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라온은 마르타와 남은 수련생들을 적절한 순간에 보내고 나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더욱더 기척을 감춘 채로 숨을 죽였다. 흡사 야생동물이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수준까지.
마르타의 지원을 받은 수련생들은 용기와 의지를 되찾고, 녹귀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로군.’
라온이 옅은 숨을 뱉으며, 더 힘을 풀었다. 승리라는 글자가 다가오는 순간이지만 지금이 가장 위험한 때였다.
‘녹전귀 놈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어.’
녹귀들에게 공격 지시를 내린 에덴의 녹전귀가 분명 저 위에 있다.
아주 느릿하고, 조용하게 모두가 싸우는 수풀로 다가갔다.
버렌과 루난, 마르타가 얼마 남지 않은 녹귀들을 향해 검을 내리치려는 무렵.
놈이 나타났다.
‘녹전귀 역시나 있었군.’
에덴의 하급 간부. 오크 투사의 힘을 이어받은 녹전귀가 무시무시한 기세를 흘리며 다가왔다.
콰아아앙!
분노한 놈의 일격에 버렌과 루난, 마르타가 동시에 튕겨 나갔다. 세 사람은 녹전귀의 기세에 짓눌려 제대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다.
두근.
라온이 자신의 심작박동을 녹전귀의 호흡과 맞추며 발을 움직였다.
그 발놀림은 암살자 시절에 목숨을 걸고 배웠던 무영보. 그림자에 숨은 듯 은밀하게 움직여 녹전귀의 뒤에 이동했다.
쿠구구구!
마르타를 향해 도끼를 내리치려는 녹전귀의 살기에 자신의 살기를 숨기며 검을 들었다.
“그만 죽어라!”
녹전귀가 도끼를 내리치려는 순간 만화공을 일으켰다.
화르르륵!
만화공 일화. 검 끝에서 피어난 화염의 꽃이 녹전귀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너!”
뒤를 돈 녹전귀의 눈동자에 경악이 깃들었다. 놈은 이 찰나의 순간 등 쪽으로 투기를 일으켜 검의 궤도를 바꾸려 했다.
“반항 말고 죽어라.”
라온은 뿜어지는 녹전귀의 투기를 만화공의 불꽃으로 갈라내며 검을 내리쳤다.
“크아아아아!”
벼락처럼 떨어지는 검이 녹전귀의 목을 가르려는 찰나 놈이 오히려 안쪽으로 파고들어 왔다.
푸카악!
새빨간 피가 폭발하고 땅에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라온은 인상을 찌푸린 채 앞을 노려보았다.
“크흐흐….”
왼쪽 어깨가 통째로 잘려 나간 녹전귀가 피를 토하며 웃고 있었다.
“안쪽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나 보군.”
“미친놈.”
인간은 위기의 순간에 도망치려고 하지 달려들지 않는다. 그 순간 안으로 들어와 목이 아니라, 팔을 내어주다니,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는 행동이다.
이래서 저놈들이랑 싸우기 싫다니까.
라온이 혀를 찼다.
“끄흡!”
녹전귀의 어깨 위로 붉은 투기가 솟구치자, 댐이 터진 듯 흘러나오던 피가 멈추기 시작했다.
“너도 움직일 수가 없나 보군.”
“…….”
라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놈의 말대로 방금의 일격에 많은 것을 걸어 잠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에 여유만 있었다면 당장에 달려가 놈의 목을 쳤을 것이다.
“네가 이곳의 책임자인가?”
불의 고리를 회전시켜 육체와 오러를 회복시키면서 입을 뗐다.
“그럼 이런 작은 마을에 내 윗대가리가 올 거라고 생각하나?”
녹전귀가 하나 남은 팔로 도끼를 꽉 말아쥐었다. 가라앉았던 붉은 투기가 다시 솟구쳤다.
“그야 모르는 일이지. 너희는 미친놈들이니까.”
라온은 탁기를 호흡으로 풀어내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언제라도 튀어 나갈 수 있는 자세로 폐에 신선한 공기를 채웠다.
터엉!
녹전귀가 땅을 박찼다. 닭살이 돋아오를 정도의 살기를 뿜어내며 도끼를 휘둘러왔다.
화르르!
라온이 검을 쳐올렸다. 만화공 일화의 불꽃이 재점화되어 칼날을 휘감았다.
캬아아앙!
검과 양날 도끼가 충돌하며 강철이 찌그러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화아아!
새빨간 불똥이 퍼져 바닥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걸 견뎌?”
녹전귀가 눈을 부라리며 도끼를 수평으로 휘둘러왔다. 강렬한 풍압.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도 못 견디면 검사 때려치워야지.”
라온이 불꽃에 덮인 검을 내리쳤다.
콰앙!
녹전귀와 두 번째 격돌에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려왔지만, 표정을 숨기고 다시 검을 세웠다.
“전사의 마음가짐을 알고 있구나! 지그하르트의 애송이!”
녹전귀가 기괴한 웃음을 터트리며 도끼를 내리쳐왔다.
“그렇다고 해도 살려둘 수는 없지만!”
“살려달라 한 적 없어.”
라온이 검을 그어 도끼를 막아서고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캬갸갸걍!
도끼의 날에 어린 막강한 투기에 검이 부러질 듯 흔들렸다.
‘견뎌야 해.’
지금의 힘으로 놈을 부술 수 없다. 도끼의 기운을 흘려내면서 싸워야 한다.
콰아앙!
라온은 지그하르트에서 배웠던 검술의 묘리를 펼치며 본능처럼 휘두르는 녹전귀의 도끼를 막아섰다.
라온과 오크의 본능을 두른 괴물은 근접거리에서 수없이 검과 도끼를 나누었다.
* * *
“뭐, 뭐야.”
버렌이 눈을 부릅뜬 채 턱을 덜덜 떨었다.
‘이게 뭐냐고….’
바로 눈앞에서 검과 도끼를 나누는 두 괴물의 전투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 지금 몇 번을 휘두른 거지?’
검과 도끼의 궤적조차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실력 차이가 난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격이 다르다는 뜻이었다.
후우웅!
녹전귀의 도끼가 벼락처럼 떨어져 내린다.
꿀꺽.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저 도끼가 자신의 머리 위로 내려왔다면 그 순간 몸이 반쪽났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팔뚝에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하지만 라온은 검으로 반원을 그려 도끼를 그대로 흘려보냈다.
콰아앙!
떨어진 도끼가 대지를 뭉갰다. 갈라진 땅에서 붉은 기운이 터져 나왔다.
“저, 저거….”
버렌이 손가락을 펼쳐서 땅을 긁었다.
‘연성검이잖아!’
지그하르트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기본 검술 연성검. 라온은 그 연성검만으로 저 막강한 도끼를 막아내고 있었다.
놀랍다 못해 경악스러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많이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라온의 노력에 감명을 받은 뒤 전력을 다해서 육체와 정신을 키웠다. 이제 그의 등까지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까 녹전귀의 팔을 베었던 검. 그리고 지금 보여주는 라온의 무력은 이미 수련생의 수준을 한참 넘어서 있었다.
“봤지?”
옆에서 들린 탄식 같은 숨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르타가 숨을 몰아쉬며 다가와 있었다.
“저게 저놈의 진짜 무력이다.”
마르타는 눈매를 좁힌 채 녹전귀와 동격의 전투를 벌이는 라온을 노려보았다.
“저 녀석이 우리에게 보여준 건 빙산의 일각밖에 되지 않았어.”
지금까지 라온이 무력을 숨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버렌, 루난. 셋이 덤벼도 일격에 밀려났던 녹전귀와 맞먹는 실력을 선보일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마르타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이번 임무. 모든 것은 라온의 손아귀에 있었다. 상황은 그가 말한 대로 움직였고,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이제 남은 건 저 괴물을 꺾는 것뿐이었다.
“하아….”
여유를 찾은 루난이 부러진 검을 들고 다가왔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힘겹게 버티는 듯한 라온이 어렸다.
꾸욱.
입술을 꽉 깨물고 전투에 참여하려 할 때 그녀의 앞을 마르타가 막았다.
“아서라. 네가 들어가는 순간 갈기갈기 찢겨질 거다.”
“도와줄 수 있어.”
“그전에 네가 죽는다고.”
“상관없어.”
루난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들어선 건 힘겹게 도끼를 피하는 라온의 모습뿐이었다.
‘이 녀석….’
마르타가 눈매를 좁혔다. 저곳의 위험을 알면서 들어가려 하다니, 라온을 그냥 따라다녔던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조금만 참아라.”
“뭐?”
“저 녀석….”
마르타가 라온을 가리켰다. 새빨간 벼락이 꺼꾸로 치솟은 듯한 눈. 그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대련에서 나를 이겼을 때의 눈을 하고 있으니까.”
* * *
“크흐!”
녹전귀는 투기를 펼쳐내며 이를 드러냈다.
“이제 힘이 달리는 모양이지?”
“…….”
라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술을 펼치고, 도끼를 막아내는 것에만 집중했다.
‘살기가 더 짙어지고 있어.’
오크 투사의 갑주를 땅따먹기로 차지한 건 아닌지, 놈은 상반신의 4분지 1이 날아갔음에도 힘이 넘쳤다. 진정 미쳤다는 말이 나올 맷집이었다.
‘아까 끝냈어야 했는데.’
라온이 혀를 찼다. 오랜만의 암살이라 살기를 완전히 숨기지 못했다. 상황이 아쉬웠다.
“네놈은 특별해. 그 나이를 생각한다면 대륙 제일의 천재라 불려도 과언이 아니지. 하지만….”
녹전귀의 입꼬리가 초승달처럼 길쭉하게 올라갔다.
“나 역시 특별한 존재다.”
놈이 든 도끼의 불꽃이 한층 더 진하게 타올랐다.
후우우웅!
내리치는 도끼에 실린 힘이 이전보다 더 빠르고 매서워졌다.
치이잉!
라온이 검을 옆으로 세워 도끼를 밀어냈다. 이전처럼 흘리기를 쓰려는 때 도끼의 날이 회전하여 검을 짓눌렀다.
“네놈이 사용했던 검술은 이제 모두 파악했다. 기본 검술을 변형시켜서 조금 난해했지만, 이제 다 끝났어.”
녹전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라온의 검이 움직일 방향을 미리 읽고, 방어나, 흘리기를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콰아앙!
검과 도끼가 부딪치며 이전과는 다른 굉음이 터져 나왔다. 힘과 힘의 격돌이었다.
“크….”
라온의 입에서 참던 신음이 흘러나왔다. 도끼에 실린 힘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팔뚝이 바르르 떨렸다.
“그거 알고 있나? 에덴의 간부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거?”
“…….”
“내겐 감각이 있다. 네놈의 검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보이는 감각이지.”
녹전귀가 히죽 웃으며 도끼를 횡으로 휘둘렀다. 도끼날에 실린 투기가 기묘한 흐름을 만들어내며 라온이 피할 방향을 차단했다.
“너도 누구처럼 말이 많군.”
라온이 차게 웃으며 검을 올려 쳤다.
끼이잉!
톱니가 비틀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녹전귀의 도끼가 칼날을 스쳐 땅으로 향했다.
콰아앙!
라온은 무너지는 땅을 박차고 녹전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놀라는 놈의 눈을 향해 검을 그어 내렸다.
촤아아악!
녹전귀의 왼쪽 가슴에서 살벌한 양의 피가 치솟았다.
“끄으윽!”
놈은 마구잡이로 도끼를 휘두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쯧.”
라온이 혀를 찼다. 이번에도 놈의 몸을 완전히 베어버리려고 했지만, 힘과 거리가 모자랐다. 성장하지 않은 몸으로 싸우는 건 역시나 쉽지 않았다.
“네, 네놈. 대체 어떻게….”
“네가 내 검술을 읽었듯이, 나도 네 공격 방식을 파악했을 뿐이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왜 안 되지? 네놈이 하는 건 나도 할 수 있다.”
거짓이 아니다.
놈과 싸우면서 불의 고리를 운용한 덕분에 도끼가 움직일 방향을 예측해냈다. 완벽하진 않지만, 움직임의 반 정도는 파악되었다.
“후욱….”
녹전귀의 가슴에서 피가 멎기 시작했다. 놈의 전신에서 투기의 불꽃이 타올랐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라온 지그하르트다. 이름조차 없는 에덴의 적귀여.”
“금발적안. 볼 때부터 불안하더니….”
살기가 유형화되듯 놈의 눈동자에서 붉은 기운이 치솟았다.
“글렌 지그하르트의 피를 강하게 이어받았군.”
“뭐?”
“네놈은 위험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기서 죽여야겠다. 에덴의 미래를 위해서.”
콰아아아!
녹전귀의 주변으로 퍼져나가던 투기가 양날 도끼에 모여들었다. 도끼가 아니라, 붉은 피로 이루어진 철퇴를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네놈과 그 뒤에 있는 지그하르트까지 모조리 부숴주마.”
녹전귀가 이를 바득 갈며 도끼를 들어 올렸다.
라온은 그 막대한 힘을 보고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거대한 기파에 흔들리는 검을 고쳐 잡았다.
“시험해보기에 딱 좋군.”
무릎을 앞으로 뻗고, 검을 뒤로 젖혔다.
고오오오!
검극에 타오르던 하나의 불꽃이 파도를 탄 듯 출렁이며 검신으로 흘러내린다.
만화공 십화.
만화공의 두 번째 문이 열리고, 칼날 위에 피어난 열 송이의 꽃이 춤을 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