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라온의 검에 어린 혹한의 냉기가 바람처럼 퍼져나가며 대지가 새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얼음? 수속성이라고?”
광혈귀의 노란 눈동자에도 당황이 드러났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강한 화속성 오러에 이어 수속성 오러라니, 네놈 정체가 뭐냐?”
만화공의 화력에 맞먹는 빙결 오러는 광혈귀에게도 신기한 일인 모양이다. 놈의 걸걸한 목소리에 처음으로 놀람이 깃들었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라온은 검을 비틀어 그었다. 검신에 어린 냉기가 빛살처럼 쏘아졌다.
“허, 검기까지?”
광혈귀가 헛웃음을 흘리며 주먹을 내뻗었다. 바위 같은 주먹이 새하얀 검기를 부숴버렸다.
전력으로 쏘아낸 검기가 깨졌지만, 라온의 눈빛은 덤덤했다.
‘냉기의 힘은 공격만이 아니니까.’
호수가 얼어붙는 듯한 소리와 함께 광혈귀의 손등 위로 새하얀 얼음이 돋아났다.
“이건….”
광혈귀가 인상을 찌푸리며 얼어붙은 손을 노려보았다. 주먹을 쥐려 했지만, 잘되지 않는 것 같았다.
“속성의 개화까지 한 건가? 정말이지 한계를 모르는 놈이로군.”
“…….”
라온은 긴장감을 꺼뜨리지 않은 채 다시 혹한의 냉기를 담은 검기를 쏘아냈다.
‘방심해서는 안 돼.’
공격이 조금 먹힌다고 방심했다가는 한 방에 머리가 날아간다.
공격하면서도 방어를 염두에 두어야 하고, 끊임없이 보법을 밟아 위치를 변화시켜야 한다.
“이놈….”
광혈귀는 이전처럼 주먹을 날리지 않고, 몸을 회전시켜 검기를 회피했다.
치이잉!
라온은 혹한의 냉기를 극한으로 운용하며 검을 휘둘렀다. 칼날에서 피어나는 차디찬 냉기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우우웅!
바닥이 얼어붙고, 대기의 온도가 내려가며 광혈귀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봐둔 보람이 있군.’
라온이 입술을 깨문 루난을 보았다. 그녀가 서리를 뿌리는 방법을 관찰한 덕분에 어렵지 않게 냉기의 오러를 펼쳐낼 수 있었다.
“크으….”
광혈귀는 바닥과 대기에 깔린 냉기와 라온이 뻗어내는 검기를 피하느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강렬하고 재빨랐던 광혈귀의 주먹이 점차 느려지고, 약해진다.
“끄아아아! 쥐새끼 같은 놈!”
광혈귀가 괴성을 터트리며 주먹을 내질렀다.
후우웅!
라온은 발목을 돌려 그 주먹을 피해낸 뒤 다시 검을 그어 내렸다. 차디찬 검기가 허공을 반으로 갈랐다.
“큭!”
광혈귀가 냉기를 피해 뒤로 물러서며 신음을 흘렸다.
누가 봐도 우위에 선 상황.
하지만 라온의 깊은 눈빛에선 긴장이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 싸움을 시작할 때보다 더한 기세를 두른 채 검을 휘둘렀다.
‘아직 기회는 오지 않았어.’
* * *
“헉! 헉!”
버렌은 사람들을 모두 대비시킨 이후 열 명의 수련생과 함께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 중앙은 마법 폭격을 맞은 듯 폐허가 되었다. 한쪽에선 불이 타올랐고, 다른 한쪽에선 바닥이 꽁꽁 얼어붙어 있는 기괴한 상태였다.
콰아아아앙!
좌측에서 울린 굉음에 고개를 돌렸다. 아니, 소리가 나기 전부터 고개가 돌아갔다.
검에 푸른 빛을 두른 라온과 광혈귀가 근접거리에서 검과 주먹을 나누고 있었다.
‘검기? 저 녀석 언제 소드 익스퍼트에….’
검기를 사용한다는 건 소드 익스퍼트 하급에 올랐다는 뜻이다. 15살에 익스퍼트 하급이라니, 이런 상황에서도 당황스러웠다.
‘아니, 잠깐! 라온의 오러가!’
버렌의 경악은 검기로 끝이 아니었다. 라온의 검에서 피어나는 냉기를 보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냉기라니!’
루난보다 더 서늘하고 날카로운 냉기의 오러. 저걸 지금까지 감추고 있었다는 것에 헛웃음이 터졌다.
‘냉기의 오러에 익스퍼트라니. 대체 넌 어디까지 올라간 거냐.’
대륙의 무인들은 강함을 몇 가지 단계로 나누어 놓았다.
검, 창, 궁, 권. 무기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단계로 오러에 입문을 하면 비기너라 불리게 된다.
비기너 초급, 중급, 고급을 넘어 오러에 익숙해지면 육체만이 아니라, 무기에 오러를 실을 수 있는 유저의 단계에 도달한다.
유저도 똑같이 초급, 중급, 고급의 단계가 있고, 그 위가 바로 무기에 담긴 오러를 배출할 수 있는 익스퍼트의 경지다.
흔히 말하는 검기를 쓸 수 있는 경지이고, 지금 라온이 위치한 단계였다.
광혈귀는 익스퍼트의 최상급 혹은 마스터로 알려져 있었다.
익스퍼트 하급인 라온이 그보다 훨씬 위에 있는 광혈귀를 밀어붙이는 모습에 가슴에 불이 차올랐다.
“후우.”
버렌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괴물….’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주변이 터져나가는 광혈귀보다 그를 상대하는 라온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단순히 두 가지 오러를 사용하고, 어린 나이에 익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검술과 보법.
누구나 알 법한 기본 검술과 보법으로 광혈귀를 상대하는 모습에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터엉!
라온의 움직임은 표홀했다. 태풍에 걸친 어린 꽃잎처럼 광혈귀가 뻗어내는 풍압을 이용하여 그의 주먹을 회피했다.
경지, 재능을 떠나 어마어마한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라온은 노력의 괴물이었다.
‘그렇지만….’
라온의 공격은 날카로웠지만, 광혈귀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오직 놈의 오른팔만 새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역시 힘의 차이가 나는군. 그럼…어?’
버렌이 두 사람의 전투를 관찰하다가 눈매를 좁혔다. 라온이 검을 내리치며 자신에게 눈길을 주었다.
‘저건….’
그래도 3년 넘게 함께 했기 때문일까? 라온이 보낸 눈빛의 의도를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도우라는 뜻이야.’
녀석은 틈을 만들 테니, 함께 공격하자는 눈빛을 보내왔다.
“음….”
양옆을 돌아보았다.
마르타와 루난도 라온의 의도를 읽고, 언제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오러를 빠르게 운용하고 있었다.
‘그래. 광혈귀가 별거냐. 우린 지그하르트야.’
주먹을 움켜쥐며 단전에 차오른 오러를 끌어 올렸다. 차오르는 녹색 바람을 느끼며 검을 뽑아 들었다.
‘우리가 여길 구하는 거야!’
버렌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라온과 광혈귀의 전투에 집중했다.
언제 어떻게 나가야 할지 모르기에 호흡을 고르며 오러를 끊임없이 운용했다.
두 괴물이 벌이는 전투를 보며 손에 땀이 찰 무렵.
라온의 검격이 광혈귀의 왼손에 적중했다.
빠드드득!
고드름이 돋아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광혈귀의 손이 꽁꽁 얼어붙었다.
“지금이다! 모조리 쏟아부어!”
버렌은 라온이 말을 하기 전에 이미 몸을 움직였다.
콰앙!
땅을 박차고 검을 세워 광혈귀를 향해 뛰어들었다.
우측과 좌측에서도 같은 소리가 들렸다. 루난과 마르타도 함께 달려온 것이다.
우우우웅!
버렌과 루난, 마르타가 쥔 검에서 각자의 오러가 밤을 지우는 태양처럼 솟구쳤다.
“이….”
광혈귀가 당황한 듯 얼어붙은 양손을 떨며 이를 갈았다.
‘이길 수 있어!’
놈의 당황한 얼굴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승리가 보였다.
우우우웅!
세 사람이 광혈귀의 급소를 향해 최강의 검격을 쏟아부으려고 할 때였다.
“아….”
“어?”
버렌, 루난, 마르타는 갑작스럽게 무거워진 공기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부릅떴다.
고오오오.
당황으로 가득 찼던 광혈귀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광기가 어렸음에도 정제된 그 눈빛을 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찌지지직!
광혈귀의 흉악한 미소에 대기가 일그러졌다.
“기다리고 있었다. 벌레들아.”
* * *
쿠구구구!
광혈귀는 오러 가득한 주먹을 뻗어냈다. 권격과 함께 뻗어나간 권풍에 바닥이 찌그러졌다.
하지만 라온은 그 권풍을 견뎌내며 검을 날렸다. 냉기가 올라오는 시퍼런 검격을 광혈귀의 어깨에 박아넣었다.
“끄으….”
광혈귀가 노란 눈빛이 터트리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분노도 없었다. 그저 흥미와 기대감만이 가득했다.
‘대륙의 역사에 남을 천재라.’
외모와 피부로 볼 때 저 녀석은 아직 10대 중반이면서 검기와 화속성, 수속성 오러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언젠가 대륙 최강이 될 자질을 가진 천재.
‘다만….’
그건 저 아이가 저대로 성장했을 때의 이야기다.
광혈귀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라온이라 불린 괴물을 제외하더라도 뒤에 있는 3명의 아이 역시 평범한 재능이 아니다.
치이이잉!
라온의 검기가 광혈귀의 가슴을 가늘게 베었지만, 그의 심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밀리는 것처럼 보이는 겉과 달리 실제 그는 가진 힘의 10분의 1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후우욱.
광혈귀가 투구 밖으로 더운 김을 뿜어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 어린 새싹들의 희망을 짓밟을 기대감에 등골이 오싹했다.
챠아아앙!
라온이 날카로운 검기를 절묘한 순간에 뿌렸다.
“크읍!”
광혈귀는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당황한 듯 왼팔을 저어 검기를 막아냈다.
빠드드득!
새하얀 냉기가 솟아올라 그의 손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모조리 쏟아부어!”
라온의 지시에 옆에서 힘을 끌어 올리던 루난, 버렌, 마르타가 광혈귀를 향해 뛰어들었다.
쿠구구구!
버렌은 검날이 바람을 담았고, 마르타는 대지의 기운을 모조리 쏟았으며, 루난은 칼날 위로 고드름 같은 냉기를 펼쳐냈다.
세 사람은 가지고 있던 모든 오러를 끌어 올려 최강의 검격을 내리쳤다.
우우웅!
라온은 광혈귀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가며 푸르게 타오르는 검을 내질렀다.
“캬하!”
광혈귀는 그 위기의 순간에 웃었다. 사냥감이 그물에 완벽하게 걸린 순간이었으니까.
콰아아아!
오우거의 투구 전체가 노랗게 번쩍였다. 그의 손을 가두었던 하얀 얼음들이 깨져나가며 어마어마한 기운이 치솟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벌레들아.”
지그하르트의 어린 것들이 자신의 빈틈을 노려서 전력으로 달려들 때가 바로 놈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때였다.
쿠구구구구!
광혈귀의 양손 위로 유형화된 노란 빛이 폭발했다. 거대한 손을 완벽하게 뒤덮은 유형화된 오러.
강기.
마스터의 증명인 강기가 그의 손에서 지옥 불처럼 타올랐다.
“이런!”
“가, 강기!”
공간조차 짓누르는 강기는 같은 강기가 아닌 이상 막을 수 없다.
루난, 마르타 버렌의 안색이 희망에서 절망으로 가라앉았다.
“아….”
“끝이다!”
광혈귀가 흥분이 가득 담긴 웃음을 터트리며 주먹을 내질렀다. 바위만 한 강기가 떨어지며 아이들의 눈빛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너는 어떨까?’
그는 마지막이 될 시선을 금발 꼬마에게 보냈다. 놈이 절망하는 눈빛을 마지막으로 즐기기 위해서.
하지만.
“어?”
광혈귀가 눈을 부릅떴다. 라온의 눈에는 절망도,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덤덤한 눈빛. 그저 적을 죽이겠다는 살의만이 가득했다.
콰아아아!
라온의 칼날 위로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었던 어마어마한 살의가 뒤덮였다.
“기다리고 있던 건 너만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