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오우거.
강력한 근력과 민첩성에 지능까지 뛰어나 숲과 산의 폭군이라 불리는 몬스터다.
흉폭함으로는 몬스터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라, 테이밍을 건 마법사를 역으로 죽이는 일도 잦았다.
몬스터의 힘을 운용하는 에덴에도 당연히 오우거의 특성을 이어받은 괴물이 있었다.
광혈귀.
피에 미친 귀신이라는 뜻의 이름은 흉폭함과 광기를 자랑하는 오우거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광혈귀인가?”
라온이 입술을 짓씹었다.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가 턱을 스치는 게 느껴졌다.
“아무리 지그하르트의 새싹이라고 해도 한 눈에 이 투구를 바로 알아보다니, 보통 눈썰미가 아니야.”
광혈귀는 키득거리며 돌리던 투구를 손아귀에 잡았다.
“거기다 무력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없군. 역시 네가 녹전귀를 베었나?”
“…….”
라온은 대답하지 못하고 손을 떨었다. 광혈귀의 무력은 지금의 자신으로는. 아니, 이곳 모두의 힘을 합쳐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너 같은 놈이 왜 여기에….”
“녹전귀에게 임무를 넘긴 게 나였으니까. 그리 쉽게 갈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광혈귀가 키득 웃으며 일어섰다. 거대한 키. 목책 위에 철탑이 솟아오른 것 같았다.
“그 천. 다르크라는 물건이다. 내부의 기운을 감춰주는 특별한 효능이 있지. 영감. 운이 좋았어. 그걸로 감싸지 않았다면 이 마을은 처음부터 잿더미가 되었을 거야.”
광혈귀는 고블린 왕의 마석을 감싼 천을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뭐, 덕분에 나한테까지 순서가 돌아왔지만.”
그가 솥뚜껑만 한 오우거의 투구를 머리에 착용했다.
당연히 맞지 않았지만, 오러를 운용하자 투구에서 기이한 울림이 일어났다.
기이잉!
내부의 무언가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투구의 크기가 광혈귀의 머리에 맞게 축소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투구에서 녹색 쇳물이 쏟아져 광혈귀의 몸을 뒤덮었다. 바위만 한 근육이 도드라진 오우거의 갑옷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틈이 없어.’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공격하고 싶었지만, 광혈귀에게선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쿠구구구!
비어있던 투구의 눈에서 광기가 어린 빛이 솟구치자,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간신히 버티고 있을 때 팔찌에서 라스가 솟구쳤다. 납을 단것처럼 목소리가 무거웠다.
-솔직하게 말하지. 지금 너에겐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선택?’
-저놈에게 죽거나, 본왕에게 몸을 넘기거나.
진실만을 말하는 듯 라스의 목소리는 진중했다.
-네게 주어진 선택권은 오직 그 둘 뿐이다.
* * *
버렌 지그하르트는 수련생들과 함께 설치한 목책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있었다.
‘괜찮군.’
교관들에게 배웠던 방식으로 목책을 지으니, 짧은 시간에 완성했음에도 내구성이 나쁘지 않았다.
오크나 고블린의 공격이라면 어렵지 않게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재료는 대부분 도리안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도움이 되긴 했지만 이런 물건을 왜 가지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버렌 님. 라온이 촌장과 함께 사라졌는데 괜찮겠습니까?”
바로 뒤에 있던 방계가 버렌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그런데?”
버렌이 뒤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아니, 녀석이 촌장이 주는 보물 같은 걸 챙기면….”
“의미 없다.”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희도 알지 않느냐. 라온이 아니었다면 우리만이 아니라, 이 마을 전체가 피에 잠겼을 거다. 녀석이 무엇을 받든, 무엇을 배우든 우리에게 발언권은 없어. 그리고….”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방계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우리 모두는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걸고 있다. 내부에서 강해지기 위한 경쟁이라면 모를까. 밖에서는 다툴 필요도 질시할 필요도 없다. 너희들도 어느 정도 깨달았지 않느냐.”
“음, 그건….”
“그렇습니다.”
방계 수련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이야.’
녹전귀와의 전투를 통해 수련생들은 라온에게 큰 감명을 받은 상태였다. 솔직히 이젠 질시나, 질투도 느껴지지 않았다.
“버러지들도 이제야 정신을 좀 차린 모양이네.”
“마르타?”
한심함이 담긴 목소리에 버렌이 고개를 들었다. 마르타가 목책 옆 나무 위에서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너희들이 목책을 제대로 만들었는지 확인해보려고.”
“그래서 목책의 상태는?”
“허술한 놈들치고는 나쁘지 않네. 그래도 대가리가 아예 돌은 아닌가 봐?”
“확인했으면 사라져라. 여긴 우리가 마무리할 테니.”
“내게 명령할 수 있는 건 한 명뿐이야.”
마르타는 코웃음을 치며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녀가 버렌에게 다가가려 할 때 안쪽 수풀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거기 나와!”
버렌과 마르타가 자세를 낮출 때 수풀에서 은빛 머리칼의 소녀가 불쑥 솟구쳤다.
“루난?”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열매.”
루난이 들고 있던 바구니를 보여주었다. 노랗게 잘 익은 금색 사과가 담겨 있었다.
“그걸 여기서 왜 따는데?”
“라온 주려고.”
“마을 사람들이 따 놓은 거 있잖아.”
“이게 신선해.”
루난은 멍한 눈으로 조곤조곤 답했다.
“누가 보면 이미 결혼한 줄 알겠어.”
마르타가 차가운 눈으로 이죽거렸지만, 루난은 별 반응 없이 바구니를 챙겼다.
“갈게.”
그녀가 그대로 떠나려고 할 때였다.
콰아아아앙!
마을 외곽에서 지축이 뒤틀리는 듯한 어마어마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뭐, 뭐야!”
“이게 무슨….”
“저긴….”
머리를 감싼 채 주저앉았던 버렌, 루난, 마르타가 눈을 부릅떴다.
“라온.”
“라온과 촌장이 간 방향이다!”
루난과 마르타가 먼저 움직였다.
“긴급 상황이다! 너희들은 무기를 챙겨서 다른 수련생들을 불러와!”
“예!”
버렌이 두 사람을 쫓으며 지시를 내렸다.
쿠우우웅!
모두가 라온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려 할 때 다시 한번 터져 나온 막강한 기운이 마을 중앙까지 이어졌다.
콰아아아!
주저앉는 건물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안고 있는 금발의 소년이 튕겨 나왔다.
“어?”
“헉!”
루난과 마르타는 바닥을 구르는 소년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라온?”
“라, 라온 지그하르트!”
그 아이는 라온이었다. 그는 녹전귀를 상대할 때보다도 더 긴장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루난!”
라온이 루난의 이름을 부르며 품에 안고 있던 무언가를 던졌다.
“으응.”
루난은 앞으로 달려가 라온이 던진 걸 받아냈다. 그건 이마에 피를 흘린 채 정신을 잃은 촌장이었다.
“루난. 마르타. 오지 마! 당장 여길 벗어나!”
그의 표정은 다급하다 못해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너 대체….”
마르타는 라온에게 다가가다 말고 멈춰서서 서쪽을 바라보았다.
쿵!
대지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사나운 걸음이 허공을 메운 모래 먼지를 갈랐다.
산 그 자체가 인간으로 화한 듯한 녹색의 거인이 다가온다. 팔과 다리의 근육은 바위를 뭉친 듯 단단했고, 샛노란 눈빛에선 광기가 이글거렸다.
“저건….”
“오, 오우거의 갑주….”
산과 숲의 제왕이라 불리는 오우거의 투구와 갑옷을 착용한 남자의 기파에 마르타와 루난의 생각이 멈춰버렸다.
“과, 광혈귀….”
마르타의 입에서 오우거 투구를 착용한 남자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 피 냄새가 흐르는 이름에 공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귀여운 녀석들도 있었군.”
“아….”
광혈귀의 투구에서 광기가 스멀스멀 피어난다. 마르타와 루난은 곧 주저앉을 것처럼 다리를 떨었다.
“라온! 이번엔 뭐…헉!”
뒤늦게 달려오던 버렌과 수련생들이 움찔 놀라며 멈춰 섰다. 광혈귀의 기세에 몸이 굳어버린 것이다.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달고 있는 것 치고는 움직임이 늦구나.”
“아아…”
“저….”
광혈귀의 눈동자가 누렇게 번쩍였다. 포식자가 뿜어내는 짙은 살기에 수련생들이 가슴을 움켜쥐고 무릎을 꿇었다.
“정신 차려!”
수련생들이 무너지려 할 때 라온의 낭랑한 목소리가 광혈귀의 공포를 뚫어냈다.
고오오오!
라온의 정심한 기운이 퍼져나가자, 수련생들의 어둑해진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그렇게 멍청하게 있다간 전멸이다! 버렌! 수련생들에게 지시를 내려서 마을 사람들을 대비시키고, 마르타와 루난은 뒤로 떨어져서 견제를 준비해!”
“응.”
“후우….”
“아, 알겠다. 금방 돌아오마!”
버렌이 이를 악물고 뒤로 뛰었고, 루난과 마르타가 오러를 운용하며 양옆으로 떨어졌다.
“저놈의 주먹에 얻어맞으면 죽는다고 생각해. 절대 정면에서 부딪치지 말고, 나를 보조해.”
라온은 광혈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작게 입을 뗐다.
루난과 마르타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리메르 교관이 매번 말했지? 한계를 넘어야 한다고.”
라온이 이를 악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이 그때야. 정신과 육체 모두 한계를 넘어야 할 순간이다.”
“한계를 넘는다?”
광혈귀가 히죽 웃으며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붉은 투기가 치솟으며 공기가 일그러졌다.
“그걸로 될까?”
* * *
치이이잉!
라온은 불의 고리를 회전시켜 긴장을 풀어내며 검을 고쳐 잡았다.
‘일격이었지.’
광혈귀가 펼쳐낸 권격을 피했음에도 피부가 터져나갔다. 가히 압도적인 무력. 끝이 보이지 않는 힘이다.
‘전생이었어도 힘들어….’
암살이라면 모를까. 정면으로 싸운다면 전생의 육체로 싸워도 이 괴물을 이긴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빈틈을 노려 놈의 목을 베어야 한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
끝을 모를 절벽이 인간이 된 것처럼 자그마한 틈도 보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덤빌 것처럼 굴더니, 안 오는 거냐?”
광혈귀가 턱을 치켜든 채 히죽 웃었다.
“네가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가마!”
놈이 대지를 뭉개며 발을 굴렀다. 순식간에 시야 전체가 광혈귀로 가득 찼다.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후웅!
초고속으로 다가온 광혈귀가 주먹을 내뻗어온다. 머리를 노려오는 바위만 한 주먹을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만화공 십화.
회천.
대기를 가르는 화염이 검이 광혈귀의 주먹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화력 하나는 좋구나!”
광혈귀가 흥겨운 목소리를 흘리며 주먹을 비틀었다. 새빨간 투기가 피어나 회천과 그대로 부딪쳤다.
쿠와아앙!
검을 휘감은 불길의 불꽃의 뱀이 광혈귀의 오러에 짓눌려 사그라들었다.
“흐읍!”
라온의 눈동자가 일그러졌다. 회천의 검격을 지워버린 광혈귀의 주먹이 그대로 심장을 노려왔다.
“크아아아!”
악을 내지르며 검을 비틀었다. 광혈귀의 주먹이 검면을 따라 옆으로 흘러내려 갔다.
콰아앙!
무시무시한 파공음이 터지며 우측 건물들이 폭삭 무너져내렸다.
“허억!”
라온이 숨을 돌리며 뒤로 물러섰다. 공격을 흘렸음에도 어깨가 빠질 것처럼 아려왔다.
‘진짜 죽을 뻔했어.’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불의 고리로 주먹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면 토마토처럼 터져버렸을 것이다.
옆을 보았다.
루난과 마르타는 어쩔 줄을 모르는 눈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아직 아니야.’
라온은 눈빛으로 그들에게 의사를 전했다. 지금은 움직일 때가 아니라, 관찰할 때라고.
조금이라도 광혈귀의 주먹을 버텨서 저들이 참여하기 전에 놈의 움직임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10% 아니, 1%의 가능성이라도 생긴다.
화르르르!
라온은 다시 십화의 불꽃을 일으켰다. 검극에서 시작된 불꽃이 검신 전체를 휘감았다.
“그래. 주먹 한 번에 꺼지는 불꽃은 재미없지!”
광혈귀가 새처럼 도약해서 주먹을 내리찍었다.
연성검법의 여섯 번째 형을 사용해서 운석처럼 떨어지는 주먹을 쳐냈다.
콰르르르!
광혈귀가 펼치는 붉은 투기에 십화의 불길이 다시 짓눌리기 시작했다.
“강력한 불꽃의 오러. 멍청한 녹전귀가 네게 당한 것도 이해가 갈 정도의 화력이다. 하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지. 그 이유를 아나?”
광혈귀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내질렀다.
“물론이다.”
라온이 광혈귀의 주먹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며 검을 내리쳤다.
“네놈의 특성이잖아.”
“잘 알고 있군. 맞다. 불꽃으로는 날 벨 수 없다.”
광혈귀가 손바닥을 내리치며 키득거렸다. 간신히 피했지만, 그 풍압에 뺨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오우거의 힘을 이어받은 내게 화염의 오러 따위는 의미가 없어!”
놈의 말대로다.
오우거는 화속성에 강한 몬스터. 불화살 수십 대를 맞고도 성을 부수는 괴물이다.
다만 라온이 가진 무기는 만화공만이 아니다.
“그럼 다른 걸 쓰면 되겠네.”
“뭐?”
라온의 붉은 눈동자에 시퍼런 냉기가 솟구쳤다.
혹한의 냉기.
그가 쥔 하얀 칼날 위로 바다 같은 푸른빛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