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내기?”
리메르가 메툰의 위아래를 살피며 눈매를 좁혔다.
“갑자기 무슨 내기를 하자는 건데?”
“5 연무장이 정말 지그하르트 수련생 중 최강인지를 증명하는 내기.”
“아아, 맞짱 뜨자고?”
“지그하르트의 교관 된 자로서 그런 상스러운 말은 사용하지 마라.”
“싸우자는 거나, 맞짱이나. 결국 붙자는 말이잖아. 직관적으로 가자고.”
리메르가 픽 웃으며 빈 맥주잔을 입에 털었고, 메툰은 석상처럼 입매를 굳혔다.
두 사람은 같은 수석 교관이었지만 성격이 너무나도 달랐다.
“오, 리메르랑 메툰이 붙는 건가?”
“쟤네들이 붙는 게 아니라, 제자들을 붙인다는 거잖아!”
“그럼 5 연무장이랑 6 연무장? 대박인데?”
주점에 있던 사람들이 모조리 일어나 리메르와 메툰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내 전 재산을 메툰 쪽에 건다!”
“에이, 이건 리메르지! 마르타, 버렌, 루난에 그 셋을 이긴 라온까지 있잖아!”
“맞아. 6 연무장에 방계는 많지만, 직계는 한 명도 없다고. 해보나 마나 5 연무장이 이길걸?”
“너희들이야말로 정보가 깡깡이네. 얼마 전에 6 연무장에 케인 님 들어가신 거 몰라?”
직계가 들어왔다는 말에 주점 사람들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어? 임무 나갔다가 부상당하신 거 아니었어?”
“그게 벌써 1년하고도 6개월 전이다. 인마.”
“오, 그럼 해볼 만하겠는데? 케인님도 재능 넘치기로 유명하셨잖아. 특히 감각이랑 오러의 순도가.”
“할 만한 정도가 아니라. 6 연무장이 더 유리하지. 케인 님이랑 그분을 따르는 방계들은 이미 16살이라고.”
“이거 재밌겠다!”
“가자! 당장 판을 올려!”
주점 사람들은 이미 내기가 성립된 것처럼 5 연무장과 6 연무장의 이름을 외치고 돈을 꺼내기 시작했다.
“와, 이거 안 하면 맞아 죽겠는데?”
리메르는 피식 웃었다. 말과는 달리 즐거운 얼굴이다.
메툰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건지 묵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맞짱 뜨자는 거야?”
“맞짱이 아니라….”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가고.”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오웬 왕국 때문인가?”
리메르가 턱을 긁적이며 맥주잔을 들었다.
“맞다. 오웬 왕국이 6 연무장을 보고도, 5 연무장에만 대련을 신청했던 일 때문에 아이들의 자존심이 구겨졌지.”
“그건 걔들이 대충 수련해서잖아.”
“네 말도 맞다. 나도, 수련생들도 모두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라.”
메툰이 반쯤 풀린 리메르의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5달 전 케인 지그하르트가 편입한 이후로 6 연무장은 변했다. 모두 새벽부터 나와 밤까지 수련했고, 최근에는 지옥주 훈련까지 통과했지.
“엑? 지옥주를?”
리메르가 입을 떡 벌렸다.
“그래. 단 한 명의 낙오도 없었다.”
“그건 대단하네.”
지옥주는 지그하르트 훈련 중 빡세기로 유명한 훈련이다. 정규 검사도 낙오가 나오는 훈련인데, 모든 수련생이 버텼다는 게 놀라웠다.
“이제 그 아이들에게도 성취감이라는 걸 느끼게 해줄 때라고 생각했다.”
“그 희생양을 우리 5연무장으로 삼겠다?”
“…….”
메툰은 대답하지 않은 것으로 대답을 했다.
“마음에 드네.”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방식은? 일대일 대련인가?”
“아니. 일대일 대련으로는 아직 5 연무장을 이기지 못한다.”
메툰이 고개를 저었다.
“음? 그럼 어떻게 붙자고?”
“결투에 일대일 방식만 있는 건 아니지.”
“아!”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단체전인가?”
“그래. 5 연무장의 숫자는 43명, 우리도 43명을 준비시키겠다. 임의로 정해진 장소에서 붙이기로 하지.”
“전면전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국지전인가?”
그는 괜찮겠어라고 중얼거리며 메툰이 내려놓은 금화에 다시 손을 올렸다.
“다만 이쪽에도 제안이 있다.”
“제안?”
“6 연무장의 숫자는 우리보다 2배 이상 많지?”
“그렇다.”
“그럼 좀 더 기회를 주는 게 좋잖아. 그쪽은 60명을 준비해.”
“뭐?”
“이쪽은 그대로 43명. 그쪽은 60명으로 붙자고.”
“우리를 무시하는 건가?”
메툰의 기세가 짚불처럼 타올랐다. 테이블이 부르르 떨렸다.
“무시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다. 무력과 경험이 모자란 건 너도 인정하지 않나?”
“음.”
“거기다 직계나 봉신가, 상위 방계 아이들도 우리가 더 많지. 60명으로 싸운다고 해도 너희에게 뭐라 할 사람은 없어.”
메툰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렇게 하지.”
“날짜와 위치도 네가 정해.”
“나한테? 내가 속이면 어떻게 하려고….”
메툰의 묵직한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네가 이런 걸로 사기를 칠 위인은 아니니까.”
금화에 올려진 메툰의 손에 힘이 빠졌고, 리메르가 그 틈에 금화를 날름 챙겼다.
“다만 네가 하나 착각하는 게 있다.”
금화에서 손을 뗀 메툰이 고개를 틀었다.
“착각?”
“케인 지그하르트는 부상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1년 반 동안 매일 오러 연공과 감각을 개발했다.”
“어?”
“녀석의 감각과 오러 양은 정식 검사에게도 뒤지지 않아.”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눈빛으로 리메르를 내려보았다.
“준비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다. 케인 한 명에게 다 쓸릴 수도 있으니까. 이건 내기의 계약금이다.”
메툰이 품에서 꺼낸 금화 주머니를 리메르 앞에 밀어놓고, 주점을 나갔다.
“우와아아!”
“우리도 구경 가도 되나?”
“당장 판을 열어! 6 연무장에 내 전 재산을 건다!”
“난 5 연무장!”
“전 재산도 얼마 안 되는 놈들이. 난 우리 집을 건드아!”
내기가 성립되자 주점의 천장이 들썩일 정도로 난리가 났다.
“흐흠.”
리메르는 금화 주머니를 툭툭 치며 빙긋 웃었다.
“꽁돈은 역시 좋다니까.”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던 것처럼 여유로웠다.
“그럼 도박장이나 가볼까.”
* * *
아직 해가 떠오르지도 않은 어둑한 새벽.
검은 커튼이 내려앉은 듯한 별관 공터에 라온이 두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어깨 위로 풀잎보다도 가는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열기 띈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반대로 라온의 육체에서 피어나는 붉은 기운은 점차 줄어들었고, 끝내 완벽하게 사라졌다.
그 순간 라온이 두 눈을 떴다.
번쩍.
천공으로 솟구치는 태양처럼 그의 붉은 눈동자가 진한 열기로 타올랐다.
“후우우….”
라온이 호흡으로 육체에 남은 탁기를 뱉어내자, 이글거리던 눈동자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시간 참 빨리도 지나가네.’
꾸물꾸물 올라가는 태양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첫 임무를 다녀온 지 3일이 지났다.
3일 동안 수련한 덕분에 육체와 오러의 움직임이 조금이나마 비슷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챠앙!
라온이 손목과 발목을 돌린 뒤 검을 뽑았다. 만화공을 운용하며 연성 검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펼쳤다.
육체 바로 뒤를 오러가 따라간다. 흡사 그림자 같은 움직임. 완벽하진 않지만, 3일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일단 이 정도만 맞춰두는 게 좋겠어.’
평생을 해야 할 수련이니까.
오러와 육체의 흐름을 완벽히 맞추는 건 며칠로 될 수련이 아니다.
결국 검과 정신을 하나로 만드는 검신합일이 되어야 하니, 앞으로도 꾸준히 수련해야 한다.
라온은 지그하르트 기본 검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펼친 뒤 검을 집어넣었다.
하늘을 보니, 태양이 상당히 높게 올라가 있었다.
‘살짝 늦었네.’
새벽 개인 훈련이 거의 끝날 시간이었다. 오전 정규 훈련 시간이 되기 전에 연무장에 가야 할 것 같았다.
라온은 땀을 흘린 옷을 갈아입고, 5연무장으로 달려갔다. 연무장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할 때 안에서 수련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녀석이 어쩐 일로 없지?”
“임무를 혼자 끝내셨는데, 새벽 훈련할 맛이 나시겠어.”
“쯧, 사실 거기에 누가 있어도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그러니까. 오러 유저라고 해도 산적인데, 얼마나 강하겠어. 운이 좋았던 거지.”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방계 수련생. 그것도 달라진 버렌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녀석들이다.
‘한심한 놈들.’
라온이 혀를 찼다. 저런 패배자들의 말은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들어가는 순간 눈을 피하고 도망갈 테니까.
‘근데 연무장이 살짝 춥네.’
연무장의 기온이 평소와 다름을 느끼고 들어가려 할 때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심하다.”
버렌의 음성이었다. 우아한 발소리가 수련생들의 앞에서 멈췄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럼 넌 당시에 산적들의 흔적을 찾았나? 아니면 산적들에게서 아이들을 구했나? 그것도 아니면 산적의 목이라도 베었겠지?”
“그, 그게….”
“버렌 님. 저희는 그냥 자, 장난으로….”
수련생들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버버 주절거리기만 했다.
“질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감정이다. 다만 그걸 입에 담는 순간 인간의 추함은 바닥을 찍게 되지. 이건 내가 직접 해보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정신 차려라.”
타악!
버렌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하, 저 새끼 없었으면 내가 너희들 대가리를 깨버리려고 했는데.”
마르타다. 이를 가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수련생들의 옆에서 들려왔다.
“주제 파악 좀 하자. 너희가 산적 두목을 만났으면, 깝치다 뒤지거나, 지켜보던 교관들에게 개처럼 끌려갔을 거야.”
“마, 마르타 님….”
“너희들 임무를 끝내고 휴가를 받았을 때 뭘 했지? 임무에 다녀왔으니,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훈련도 설렁설렁했겠지? 아예 안 하던가.”
“그게….”
“으음.”
수련생들은 정곡을 찌르는 마르타의 말에 쩝쩝 소리만 냈다.
“임무를 혼자 끝내버린 그 자식은 너희들이 집으로 돌아가 발 뻗고 잘 때도 연무장에 나와서 수련했다. 심지어 돌아온 당일에도.”
“저, 정말입니까?”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던가.”
마르타는 찬웃음을 흘리며 수련생들을 비웃었다.
“라온의 행적을 잘 아는군. 스토킹이라도 했나?”
“뭐? 이 새끼가 어따 주둥이를 놀려!”
버렌의 농담 같은 말에 마르타가 벽을 후려쳤다.
“맞잖아. 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알지?”
“그 아가리를 묶어버리면 알지 않을까?”
버렌과 마르타가 싸울 듯이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후우.
라온은 가슴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듯한 뭔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연무장의 문을 열었다.
시끄럽고, 분주하던 연무장이 조용해졌다. 멱살을 쥐고 싸울 것 같았던 버렌과 마르타가 고개를 홱 돌렸다.
“라온.”
두 사람을 보고 있을 때 눈이 은빛으로 반짝이는 루난이 다가왔다. 어깨 위로 새하얀 서리가 피어나고 있었다.
‘이 녀석이었군.’
연무장의 기온이 왜 내려갔나 했더니, 루난이 살벌한 양의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던 것 같다.
“임무 좀 혼자서 해냈다고 뵈는 게 없나 봐? 새벽 훈련에도 늦고.”
마르타는 조금 전에는 자신의 편을 들어줘 놓고 지금은 비꼬기 시작했다.
“집에서 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라온은 가볍게 대답하고 연무장의 중앙에 섰다.
“곧 정규 훈련이 시작된다. 전부 정렬하도록.”
수련생들이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라온의 뒤로 모이기 시작했다.
“훈련 시작 전까지 몸을 풀어라.”
몸을 풀라고 말하며 목을 돌리는 라온의 입가에는 누구도 알기 힘들 정도로 작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 * *
첫 임무를 완수한 후 두 달이 지났다.
라온을 보는 주변 시선이 조금 달라졌지만, 그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연성검법과 가람보법의 조화에만 열중했다.
-지겹도다. 이미 익힌 검술과 보법만 반복하다니, 네놈에겐 지루하다는 감정이 없는 게냐?
‘그럴 리가.’
라온이 픽 웃었다.
‘중요한 훈련이니까. 참는 거야.’
기초가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대부분은 알면서도 기초 단련을 포기하고 고급 무학에 몰두하는 실수를 범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경쟁심.
‘내가 뒤떨어지는 것 같으니까.’
이쪽이 평범한 검술과 보법만 반복할 때 저쪽이 검기를 쓰고, 검풍을 날린다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거기다 더럽게 지루하지.’
기본 검술과 보법은 단순하고 간단하다. 평범한 재능의 수련생이라고 해도 일주일이면 그 형을 익힐 수 있을 정도.
그걸 몇 달 혹은 몇 년간 반복해서 수련하는데, 즐거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라온 역시 마찬가지. 기초 검술과 보법을 계속 반복하는 건 그에게도 괴로울 정도로 힘든 일이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지.’
기초를 열심히 수련하는 건 절벽에 사다리를 만드는 것과 같다.
손과 발로 오르는 녀석들이 일단 먼저 가겠지만, 훗날에는 사다리를 세운 자신이 더 높고 빠르게 절벽을 오를 것이다.
참을성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라온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개인 시간에는 항상 기초 검술과 보법,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와, 진짜 지겹지도 않나?”
“어떻게 연성검법만 반복하는 거지?”
“미쳤다. 미쳤어….”
“난 저렇게 못 산다. 못 살어.”
수련생들은 기본 검술을 반복하는 라온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조롱이나 놀리는 게 아닌 순수한 감탄이었다.
“그러게. 어떻게 저것만 반복하냐. 머리가 반쯤 돌아간 거 아닐까?”
경쾌한 목소리에 수련생들이 뒤를 돌았다.
“허억!”
“교, 교관님!”
“이렇게 일찍 웬일이십니까?”
“안녕.”
수석 교관 리메르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기본이 지겨운 건 사실이지만, 저 녀석은 높이 올라갈 거다. 기초를 끊임없이 닦은 검사 중에 위에 서지 못한 사람은 본 적 없거든.”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단상 위로 올라갔다.
“자, 모두 주목!”
리메르가 손뼉을 치고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수련생들이 개인 수련을 멈추고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버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리메르가 새벽 개인 훈련 시간에 나온 게 신기한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 예전에 말했어야 했는데, 깜빡한 일이 있어서.”
“예? 깜빡이요?”
“또 뭘 잊으신 겁니까?”
수련생들은 별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질문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그들의 생각을 한참 뛰어넘었다.
“6 연무장이랑 한 판 뜨기로 했거든.”
“떠요? 6 연무장이랑? 서, 설마 대련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대련이라기보다는 전면전 느낌이지. 너희 43명과 그쪽 60명이 동시에 붙을 거야.”
“언제입니까?”
버렌의 얼굴이 나무껍질처럼 굳어졌고, 다른 수련생들도 마른침을 삼켰다.
리메르는 그 표정을 즐기듯 히죽 웃었다.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