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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80화 (80/653)

80화

폭풍의 눈이란 거대한 폭풍의 중심에서 생성되는 무풍지대를 말함이다.

주변에선 여전히 강력한 바람이 휘몰아치지만, 내부는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잔잔하면서도 평화로운 공간. 그게 바로 태풍의 눈이다.

그리고 지금 라온의 눈앞에 그런 상황이 일어났다.

광혈귀가 미친 듯이 흘려내던 광기와 투기도, 리메르가 펼쳐내던 진녹색 오러도 모조리 주변으로 밀려 나갔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공간.

아니, 바람만이 아니라, 공기의 흐름마저 멈춘 듯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어깨에 쇳덩이를 단 듯 몸이 무거웠다.

광혈귀도 당황했는지 눈을 부릅뜬 채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놈 역시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위이이이잉!

그 적막의 공간으로 청명한 흐름이 돋아났다.

리메르의 검이다. 오러가 사라져 텅 비어 있던 그의 칼날 위로 진녹색 바람이 모여들었다.

터엉!

리메르가 발을 굴렀다. 땅이 뭉개지며 그의 육신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광혈귀가 당황한 와중에도 막강한 권격을 내질렀지만, 리메르는 바람처럼 타고 더 깊게 들어갔다.

그리고 일검.

바람 그 자체를 담은 검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푸칵!

강철보다도 단단한 광혈귀의 오른팔이 잘려 시꺼먼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광혈귀는 마스터에 오른 무인이다. 팔이 잘렸다고 그대로 무너지지 않았다.

피가 터져 나오는 오른팔을 바로 지혈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 움직임은 비호처럼 재빠르고 유연했다.

리메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검을 휘돌리고 광혈귀를 쫓았다.

광혈귀가 리메르가 만들어낸 폭풍의 눈을 벗어나려 했지만, 리메르가 움직이는 만큼 이 공간도 함께 움직였다.

도망칠 수 없다는 걸 파악한 광혈귀가 멈춰 섰다. 자세를 낮추고 남은 왼 주먹에 가진 모든 기운을 응축시켰다.

우우우웅!

공간이 진동한다. 파도처럼 일어난 붉은 강기가 해일을 일으켰다.

대지를 뒤덮을 강기의 해일 앞에 리메르는 얇은 검 한 자루를 쥐고 섰다.

후우우욱!

태풍의 눈의 크기가 더욱 커지며 리메르의 검을 휘감은 바람이 점점 더 짙은 빛을 띄었다.

리메르는 폭풍이 휘감긴 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쩌어억!

절벽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진녹빛 바람이 붉은 해일을 갈랐다.

후우우웅!

그 순간 강렬한 빛이 터져나왔다.

‘크윽!’

라온도 그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끝난 건가?’

눈을 뜨니, 태풍의 눈이 사라지고,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

광혈귀와 리메르는 다섯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서로의 육체와 오러의 위력을 반감시키고, 그 무풍지대의 바람을 모조리 네 검에 담았군.”

광혈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광기와 투기가 흘러넘쳤다.

“다 좋다. 검계라는 건 원래 그런 것이니까. 그런데 네놈이 어떻게 검계를 운용한 거지?”

그건 광혈귀만의 궁금증이 아니었다. 라온 역시 리메르가 검계를 사용한 것을 보고 경악했으니까.

‘검계는 지그하르트의 피를 이은 사람만이 쓸 수 있을 텐데….’

대륙 최강의 세력 육황과 오마는 각기 특색이 있지만, 지그하르트는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마법사가 아닌, 검사의 몸으로 만들어내는 결계. 검계현신의 능력은 대륙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했다.

다만 검계는 오직 지그하르트의 피를 이은 자만이 사용할 수 있고, 발현시키는 사람은 그중에서도 소수다.

그런 검계를 지그하르트는커녕 인간도 아닌 엘프 리메르가 사용하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제대로 말하자면 검계는 아니고, 비슷한 걸 만들어 낸 거지.”

리메르가 눈을 내리감으며 웃었다.

“난 엘프라서 자연과 꽤 친숙하거든.”

“…그랬군.”

광혈귀는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늙어서 이가 빠지고, 부상을 입어도 호랑이는 호랑이라는 건가.”

크르륵 소리를 내며 웃다가 라온에게 시선을 보냈다.

“아쉽군. 저건 무조건 제거했어야 했는데, 분명 에덴에 큰 영향을 미칠….”

“우리의 어린 왕을 너 같은 놈에게 당하게 할 수는 없지.”

“확실히 평범한 검사의 자질이 아니라, 패왕의 자질이다. 다만 자만하지 말아라.”

광혈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도 저 괴물에 못지 않은 재능이 있다. 둘이 붙는 것도 기대가 되는군.”

“대륙은 넓으니까.”

리메르는 그럴 수 있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패배다. 지그하르트의 광검이여.”

광혈귀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그의 몸의 중심으로 새빨간 선이 그어졌다.

오러로 유지 시켰던 몸이 갈라지며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거인이 뒤로 넘어갔다.

후우욱!

광혈귀가 끼고 있던 투구 역시 반으로 갈라졌고, 광기 어린 빛도 사라졌다.

“하아….”

리메르가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잘 봤어?”

그가 뒤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평소와 같은 표정이지만, 힘이 빠져 보였다.

“봤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네가 지그하르트로서 익혀야 할 기예다. 검계라고 하지.”

“검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검계라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마나로 펼치는 마법사들과 달리 자신이 쌓아온 업과 기세로 펼치는 결계지.”

“그래서 지금까지 그렇게 기세를 중요시하셨군요.”

“그래. 검계가 아니더라도 기세를 쌓는다면 그에 따른 힘을 발휘하기 쉬우니까.”

리메르가 씩 웃었고, 라온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리메르가 매일 같이 시킨 한계를 넘어서는 수련 덕분에 자신은 그렇다 치고, 다른 아이들은 분명 큰 효과를 받았다.

만약 기세를 키우는 수련을 하지 않았다면 아이들은 녹전귀에게 덤비지도, 광혈귀 앞에서 도망치지도 못했을 거다.

“넌 방계지만 실제로는 직계이니, 언젠가는 개방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개방할 수 있을 거야.”

리메르는 무조건 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네가 쌓아온 경험과 업적 그리고 오러와 미래까지. 모든 것을 담아 만드는 게 바로 검계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익히도록 해.”

그는 숨을 헐떡이고 있으면서도 가르침을 내렸다. 광혈귀와의 전투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이 교육이었다.

“너희들도 잘 봤지?”

리메르는 이제 몸을 완전히 돌려서 저 뒤를 보았다. 그곳에는 루난과 버렌, 마르타를 비롯한 수련생들이 멍하니 서 있었다.

그들은 검계의 외부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라온!”

루난이 달려왔다. 멍한 그녀의 눈매에는 작은 이슬이 고여 있었다.

“이런 미친! 이 자식 살아 있었어! 살아 있었다고!”

마르타는 라온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는지 라온의 어깨를 잡은 손을 떨었다.

“라온 님!”

“라온!”

“크으윽!”

도리안과 수련생들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달려왔다.

“라온 지그하르트.”

버렌은 볼을 흔들릴 정도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다….”

비틀거리다가 라온의 옆에 있는 리메르를 보고 코를 훌쩍였다.

“저기 그런데 교관님.”

“응?”

“교관님이 어떻게 검계현신을 사용하신 겁니까?”

“만들었다.”

“마, 만들었다고요?”

“그래.”

리메르는 광혈귀에게 했던 말을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그하르트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몇 가지 검계가 있지. 그건 그들의 피에 전해져서 혈족만이 쓸 수 있지만, 새로 만드는 건 좀 달라.”

그는 검계를 만들었다고 말하며 씩 웃었다.

“그럼 저도 그 검계라는 걸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마르타가 앞으로 나오며 물었다. 루난도 눈빛이 반짝였다.

“그건 아니지.”

리메르는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그하르트가 아닌 자가 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해.”

“두 가지 조건?”

“첫 번째는 경험이다. 검계에 대한 경험이 많아야 해. 난 가주님을 따라 전장의 가장 앞에 서서 수많은 검계를 경험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는 수련생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속성에 대한 재능이다.”

“어떤 재능을 말하는 거죠?”

마르타가 한 발 더 다가가며 물었다. 그녀는 검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속성에 대한 재능. 지그하르트의 피를 가지지 않은 우리가 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속성의 힘이 필요하다. 나 역시 바람을 이용해서 검계를 만들어냈지.”

“음….”

“다만 추천하지는 않아.”

리메르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방계나 슬리온 가문을 비롯한 몇몇 봉신 가문에도 지그하르트의 피가 흐르니, 열심히 한다면 검계를 열 가능성도 있어. 다만 지그하르트의 피가 없는 자가 검계를 열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할 게 있거든.”

“희생이요?”

“…….”

리메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희들의 앞날은 창창해. 어쩔 수 없이 검계를 연 나와 달리 스스로의 힘으로 강해질 수 있을 거다.”

그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에 바람을 실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리메르는 손매에서 투명한 물병 하나를 꺼내서 라온에게 다가갔다.

“아플 거다. 참아.”

그리 말하고서 물병을 부서진 팔과 뜯겨나간 허리와 허벅지에 뿌렸다.

“…….”

라온은 극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조그마한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광혈귀와 싸울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고통도 아니었다.

“안 아파?”

“아픕니다.”

“근데 신음도 안 흘리네.”

“딱히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허, 참.”

리메르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다 끝났으니, 돌아가자.”

“잠깐!”

버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평소 연무장에서 보이는 눈빛이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엑? 나 피곤한데, 나중에 하면….”

리메르는 어떤 말이 나올지 알았는지, 마른침을 삼켰다.

“아뇨. 지금 해야 합니다. 대체 어디에 계시다가 지금 나타나신 겁니까. 따라오신 건 분명한데, 왜 이렇게 위험한 순간에 오신 겁니까. 저희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까지 위험할….”

“어? 저게 뭐지?”

리메르가 손가락을 들어 올려 버렌의 뒤쪽을 가리켰다.

“헉!”

“또 뭐가….”

수련생들이 황급하게 뒤를 돌아보았지만, 나뭇잎이 모조리 떨어진 가지만 흔들렸다.

“아무것도 없… 어디 갔어!”

버렌이 눈을 부릅떴다. 뒤를 돌아본 짧은 순간에 리메르는 사라져있었다.

“이 인간 진짜! 대체 왜 지금 나타난 거냐고! 정말 다 죽을 뻔했는데!”

나타나서 구해준 건 고맙지만, 상황이 너무 극적이었다. 자신들은 그렇다 치고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더 빨리 왔어야 했다.

“죽은 사람은?”

라온이 부러진 오른팔을 잡고 버렌의 앞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없다. 있었다면 바로 교관님 멱살을 잡았을 거야.”

“그럼 됐어.”

리메르에게도 분명 사정이 있었을 거다. 마을 사람들이 여러모로 충격을 받았겠지만, 죽은 사람이 없으니 이겨낼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만 정리하자. 아직 할 일이 많아.”

라온은 전신에 피칠갑을 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

“너, 너 괜찮은 거 맞냐?”

“라온 괜찮아?”

버렌과 루난이 동시에 물었다.

“괜찮아.”

라온은 누가 보기에도 심각한 중상을 입었음에도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의 고리를 운용하여 육체와 마나 회로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리메르가 준 약도 효과가 있으니, 푹 쉰다면 이전보다 더 단단한 육체와 마나회로를 가질 수 있을 거다.

“미안하다.”

버렌이 고개를 숙였다. 길게 내린 손이 바르르 떨린다.

“내 판단이 느려서 네가 나서주었음에도 모두를 죽일 뻔했다. 난 누군가를 이끌 인간이 아닌 모양이다.”

“실수 한 번 했다고 죽으려고 하네. 문제가 뭔지 알았으면 앞으로는 판단력과 무력을 함께 키워.”

“음….”

“자신 없으면 진짜 때려치우던가.”

“아니. 하겠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지 않을 무력과 판단력을 갖추겠다! 내 목숨을 구해준 네게 약속하마!”

“그럼 됐어.”

라온이 멀쩡한 왼손을 저었다.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고 했으면 주먹을 날렸을 텐데.’

광혈귀에게 덤비지 못해서 미안해가 아니라, 바로 도망치지 못한 걸 사과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녀석은 아직 아이이니, 앞으로도 큰 발전을 이뤄낼 수 있을 거다.

“루난. 너도 마찬가지야. 아까 거기선 날 도와줄 게 아니라, 도망쳤어야 했어.”

“싫어.”

루난은 드물게도 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기지 못할 상대가 있다면….”

“싫어.”

“위험.”

“싫어.”

“아니, 일단 말을.”

“안 들어. 도와줄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귀를 막고 고개를 돌렸다.

“강해질 거야. 꼭 강해져서 옆에서 싸울 거야!”

“하….”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다만 강해지겠다는 말도, 도와주겠다는 진심이라는 걸 알기에 가슴이 따스해졌다.

이번 임무를 행하며 많이 다치고 힘들었지만, 더 많은 감정에 대해 알아가는 게 기뻤다.

“…….”

라온은 마지막으로 마르타를 보았다. 그녀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지 깊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 끝났다. 돌아가자.”

아직도 어벙해 있는 수련생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달려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크레인이 부르러 갔던 지그하르트의 지원대였다.

모두 끝났다는 생각에 마음이 몽실몽실 풀어졌다.

[<분노>와의 내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빨리 쉬고 싶다고 생각할 때 눈앞에 푸른 창이 올라왔다.

“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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