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저 벌레들은 뭐지?”
오크 투사의 갑주를 입은 남자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을 흘렸다. 그의 시선에 언덕을 내려와 세부 마을로 달려가는 버렌과 루난이 잡혔다.
“지, 지그하르트의 수련생들입니다.”
눈알이 그려진 복면을 쓴 홍안귀가 부복하며 대답했다.
“너 분명히 저 애새끼들 돌아갔다고 했었을 텐데?”
남자의 목소리에 살기가 깃들었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주었던 냉정하고 침착했던 음성과는 결이 달랐다.
“부, 분명히 돌아갔습니다. 확실히 확인하고 돌아왔는데….”
“그럼 저놈들 중에 네 미행을 눈치챈 놈이 있다는 뜻이겠군. 머저리 같은 놈!”
남자가 발을 들어 복면인의 어깨를 찍어버렸다.
“끄흐흡!”
복면인은 어깨 한쪽이 뭉개졌음에도 가는 신음만 흘릴 뿐 움직이지 않았다.
“쯧.”
남자가 거칠게 혀를 차고 바위에서 일어섰다.
지그하르트 수련생들은 이미 마을에 도착해서 무너지는 목책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저 둘인가?”
남자는 목책을 무너뜨리는 오크를 단숨에 베어버린 루난과 버렌을 보고 탁한 숨을 뱉어냈다.
“아, 아닐 겁니다. 둘보다 더 뛰어난 흑발의 계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년은 어디에 있지?”
“더 안 보이는 걸 보니, 아마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것 같습니다.”
“흐음….”
오크 투사의 갑옷을 입은 남자가 팔짱을 끼고, 마을을 굽어보았다.
“잘 싸우는군.”
지그하르트의 수련생들은 진을 짜듯이 선을 그어 목책을 넘어오는 오크들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저놈들로는 못 뚫겠어.”
그는 뒤에 있는 복면인 보고, 턱짓했다.
“녹귀들을 보내라.”
“예? 지그하르트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너를 눈치챈 놈들이 그냥 돌아왔을 거 같나? 분명 지부에 지원 요청을 보냈을 거다. 그놈을 잡는 건 이미 늦었어. 최대한 빨리 끝내고 모든 것을 불태운 뒤 여길 벗어나는 게 최선이다.”
“…알겠습니다.”
복면인은 고개를 숙인 뒤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흐음….”
남자는 손목을 돌리며 산 아래로 내려갔다. 자그맣게 보이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살려줬는데도 돌아오다니, 너희들의 운은 지그하르트의 선택을 받은 것으로 끝난 모양이군.”
* * *
촤아악!
버렌은 달려드는 오크를 몸통 채로 갈라버리고, 반만 남은 목책을 뛰어넘었다.
“목책의 앞에 서라! 오크들이 목책을 넘은 순간 사람들이 위험해진다!”
“예!”
방계의 수련생들은 우렁차게 대답하며 목책의 앞에 진을 쳤다.
샤아아아아!
좌측에서 퍼지는 서늘한 한기에 버렌이 고개를 돌렸다.
루난이다. 검에 내려앉은 서리가 바닥에 깔려 오크들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촤아앙!
허공에 뿌려진 냉기에 오크들은 제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의외로군.’
루난은 항상 라온의 옆에 딱 붙어 있었는데,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이곳까지 온 건 예상외였다.
‘그래도 다행이야.’
오크들의 숫자도 숫자지만, 흉폭함과 힘이 어제 상대했던 놈들과는 격이 달랐다.
루난과 봉신 가문의 수련생들이 없었다면 목책이 완전히 무너져서 마을에 큰 피해가 났을 거다.
“오크의 공격을 직접적으로 받지 마라! 흘린 뒤에 반격을 가해!”
버렌은 적절한 지시를 내리며 계속해서 오크를 베었다. 한 번 지휘를 한 덕분에 상황에 맞는 지시를 내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막는 건 어렵지 않아.’
오크들이 강화되었다고 해도 수련생들은 놈들과 싸운 경험이 있으니,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
‘다만….’
정말 라온의 말대로 에덴이라면 이대로 끝나지 않는다. 분명히….
스스스스.
버렌이 뒷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마을 앞에 있는 숲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숲이 아니야.’
숲에서 녹색 후드로 전신을 가린 괴인들이 튀어나왔다. 대충 세어봐도 마흔이 넘는 숫자였다.
“녹귀다!”
버렌이 악을 내지르며 검을 꽉 잡았다.
‘빌어먹을! 진짜 에덴이었어.’
녹귀는 에덴의 하급 무인으로 오크와 고블린, 코볼트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루난!”
버렌은 오러를 극성으로 끌어 올리며 루난을 불렀다.
“우리가 앞에서 싸우겠다. 뒤에서 보조를 해줘!”
“응.”
루난은 평소와 달리 즉답하고서, 검에 더 짙은 냉기를 피워내 다가오는 녹귀들에게 뿌렸다.
쾅! 콰앙!
녹귀들이 등과 허리춤에 끼고 있던 도끼를 들어 수련생들을 향해 내리쳤다.
“공격을 흘려!”
버렌은 검으로 쏟아지는 도끼를 흘려낸 뒤 녹귀의 목을 베었다.
푸칵!
인간의 살이 갈라지는 감각에 소름이 돋아올랐지만, 입술을 씹어서 참았다.
“놈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단숨에 목을 날려!”
버렌은 당황한 와중에도 지그하르트 검술 묘리를 제대로 살려냈다. 예리한 검격을 뿜어내며 전진했다.
“흐읍!”
루난은 앞으로 나아가는 버렌과 수련생들을 향해 검에 맺힌 서리를 흩뿌렸다.
화아아아!
흘러간 냉기들은 그들을 지나, 녹귀의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찌지직!
녹귀들의 의복과 피부가 얼어붙어 움직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돌격!”
버렌은 지시만 내리는 게 다가 아니라, 가장 먼저 뛰어들어 녹귀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이길 수 있다!”
그 말을 하면서도 가슴이 아릿했다. 녹귀는 아직 많이 남았고, 수련생들은 지쳐가고 있었다.
거기다….
피잉! 휘이익!
고블린과 코볼트의 특성을 가진 녹귀들은 다가오지 않고, 뒤에서 독침을 날리거나, 독무를 뿌리기 시작했다.
“입을 막아!”
버렌은 옷을 올려 코와 입을 막은 뒤 녹귀가 날린 독침들을 쳐냈다.
“윽!”
“끄으!”
“제, 젠장!”
독침을 날리는 녹귀가 많았고, 접근해오는 녹귀도 다수였기 때문에 수련생들이 하나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크으….”
버렌이 거친 숨을 뱉어냈다. 호흡을 멈춘 상태에서 독침을 쳐내고, 전투를 벌이니, 머리가 아찔해졌다.
“하압!”
루난의 기합 소리에 슬쩍 눈을 돌렸다. 서늘한 냉기를 펼치며 녹귀를 압박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앞으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최악의 상황이라는 의미였다.
“끼이익!”
녹귀들은 교활했다. 루난의 냉기가 퍼지는 순간 뒤로 물러나서 독침과 독탄을 던졌다.
“허업!”
“으으윽!”
독탄을 흡입한 수련생들의 팔다리가 휘청거린다.
“버, 버텨라! 아직….”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버티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렸다. 팔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흔들린다.
‘이,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한다. 전멸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을 때 좌측에서 거대한 기운이 치솟았다.
콰아아앙!
황색 오러가 질풍처럼 밀어닥쳐 독침과 독탄을 던지던 녹귀들을 휩쓸었다.
후우욱!
먼지가 가라앉고, 녹귀들을 부숴버린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르타….”
열에 가까운 녹귀가 모조리 쓰러졌고, 마르타 지그하르트 홀로 서 있었다.
“모두 죽여라!”
마르타의 지시에 라온의 곁에 남아 있던 수련생들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지, 지금이다! 모조리 쓸어버려!”
버렌은 이를 악물고, 검을 다잡았다. 자신을 포함한 수련생들이 독무를 들이켰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밀어붙여!”
마르타가 오러가 가득 담긴 검을 내리치자, 녹귀들의 도끼와 검이 바스러졌다.
‘완벽한 타이밍이야.
그녀가 적절한 순간에 기습해준 덕분에 녹귀들은 반격할 틈도 잡지 못하고 쓸려나갔다.
‘됐어!’
라온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승기가 눈에 보이고 있었다.
“단 한 마리도 놓치지 마라!”
버렌은 이를 악물고 물러나는 녹귀들을 향해 달려갔다.
“끝까지…어?”
세부산까지 쫓아가서 검을 휘두르려던 그가 목을 움츠린 채 멈춰 섰다.
“뭐, 뭐야….”
숲 전체를 뒤덮은 듯한 붉은 운무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꿀꺽.
뒤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부푼 근육 형태의 녹색 갑주를 입은 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마에는 하나의 십자 상흔이 돋아났고, 입가의 뻐드렁니는 둥글게 코끝까지 말려 올라가 있는 오크 투사의 투구였다.
버렌이 검을 쥔 손을 떨었다.
“오, 오크 투사의 갑옷! 녹전귀!”
녹전귀는 에덴의 하급 간부 중 하나로 인간의 몸으로 오크 투사의 무력을 이어받은 괴물이었다.
“무, 물러나!”
버렌은 검을 쥔 손을 떨며 뒷걸음질 쳤다. 저 무시무시한 기운에 손발이 흔들렸다.
“아….”
루난 역시 떨리는 눈동자를 숨기지 못했다.
“녹전귀라.”
마르타는 반대로 입맛을 다셨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눈. 하지만 그녀 역시 혼자서는 역부족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귀찮게 만드는군.”
녹전귀의 입이 열렸다. 정말 오크 투사가 된 것처럼 살기 짙은 으르렁거림이었다.
“가볍게 놀고 갈 기회를 만들어줬는데, 그걸 바닥에 내던지다니, 멍청하기 그지없어.”
그가 등에 메고 있던 쌍도끼를 손에 쥐었다. 숨 막히게 만드는 압도적인 기파가 수련생들을 휩쓸었다.
도끼 위로 타오르는 붉은 기운. 중상위 몬스터만 사용한다는 투기였다. 에덴의 간부들은 전부 투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끄윽!”
“크흡!”
수련생들은 입술을 짓씹으며 간신히 서 있었다.
‘그 수련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쓰러졌을 거야.’
버렌이 손톱으로 손바닥을 긁었다. 리메르가 기세를 올리는 수련을 시키지 않았다면 지금 무릎을 꿇고 죽을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거다.
“수련생 주제에 내 기세를 버티다니, 지그하르트의 이름값은 하는구나.”
녹전귀가 히죽 웃었다.
“하지만 멍청해. 너희들이 죽는 이유는 제 능력도 모르고 함부로 나섰기 때문이다.”
“으음….”
버렌의 머릿속으로 라온의 경고가 들려왔다.
“그건 해봐야 알겠지. 징그러운 새끼야!”
마르타가 이죽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손을 뒤로 젖혀서 루난과 버렌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3초 뒤 동시에 공격하자는 수신호에 두 사람의 눈동자가 진하게 빛났다.
“너희가 무엇을 해도 소용없다.”
“주둥이에서 냄새나니까. 닥쳐!”
마르타가 중앙에서 돌진하고, 버렌과 루난이 각각 좌우에서 침투했다.
“세 명이 모인다고 될까?”
녹전귀가 들고 있던 도끼를 횡으로 휘둘렀다. 무시무시한 풍압과 함께 묵직한 투기가 공간을 휩쓸었다.
“크아아악!”
“꺅!”
“끄윽!”
버렌의 검이 부러지고, 루난의 튕겨 나갔으며, 마르타가 무릎을 꿇었다. 단 한 수에 벌어진 일. 세 사람과 녹전귀는 격 자체가 달랐다.
“아아….”
“저, 저 셋으로도 안 된다고?”
“그럼 어떻게….”
“라온은? 그 녀석은 어디 있어!”
“도, 도망쳤겠지. 저걸 보고 왜 오겠어!”
수련생들의 눈동자에 절망의 빛이 드리웠다. 자신들이 모두 덤벼도 이길 수 없는 저 셋이 한 수에 무너졌으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녹전귀가 퍼뜨리는 살기에 움직이기는커녕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었으니까.
“네놈들이 강해서 우리가 그냥 보내줬다고 생각했나?”
녹전귀가 더더욱 진한 살기를 일으키며 걸어왔다.
“너희는 지그하르트라는 거대한 나무에 올라탄 애벌레일 뿐이다. 능력도, 무력도, 정신력도 없는 주제에 뭐라도 되었다고 생각했나?”
그의 걸음마다 바닥에 투기가 담긴 불꽃이 타올랐다.
“끄으….”
버렌이 부러진 검을 쥐었고, 루난은 팔을 떨며 몸을 일으켰다.
“아….”
“제, 젠장!”
마르타는 아직 투지를 꺼뜨리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오러를 끌어 올렸다.
이 쓰레기 중에서는 그나마 네년이 가장 낫군.”
녹전귀가 가장 앞에 있는 마르타를 향해 다가갔다.
“하긴 그 시선을 알아낼 정도였으니까.”
그는 그르렁거리며 마르타의 앞에 섰다.
“으….”
마르타는 아직 오크 투사 갑옷의 기운을 풀지 못하고 입술을 깨문 채 몸을 떨었다.
“어차피 이리되었으니, 지그하르트의 새싹을 모조리 짓밟아버리는 게 옳은 일이겠지.”
녹전귀가 양날 도끼를 들어 올리며 살기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만 죽어라.”
“아!”
마르타가 눈을 부릅떴다. 녹전귀가 도끼를 내리치려는 찰나 놈의 뒤에 시꺼먼 그림자가 일어났다.
라온 지그하르트.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붉은 눈을 빛내며 검을 내리쳤다.
“아니. 네가 죽어라.”
시뻘건 불꽃을 두른 라온의 검이 녹전귀의 목을 향해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