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녹전귀는 라온에게 기습을 당한 순간부터 그를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야생동물이라고 생각이 될 정도로 기척을 죽이는 능력과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검격.
‘암살자. 그것도 최상급 암살자 수준.’
지그하르트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면 암살자라고 생각될 정도의 실력을 가진 괴물이었다.
하지만 놈의 기습은 절반만 성공했고, 자신에게는 오크 투사의 생명력이 있었다.
투기와 생명력을 불태우며 공격에 대비했다. 놈도 기습에 많은 힘을 사용했는지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시간을 번 동안 투기로 어깨의 출혈을 막고, 힘을 끌어 올렸다.
‘다 끝났어.’
어깨 채로 팔을 잃었지만, 한 번을 버텼으니, 놈을 이기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암살자로 키운 놈이니, 정면 대결에선 분명 약할 거라 여겼다.
도끼에 투기를 휘감아 그대로 내리쳤다. 장작처럼 두 쪽을 낼 생각으로 휘둘렀지만, 놈은 그 공격을 가볍게 흘려냈다.
‘기습만이 아니라, 다른 쪽에도 능하다고? 저 나이에?’
말이 되질 않는다.
아무리 지그하르트라고 해도 저런 어린놈이 기습에 이어 저런 흘리기를 사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보통 놈이 아니야.’
녹전귀는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며 라온을 향해 계속해서 도끼를 내리쳤다.
놈은 막을 공격을 막고, 피할 공격은 피하면서 자신의 도끼질을 모조리 방어했다. 어린놈이 아니라, 산전수전 모두 겪은 검사와 겨루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녹전귀에겐 오크 투사의 후각도 있다. 상대 검술의 약점과 부족한 부분을 파악해서 쫓는 그 능력이 있는 이상 패배는 있을 수 없다.
‘됐다.’
이 어린놈의 검격이 모조리 파악되었다. 그 약점을 향해 도끼를 내리쳤다.
콰아앙!
검과 도끼가 맞부딪친 소리가 시원하게 울려 퍼졌다. 만족스러운 손맛. 이제 놈의 목을 가르는 것만 남았다.
비틀거리는 놈을 향해 도끼를 그었다. 놈의 모가지에서 피가 흩뿌리는 모습을 기대하려 할 때 놈의 검이 처음 보는 각도로 꺾여서 들어왔다.
캬아앙!
그 안에 담긴 강력한 힘과 일순간의 방심. 도끼가 밀려나고, 자세가 무너져 내렸다.
“이익!”
재빨리 몸을 가누려 할 때 놈이 먼저 들어왔다. 투기의 기운을 가르고 검을 내리쳐왔다.
퍼어억!
가슴과 갈비뼈가 갈라지는 파육음이 귓가를 울리고, 지독한 통증이 찾아왔다.
“끄으으윽!”
녹전귀가 피를 토하며 하나 남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네놈. 대체 어떻게….”
“네가 내 검술을 읽었듯이, 나도 네 공격 방식을 파악했다.”
“그,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왜 안 되지? 네가 하는 건 나도 할 수 있다.”
마른침이 넘어갔다.
옅게 피어나던 위험의 냄새가 점점 지독해졌다. 수많은 인재 중에서도 보지 못한 재능. 저놈이 더 강해진다면 에덴 최대의 적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놈을 죽여야 했다.
고오오오!
남은 투기와 생명력을 불태워서 도끼에 휘감았다. 양날 도끼의 날이 불에 담긴 듯 진하게 타올랐다.
“크아아아아!”
라온이라는 놈과 그 뒤의 지그하르트까지 모조리 제거하기 위해 도끼를 내리찍으려는 찰나.
빠직.
놈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타올랐다.
화아아악!
그가 ‘만화공 십화’라고 중얼거리자, 검 끝에서 타오르던 작은 불씨가 검날 위로 퍼지며 화염의 꽃 열 송이가 피어났다.
“아….”
그 불꽃을 본 순간 심장이 콱 조여들었다. 지혈해놓은 가슴의 상처가 다시 터져 나왔다.
놈이 불꽃으로 타오르는 검을 겨누며 악귀 같은 눈을 번쩍였다.
“십화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라.”
* * *
화르르륵!
라온은 검 전체를 휘감은 불길을 보며 두 눈을 빛냈다.
‘성공했군.’
아직은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실전에서 얻은 깨달음 덕분에 십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
고오오오!
힘이 넘쳐난다. 정상적인 녹전귀라고 해도 베어낼 힘이 검 위로 용솟음쳤다.
“끄으….”
눈앞에 있는 녹전귀의 경악이 투구를 뚫고 전해졌다.
“네, 네놈은 대체 무엇이냐! 어찌 그 나이에….”
오크 투사로서 가지는 본능조차 이겨낸 놀라움인지 그의 목소리가 인간처럼 돌아갔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라온은 불길에 휩싸인 검을 휘돌리며 한 걸음 걸었다.
“와라.”
“흐욱….”
녹전귀의 투구에서 허연 김이 빠져나왔다. 가진 모든 기운을 도끼를 쥔 오른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콰앙!
땅을 박차고 공간으로 파고들었다. 그대로 내리치는 양날 도끼. 놈이 가진 모든 기운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치이이잉!
라온은 도끼가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젖혀두었던 검을 내질렀다.
만화공 십화.
염권풍.
검신 위에 똬리를 튼 꽃송이들이 길게 펼쳐지며 회전한다. 검날을 탄 화염의 용오름. 그 강렬한 화력이 혈귀의 투기를 갈랐다.
콰아아아아!
열 개의 불꽃에 이르러야만 사용할 수 있는 만화공의 검술 염권풍의 위력에 녹전귀가 이를 악물었다.
“아직이다! 네놈만큼을 무조건….”
“아니, 이미 끝났어.”
라온은 담담하게 중얼거리며 검을 그었다.
촤아악!
이미 찢겨나간 투기는 십화의 불길을 이겨내지 못했다. 불꽃이 담긴 은빛 칼날이 녹전귀의 심장을 꿰뚫었다.
“끄윽, 너, 너 지그하르….”
녹전귀는 마지막 말을 맺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캬아앙!
놈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진녹색 투구와 갑주가 반으로 갈라져서 쪼개졌다. 그 안에는 인상이 강해 보이는 20대 청년이 눈을 까뒤집은 채 죽어 있었다.
후우욱.
라온이 십화의 불꽃을 꺼뜨렸다.
“후욱….”
피로가 한순간에 몰려와 탁한 숨이 흘러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당장에 주저앉고 싶었지만, 꾹 참고 뒤를 돌았다.
경악, 전율, 안도, 경외 등 수련생들과 마을 사람들의 다양한 감정이 담긴 시선이 그대로 느껴졌다.
“너….”
“라온.”
“너란 새끼는 정말이지….”
버렌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떨었고, 루난은 본인이 더 긴장했는지 주저앉았으며, 마르타는 당장에 달려들 것처럼 눈을 빛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라온은 검을 들어 올려 넋이 나간 녹귀들을 가리켰다. 녹전귀가 패할 거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는지 놈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모조리 쓸어버려!”
“우와아아아!”
라온의 승리에 기세가 하늘 끝까지 올라간 수련생들은 전장을 둘러싸고 있던 녹귀들 향해 돌진했다.
“후우….”
라온은 불의 고리를 회전시켜 육체에 내려앉은 피로를 녹이고, 단전에 오러를 채워나갔다.
‘역시 대단하다니까.’
불의 고리의 진정한 효과는 전투 전과 전투 중만이 아니라, 전투 이후에 나타난다.
소모한 오러가 급류를 탄 배처럼 솟구치고, 근육에 가득 쌓인 젖산이 녹아내렸다.
특히 이제 막 발광을 시작하려는 마나 회로 내부의 냉기마저 막아준다. 여러모로 최고의 연공법이었다.
‘이것도 웃기는 일이군.’
전생에서 저 에덴과 부딪친 이후 도망치다가 불의 고리를 얻었으니, 웃기다면 웃긴 일이다.
반대로 아버지와 누나의 목숨을 가져간 원수이기도 하지만.
“이야아아아!”
“녹귀들을 모조리 베어라!”
“싸움을 끝내!”
라온이 당당히 서서 노려보고 있으니, 녹귀들은 감히 덤벼들거나, 도망치지 못하고 수련생들에게 그대로 목을 헌납했다.
전투는 10분이 채 지나기 전에 끝났고, 목책 앞에 남은 사람은 수련생들밖에 없었다.
“라온.”
마지막 녹귀를 베어버린 루난이 달려와서 어깨를 잡았다. 본인 나름대로 잘했다는 표현 같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뒤를 이어 버렌이 다가왔다.
“후우, 네, 네 말이 맞았다. 적은 강했고, 우린 약했어. 한 번의 승리에 도취 되어서 내가 눈이 멀었던 것 같다. 미안하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문 채 허리를 굽혔다. 복종의 의미라고 생각될 정도로 깊게.
“네가 아니라면 우리만이 아니라, 지켜야 할 마을 사람들까지 죽었겠지.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다만….”
버렌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난 갔을 거다. 힘이 모자르다고 해도 불의를 넘기는 건 내가 생각하는 지그하르트 검사의 모습이 아니니까.”
“잘했어.”
라온이 버렌의 녹색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너희가 전력을 다해서 싸워준 덕분에 녹전귀의 틈을 노릴 수가 있었지. 이 승리에는 너희의 공이 커.”
“무, 무슨 의도냐! 내게 뭘 원하는 거야!”
생각지도 못한 칭찬을 들었기 때문인지 버렌이 긴장하며 손가락을 떨었다.
“진심이다.”
“으음, 다, 다음엔 이렇게 되지 않을 거다.”
버렌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미래의 너를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힘을 키워 내 역할을 똑똑히 해낼 거다!”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목숨을 구해주어서 감사하다는 의미와 깨달음을 얻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뜻이 동시에 담긴 인사였다.
“나와 모두의 목숨을 구해주어서 고맙다.”
그 말을 끝으로 버렌은 방계들과 마을로 들어갔다. 바로 목책 제건 작업을 시작하려는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도 마을을 생각하다니, 역시나 녀석은 리더에 어울리는 인재였다.
“마르타.”
라온은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서 있는 마르타를 불렀다.
“수고했다. 네가 제 역할을 해준 덕분에 싸움을 쉽게 가져갈 수 있었어.”
마르타가 녹전귀의 시선을 끝까지 가져가지 않았다면 기습에 실패해서 놈과의 싸움이 훨씬 더 거칠어졌을 거다.
그녀는 지시 그 이상으로 잘해주었다.
“시키는 대로도 못 하면 혀 깨물고 죽어야지.”
마르타가 입꼬리를 살랑살랑 움직이다가 고개를 홱 돌리고 마을로 들어갔다. 말과는 달리 칭찬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하아….”
라온이 숨을 내뱉었다. 완전히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까. 육체의 피로와 상관없이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턱.
뒤로 넘어지려는 순간 등 뒤에서 부드러운 감각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루난이 등을 잡아주고 있었다.
“쓰러질 것 같았어.”
그녀는 고개를 꾸벅였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수련을 했을 때와 같았으니까.”
루난이 입을 다문 채 턱을 끄덕였다.
“그러냐.”
자신이 이들을 봐온 것처럼 이들도 자신을 잘 봐왔던 것 같다.
“후.”
라온이 픽 웃으며 주저앉았다. 그동안 너무 긴장했던지 잠이 쏟아졌다.
[극한의 전투….]
눈앞에 몇 가지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볼 기운이 없었다. 그대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