 이곳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조금의 과장이나, 감소 없이 말해주었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부르카스의 목소리가 탁하고 튀었다. 너무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으니, 목소리가 꽉 막혔다.
“그렇지만, 사실입니다.”
버렌, 루난, 마르타를 포함한 수련생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
어처구니가 없다.
‘녹전귀의 뒤를 잡아서 팔을 베고, 결국 놈의 목을 베었다고?’
이것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 뒤에 들은 말엔 경악성밖에 나오지 않았다.
‘광혈귀에게서 10분 가까이 버텼다니….’
버렌은 라온이 모두를 도망치게 한 뒤 리메르가 나타날 때까지 광혈귀를 잡고 있었다고 했다.
아직 검사의 자격도 얻지 못한 15살짜리 수련생이 마스터인 광혈귀와 검을 나눴단다. 어이가 없어서 머리가 띵했다.
“후우….”
부르카스가 한숨을 뱉으며 수련생들을 살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눈. 이들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뒤를 돌아 라온이 들어간 집을 바라보았다.
꿀꺽.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지그하르트의 현 가주인 글렌 님도 15살의 나이에 광혈귀를 상대할 수는 없을 거다.
‘괴물….’
그 두 단어밖에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천재라는 개념을 넘어선 괴물이었다.
* * *
“그, 그럼 가보겠습니다.”
스스로 부지부장라고 소개한 서비안이라는 남자가 전신에 약과 붕대를 감아준 뒤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아휴, 아닙니다.”
그는 손사래를 치고 밖으로 나갔다.
“하아….”
라온이 통증을 참으며 등을 벽에 기댔다.
‘꿈꾸는 것 같네.’
아직도 문제가 있는 이 육체로 녹전귀를 베고, 광혈귀에게서 살아남았다는 게 아직 믿기지 않았다.
‘운이 좋았어.’
녹전귀를 벨 때는 수련생들이 시선을 끌어준 덕분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그 성장을 바탕으로 광혈귀와의 전투에서 버텨낼 수 있었다.
조금만 부족했더라면 양쪽 모두 목숨이 위험한 순간이었다.
‘대신 또 성장할 수 있었지.’
라온이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광혈귀와 힘겨운 싸움을 하며 능력치, 경험, 격이 모두 상승했다.
세부 마을에 오기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하늘과 땅 수준으로 차이가 났다.
지금은 확실하게 소드 익스퍼트 하급에 오른 상태였다.
‘역시 고생을 안 하고는 강해질 수 없는 건가.’
전생에서부터 느꼈지만, 위기라는 파도를 겪어야 기회가 오는 것 같다.
‘거기다….’
라온이 씩 웃으며 라스가 들어 있는 얼음꽃 팔찌를 흔들었다.
“네 덕분에 한 번 더 성장할 수 있게 됐지.”
-끄응….”
얼음꽃에서 푸른 불꽃이 타오르며 라스가 솟아올랐다.
-본왕은 이런 허술한 내기를 한 적이 없다. 네놈은 오우거 투구를 쓴 그 무식한 놈을 죽이지 못했느니라!
“그게 아니지.”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너와 나의 내기는 광혈귀의 죽음이었다. 즉, 누가 쓰러뜨려도 상관이 없었어.”
-크으으, 빌어먹을!
라스가 격한 분노를 끌어 올렸다. 녀석은 상황이 급박해 제대로 내기를 걸지 않았다고 한탄했다.
‘음….’
라온은 평소처럼 라스를 놀리지 않고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와 달리 녀석의 감정이 더 깊게 가슴에 와닿았다.
‘분노를 받았기 때문인가.’
라스의 분노를 받았기 때문에 녀석의 감정이 더 잘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예상보다 위험해.’
고작 10의 분노를 받았는데 그 여파가 상당하다. 아무래도 녀석과의 계약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 같았다.
“다시 확인 좀 해볼까.”
라온은 별거 아닌 것처럼 목소리를 한 톤 올리며 지나간 메시지를 불러왔다.
[<분노>와의 내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3포인트 상승합니다.]
[분노에게 네 번째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4연승의 효과로 추가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근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민첩성이 2포인트 상승합니다.]
[기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세 번째 내기에서 이겼을 때처럼 추가 포인트까지 상승했다. 아낌없이 주는 라스다운 보상이었다.
꾸우욱!
라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능력치가 동시다발적으로 오르자, 허무하리만큼 힘이 빠졌던 근육이 되살아나는 게 느껴졌다.
-이런 망할 내기 따위는 하는 게 아니었거늘!
라스는 속임수라고 소리치며 방 전체를 냉기로 뒤덮었다.
“너도 알잖아. 아직 남았어.”
[내기의 두 번째 보상으로 <분노>가 가진 특성이 생성됩니다.]
[특성이 결정되었습니다.]
[당신에게 특성 <불굴의 의지>가 생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