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2화 (52/653)
  • 52화

    루난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연무장을 정리하는 라온을 바라보았다.

    ‘힘들었어.’

    라온의 조언을 들었어도 오크에게 칼이 나가질 않았다.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라는 걸 알고 있어도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토할 거 같았어.’

    바닥에 깔린 피를 밟을 때마다 오빠가 보고 있는 것처럼 팔다리가 떨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직접 공격할 수가 없어서 오러 소모가 심해도 계속 서리만 뿜어낼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서 뭐라 외치고, 소리 지른다는 건 알았지만, 그것도 들리지 않았다.

    시야가 점점 어둠으로 차올랐다. 청각만이 아니라, 시각도 깜깜해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간신히 버티고 있을 때였다.

    루난!

    라온의 선명한 목소리가 주변을 꽉 채운 어둠을 뚫어냈다.

    오크가 달려오고 있음에도 바로 고개를 돌려 라온을 보았다.

    미소를 지은 라온과 눈이 마주치자, 파도처럼 혼란스러운 감정과 감각이 잠잠해졌다.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가 말하는 ‘괜찮다’를 들으니 눈앞에 차올라 있던 어둠이 완전히 사라졌다.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오빠의 기억도 흐릿해졌다.

    그래. 괜찮아. 라고 중얼거리자 추를 단 것처럼 무거웠던 팔이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크가 도끼를 내려치려는 순간 응축시킨 기운을 내질렀다.

    도끼 자루가 잘리고, 오크의 심장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젠 겁나지 않았다.

    오크에게서 뿜어진 핏물이 손등을 적셨다. 라온의 말대로였다. 피가 닿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캬아아앙!

    그걸 깨달은 순간 온몸을 휘감고 있던 두꺼운 쇠사슬이 으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핏물과 그림자에 어려 있던 오빠의 얼굴도 완전히 사라졌다. 어둑했던 세상이 다시 빛으로 차오른 기분이었다.

    “대련장 바닥을 뜯어서 우측 창고로 옮겨! 또 써야 하니, 조심히 들고! 아, 이 양아치 교관은 정리 안 하고 또 어디로 도망간 거야!”

    앞에서 들린 버렌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방계 수련생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연무장 정리를 하고 있었다.

    ‘변했네.’

    버렌과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만났었다. 항상 건방졌고, 자신만 알던 아이라 관심조차 주지 않았는데, 지금의 그에게선 한 톨의 거만함도 찾을 수 없었다.

    그 변화를 이뤄낸 사람은 버렌 본인이 아니라, 라온이었다. 그는 라온에게 패한 이후로 저렇게 각을 맞춘 것 같은 검사가 되었다.

    ‘나도 마찬가지지.’

    라온을 만난 덕분에 걸어 잠갔던 마음이 열렸고, 다시 사람과의 관계를 쌓을 수 있었다.

    매일매일이 즐거운 시간이었고, 오늘이 그 변화의 정점이었다.

    라온의 조언과 괜찮다는 말 덕분에 이젠 오빠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오빠의 그림자가 보이지도 않았다.

    머리에 박혀 있던 무언가가 빠진 듯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루난이 라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고 해야지. 정말 고맙다고.’

    엄마에게 들었던 대로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할 때였다.

    *     *      *

    어둠에 가라앉은 중무전. 갈기갈기 찢어진 로브를 입은 제이크가 무릎을 꿇었다.

    “시, 실패했습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조아렸다.

    “실패? 리메르가 관여한 건가?”

    카룬이 인상을 찌푸리며 무릎 꿇은 제이크를 굽어보았다.

    “아, 아닙니다.”

    제이크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눈동자가 탁했고, 턱이 풀려 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실패를 했다는 거냐.”

    “라, 라온 지그하르트는 모든 강화 마법에 광폭화까지 건 그 오크를 단 일검으로 베어버렸습니다.

    “주둥이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다. 지금 그걸 믿으라고 지껄이는 거냐.”

    카룬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을 흘렸다.

    “정말입니다! 그, 그놈의 검에서 피어난 불꽃이 오크의 목을 그대로 갈라버렸습니다!”

    “불꽃?”

    “예! 노을을 받아 금색으로 번쩍이던 불꽃에 오크는 아무것도 못 하고 목을 내주었습니다. 거기다가….”

    제이크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5 연무장에 가서 보았던 것들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리메르는 저희의 생각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저를 배, 배웅해주면서 수련생들을 건드리면 죽여버린다고 해, 했습니다.”

    그는 흥미를 보이는 카룬에게 리메르의 경고까지 말해주었다.

    “역시 그놈 때문이었군.”

    카룬이 콧방귀를 뀌며 픽 웃었다.

    ‘썩어도 준치라는 건가.’

    이전에 만난 리메르의 육체와 정신의 균형은 무너져 있었다. 워낙에 게으르고 제멋대로 하는 놈이라 술수를 부려도 눈치채지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괘, 괜찮겠습니까? 리메르의 입에서 전주님의 이름도 나왔는데….”

    “상관없다. 그 벌레가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으니까.”

    카룬은 손을 저었다. 이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리메르 따위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잡초와 다를 바가 없었다.

    “돌아가라. 나중에 다시 부르지.”

    “아,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이크는 고개를 연속으로 조아리고서 방을 나갔다.

    “일검에 그 오크와 무기를 동시에 갈랐다면 놈은 상급 연공법을 익혔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겠군.”

    “예전에 첩자가 가져온 정보에서도 굉장히 강한 마나의 파동을 일으킨다고 했었습니다.”

    “첩자라면 별관에 있는?”

    “예.”

    “쓸만하군.”

    “그녀가 가져온 정보 중에 잘못된 부분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카룬의 집사가 눈을 내리감으며 대답했다.

    “그 녀석에게 조금 더 지원해주도록. 앞으로는 리메르의 행적도 조사하도록. 그리고….”

    카룬은 말을 마치고, 제이크가 나간 문을 보며 손가락으로 목을 그었다.

    “저놈은 처리해라. 눈치가 빨라서 입을 열 놈이고, 이미 리메르의 살기에 먹혔어.”

    “예.”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리고 리메르.”

    자신의 위치에서 보면 견제할 필요 없는 먼지에 불과한 놈들이지만, 이상하게 자꾸 눈에 거슬렸다.

    “둘 다 한 번에 처리해버리는 게 좋겠군.”

    카룬의 서늘한 눈빛에 중무전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     *      *

    마르타는 연무장의 외곽에 세워진 나무에 등을 기댔다. 시선의 끝에는 연무장을 정리하는 라온이 걸려 있었다.

    쯧.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저놈 대체 뭐야.’

    어떻게 그렇게 단호하게 검을 그을 수가 있지?

    오늘 훈련이 몬스터를, 그것도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는 몬스터를 죽이는 훈련이라는 걸 알고 주먹을 움켜쥐었었다.

    이번만큼은 라온 지그하르트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버렌이나 다른 수련생들은 몬스터에게 제대로 검을 날리지 못했다. 리메르나 교관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몬스터를 벨 수 있었다.

    하지만 마르타는 달랐다.

    몬스터에게 틈이 생겨난 순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목에 검을 박아넣었다.

    그녀가 남들과 다른 건 당연한 일이다.

    ‘해봤으니까.’

    지그하르트에 오기 전.

    엄마를 찾기 위해서 홀로 백혈교에 잠입했을 때 교도 놈들에게 검을 찔러넣었었다.

    그 경험 덕분에 인간의 모습을 한 몬스터에게 검을 내리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놈은 어떻게….’

    라온은 자신과 다르다.

    안전한 담벼락 안에서 태어났고,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곱게 자란 도련님 중 도련님이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놈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는 오크의 목을 갈랐다. 그것도 자신보다 빠르고 강하게.

    솔직히 순간 멍해질 정도로 아름답기까지 했다.

    ‘믿을 수 없었어.’

    두 눈으로 본 게 정말 현실인지 아직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망할….”

    마르타가 주먹으로 등을 기댄 나무를 후려쳤다.

    ‘이건 이겼어야 했는데.’

    라온에게 대련으로 졌고, 그의 명령을 듣겠다고 했지만 마음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언젠가 녀석을 무릎 꿇릴 각오로 죽어라 수련했는데, 무조건 이길 거라 여겼던 부분에서 패했다는 생각에 이가 바드득 갈렸다.

    다만 그 와중에 마음에 작은 울림이 일어났다.

    그건 동질감. 라온과 자신이 비슷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감정이었다.

    아무래도 라온는 생각했던 대로 그저 곱게만 자란 아이가 아닌 것 같았다. 저렇게 독한 마음을 먹게 된 계기가 있을 거다.

    “음?”

    라온의 과거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흥.”

    마르타는 라온의 담담한 눈을 바라보다가 콧방귀를 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연무장을 떠났다.

    딱딱했던 마르타의 걸음걸이가 조금은 부드러워졌지만, 그녀 본인도 알지 못했다.

    *     *      *

    라온이 연무장 정리를 끝내고, 실내 단련장으로 가려 할 때 루난이 다가왔다.

    “라온.”

    그녀가 보라색 눈을 빛내며 고개를 꾸벅였다.

    “고마워.”

    “별거 아니야.”

    고개를 저었다. 도와준 건 사실이지만, 큰 역할은 그녀 본인이 했다. 감사의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고마워.”

    “그 정도는 아니라니까.”

    “고마워.”

    “정말 별거….”

    “고마워.”

    “하, 알겠어.”

    “응.”

    졌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제야 루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괜찮은 거지?”

    라온이 루난의 눈과 손을 살폈다. 시리아의 세뇌가 풀린 것 같긴 하지만 혹시 몰라 물어보았다.

    “응.”

    루난이 옅게 웃었다. 구김 없는 미소. 일단은 잘 풀린 모양이다.

    “만약 네 오빠가 또 힘들게 하면 말해.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줄게.”

    “괜찮아.”

    루난이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저었다.

    “내가 해야 해.”

    눈동자가 반짝인다. 상처 입었던 마음이 아물며 더 단단해진 것 같다.

    “그래.”

    라온이 웃었다. 루난은 다시 고맙다고 말한 후 연무장을 떠났다.

    -아이스크림 소녀를 도와주지 않는 게냐.

    ‘본인이 하겠다고 하잖아. 원래 남의 가족 일에는 끼는 게 아니야.’

    -흠, 본왕이 볼 때 아이스크림 소녀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다.

    ‘그럼 도움을 청하겠지. 만약 청하지 않더라도….’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해결하는 방법은 있으니까.’

    *     *      *

    루난은 숙소로 돌아와서 라온에게 받은 다람쥐 조각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침대 밑에 넣어둔 구슬 아이스크림 상자를 꺼냈다. 오빠가 준 게 아니라, 엄마가 사두셨던 아이스크림이다.

    화아아.

    뚜껑을 열자, 차디찬 냉기가 흘러나와 훈련에 지친 얼굴을 식혀주었다.

    앞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보기만 해도 오빠가 생각날 테니까.

    하지만 라온이 머리와 심장을 묶고 있던 오빠의 그림자를 지워주었다.

    더 이상 오빠는 무섭지 않았고, 아이스크림도 밉지 않았다.

    ‘아니야.’

    다만 루난은 아이스크림에 손을 데지 않고 다시 뚜껑을 닫았다.

    ‘내일 먹어야지.’

    내일 라온과 함께 먹기로 하며 아이스크림 상자를 침대 밑에 밀어 넣었다.

    루난은 테이블 위에 놓아둔 빨간 눈동자의 다람쥐를 보며 가는 미소를 지었다.

    *     *      *

    라온은 어디론가 사라진 리메르 대신 연무장 정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화아아!

    땀에 젖은 훈련복을 벗고 있을 때 조용하던 라스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까는 말하지 않았다만.

    라스가 냉기로 이루어진 불꽃 속에서 서늘한 눈빛을 뿜어냈다.

    -너 인간을 죽여보았군.

    “뭐?”

    -네놈에겐 아직 그 허접한 마법사의 환상을 깨뜨릴 능력이 없다. 아무리 오크라는 걸 알고 있어도 보이기는 인간이었지. 그걸 단호하게 베는 건 실전도 치르지 않은 애송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쉽던데.”

    라온이 손을 흔들어 눈앞으로 다가온 라스를 밀어냈다.

    -뭐?

    “감각 수치가 높다 보니, 그놈이 인간이 아니라는 게 피부에 와닿았거든. 몬스터를 베는 정도야 어렵지 않지.”

    -가. 감각?

    “그래. 마법으로 외모는 속일 수 있지만, 기질은 감추지 못하니까.”

    -끄응, 감각….

    담담한 표정으로 연기를 하자, 라스가 신음을 흘렸다.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다.

    ‘전생이든, 불의 고리든 알려줄 순 없지.’

    적인 분명한 라스에겐 자그마한 정보도 줄 수 없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살생에 망설임이 없다니, 네놈 정체가 대체 뭐냐.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정신력을 가질 수 있는 거지?

    라스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중얼거렸다. 비상식적으로 무력이 강해지는 것보다 처음부터 강한 정신력을 가진 걸 놀라워하는 것 같았다.

    “알아서 뭐 하려고.”

    -크으,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단 하나도 없는 놈이로다.

    “너 마음에 들려고 여기 있는 거 아니야.”

    라온이 라스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네가 말할 때마다 추우니까. 입 좀 다물고, 내기 보상이나 내놔.”

    -이건 사기다. 네놈이 그렇게 독한 인간일 줄은 몰랐다.

    “내기를 먼저 하자고 한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왕이라는 놈이 또 찌질해진다.”

    -찌, 찌질….

    라스는 태어나 처음으로 찌질이라는 단어를 들었는지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이걸로 3연승인가? 마계의 군주도 별거 아니네.”

    -닥치거라! 본왕이 본체의 힘만….”

    “그놈의 본체. 본체. 언제 찾을 건데. 그리고 이건 본체 능력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끄으윽….”

    라스의 푸른 냉기가 크게 출렁이고, 입에서는 거품을 무는 소리가 들려왔다. 패배의 충격에 농락까지 당하니,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았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사기다. 사기!

    녀석이 마지막 발악을 하려 할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올라왔다.

    [<분노>와의 내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포인트 상승합니다.]

    [분노에게 세 번째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연승의 효과로 추가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근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민첩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기력 1포인트 상승합니다.]

    “허!”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근력과 민첩성이 한 번에 오르며 근육이 출렁이는 감각에 희열이 느껴졌다.

    -인간 따위에게 3번이나….

    라스는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리며 메시지를 얼려버릴 듯이 냉기를 뿜어냈다.

    “아직 남았잖아.”

    -끄으윽!

    라온은 짜증을 일으키는 라스를 옆으로 밀어버리고 다음에 뜰 메시지를 기다렸다.

    [내기의 두 번째 보상으로 <분노>가 가진 특성이 생성됩니다.]

    [특성이 결정되었습니다.]

    [당신에게 특성 <블리딩 커스>가 생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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