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78화 (78/653)

78화

알고 있었다.

광혈귀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는 것도, 화속성에 강하다는 것도, 사냥감을 농락하고 죽이는 지저분한 성격이라는 것까지도.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놈이 파놓은 함정을 역으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길 방법은. 아니, 살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고오오오!

광혈귀가 본색을 드러내자, 공기의 무게감이 달라졌다.

쇳덩이가 전신을 내리누르는 듯한 감각. 이를 악물고 암살자 라온의 살의를 모조리 끌어왔다.

찌이이이잉!

살의와 광기가 어린 기파가 경합하며 격이 달리는 버렌, 루난, 마르타가 뒤로 튕겨 나갔다.

이것도 계획대로.

다만 아직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았다.

라온은 세 사람을 광혈귀의 강기에서 벗어나게 한 뒤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몸을 비틀었다.

콰아아아아!

강기에 휘감긴 거대한 주먹이 왼쪽 어깨 주변을 훑고 지나갔다.

뿌드드득!

직격은커녕 스치기만 했음에도 왼팔의 뼈가 뭉개졌다.

“끄읍!”

라온이 부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초인적인 인내로 고통을 견디며 오른팔로 검을 세웠다.

고오오오!

가진 모든 기운과 살의를 검의 끝에 휘감았다.

“네놈!”

놀람에 눈을 부릅뜬 광혈귀의 심장을 향해 서리 가득한 칼날을 쏘아냈다.

만화공 극점.

만화공의 검결이 혹한의 냉기에 의해 풀려나온다. 창공을 노니는 빙룡이 깃든 듯 은빛 칼날이 푸르게 물들었다.

찌지지직!

푸른 칼날이 오우거 갑주를 가르고 들어가는 관통음이 귓가를 울렸다.

“으….”

하지만 라온의 눈은 밝아지지 않았다. 노을이 진 하늘처럼 점차 어두워졌다.

“망할….”

강철조차 뚫어버릴 검극이 광혈귀의 거죽에 막혀 더 이상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 대단하군.”

광혈귀가 가슴에 검을 박은 채 순수한 감탄을 뱉어냈다.

“네가 내 덫을 역으로 이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 죽을 뻔했어. 하지만…”

그의 가슴에 박힌 푸른빛의 검이 캬앙 소리와 함께 부러졌다.

“커헉!”

라온이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네가 너무 약했다. 너와 나의 실력 차는 그 정도 기습으로 메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광혈귀가 가슴에 박힌 칼날이 진흙에 박힌 돌처럼 스르륵 빠져나왔다.

‘근육에 막혔어….’

라온이 피가 덕지덕지 묻은 입술을 깨물었다. 놈은 피부와 근육을 강화시켜 자신의 검을 막아냈다.

육체의 수발이 자유로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괴물다운 방법이었다.

“허억.”

라온이 뒤로 물러서며 뒤에 있는 버렌, 루난, 마르타 그리고 남아 있던 수련생들을 보았다.

“계, 계획은 끝이다. 모두 도망쳐!”

“라, 라온?”

“야. 너….”

“못 이겨.”

지금 이 상태로는 무슨 수를 써도 이기지 못한다. 계획이 무너진 이상 전투는 여기서 끝이었다. 남은 건 도주뿐.

“수석의 이름으로 명한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물러나! 크레인이 찾아간 가문의 지원대가 달려오고 있다. 서쪽으로 달려!”

“라온.”

“나, 나도….”

“버렌 지그하르트!”

라온은 입술을 떨며 몸을 일으키던 버렌의 이름을 외쳤다.

“지금 여기서 개죽음을 당하는 게 네가 말한 지그하르트의 길인가? 그렇다면 나와 함께 싸워라. 그게 아니라면 너는 네가 할 일을 해!”

“나, 나는….”

그 말에 버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고민을 길었지만, 결정은 짧다.

“후퇴한다. 모두 물러나! 도망치는 데 집중해!”

그는 결국 입술을 뜯어버리고서 몸을 돌려 마을 쪽으로 달렸다. 수련생들이 눈물을 글썽거리다가 버렌의 뒤를 따라 달렸다.

“아….”

루난의 보랏빛 눈망울에 부러진 팔을 부여잡고, 피를 토하는 라온이 잡혔다.

“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광혈귀에게 돌진하려는 때에 뒤에 있던 마르타가 루난의 목을 후려쳤다.

뻑 소리와 함께 루난이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

마르타는 그대로 루난을 업고, 라온을 보았다. 정말 답이 없냐고 묻는다.

터엉!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자, 몸을 돌려 버렌이 간 방향으로 뛰어갔다.

“…고맙다.”

라온이 가늘게 웃었다. 말이 통하는 녀석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파앙!

광혈귀가 가슴에 박힌 검신을 아예 뽑아버렸다. 피가 흘러내렸지만, 금방 지혈되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오우거가 가진 체력과 재생력의 힘이었다.

‘망할.’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블리딩 커스가 적중되었지만, 지금에선 아무 소용이 없다. 1할이 아니라, 5할이 약해져도 이길 수 없으니까.

“저 벌레들이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광혈귀가 손에든 검신을 과자처럼 으깼다.

“주변에 오우거를 풀어두었다. 놈들은 얼마 지나지 못하고 산채로 뜯어먹히게 될 거다. 아니. 그전에….”

광혈귀가 낄낄 웃으며 라온을 굽어보았다.

“네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 팔, 그 체력으로?”

“….”

라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광혈귀가 아니라, 팔에 있는 라스를 보았다.

‘라스.’

-이제야 본왕의 차례가 왔군.

라스가 연기처럼 스멀스멀 일어섰다. 놈의 기세만큼은 마스터인 광혈귀를 한참 넘어서고 있었다.

-말했듯이 네놈의 무력으로는 저놈을 꺾지 못한다. 육체를 내놓아라. 저놈만이 아니라, 이 공간 자체를 얼려주지.

‘후우, 넌 참 착각을 잘해.’

-뭐?

‘거래다.’

라온이 피를 토하며 두 눈을 빛냈다.

-거래라니?

‘예전에 네가 분노로 거래를 할 수 있다고 했었지. 네 분노를 받겠다. 내 육체와 오러를 정상으로 되돌려라.’

-너….

라스가 불기둥처럼 푸른 냉기를 피워올렸다.

-이 멍청한! 네놈의 무력으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저놈들 잡을 수 없다! 회복된다고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할 거야 말 거야?’

-끄으….

라온의 단호한 태도에 라스가 뜸을 들이며 이를 갈았다.

-…좋다. 10의 분노를 주고 네 몸을 완벽하게 회복시켜주마. 하지만 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입 닫고 주기나 해.’

-흠!

라스에게서 콧김을 내뿜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놈의 냉기가 몸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흡!”

피부가 냉기에 찢겨 나가는 것 같은 고통에 이가 악물었다.

뿌드드득!

부러진 팔과 갈비뼈가 저절로 맞춰진다. 부러질 때보다 더한 통증 때문에 입술이 덜덜 떨렸다.

“후욱….”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전생, 현생을 통틀어도 가장 심한 고통 중 하나였다.

“너 뭐냐?”

팔이 저절로 돌아가는 모습을 본 광혈귀가 걸음을 멈추고 눈을 부릅떴다.

“허억….”

라온이 숨을 몰아쉬었다. 바닥 난 단전에 오러가 차오르는 것마저 고통이었다.

다만 진정한 고통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분노>와의 계약에 따라 분노가 10포인트 생성됩니다.]

폐가 마른 장작처럼 우그러들고,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세포 하나하나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일어났다.

“으어어….”

고통은 둘째치고 육체와 영혼이 어긋나는 기분이다. 끈적하고 사악한 무언가가 몸에 깃든 느낌이었다.

‘그래도….’

회복은 확실했다. 정신력은 바닥이지만, 육체와 오러는 평소 이상으로 돌아갔다.

“이해할 수가 없군.”

광혈귀가 의문이 담긴 노란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오우거나 트롤의 피를 마신 것도 아닐터. 어떻게 그런 회복력을 가지는 거지? 인지를 벗어난….”

“네놈은 모를 거다.”

이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를.

“후우….”

뜨거운 숨을 뱉어내며 땅에 떨어진 다른 수련생의 검을 들어 올렸다.

‘라스.’

-뭐냐. 이 건방진 놈아.

‘죽을지도 모르는데, 나랑 내기 하나 할까?’

-내기?

‘그래. 난 저놈이 죽는다에 걸지.’

-또 미친 소리를 하는군.

‘왜, 쫄려?’

-좋다! 얼마든지! 본왕은 네가 육체를 넘긴다는 것에 걸겠다.

라스의 대답을 들은 라온이 광혈귀에게 검을 겨누었다.

“와라. 동이 틀 때까지 놀아주마.”

*     *      *

“허억! 허억!”

마르타는 루난을 등에 업은 채 버렌과 수련생들의 뒤를 따라 달렸다.

모두가 전력으로 달렸기 때문에 앞서가던 수련생과 마을 사람들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대, 대체 무슨 일입니까.”

“우리는 괜찮겠죠?”

마을 사람들은 나름 빠르게 걷고 뛰었지만, 마르타가 보기에는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짜증이 돋아올랐다.

“젠장, 젠장….”

버렌은 흔들리는 눈으로 꽉 쥔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앞도 주변도 보지 않고 그저 멍하니 걷기만 했다.

“으….”

“라온 님….”

“아윽!”

그만이 아니라, 다른 수련생들도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눈이 풀려 있었다.

“그 녀석은.”

작은 욕과 숨소리만이 들리는 공간에서 마르타가 나지막하게 입을 뗐다.

“우리를 위해 그리고 이 사람들을 위해 그 거대한 괴물 앞에 혼자 섰다.”

절망과 분노가 가득 어린 목소리에 모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팔이 부러지고, 갈비뼈가 나간 지금도 그놈을 막고 있지. 그런데 너희들은 뭐냐.”

“뭐?”

“거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놓고, 여기서도 멍청하게 있다가 죽을 셈이야!”

“그게 아니라, 지금 버렌 님도 힘든….”

“아니!”

버렌이 마르타의 앞에선 방계를 막아섰다.

“그 말이 맞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1조는 전방 경계! 2조와 3조는 각각 좌측과 우측을 경계한다. 항상 오러를 운용하여 바로 움직일 준비를 마쳐라!”

그의 빠른 지시에 멍하니 있던 수련생들이 각기의 움직임을 이뤄냈다.

“마르타. 네가 가장 감각이 좋으니, 뒤를 맡아라. 루난은 이쪽에 넘겨.”

“흠.”

마르타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기절한 루난을 방계 수련생에게 넘겨주었다.

“지금부터 속도를 올린다! 가문의 지원이 달려오고 있을 테니, 최대한 빨리….”

“잠깐.”

마르타가 버렌의 말을 끊고 숲이 우거진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버렌과 다른 사람들도 홀린 듯 그 시선을 따라갔다.

스스스슥!

강한 바람이 숲을 스치는 듯한 소리. 그냥 지나갈 수 있는 바람 소리였지만, 마르타는 식은땀을 흘리며 검을 뽑았다.

“모, 모두 물러서! 당장 도망….”

그녀가 말을 끝내기 전에 숲이 무너져내리고 4m가 넘는 녹색 괴물이 솟아올랐다.

오우거.

숲의 제왕이라 불리는 흉악한 몬스터가 붉은 눈을 빛냈다.

“아….”

마르타가 마른침을 삼켰다.

‘생각을 못 했어.’

광혈귀는 오우거의 힘을 가지고, 오우거를 조종하는 괴물이다. 이곳에 오우거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모, 못 이겨….’

만전일 때라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모두 달려들어도 오우거를 잡는 건 무리다. 그야말로 전멸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크어어어어!”

오우거가 괴성을 내지르며 바위 같은 주먹을 내리쳤다.

“흐아아압!”

“하앗!”

마르타와 버렌이 뛰어들어 오러로 가득 찬 검을 올려 쳤다.

“크르르!”

오우거는 그 둘의 검에 피어난 오러를 보고, 슬쩍 몸을 뺐다.

후우웅!

두 사람의 검이 허공을 베고 힘이 빠졌을 때 다시 달려가 주먹을 내뻗었다.

콰아아앙!

강렬한 기운이 폭발하며 마르타와 버렌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밀려났다.

“끄으….”

“윽!”

두 사람은 비틀거리며 일어섰지만, 힘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젠, 젠장….”

마르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에 몸을 빼다니, 놈은 듣던 것 이상으로 타고난 사냥꾼이자, 괴물이었다.

“크르르.”

오우거가 손에 미약하게 흘러내리는 피를 핥으며 다가온다. 입가에는 노골적인 비웃음이 그려졌다.

“너희들은 먼저 가라! 나와 마르타는 이놈을 잡고 뒤따라가겠다!”

버렌이 떨리는 오른 손목을 왼손으로 다잡으며 외쳤다. 이제 자신의 차례였다.

“버, 버렌 님!”

“빨리!”

“으으….”

도리안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기 전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콰아아앙!

땅을 부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좌측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두 번째 오우거가 수련생들의 앞을 막아섰다.

“아….”

마르타의 눈동자가 격하게 출렁였다.

‘그래서였어.’

자신들이 도망쳐도 광혈귀가 웃고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놈은 미리 주변에 오우거를 풀어두었던 거다.

“다, 다 끝났어.”

누군가의 절망에 찬 목소리에 분위기가 더 가라앉았다.

“크르르르!”

“크아아아!”

이제 들리는 소리라고는 먹이를 발견한 오우거의 배고픈 울음소리와 겁먹은 인간의 신음뿐이었다.

“물러서지 마라.”

버렌이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훔치고 검을 들었다.

“라온도 아직 싸우고 있다! 여기서 죽는다면 홀로 광혈귀를 막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못 봐!”

그가 악을 내지르며 오러를 끌어 올렸다. 확고한 의지로 인해 강해진 푸른 바람이 휘몰아쳤다.

“너 치고는 맞는 말을 하네.”

마르타가 키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검에 타이탄의 오러를 둘렀다.

“라온을 도와주러 가야 해.”

기절했다가 깨어난 루난도 검을 세우고, 은빛 서리를 뿜어냈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세 사람의 눈빛에는 그 어둠이 보이지 않았다.

“크르르!”

“쿠어어어어!”

두 마리의 오우거는 그들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포효를 터트리며 땅을 박찼다.

세 명의 검사와 두 마리의 괴물이 부딪치려는 찰나.

후우우웅!

숲의 중심에서 녹색 바람이 휘몰아쳤다.

*     *      *

콰아아앙!

누런 오러가 푸르고 붉은 오러를 짓눌러 터트려버렸다.

후우욱!

라온은 시꺼먼 연기를 뚫고 뒤로 날아갔다.

끼기기긱!

검을 땅에 박아넣고 나서야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하악!”

라온은 시꺼멓게 죽은 피를 토하며 턱을 떨었다. 고쳤던 왼팔은 다시 뭉개졌고, 허리까지 뜯겨나갔다.

온몸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거머리 같은 녀석.”

광혈귀가 차돌 같은 손가락을 풀며 다가온다. 점차 거대해지는 기파에 피부가 터져나갔다.

콰앙!

놈이 바닥을 부수고 포탄처럼 날아왔다.

“흐읍!”

땅을 박차고 몸을 회전시켰다.

티이익!

광혈귀의 주먹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고 뒤로 물러섰다.

“쯧.”

혀를 찼다. 완전히 부러져서 휘청이는 왼팔이 거슬렸다. 자칫 잘못했으면 잡혀서 그대로 숨이 끊어질 뻔했다.

자를까?

잠시 왼팔을 잘라버릴까 생각했다. 그러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팔이 두 번 조각나고, 옆구리가 뜯겨나가고, 근육과 피부가 비명을 지른다.

전생에서도 겪지 못한 고통을 참으며 왜 여기에서 저 괴물과 싸우는 건지 모르겠다.

여러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긴 시간을 함께 보냈고 가장 불편했으며, 가장 미안한 사람의 말이 기억났다.

[나는 라온이 그 옛날의 지그하르트 검사다운 무인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렇지. 바로 그 말이다.

실비아의 그 말이 지금의 자신을 이곳에 묶어두었다.

전생이라면 무조건 도망쳤다.

버렌, 루난, 마르타와 수련생들. 아니, 마을 사람들까지 미끼로 던져서 이 괴물에게도 벗어났을 거다.

하지만 실비아의 말이.

함께 시간을 보낸 수련생들의 기억이 날 이곳에 묶어 두고 있었다.

루난은 차가워 보이고, 맹하지만 누구보다 다정하다. 싸이코 같은 오빠에게서 가족을 구하기 위해 홀로 고통을 삭인 아이다.

버렌은 얍실한 녀석이었지만, 아이답게 금방 변해 본인의 목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마르타는 거칠지만, 의지가 뛰어나고 신념이 굳건하다. 확실치는 않지만, 친엄마를 그리워하고 있다.

다른 수련생들도 처음과 달리 점점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많이 변했지.’

그들이 날 보는 눈빛은 그렇게 너무나도 달라졌고, 내가 그들을 보는 눈빛도 달라졌다.

그렇기에 이곳에 남았다.

실비아의 말대로 지그하르트의 검사다운 모습이 되어가는 녀석들을 살리고 싶어서.

전생에서 수백의 생명을 죽이고, 수십의 전장에 참여할 때와는 다르다.

지금 난 나의 의지로 저 괴물과 싸우고 있었다.

“하!”

웃음이 나왔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검이라니. 기분이 요상했다.

“이 상황에 웃음이라. 네놈도 정상은 아니로군.”

“그러게. 나로 이럴 줄은 몰랐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를 잡고 있을 때 조용히 지켜보던 라스가 일그러진 모습으로 올라왔다.

-이제 알겠군.

‘뭐?’

-네놈 본왕에게 몸을 넘길 생각이군.

‘…….’

-지금은 시간을 끌고 있는 거였어. 그 어린놈들이 본왕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날 때까지.

‘너도 눈치는 있군.’

-정말이지 광오하도다!

라스의 불꽃이 밤하늘의 별처럼 치솟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독한 분노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본왕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이놈을 죽이고 네 동료들을 찾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다시 육체의 제어권을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확신하진 않는다. 그저 도박일 뿐이지.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방법은 그것 하나니까.’

지금 광혈귀를 이길 방법은 없다. 지원이 빨리 온다고 해도 몇 시간은 걸릴 터.

여기서 놈에게 살아남고 모두를 구하는 길은 라스에게 몸을 넘겨서 이놈을 잡고, 수련생들에게 가기 전에 몸을 되찾는 방법뿐이었다.

-네놈은 이미 본왕의 분노를 받아들였다. 이전처럼은 되지 않아.

‘그래도 해봐야지.’

원수를 남겨두고 이대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으니까.

-착각하지 마라. 지금의 넌 정신력도, 체력도 바닥이다. 감정 역시 격해져 있지. 느끼게 해주마.

라스가 이를 갈며 몸에 달라붙었다.

“끄아아악!”

라온이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이전과는 격이 다른 고통에 피부가 검게 물들었다.

“이, 이게….”

-그게 지금 네놈의 상태다. 본왕의 빙의는 버틸 수 있겠지만, 스스로 몸을 넘긴다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허억….”

라온이 사지를 떨었다. 라스의 말대로 방금의 고통과 충격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그럼 어떻게….’

“이제야 네놈에게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 아! 재밌는 생각이 났어.”

광혈귀가 큼지막한 손가락을 돌렸다.

“너보다 먼저 네 동료들을 죽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 아이들의 목을 하나씩 뽑으면 네가 어떤 얼굴을 할까?”

놈이 키득 웃으며 몸을 돌렸다. 대지를 쪼개며 달려갈 것처럼 놈의 허벅지가 부풀었다.

‘안 돼.’

수련생들은 광혈귀의 한 수도 버티지 못한다. 그야말로 몰살. 이렇게까지 버틴 의미가 없어진다.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

“멈춰라.”

라온이 부러진 검을 고쳐잡았다. 이를 악물고 허리를 폈다. 불의 고리와 만화공을 극성으로 운용하며 격을 끌어 올렸다.

“나를 보아라.”

부러진 검으로 광혈귀를 겨누었다. 손은 떨렸지만, 검 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 이름은 라온 지그하르트. 북멸왕 글렌 지그하르트의 피를 이은 손자이며 언젠가 대륙 최강이 될 검사다.”

글렌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남들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내 심장을 멈출 때까진 이곳을 떠날 수 없다! 에덴의 미친 귀신이여!”

바닥을 친 격과 오러가 이글거리며 타올라 검날을 휘감았다.

“하!”

광혈귀의 노란 눈동자에 한줄기 감탄이 어렸다.

“그 나이에 그 기상.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좋다. 진짜 무인에게는 그만한 예를 갖춰야겠지.”

놈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달려가기 위해 증폭시켰던 근육을 이쪽으로 돌렸다.

“후우욱!”

일단 시선을 돌렸지만, 방법이 없다.

‘어떻게 해야.’

라스에게 몸을 넘기지 않으면 광혈귀에게 죽는다.

라스에게 몸을 넘긴다면 수련생들이 죽게 되고, 내 몸을 평생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설상가상. 방법이 없었다.

광혈귀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격과 오러를 끌어 올리느라 힘을 다했는지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네 이름을 기억하겠다. 라온 지그하르트.”

놈이 바위 같은 주먹을 내리치려 할 때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내겐 할 일이 있다고!

‘라스. 네게 내 몸을….’

-결국 결정을 했군. 이제 너와는 작별이다.

라스의 목소리에 한줄기 희열과 알 수 없는 작은 감정이 차올랐다.

‘넘긴….’

라온이 말을 하다 말고 눈을 부릅떴다. 12살 이후 수없이 맡았던 다정하면서도 시원한 바람의 향이 콧등을 스쳤다.

-뭐 하는 거냐! 빨리 결정해라!

‘넘기지 않겠다.’

-이런 젠장! 왜 지금!

라스의 비명을 들으며 검을 내렸다. 눈까지 감았다.

“죽어라!”

광혈귀가 들어 올린 주먹을 내리쳤다. 쏟아지는 풍압에 피부가 찢겨 나갔지만 라온은 눈을 뜨지 않았다.

후웅.

고통은 없었다. 작은 바람이 꽃잎을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펄럭이는 긴 적발. 녹색 바람을 휘감은 널찍한 등이 보였다.

그가 쥔 얇은 검이 광혈귀의 주먹을 완벽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늦으셨습니다.”

라온은 그 남자를 보며 입매를 찡그렸다.

“미안하다. 살짝 늦잠을 잤거든.”

적발의 검사. 리메르가 뒤를 돌았다. 누군가의 피로 가득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이제 내게 맡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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