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67화 (67/653)

67화

책장과 책상 그리고 탁자까지. 온통 검은색 원목 가구로 가득 찬 고풍스러운 방에서 사각거리는 필기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은 책상이었다.

설원처럼 반짝이는 은발이 흘러내리는 미중년이 백지만 가득한 책에 뭔지 모를 문양을 그려 넣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가 적은 문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서 책은 계속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중년인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문양을 새겨넣을 때였다.

툭.

그의 오른손등에 벌어져 있는 상처에서 핏방울 떨어져 책을 적셨다.

중년인의 손이 처음으로 멈췄고. 그의 시선이 백지를 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혈흔을 향했다.

쯧.

은발의 중년인이자, 남방의 지배자. 천검성 데루스 로베르트가 짧게 혀를 찼다.

‘아직도 아물지 않다니.’

17년 전 라온이라는 사냥개를 죽였을 때 벌어진 손등의 상처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질 좋은 영약을 먹고, 명성 있는 회복사나 신관을 불러봤지만, 누구도 이 검흔을 지우지 못했다.

‘그렇다고 벌어지지도 않지만.’

상처는 아물지도, 벌어지지도 않았다.

꼭 기억하고 있으라는 것처럼 처음 모습 그대로 유지만 되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죽은 망령을 기억이라도 해달라는 건가.”

데루스 로베르트가 피식 웃으며 손등의 상처를 매만졌다. 배어 나오던 피가 천천히 멎기 시작했다.

“미안하지만 난 돌아보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는 다시 만년필을 들고, 책에 문양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중천에 뜬 태양이 지고, 다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데루스는 책상에 앉아 끊임없이 문양을 새겼다.

데루스가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 흑룡이 그려진 책 표지가 보였다. 꼭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되었군.”

데루스 로베르트가 완성된 책을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대계도 얼마 남지 않았어.’

그가 책에 손을 올리자, 표지에 그려진 흑룡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     *      *

새해가 밝았다.

15살이 되어 미려하다는 단어가 그대로 외형으로 녹아내린 것 같은 라온이 숯가마가 있던 자리에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그의 어깨 위로 붉은 아지랑이가 끝없이 피어올랐고, 모공에서는 서늘한 한기가 뿜어졌다.

냉기와 열기가 교차하며 숯가마의 주변은 안개 같은 뿌연 연기가 가득했다.

라온은 그런 신비한 상황을 모르는지 떠오른 태양이 서산으로 내려갈 때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석상이라도 된 듯 움직이지 않던 라온의 변화는 달이 떠오를 때가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어깨 위로 피어나던 붉은 아지랑이가 뻘건 불꽃이 되었고, 모공에서 흘러나오던 김이 냉기가 되었다.

빠직!

화염과 냉기가 경합하며 스파크가 튀긴 순간.

라온이 두 눈을 떴다. 벼락이 떨어진 듯한 붉은 눈동자가 밤의 어둠을 꿰뚫었다.

꾸욱.

그는 주먹을 말아쥔 채 들뜬 숨을 흘려냈다.

“드디어.”

꽉 잠긴 목소리 위로 반투명한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혹한의 저주 한 가닥이 사라졌습니다.]

[만화공이 3성에 올랐습니다.]

[혹한의 냉기가 3성에 올랐습니다.]

[설화의 감각이 3성에 올랐습니다.]

[화속성 저항력이 3성에 올랐습니다.]

[소드 익스퍼트 - 초입의 단계에 오르셨습니다.]

[오러 운용 속도가 빨라집니다.]

[모든 능력치가 크게 상승합니다.]

[검술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보법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쭈르륵 떠오르는 메시지.

“드디어 익스퍼트인가.”

라온은 메시지를 확인하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도 수련을 계속한 덕분에 새해가 된 지 한 달 만에 익스퍼트의 단계에 올랐다.

하급도 아닌 초입이지만, 성취의 기쁨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익스퍼트? 소드 마스터도 하찮은 벌레일 뿐이건만, 고작 익스퍼트가 되었다고 좋아하는 게냐?

라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끼었다.

“15살에 익스퍼트가 된 건 드문 일이니까.”

익스퍼트가 뛰어난 경지임은 분명하지만, 대륙 전체로 보았을 때는 강자라 불리기 힘들다.

하지만 그게 15살의 아이라면 일반적인 가문이나, 왕국만이 아니라. 육황이나 오마에서도 경악할 만한 성취였다.

-나이? 누가 전장에서 나이를 따지는 건 멍청이들 뿐이니라. 나이와 상관없이 약자는 약자일 뿐이다.

“그 말도 맞긴 하지. 전장에서 나이가 어리다고 봐주는 멍청이는 없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픽 웃었다.

“하지만 익스퍼트가 되었다고 멈춰 있을 생각은 없어.”

라온은 이죽거리는 라스를 밀어내고 일어섰다.

‘가벼워.’

항상 전신을 꽉 조이고 있는 듯한 냉기의 족쇄가 또 한 가닥 풀린 덕분일까. 몸이 나뭇잎처럼 가볍고, 활력이 넘쳤다.

“상태창.”

라온은 몸을 가볍게 움직여본 뒤 상태창을 불러왔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최초의 승리.

상태 : 혹한의 저주(다섯 가닥)

특성 : 분노, 불의 고리(4성), 수속성 저항력(4성), 설화의 감각(3성) 만화공(3성), 혹한의 냉기(3성), 화속성 저항력(3성). 블리딩 커스(1성).

근력 : 55

민첩성 : 56

체력 : 57

기력 : 40

감각 : 62

상태창을 보자마자 입가가 절로 올라갔다. 만화공과 혹한의 냉기, 화속성 저항력의 단계가 올라갔고, 능력치도 크게 상승했다.

이런 단순한 수치만이 아니라, 마나 회로가 늘어나서 한 번에 운용할 수 있는 오러의 양과 운용 속도도 빨라졌다.

‘익스퍼트 초입이지만, 하급 정도는 되겠지.’

보여지는 등급이나, 수치보다 뛰어난 무력을 갖췄다는 생각에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한심하도다. 본왕의 손가락 하나. 아니, 손톱조차 버티지 못할 무력이다.

“그렇긴 하지.”

라온이 빙긋 웃었다.

-그런데 왜 웃는 것이냐.

“예전 같으면 손톱이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을 테니까. 네가 나름 성장했다고 인정해준 거 아니야?”

-본왕이 인간 따위를 인정하겠느냐!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거 보니까 맞네. 너랑 오래 같이 있다 보니, 네 생각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거든.”

-본왕을 뚫어보려는 인간이라니, 뼈를 씹어먹어도 부족하다!

라스의 냉기가 해일처럼 솟구쳤다.

화아아아!

라온은 3성에 오른 만화공을 일으켜 라스의 냉기를 모조리 녹여버렸다.

“그게 다야? 너 빨리 힘을 회복하지 못하면 조만간 나한테 먹히겠는데?”

-흥! 헛소리를 듣고 있으니, 옛 생각이 나는군.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성에 찾아와 시비를 거는 마족들이 있었….

“아, 난 몸이나 풀러 가야겠다.”

-어딜 가느냐! 본왕의 말을 들어라!

*     *      *

“훈련 끝.”

“수고하셨습니다.”

리메르의 간결한 목소리에 라온이 탁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수련생들은 라온을 따라 감사 인사를 외쳤다.

“오냐.”

리메르는 히죽 웃으며 손을 휘적였다. 귀찮아서 대충 대답하는 것 같지만, 그 나름의 인사였다.

‘이젠 모두 익숙해진 모양이군.’

라온은 리메르와 교관들 그리고 수련생들을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3년이 넘는 시간을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보내며 모두는 상당히 가까워져 있었다.

제일 까탈스러웠던 버렌이나 마르타도 이제 리메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조금 너그러워졌다.

“교관님. 오늘 20분 지각하셨으니, 훈련 20분 추가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물론 지각에 관해서는 여전히 타협이 없었다.

“그건 내일 보충하자. 오늘은 충분해.”

리메르는 어색하게 웃으며 단상에서 내려갔다. 뒷걸음질을 치는 모양새를 보니, 대충 말을 흘리다가 도망칠 게 분명했다.

“당번은 연무장 정리를 시작하도록.”

라온은 여전하다고 중얼거리며 뒤를 돌아 정리를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당번인 도리안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청소도구가 있는 구석으로 달려갔다.

“허억!”

그는 도구함을 열다 말고 옆에 선 사람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뭐야? 내가 당번인 게 꼬와?”

검은 머리칼이 다시 어깨를 적시는 마르타가 눈썹을 내렸다.

“아, 아뇨. 절대! 영광입니다….”

“쯧.”

그녀는 혀를 한 번 차 주고서 연무장을 다지는 기구를 들고 도리안보다 먼저 당번 일을 시작했다.

예전의 마르타라면 잡일을 방계나 추천생들에게 떠넘기고 직계 수련에 갔겠지만, 라온의 지시 때문에 당번 일에서 도망치지 못했다.

“다들 구경났어? 정리해야 하니까 다른 곳으로 꺼져!”

“으허헉!”

“어억!”

마르타가 쿵하고 발을 굴렀다. 강력한 진동.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던 수련생들이 황급히 출구로 달려갔다.

“히이익!”

그녀의 옆에 있던 도리안은 깜짝 놀라 주저앉았다.

“여전하구만, 성격이 바뀐 건 너한테만인가 보다.”

라온은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리메르가 실실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버렌의 잔소리에 도망가신 거 아닙니까?”

“아, 까먹은 게 있어서 다시 왔어.”

“까먹….”

“모두 주목!”

리메르가 손뼉을 치자, 마르타의 윽박에 도망치던 수련생들이 모두 멈춰 섰다.

“할 말이 있다.”

수련생들이 다가오자, 리메르는 다시 단상 위로 올라갔다.

“내가 엄청 중요한 일을 까먹었거든.”

그는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또 뭡니까.”

“아, 너희들에게 두 번째 임무가 내려왔다.”

순간 연무장 전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임무!”

“그걸 까먹어?”

“저 인간은 정말….”

설마 임무를 까먹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수련생들이 이를 갈았다.

“임무라….”

라온이 눈을 내리감았다.

‘생각보다 길었군.’

첫 번째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쳐서 금방 두 번째 임무가 올 거라 생각했는데, 반년 이상이 지났다.

수련생에게 임무는 그렇게 자주 있는 기회가 아닌 것 같다.

‘지그하르트가 아이들을 생각보다 여리게 키우든지 아니면 임무가 굉장히 어렵던지.’

둘 중 하나. 개인적으로는 후자이길 바랐다. 그게 더 큰 성장을 할 수 있는 기회일 테니까.

“지그하르트 남동쪽에 있는 세부 마을 근처에서 오크들이 나타난다고 하더군.”

리메르는 텅 빈 허공에서 손짓으로 세부 마을을 가리켰다. 지도를 가져오지 않는 걸 보니, 귀찮은 게 뻔했다.

“세부 마을에 가서 사람들을 위협하는 오크와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마을을 지키는 게 너희들의 임무다. 즉, 마을의 보호와 몬스터 토벌이지.”

“오크!”

“몬스터 토벌이다!”

몬스터 토벌은 호위나, 던전 탐사와 비교하면 가장 쉬우면서도 시원한 임무다. 첫 임무였던 산적 토벌보다 더 쉬웠기 때문에 수련생들은 환호를 질렀다.

“임무를 좋아하다니, 어리구만.”

리메르는 끌끌 혀를 차고서 말을 이었다.

“첫 임무와 달리 교관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세부 마을에 가는 건 너희들뿐이라는 거지. 임무의 시작과 끝 모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거야.”

“질문이 있습니다.”

버렌이 손을 쭉 올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셨기에 저희만 가는 임무를 까먹고 이제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음, 그건 질문이 아니라, 질책이잖냐.”

리메르가 찔끔 땀을 흘렸다.

“후우!”

버렌은 나무껍질처럼 인상을 꾸기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진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저희끼리만 움직인다고 하셨는데, 만약 극복할 수 없는 위기가 찾아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겁니까.”

“그걸 파악하는 것도 너희들의 능력이다. 무리한 임무라면 포기하고 돌아오는 것도 실력이지. 그렇기에….”

리메르의 시선이 수련생을 쭉 훑다가 라온에게서 멈췄다.

“이번에도 리더의 능력이 중요하다. 위기 상황에서 무력으로 돌파해야 할지, 계략을 써야 할지 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야 할지. 그걸 읽어야 한다.”

모두의 시선이 리메르의 녹색 눈동자를 따라갔다.

“이, 임무에서 도망을 치면 문제가 되지 않나요?”

이번에는 도리안이 손을 들어 올렸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 고블린을 마주하고 도망치면 감점에 망신당하는 거고, 오마 중 한 세력과 마주하고 물러났으면 칭찬을 받아 마땅하지.”

“오오!”

도망쳐도 된다는 소리에 도리안이 탄성을 터트렸다. 녀석의 겁쟁이 기질은 해가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이해했습니다.”

버렌은 마지막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낮게 빛나는 눈. 인정과 조그마한 부러움을 간직한 표정이었다.

“출발은 모레 새벽. 오늘이랑 내일 훈련은 쉬고, 출발 준비를 단단히 하도록.”

“자, 자, 잠깐! 이틀 뒤요?”

도리안의 눈동자가 메뚜기처럼 좌우로 뛰었다.

“응. 이틀 뒤.”

“왜 이렇게 촉박해! 너무 빠르잖아요! 오늘 다 갔으니, 하루밖에 안 남았네!”

“몬스터 토벌은 호위나, 던전 탐사에 비해 한시가 급한 임무지. 너희가 늦으면 세부 마을에 사상자가 나올 거다.”

“그럼 진작 좀 말하던가!”

버렌이 다시 폭발해서 발을 굴렀다.

“으음….”

“모레라니….”

“그만.”

라온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연무장의 중심을 꿰뚫었다.

“교관님이 예전부터 말했잖아. 임무는 언제 어떻게 내려올지 몰라. 지금은 당황하고 따질 때가 아니라, 임무 준비를 할 때다. 너희가 따질수록 교관들의 의도에 넘어가는 거다.”

“으음….”

“그건 맞지.”

“그래. 일단 움직이자.”

버렌과 함께 열을 올리던 수련생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메르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언젠가 저 귀 뽑는다.”

마르타는 라스와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루난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멍하니 서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먹을 아이스크림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야생의 오크는 실전 훈련 때 상대했던 오크보다 사납고, 체력이 강해. 숫자도 많아서 일대다수의 싸움이 되겠지. 보법을 익힌 우리라면 방어보다는 회피 위주로 싸우는 게 유리해. 장비를 최대한 가볍게 하고 모레 새벽에 이곳으로 모이도록.”

라온은 그렇게 말하고서 몸을 돌렸다.

“응.”

“쯧….”

루난은 어린 새처럼 고개를 끄덕였고, 마르타는 혀를 차고 연무장을 떠났다.

“알겠습니다!”

라온을 따르는 수련생들은 우렁차게 대답하고 기숙사로 뛰어갔다.

“음….”

버렌은 잠시 교관들을 노려보았지만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방계들은 그 뒤를 따라 본관으로 향했다.

“이젠 누가 봐도 리더처럼 보이는군.”

리메르는 팔짱을 낀 채로 씩 웃었다. 시선에 담긴 건 당연히 라온의 뒷모습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 아이가 저렇게 변할 줄은 몰랐어요.”

“최하위에서부터 올라와서 그런지 생각도 열려 있습니다.”

“제가 많은 아이를 봐왔지만, 지위나 재능이 아니라, 노력으로 아이들을 따르게 만든 수석은 처음입니다.”

교관들은 리메르의 옆으로 다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 라온을 인정하고 있었다.

“음, 저도 준비해야겠네요. 아이들보다 먼저 출발해야 하니까.”

막내 교관이 떠나는 아이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예전에는 정말 수련생들만 임무를 보냈지만, 글렌이 마를 벗어난 이후로 교관들이 몰래 따라가는 게 최근 두 번째 임무의 규칙이었다.

“아니.”

리메르가 막내 교관의 어깨를 툭 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간다.”

“예?”

“에엑?”

“저, 정말이십니까?”

교관들이 눈을 부릅떴다. 교육도 귀찮아하는 인간이 임무에 따라간다고 하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

“저기 수석 교관님. 늦잠 주무시다가 아이들이 위험할 때 못 가면….”

“아잇! 날 뭘로 보고! 나 못 믿어?”

리메르가 홱 손을 내리쳤지만, 교관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훈련기간 동안 그가 지각하지 않은 적은 다섯 번도 되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내가 갈 테니까. 다들 푹 쉬고 있어.”

리메르는 그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연무장을 나가는 그에게서 한동안 푹 자야지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고 싶으면 여기서 주무시지. 왜 임무를 따라간다고….”

“여기 있으면 가주님이나, 다른 대주들이 방해하니까 나가는 거겠지.”

“하….”

교관들은 리메르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헛바람을 내뱉었다.

“정말 대단한 게으름뱅이야.”

라온은 이틀 뒤가 임무 시작임에도 밤 훈련까지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방 앞에는 경량화 마법이 걸린 배낭이 있었다. 임무에 가져가라고 준비한 가방 같았다.

‘신경 쓰지 않겠다는 티를 팍팍 내는군.’

이런 가방은 원래 직접 주는 게 이렇게 방 앞에 놔둔 걸 보면 관심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     *      *

“좋지.”

라온이 피식 웃으며 가방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교관들이 오든 말든 상관없다. 어떤 임무라도 완벽하게 끝내고 돌아오면 그만이다.

-건방진 녀석. 세상일이 전부 다 네 마음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느냐. 생각지도 못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뭐, 그렇지.”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의 말대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다만 웬만한 일은 자신의 손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그리 와닿지 않았다.

‘네가 나한테 당한 것처럼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는 거지.’

-정말이지 그 주둥이를 찢고 싶구나.

‘불가능한 일이지.’

라온은 픽 웃으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가벼운 가방까지 받았으니, 짐을 꾸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똑똑.

한참 짐을 싸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다들 출발 준비로 바쁠 시간이라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헉!”

라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벌렸다. 유일하게 그를 당황 시킬 수 있는 두 사람. 실비아와 헬렌이 붉어진 얼굴로 서 있었다.

“라온! 임무에 나가는 거면 별관으로 와서 엄마한테 말은 해줘야지!”

“어떻게 그걸. 설마 이번에도 도리안이?”

“리메르 님이 알려주셨어!”

실비아가 허리춤에 손을 떡 올리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 엘프. 진짜….’

속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실비아나, 헬렌이 걱정할까 봐 일부러 숙소로 온 건데, 직접 찾아가서 말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미안해,”

안 들켰다면 모를까 이미 들켰으면 변명할 필요 없었다. 별관에 갈 시간은 있었지만, 교관 없이 임무에 나간다고 말하면 불편한 상황이 올까 봐 피한 건 사실이었다.

“…….”

실비아는 말없이 입을 삐죽이고, 콧등을 찡그렸다. 한동안 잔소리가 퍼부어질 것 같아서 눈을 감으려 할 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온."

“으응?”

“수석은 그저 인사만 하는 자리가 아니라, 수련생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야만 하는 자리야.”

실비아의 눈동자는 평소와 다르게 진중한 빛으로 반짝였다.

“너 혼자만이 아니라, 수련생 모두를 생각하고 움직여야 해. 네 선택에 아이들의 목숨이 달렸으니까.”

“어. 응.”

라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이 나올 줄은….’

혼나고 잔소리를 들을 줄 알았지만, 저런 조언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몬스터 토벌은 쉬워 보이면서도 어려운 임무야. 마을 사람들은 계속 고생하지 않게 확실하게 뿌리 뽑고 와.”

실비아의 말이 맞다. 몬스터들의 번식은 굉장히 빠르기에 한 번 처리할 때 확실하게 끝내야 한다.

“임무에 나간 이상 넌 수련생이 아니라, 지그하르트의 검사라는 걸 항상 마음에 품고 있으렴.”

그녀가 자세를 낮춰서 눈을 마주쳤다. 별빛처럼 일렁이는 눈망울이다.

“엄마가 말했지? 예전 지그하르트는 명예와 부끄러움을 알고, 약자를 위해 강자에게 검을 드는 사람이었다고. 엄마는 라온이 그 옛날의 지그하르트 다운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어.”

실비아가 라온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화난 거 아니었어?”

“화났어! 걱정도 되고! 아주 답답해! 그렇지만!”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다시 입술을 삐죽인다.

“지금은 널 혼낼 때가 아니니까. 나중에 돌아오면 잔소리들을 각오하고 있어.”

“응.”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비아 역시 검사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지금이 혼낼 때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네가 수련을 시작하면서 밝아진 건 기쁘지만, 항상 걱정을 놓을 수가 없다니까.”

실비아가 라온을 꼭 끌어 안아주었다. 떨리는 손끝에서 그녀의 걱정이 가득 묻어나왔다.

그녀는 몇 가지 조언을 더 해준 뒤 돌아갔다. 각오한 만큼 시간을 뺏지도 않았고, 혼을 내지도 않았다.

아들을 걱정하면서도, 검사로서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그녀의 목소리가, 그녀의 말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라온은 짐을 챙기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를 부러워하듯 달빛이 방에 스며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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