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마르타 지그하르트는 전방을 향해 달리며 라온에게 들은 지시를 생각했다.
-너와 방어 검진의 상성은 좋지 않아. 상대를 바꾸는 게 가장 좋다.
‘절대 안 해!’
상대에게 도망치라는 말에 바로 욕설을 내뱉었다. 라온은 당황하지 않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른 지시를 내리지. 검진을 부숴라.
-검진을?
-상대의 검진은 완벽하지 않아. 아니 완벽할 수가 없지. 수련생 수준이니까.
-어떻게 완벽하지 않다는 건데?
-그들은 9명의 오러를 응집시켜서 널 막았다. 즉, 검진 내부에서 오러의 이동이 일어난다는 뜻이지.
-그러면….
-그래. 그 틈을 노린다면 많은 오러를 소모한 지금의 힘으로도 검진을 부술 수 있다.
그 말에 등줄기로 소름이 돋아올랐다.
‘이놈은 뭐지?’
앉은 자리에서 적의 약점을 파악하고, 공략법을 내놓다니, 뭐 이런 괴물이 있나 싶었다.
-나는 약점이 아니라, 정면에서 이기길 원하는데.
라온의 말에 압도되기 싫어서 생각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 제 체력을 찾고, 오러를 회복한다면 이길 수 있겠지. 넌 뛰어나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역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체력과 오러가 떨어진 지금 그 체력 괴물들을 이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말했듯이 이건 일대일 대련이 아니라, 팀의 대결이다. 선택해. 확신도 없는 승리를 위해 자존심을 선택할지 팀의 승리를 선택할지를.
그 말을 들은 마르타는 대답 없이 일어섰다.
‘예전이라면 그런 말 따위 무시했겠지.’
라온에 패배하기 전 자만으로 넘치던 시절이라면 녀석이 뭐라 지껄이더라도 계속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의 패배를 경험했고, 이번에는 두 번째 패배를 당할지도 모른다. 지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이기는 게 나았다.
‘던이라고 했었지.’
멀리서 아까 싸웠던 던이라는 놈이 보였다. 바위처럼 단단한 기세는 여전했다. 당장에 주먹으로 깨부수고 싶었지만, 어금니를 깨물며 참았다.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도 온 건가? 멍청하군.”
“주둥이를 함부로 놀렸다간 다치게 될 거야.”
옛날의 나처럼.
마르타가 땅을 박차고 던에게 뛰어들었다.
“4형!”
뒤에 있던 수련생들이 던의 옆으로 붙으며 오러를 모았다.
“음!”
마르타는 들어 올린 검을 내리치지 않고 기감을 펼쳤다.
6 연무장 수련생들의 오러가 던에게 모여드는 게 느껴졌다.
‘정말 느리잖아.’
라온의 말대로다. 오러의 크기가 크다 보니, 그 움직임이 굼벵이처럼 느렸다.
“흐읍!”
마르타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우측으로 돌았다.
“소용없다!”
던은 허리를 돌려 앞을 막아섰다. 이전과 같은 구도. 하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무지성으로 검격을 때려 박던 마르타가 아직 오러가 응집되지 않은 던의 우측 옆구리를 향해 검을 내리친 것이다.
콰아앙!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강렬한 파동이 일어났다.
그 충격에 마르타가 뒤로 밀려났지만, 뿌리 깊은 나무처럼 단단하던 던과 수련생들의 검진도 크게 출렁였다.
“크흡!”
“크으….”
던과 수련생들이 신음을 흘리며 흔들리는 검진을 다잡았다.
마르타의 눈동자가 흑진주처럼 번쩍였다.
‘그 녀석의 말이 맞았어.’
라온의 말대로다. 아직 오러가 모이지 않은 곳의 방어력은 다른 곳보다 확연히 낮았다.
“정말 이게 공략법이었군.”
헛웃음이 나왔다.
공략법이 너무 쉬워서?
아니다. 깃발이 꽂혀 있는 거점에서 저 검진의 약점을 알아본 라온 지그하르트. 그 괴물 녀석에게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한 번 우위를 점했다고 자만하지 마라!”
“한 번? 지랄하네. 앞으로 계속이다!”
마르타가 기합을 내지르며 앞으로 뛰어들었다.
공격하는 척하며 좌측으로 빠진 뒤 오러를 이동시키지 못한 던의 하체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쩌어엉!
던이 재빠르게 검을 내리찍었지만, 상체가 크게 흔들리며 검진을 이룬 수련생들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이제 다 끝났어!”
마르타가 야수와 같은 기세를 뿜어내며 검진이 깨진 던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버렌은 검을 든 손목을 빙글 돌리며 고개를 들었다.
방계에서 손꼽히는 수련생 데칼이 사나운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는 졌지.’
데칼과 일곱 명의 수련생이 동시에 달려들고, 검술을 파훼하는 감각검을 사용하니 놈들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인원이 차이 나다 보니, 다른 녀석들도 도와줄 상황이 되지 않아서 계속 밀리기만 했다.
5 연무장을 쓰러뜨리기 위해 확실한 계획을 짰다는 게 정말이었다.
‘이젠 그냥 당하진 않아.’
후퇴는 한 번으로 족하다. 쓰러지더라도 저놈들을 모조리 때려눕힐 것이다.
“천하의 버렌 지그하르트 님이 도망치다니. 역시 다굴에는 장사가 없나 봅니다.”
데칼이 씩 웃었다.
“이번에는 검사답게 끝까지 싸워주시길 바랍니다!”
그의 손짓에 뒤에 있던 수련생들이 쥐떼처럼 달려들었다.
“흐아압!”
데칼 역시 중심을 파고들어 검을 내질렀다.
여덟 명이 휘두르는 검은 조화롭지는 않았지만, 하나하나가 가장 약한 빈틈을 노려왔다.
“후욱!”
버렌이 오러를 끌어 올리며 보법을 밟았다. 물 흐르듯이 옆으로 움직이며 현상 검법을 펼쳤다.
그의 검이 우측의 데칼을 노리고 휘어졌다.
“지금이다!”
“몰아쳐!”
버렌의 검이 뻗어나가는 순간을 노리고 감각검을 익힌 수련생들이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건 버렌이 깔아놓은 함정이었다.
퍼어억!
데칼을 노리던 수련검이 초승달처럼 휘어지며 안으로 들어온 수련생들의 팔목과 가슴을 후려쳤다.
“크헉!”
“아악!”
순식간에 두 명의 수련생들이 손목과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상태를 보니 저대로 이탈이다.
“흐읍!”
버렌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가람 보법을 밟아 이동하며 다시 현상 검법을 내리쳤다.
어깨 전체를 사용하는 큰 동작에 세 명의 수련생들이 본능처럼 빈틈을 찔러왔다.
‘걸렸어.’
버렌의 푸른 눈동자가 번쩍였다. 팔꿈치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다가온 수련생들의 가슴을 사정없이 찍어버렸다.
뻐어어억!
한 번의 검격으로 세 명의 수련생들이 날아갔다.
“크헉!”
“으윽….”
끝에 맞은 녀석은 일어섰지만, 두 명은 이미 기절한 상태였다.
“이, 이런!”
데칼이 뒤늦게 쫓았지만, 버렌은 옆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대, 대체 뭡니까! 갑자기 허초를 섞다니!”
“그러게 말이야.”
버렌이 콧등을 찡그렸다.
‘허초를 섞는 것만으로 이렇게 달라질 줄이야.’
감각검은 체계가 아닌, 본능에 의지하는 검술.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한 수련생들은 허초에 낚여서 파닥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놈은 이걸 어떻게 안 거지?’
라온은 분명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는 녀석의 감각과 지식에 닭살이 돋았다.
‘마르타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겠지.’
아마 이 아래에서 싸우고 있는 마르타도 똑같은 생각을 할 게 뻔했다.
‘양파 같은 놈.’
라온은 이만큼 알았다 싶으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양파처럼 까도 까도 색다른 녀석이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흐아압!”
데칸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남은 3명의 수련생들도 함께 돌진해왔다.
후우웅!
버렌이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위력은 강했지만, 여러 개의 빈틈이 보일 정도로 동작이 컸다.
“허초다. 신경 쓰지 마! 어?”
데칼이 눈을 부릅떴다. 무시하고 나아가려 했지만, 버렌이 펼친 검격의 궤도는 변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진짜다.”
“이, 이런!”
뒤늦게 수비로 전환했지만, 이미 늦었다.
콰아앙!
막강한 위력의 검격에 데칼이 수련검을 부러뜨린 채 뒤로 날아갔다.
“대결은 이미 끝났다.”
버렌이 남은 수련생들을 보며 푸른눈을 빛냈다.
“우리가 이겼어.”
그 괴물이 있는 이상 5 연무장은 질 수가 없다.
* * *
“이, 이게 뭐야!”
메툰은 동시다발적으로 밀리기 시작하는 6 연무장 수련생들을 보며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한곳이 밀리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위, 중앙, 아래 세 곳이 모두 밀리고 있었다. 그것도 한 번씩 이겼던 상대들에게.
“내가 말했잖냐. 아직 안 끝났다고.”
옆에 드러누운 리메르는 얄밉게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너 무슨 짓을 했지?”
“내가 한 게 아니라, 라온이 했지.”
“뭐?”
“네가 보기 전에 라온이 저 녀석들에게 조언을 했거든. 그게 잘 먹혀든 거지.”
“고작 수련생의 조언 하나에 상황이 이렇게 바뀐다고?”
“고작 수련생이 아니라, 라온의 조언이니까.”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홀로 깃발을 지키고 있는 라온을 가리켰다.
“수련생 중에 라온을 따르지 않는 녀석도 있고, 라온을 싫어하는 녀석도 있지만, 저 녀석의 무력과 판단은 모두 믿어. 아마 오늘 이후에는 신의 목소리처럼 따르겠지.”
“으음….”
메툰이 신음을 흘렸다. 그 말대로라면 신뢰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신뢰를 얻은 것보다 그의 조언이 확실하게 먹혀들어 갔다는 게 더 놀라웠다.
“무슨 조언이었지?”
“궁금해? 궁금하면 금화를… 아, 알겠어.”
리메르는 사정없이 굳어진 메툰의 표정을 보고 손을 저었다.
“일단 위에서는….”
그는 메툰에게 라온이 수련생들에게 해주었던 조언을 말해주었다.
“미친….”
메툰이 손가락을 바르르 떨었다.
‘수련생이 어떻게 그런 조언을 할 수 있지?’
하나도 버릴 게 없는 완벽한 공략법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저 먼곳에서 기감만으로 상대의 약점을 파악했다는 점이다.
리메르의 말이 맞았다. 거만한 건 라온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그는 케인보다 더 감각이 뛰어나다고 말할 자격이 있었다.
‘다만.’
메툰이 움직이기 시작한 케인을 내려다보며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대결은 아직 안 끝났어.’
* * *
깃발 아래에 앉아 있던 라온이 두 눈을 떴다.
‘다 잘하고 있군.’
기척은 죽여 놓았지만, 전황을 지켜보기 위해 활짝 열어놓은 기감을 풀며 빙긋 웃었다.
데칼을 꺾은 버렌은 감각검을 익힌 수련생들을 폭풍처럼 몰아쳤고, 마르타는 검진을 깨부수고 남은 수련생들을 후려 패고 있었다.
그리고 루난은….
상대로 나온 6 연무장의 상위 수련생과 빙판 대결을 펼치는 중이었다.
‘뭐. 상관없지.’
지지는 않을 것 같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자, 그럼….”
라온이 일어섰다. 가볍게 몸을 풀자, 수풀이 흔들리고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검사가 나타났다.
‘케인 지그하르트.’
6 연무장의 수석이자, 자신보다 2살이 많은 직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럴 줄 알았지.’
모든 방향에서 밀리고, 자신의 기척은 드러내지 않았으니, 저 녀석이 움직일 방향은 하나였다.
상대의 깃발을 챙기는 것.
“역시 이곳에 있었나. 라온 지그하르트.”
케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듯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수련생들에게 마법을 부릴 줄은 몰랐다.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헛소문이었군.”
그가 천천히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다만 여기서 끝이다.”
“끝?”
“네 오러가 화속성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과 함께 케인의 검날 위로 붉은 화염이 타올랐다.
“아쉽게도 내 오러는 최상급 화속성의 오러고, 오러량은 정식 검사 이상이다. 상성 상 넌 날 이길 수 없다.”
“상성이라.”
라온이 픽 웃으며 검을 뽑았다. 검날을 빨갛게 물들이던 만화공의 기운이 작은 꽃을 피워냈다.
화아아!
케인의 검에 타오른 불꽃보다 훨씬 작았지만, 색의 진하기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 가문은 싸우기 전에 참 말이 많다니까.”
라온이 불꽃과 같은 색의 눈동자로 선언했다.
“덤벼. 불꽃 한 송이가 네 불길을 집어삼키는 걸 보여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