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렉터의 입에서 죽인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폭풍 같은 살기가 전신을 휩쓸었다.
고오오오!
다만 평생을 암살자로 살아온 자신에게 살기는 큰 의미가 없었다. 네 개의 불의 고리를 공명시켜 몸을 짓누르는 살기를 밀어냈다.
“오호!”
렉터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살기를 버틴 게 놀라운지 입을 둥글게 벌렸다.
“이거 새싹이 아니라, 이미 봉오리인데?”
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검집을 툭툭 쳤다. 뽑을까 말까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이길 수는 없어.’
암살이라면 죽일 수 있지만, 지금의 무력으로 렉터를 꺾는 건 무리다. 다만 라온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스르릉.
라온이 먼저 검을 뽑았다.
“검을 뽑아 덤벼라.”
가라앉았던 기세를 끌어 올리며 은빛 칼날로 렉터를 겨누었다.
“내가 이거 뽑으면 너 죽는데?”
“약자가 죽는 건 당연한 이치다.”
“하, 무슨 어린놈의 기상이 저래?”
렉터가 탄성을 흘리며 박수를 쳤다. 그의 손은 이제 완전히 검집에서 떨어졌다.
“네 기상을 보니, 싸울 마음이 사라졌어. 지금 여기서 죽이기엔 아까운 놈이야.”
“무인은 죽을 자리를 고르지 않는다.”
“와, 미쳤네. 너 어린애 맞냐? 무슨 명언집이라도 보는 거야?”
“…….”
“뭐, 사실 그 이유만은 아니고.”
렉터의 시선이 라온을 너머 나무 위를 향했다.
“그 영약을 회수한다고 해도 내가 죽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그는 나무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고 뒤로 훌쩍 물러섰다.
‘역시.’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지금 자신의 뒤에는 교관들이 모두 몸을 숨기고 있다.
리메르의 위치는 잡히지 않았지만, 그의 성격상 분명 근처에 있을 거다.
렉터는 리메르와 교관들의 기척을 느끼고 물러난 거다.
“네가 남북맹 소속이었다면 정말 재밌었을 텐데, 이름이 뭐지?”
“…….”
라온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렉터의 질문에 옛 생각이 났다.
전생에서 암살자로 살아올 때 적에게 저런 말을 듣기도 힘들었지만, 듣는다고 해도 말을 할 수 없었다.
항상 입을 다물고 도망치거나,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적이. 그것도 대륙에 명성을 떨친 강자가 이름을 묻는 것에 가슴이 살짝 떨렸다.
“이름도 말해주지 않는….”
“내 이름은 라온. 라온 지그하르트다.”
라온은 천천히 눈을 뜨며 당당하게 이름을 밝혔다.
“라온이라. 훗날 네 이름이 테루칸 산과 레이블 강에 들려오길 기다리마.”
그는 씩 웃고서 그대로 산을 내려갔다. 혹시라도 돌아올지 몰라 기감을 열어두었지만, 정말 사라져버렸다.
“후.”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검을 집어넣었다.
‘잘 먹혔군.’
렉터는 곱상한 외모와 달리 남자다운 성격을 가졌다.
힘에서 밀린다는 걸 알고도 당당하게 나가니. 오히려 호감을 쌓은 것 같다. 로베르트 가문에서 본 정보대로였다.
‘안 싸우고 끝나서 다행이야.’
렉터는 강하다. 리메르와 함께 싸운다면 이길 수는 있겠지만, 교관 몇 명이 죽었을 거다. 싸움 없이 끝난 게 최선이다.
라온은 영약을 품에 집어넣고, 설호채주의 목을 두꺼운 보자기에 넣었다. 실적을 위해서 채주의 머리는 직접 챙겨야 한다.
“그럼 돌아가죠.”
나무 위를 올려보며 빙긋 웃었다.
* * *
리메르는 아이들이 수색을 시작했을 때부터 산적들의 위치를 파악했었다.
우거진 숲과 높은 산이라는 함정을 지우고 보면 바로 산적들이 어디에 숨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다만 그건 많은 경험을 쌓은 그의 이야기고, 수련생들은 달랐다.
예상했던 대로 수련생들은 먼저 산과 숲으로 움직였다.
버렌과 마르타도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각기 산과 숲으로 방향을 정한 뒤 멧돼지처럼 수색을 시작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라온과 루난은 길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수련생들이 한참 전에 방향을 정하고 수색을 시작했을 때야 이동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방향은 숲도, 산도 아닌 구릉이었다.
저 녀석들이?
일부러 구릉 옆에 있는 숲이 보이지 않는 곳을 거점으로 골랐는데, 저길 어떻게 알고 가는 건지 모르겠다.
역시 라온인가.
라온이 뛰어난 판단력으로 산적들이 구릉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것 같다.
다만 산적들은 산에서 생활하는 놈들답게 대부분의 흔적을 지웠다. 교관들도 찾기 힘든 수준이니, 라온과 루난이 산적의 기척을 발견하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라온은 구릉 위의 숲을 쭉 둘러보고 무엇을 발견한 사람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인간의 흔적을 하나씩 발견하며 산적들이 숨어 있는 방향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리메르가 입을 쩍 벌렸다. 이제 첫 임무에 나온 녀석이 추적자처럼 산적의 흔적을 찾아간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그냥 가는 것도 아니다. 자세를 낮추고, 발 앞꿈치로만 걸어서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허, 함정까지 지워?
라온과 루난은 산적들이 설치한 함정까지 해제하며 결국 산적들이 숨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인질이 잡혀 있었다.
어떻게 할래?
리메르는 인질이 잡혀 있는 나무 근처로 이동했다. 혹시라도 라온이나 루난이 실패하면 바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라온은 루난을 미끼로 삼아서 경계를 서는 산적들의 시선을 돌린 뒤 인질을 잡은 산적의 목을 베었다.
꿀꺽.
예리하면서도 단호한 일격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기막을 쳐서 소리를 죽이고, 앞의 산적까지 처리하는 모습도 완벽했다.
그 뒤 산적 하나를 살리고 정보를 모으는 모습까지. 그야말로 프로를 보는 듯했다.
다만 하나의 실수. 아니, 하나의 우연이 있었다.
무음적. 훈련받은 자만이 들을 수 있는 그 피리를 부채주가 감지했기 때문이다.
라온은 그 위기의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바로 새로운 작전을 짠 뒤에 루난과 아이를 숨겼다.
부채주와 산적들의 방심을 유도한 뒤 단숨에 뛰어들어 두 번째 인질까지 구해냈다.
그 뒤로는 전투였다.
리메르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라온이 전위, 루난이 후위에 선 전투를 지켜보았다.
위험한 순간에 나서려고 다리를 풀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루난이 서리를 깔고, 라온이 검을 들자 산적들은 무기를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고, 죽어갔다.
똥폼을 잡고 나온 채주는 라온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부하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저건 내가 잡아야겠네.
인질 둘을 지키면서 산적을 처리하고, 채주까지 잡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채주를 놓칠 수는 없기에 리메르는 채주가 도망친 곳으로 움직였다.
인질? 아니, 저것도 산적이군.
채주는 여자 산적을 인질처럼 들고 구름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럼 잡으면….
설호채주가 반항조차 할 수 없도록 기습하려고 할 때 뒤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온이다.
녀석은 채주가 있는 방향으로 사자처럼 돌진했다.
채주는 당황한 척하면서 여자 산적을 던졌다. 라온은 속도를 늦추며 그녀를 받았다.
이런….
리메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 여자는 뱀술사다. 뱀에게 물리기 전에 라온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뱀이 튀어나오는 순간 라온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퍼억!
알고 있었다는 듯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검으로 뱀과 여자의 심장을 뚫어버렸다.
“와아.”
리메르는 본인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뱀을 죽이다니, 저건 미리 알지 않는 이상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뭐 저런 녀석이 다 있지?
이젠 감탄 수준이 아니라, 정신이 멍해질 지경이다.
수십 년 동안 전장을 나돌아다니며 수많은 재능을 봐왔지만 저런 괴물은 처음이다.
라온은 설호채주의 목까지 베어버린 후 그가 가지고 있던 영약까지 챙겼다.
그래. 잘했다.
박수를 쳐 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옆을 보니 다른 교관들도 어이가 없는지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 강렬한 기세를 두른 젊은 미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색 두건에 막강한 기도. 남북맹의 무인이었다.
역시 남북맹과 관계가 있었군.
설화채 산적들이 왜 숨어 있나 했더니, 남북맹의 무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남북맹의 무인은 스스로의 이름을 렉터라고 밝혔다.
아는 이름이다.
남북맹에 입맹한 지 10년 만에 채주가 된 젊은 천재 검사.
라온은 렉터의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았다. 먼저 덤비라고 말하며 검을 뽑았다.
저 녀석.
렉터의 강함을 몰라서가 아니다. 지그하르트 무인으로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렉터는 어이없어하면서도 라온의 기개에 감탄했다.
그리고 스스로 물러섰다.
물론 놈은 자신과 교관들이 숨어 있다는 걸 알고 물러선 거지만 그 이유 중에는 라온에 대한 호의도 있었다.
“나는 라온, 라온 지그하르트다.”
아.
본인보다 훨씬 강한 자에게도 인정을 받고, 당당히 이름을 내뱉는 라온의 등을 보자 등골 사이로 소름이 돋아올랐다.
옛날 글렌을 처음 만났을 때의 장면이 데자뷔처럼 머릿속을 흘러갔다.
리메르가 꽉 주먹을 말아쥐었다.
왕.
아직 어리고 약하지만, 드디어 새로운 왕의 씨앗이 싹이 튼 것 같았다.
* * *
라온은 루난과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무음적을 듣고 달려온 교관들이 남아 있던 산적들을 제압한 상태였다.
“왔구나.”
“대단한 일을 해냈어.”
“너 진짜 정체가 뭐냐?”
교관들은 감탄, 놀람 그리고 경악이 어린 시선으로 혀를 내둘렀다.
“라온.”
루난이 두 아이를 안은 채 다가왔다. 로브를 뒤집어쓴 아이들은 실컷 울었는지 눈이 땡땡 부어있었다.
“루난. 정말 잘해줬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그녀가 적절하게 나서준 덕분에 아이들을 다치지 않게 구해낼 수 있었다.
“응.”
루난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걸 보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음….”
라온은 두 아이의 머리를 툭 치려다가 손에 피가 묻은 걸 보고 멈췄다.
“이제 괜찮아.”
아이들의 어깨를 잡아주며 옅게 웃어주었다. 그 이상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으아아앙!”
남자아이는 여동생을 꼭 끌어안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오빠로서 참고 참던 울음이 터진 것 같았다.
“너희들은 이만 내려가라.”
교관들은 땅을 파며 구릉 아래의 거점을 가리켰다.
“교관님들은요?”
“이곳의 정리를 끝내고 가겠다. 나머지는 맡겨라. 정말 수고했다.”
교관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알겠습니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루난과 아이들을 데리고 산적들의 악취로 가득한 숲을 나섰다.
-저런 꼬맹이들을 위로하는 방법도 모른다는 말이냐.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큰 기근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본왕은 배고픔에 시달리던 어린 마족들을 불쌍히 여겨 겨울성의 문을 열고….
‘아저씨. 됐어요.’
-거기다 저런 산적 따위를 죽이는데, 이리 오랜 시간이 걸리다니, 본왕이 붙어 있다는 게 창피하기 그지없도다. 너라는 놈은 가진 힘도 제대로 이용 못 하고 있어.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데?’
-멍청한 놈. 첫 일격이다. 첫 일격. 첫 일격에 응축시킨 힘을 폭발하듯 내질러야 한다.
‘폭발?’
-그렇다. 인간의 마나 회로는 신비한 바가 있어서 마나를 증폭시켜서 움직여도 괜찮….
라온은 라스를 슬슬 긁어서 더 효율적인 마나 운용법을 빼내기 시작했다. 역시나 아낌없이 주는 라스였다.
* * *
라온이 루난과 아이들을 챙겨서 거점으로 돌아왔을 때 중앙에서 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산이 맞다. 놈들은 분명 저 위에 숨어 있어.”
“지랄하네. 산은 네 머리 스타일처럼 뻔해. 산적이라고 무조건 산에 있다는 건 멍청한 생각이지. 서쪽의 빽빽한 숲에 숨어 있는 게 확실해.”
“네 방식은 너무 충동적이다. 제대로 된 독도법과 추적술을 사용하지 않고 감에 의존하는 건 위험하다.”
“내 감이 네 판단보다 우위니까 입 닥쳐. 내일은 무조건 서쪽 숲이다.”
버렌과 마르타가 서로가 확인한 방향에 산적이 있을 거라고 싸우는 중이었다.
“어휴, 또 시작이네.”
“저 둘은 진짜 만났다 하면 싸우잖아.”
“근데 진짜 어디가 맞는 거지?”
수련생들은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흠!”
루난이 헛기침을 하자 모두의 시선이 라온과 루난 그리고 아이들을 향했다.
“그 아이들은 뭐지?”
“산적을 찾으랬더니, 어디서 가출한 애들이라도 찾은 거냐?”
버렌과 마르타는 두 아이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글쎄. 누굴까?”
라온은 산적 두목의 머리가 담긴 보자기를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