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세부 마을 앞에 도착하자, 목책 위에서 목 하나가 삐죽 올라왔다. 세월이 내려앉은 회색 머리칼의 노인이었다.
“헉! 지그하르트 분들이십니까?”
경계심 가득하던 그의 세모꼴 눈동자가 수련생들의 가슴에 박힌 불꽃에 타오르는 검 문양을 보고, 동그랗게 말려 들어갔다.
“그렇습니다.”
선두에 서 있던 버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오셨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린 후 목책 좌측에서 문이 열렸다.
“세부 마을 촌장 이가함입니다! 지그하르트 검사분들을 환영합니다!”
회색 머리칼의 노인이 촌장이었던지, 먼저 나와서 고개를 숙였다. 그 뒤로 창과 검을 든 마을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는 아직 검사가 아니라, 수련생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지그하르트에서 오신 분들은 맞지 않습니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가함과 마을 사람들은 어린 티가 나는 수련생들에게도 바짝 고개를 숙였다. 지그하르트의 이름값이 이곳에도 미친다는 뜻이었다.
“험.”
“어음….”
수련생들은 처음 받아보는 환대에 기쁨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미숙함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초출의 모습이었다.
라온은 수련생들의 중간에 서서 기척을 죽였다. 주변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숲에서 느꼈던 시선을 찾아봤지만, 이곳을 벗어난 건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도망쳤다.
‘그런 거 같네.’
라스는 답답한 걸 참지 못해서 이렇게 한 번씩 답을 알려주었다. 갑자기 달려드는 것만 빼면 참 쓸만한 녀석이다.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일단 쉬시죠.”
이가함 촌장은 손을 들어 수련생들의 안내를 자처했다.
“아닙니다.”
버렌은 마을 안에 들어가서 멈춰 섰다.
“먼저 상황부터 듣겠습니다. 몬스터의 움직임을 말해주십시오.”
“수련생이라고 해도 지그하르트트는 지그하르트군요.”
촌장은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흐흠!”
버렌은 지그하르트답다는 말을 듣고서 어깨를 쭉 폈다. 무게를 잡더니, 금세 아이다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저길 봐주십시오.”
촌장이 우측의 산을 가리켰다.
“저 산은 저희 마을과 이름이 같은 세부산입니다. 매년 몬스터가 나타나지만, 숫자가 적어 저희끼리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몬스터의 숫자가 3배 이상 늘어서 저희가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3배 이상이면?”
“관측된 것만 100마리 이상입니다. 보이지 않는 놈들을 생각하면 200은 되겠죠.”
“200마리라, 알겠습니다.”
버렌은 세부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고 마음 놓고 계세요. 저 산에 있는 몬스터의 씨를 말려버릴 테니까.”
“오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미 모든 몬스터가 정리된 것처럼 버렌과 수련생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십시오. 세부는 지그하르트의 세력권에 있는 마을.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버렌은 마음이 들떠 얼굴이 붉어졌지만, 티를 내지 않고 몸을 돌렸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새벽. 몬스터들이 깨어나기 전에 산으로 향한다.”
“그럼 휴식하실 수 있게….”
“그전에.”
촌장의 목소리는 다시 한번 버렌에게 막혔다.
“내일 우리에게 산을 안내해줄 몸놀림이 빠른 사람을 준비해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촌장은 버렌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마을 회관으로 수련생들을 안내했다.
‘나름 괜찮네.’
라온은 버렌과 촌장의 대화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저 눈깔 꼬마라면 오자마자 무릎을 꿇으라고 할 줄 알았건만.
라스는 아쉽다고 중얼거렸다.
‘다 너 같은 줄 아냐.’
솔직히 말하면 라스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촌장에게 갑질할 줄 알았는데, 그는 임무에 대해서만 생각했고, 나름 대우도 해주었다.
‘다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오크와 고블린, 코볼트 정도는 자신이 없어도 버렌과 수련생만으로 처리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세부 마을 근처에 들어서자마자, 느꼈던 그 견제의 시선이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 시선은 저 산 쪽으로 사라졌었다.
‘내일이면 알게 되겠지.’
가문의 시험인지, 아니면 다른 세력이 무언가를 준비 중인 건지.
라온은 세부산 전체를 훑어본 뒤 가장 마지막으로 마을 회관에 들어갔다.
* * *
세부산 정상. 이불처럼 깔린 눈 위로 크고 작은 몬스터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다만 몬스터는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고, 젊은 남자 한 명이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스으윽.
남자가 오크 머리 형태의 투구를 손가락으로 돌리고 있을 때 녹색 복면을 뒤집어쓴 괴인이 바닥에서 솟구쳤다.
“누가 온 거지?”
“지그하르트입니다.”
녹색 복면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지그하르트? 그 정도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정식 검사가 아니라, 수련생들 같았습니다.”
“교관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하, 두 번째 임무로군.”
젊은 남자가 투구를 툭 두드리며 픽 웃었다.
“들키진 않았나?”
“물론입니다. 놈들은 제가 근처에 있었다는 것도 몰랐을 겁니다.”
“하긴. 수련생이 네 은신을 알아차릴 리가 없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맛을 다셨다.
“몬스터를 확실하게 통제했는데, 왜 저놈들이 온 걸까요?”
“마을 사람들은 변화에 민감하니까. 몬스터들의 숫자가 늘어나서 지그하르트에 지원을 부탁했겠지. 물건을 금방 찾을 줄 알고 너무 방심한 모양이야.”
젊은 남자는 고개를 젖히며 혀를 찼다.
“산 전체를 뒤져도 나오지 않았으니, ‘마석’은 결국 저 마을에 있는 듯합니다.”
“그렇겠지.”
“바로 공격하시겠습니까?”
남자는 돌리던 투구를 손가락으로 잡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예? 지그하르트의 새싹을 죽일 좋은 기회인데….”
“놈들을 죽이는 거야 간단하지만, 괜히 건드렸다간 지그하르트가 마석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될 수도 있다. 작은 걸 얻으려다 큰 걸 놓친다면 오히려 손해야.”
“그러면….”
“적당히 몬스터를 내어줘. 지그하르트의 어린 것들이 훌륭히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갈 수 있게 말이야.”
남자가 손에 든 녹색 투구를 머리에 썼다. 투구는 오크의 머리처럼 뻐드렁니와 살벌한 눈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그 눈에서 흉악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놈들이 돌아간 뒤에 세부 마을을 친다. 모조리 갈아 엎어버려.”
* * *
다음날 새벽.
라온은 수련생들과 함께 세부 산 입구 부근에서 대기했다.
‘나타났군.’
산 앞에 다가가자마자 어제 느꼈던 그 시선이 다시 찾아왔다.
‘서쪽인가.’
어제 한 번 느꼈던 덕분에 놈의 위치가 살짝이나마 잡혔다. 서쪽에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은 올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라온은 눈을 내리감고 기감을 펼쳐냈다. 산 주변을 훑어보았다. 크고 작은 기척들. 촌장의 말대로 오크와 고블린, 코볼트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암살자로 살아온 감각이 올라오지 않는 걸 보면 큰 위험은 없을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르니 감각은 계속 열어두었다.
“관찰 결과. 오크, 고블린, 코볼트 모두 확인되었다.”
버렌은 뒤를 돌아 모든 수련생과 눈을 마주쳤다.
“전투력은 오크가 뛰어나지만, 배웠듯이 고블린과 코볼트는 독침과 독 연기 같은 더러운 기교를 사용한다. 절대 방심하지 말도록.”
“예.”
몬스터들이 튀어나올 수 있기에 수련생들은 작게 대답했다.
“조별로 움직이는 게 가장 좋지만, 우린 실전 경험이 적다. 서로를 보조할 수 있게 함께 움직인다.”
그 말을 끝으로 버렌이 라온을 쳐다보았다. 허락을 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
라온은 말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버렌은 눈으로 인사를 보낸 뒤 다시 몸을 돌렸다.
“우리의 땅을 위협하는 몬스터들에게 지그하르트의 힘을 보여라!”
버렌이 검을 뽑으며 산으로 뛰어 올라갔다.
“가자!”
“으아아아!”
수련생들은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며 버렌의 뒤를 따랐다.
루난과 마르타는 자신의 시선을 확인한 뒤 그들과 함께 산속으로 들어갔다.
-멍청한 것들.
라스는 수련생들의 뒤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지금까지 기습을 준비해놓고, 저렇게 소리를 지르다니, 한심하기 그지없군.
‘첫 실전의 긴장을 함성으로 떨치려는 거야. 긴장하지 않는 게 기습보다 중요하니까.’
수련생들에겐 이게 첫 번째 실전이나 다름없다. 저 정도 실수는 이해할 수 있는 범주다.
-네놈도 몬스터 토벌은 처음인데, 그 심장박동은 뭐냐.
라스의 목소리에 짜증이 어렸다.
-백전노장의 심장 소리 같다. 지금 이곳만이 아니라, 많은 것을 보고 있어. 짜증 날 정도로 묵직한 소리다.
‘난 특이하니까.’
라온은 픽 웃으며 검을 뽑았다.
“그럼 가시죠.”
“아, 예!”
옆에 있던 갈색 머리 청년이 떨리는 턱을 끄덕였다. 길 안내를 맡은 마을 사람이었다. 자신의 역할은 전투가 아니라, 길잡이의 보호였다.
“크어엉!”
“카아악!”
비명이 들리는 방향으로 걸어가자, 이미 전투가 한창이었다.
“오크들을 막아서고, 고블린과 코볼트부터 처리해!”
버렌의 지시에 전위에 선 수련생들이 오크와 검을 맞대고, 뒤에 있던 수련생들이 앞으로 뛰어들어 고블린과 코블트를 베었다.
몬스터로 이루어진 녹색의 벽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폭풍처럼 몬스터를 학살하는 수련생 중에서도 특히 세 명이 눈에 띄었다.
바람의 기운을 검에 두른 버렌은 오크의 도끼를 그대로 베어버렸고, 루난은 주변에 냉기를 둘러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제어한 뒤 목을 갈랐다.
마지막으로 마르타는.
콰아앙!
검에 무시무시한 오러를 담아 눈앞에 있는 것을 아예 깨부숴버렸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산 전체에 있는 몬스터들을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꾸어어어!”
라온이 기감을 퍼뜨리고 있을 때 수련생들의 포위망을 벗어난 오크 두 마리가 도끼를 들고 달려들었다.
“히이이익!”
오크에게서 피어나는 피비린내에 길잡이가 떨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촤아아악!
라온은 그의 앞에 서며 검을 뽑아 그대로 그었다.
“끄륵….”
붉은 기운이 담긴 검이 허공을 질주하자, 오크의 목이 나무 열매처럼 툭 떨어졌다.
“으음.”
“…….”
버렌은 그 모습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고, 마르타는 검은 눈동자를 빛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라온은 입을 쩍 벌린 길잡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줬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가게 해드릴 테니까.”
* * *
올해로 25살이 된 칸바르는 최악의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 마을 회의에서 자신이 토벌대의 길잡이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괜찮을까?’
걱정이 앞섰다.
지그하르트의 토벌대가 마을을 구하기 위해 와준 건 고맙지만, 생각보다 너무 어려 보였다.
거기다 오늘 아침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붙은 검사는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 보이는 아이였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잘생겼지만, 덩치가 너무 작아 신뢰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별수 있나.
이미 결정은 내려졌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칸바르는 자신보다 작은 아이를 앞에 세운다는 민망함을 지닌 채 산을 올랐다.
산 초입에 들어가자마자 본 건 몬스터들을 휩쓰는 아이들의 칼날이었다.
힘겨운 싸움이 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오크와 고블린, 코볼트들이 아무것도 못 하고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미친!’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장정 5명이 모여야 겨우 상대할 오크의 목이 나뭇가지처럼 부러져 나갔다. 수련생 한 명 한 명이 괴물 그 자체였다.
‘이래서였군.’
촌장이 이 어린아이들에게 예의를 다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들은 평범한 자신들과 결이 다른 사람들이었다.
여유를 찾고, 마음을 놓고 있을 때 좌측에서 오크 두 마리가 달려 들어왔다. 놈들의 숨결에서 퍼지는 노린내에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으어어억!”
머리가 하얗게 질려 주저앉았을 때 조용히 있던 아이가 나섰다.
검을 뽑고, 긋는다.
이미 죽은 고기를 자르는 듯한 간결한 흐름에 다가오던 오크 두 마리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허….”
칸바르는 눈을 부릅뜨고 이빨을 탁탁 부딪쳤다.
‘뭐지?’
간단하고 가벼운 검술에 조금 전에 보았던 아이들의 막강한 무력이 모조리 잊혀졌다. 아이가 아니라, 수백 번의 실전을 겪은 노장을 보는 기분이었다.
검술에 무지했지만, 저 아이가 이 중에서도 남다르다는 건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 뒤로 산을 오르면서도 자신의 옆에 있는 금발적안의 아이는 있는 듯 없는 듯 서서 주변을 관찰했다.
대단한 활약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모든 상황을 살피며 위험한 상황을 사전에 차단했다.
‘이 아이가 진짜야….’
이건 가까이에서만 봐야 알 수 있다. 40명이 넘는 아이 중 최고는 가장 어려 보이는 이 아이였다.
“칸바르라고 했습니까?”
헉 소리를 내며 관찰하고 있을 때 금발 아이가 말을 걸어왔다.
“아, 예! 그렇습니다! 검사님!”
자신도 모르게 극존칭으로 대꾸했다.
“이 산에 내려오는 전설 같은 건 없습니까?”
“저, 전설이요?”
“네. 대단한 보물이 있다던가, 특별한 몬스터가 있었다던가.”
“아, 이, 있긴 있습니다. 몇백 년 전이긴 한데, 서쪽에서 내려온 고블린들의 왕과 기사단이 이 산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음, 보물 같은 건 없습니까?”
“고블린 왕의 반지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긴 했는데….”
“그렇군요.”
아이의 눈빛이 아주 잠깐 빨갛게 빛났다.
그거였어.
나지막하게 흐르는 혼잣말을 들은 순간 등골에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