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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9화 (49/653)

49화

‘무, 무슨 어린놈의 눈깔이….’

제이크가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할 때 경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탑에서 오셨죠? 이야, 일찍 오셨네요.”

발걸음만큼이나 가벼운 목소리에 굳어 있던 고개가 움직였다. 붉은 머리 엘프가 웃고 있었다.

“리, 리메르 수석 교관?”

“맞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훈련 전에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리메르가 팔을 툭툭 치며 수석 교관실을 가리켰다.

“으음, 알겠습니다.”

대답하며 다시 라온이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별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후….”

제이크는 가뿜 숨을 뱉어내고서 몸을 일으켰다. 조금만 더 늦었다가 바지에 오줌을 지릴 뻔했다.

“몸이 안 좋으신가요?”

“아, 아닙니다. 가시죠.”

“넵!”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메르를 따라 수석 교관실로 들어갔다. 방은 그의 깔끔한 얼굴과 달리 지저분해 앉을 곳도 없었다.

“앉으세요.”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만….”

“아, 그렇긴 하네.”

리메르는 가볍게 웃고서 흔들의자에서 일어섰다.

“뭐, 오래 걸리는 건 아니니까. 이대로 하죠. 수련생들이 상대할 오크에게 강화 마법을 걸어주셔야 하는 건 알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제 가르침이 워낙에 탁월해서 수련생들의 무력이 나이대를 뛰어넘었습니다. 평범한 오크로는 훈련조차 되지 않을 거예요.”

“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자랑에 머리가 멍해졌다.

“제가 아이들의 무력 수위를 알려드릴 테니, 그 정도에 따라 몬스터에게 강화 마법을 걸어주세요. 가능하시죠?”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제 주 전공이 몬스터 소환과 운용이니까요.”

“하긴 베르빈 부탑주님도 마법사님 칭찬을 하시더라구요.”

“아….”

리메르가 부탑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제이크의 표정이 아리송하게 비틀렸다.

“하나만 더 몬스터를 인간으로 보이게 하는 환상 마법은….”

“아, 그건 이걸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제이크가 오른손을 들어 올려 중지에 낀 반지를 보여주었다.

“부탑주께서 내어주신 환상계열 아티팩트입니다. 이 반지를 이용한다면 수련생들에게 환상을 거는 것도 간단합니다.”

“오, 딱이네요.”

리메르는 마음에 들었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되면 나중에 부탑주님과 함께 술 한 잔 사죠.”

그는 그 말을 하고서 교관 교관실을 나가버렸다.

‘일이 편해지겠어.’

리메르는 몬스터에 관한 일을 모두 자신에게 맡겼다. 이대로라면 그 오크를 소환해서 라온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일도, 핑계를 대며 도망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그놈….”

제이크가 조금 전에 보았던 라온을 떠올렸다. 처음엔 알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부상을 입혀야 한다는 생각에 약간 미안했지만, 이젠 아니다.

자신에게 망신을 준 그 망할 꼬마에게 더 심한 부상 새겨줄 것이다.

빠득.

제이크는 어금니를 꾹 깨물고서 교관실을 나섰다.

*     *      *

라온은 리메르를 따라 교관실로 향하는 중년 마법사를 보고 눈빛을 가라앉혔다.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저 마법사에게서 살의가 느껴졌다. 죽인다기보다는 건드린다는 기세. 자신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감지하지 못했을 거다.

-그 나이에 원한도 많군. 대체 무얼 하고 살았던 거냐.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는 모든 마족이 본왕을 경배하기만….

‘시끄러.’

라온은 비웃음을 흘리는 라스를 발로 밀어냈다.

‘저놈인가 보네.’

주디엘이 말해주었던 카룬이 준비한 술수가 바로 저 마법사인 것 같았다.

-본인의 기세조차 제대로 숨기지 못하다니, 새끼 고양이만도 못한 놈이다.

‘새끼 고양이는 귀엽기라도 하지. 저런 놈은 쓸 곳도 없어.’

라온은 교관실을 보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몬스터를 강화시키겠지.’

저 마법사는 카룬의 지시를 받아 자신과 상대할 몬스터를 특별할 정도로 강화시킬 게 분명했다.

‘나를 죽이던가 혹은 심각한 부상을 입히려 들 테고.’

너무 한심한 계획이라 웃음만 나온다. 아들에 비해 과분한 아버지였다.

‘한심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다가 연무장에 들어오던 루난과 눈을 마주쳤다. 이틀 만에 본 루난의 눈빛은 평소와 같았다.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쓰렸다.

“아빠가 오늘 훈련은 몬스터와의 전투라고 했어.”

그녀는 그때의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지 바로 오늘 훈련에 대해 말했다.

“그래?”

“응.”

루난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평상시를 연기하는 게 분명했지만, 본인이 그 일을 잊으려 하는 것 같아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훈련 준비를 하겠다며 휴게실로 들어갔다.

-한마디도 안 하는 거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리고 가족의 일이니까.’

나 자신의 감정도 잘 모르는데 상대 가족에 관한 조언을 어떻게 하겠는가.

다만 시리아가 루난에게 무슨 수를 썼는지는 알고 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해결할 수 있다.

“도, 도련님. 그거 아십니까?”

씁쓸한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도리안이 불안한 듯 배를 만지며 다가왔다.

“뭘?”

“오늘 실전 훈련. 다, 단순히 몬스터와 싸우는 게 아닙니다.”

“그럼?”

“몬스터를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진짜 피를 봐야한다구요! 어, 어떻게 하죠?”

그는 손톱을 딱딱 깨물며 눈동자를 두르륵 굴렸다.

“피를 본다라….”

“예에! 숨통을 끊는 게 훈련 목표래요! 진짜 미쳤어요!”

“잘됐네.”

“에에엑!”

라온은 비명을 지르는 도리안을 뒤로하고 루난이 들어간 휴게실을 보았다.

저주를 한 번 풀어볼까.

*     *      *

“자, 주목!”

교관실에 들어갔던 리메르가 어느새 단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는 시원하게 손뼉을 쳐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오늘 실전 훈련을 할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었지?”

“예!”

수련생들이 연무장 중앙으로 모이며 대답했다. 기대감이 꽉 차오른 표정들이었다.

“이제 내 말에 신뢰가 좀 생긴 모양이네. 눈빛이 반짝반짝해.”

리메르의 농담에 수련생들이 킥킥 웃었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이젠 수련생들도 리메르의 진심을 어느 정도는 알게 된 것 같았다.

“힌트 그리고 몇몇 교관이 정보를 퍼트린 덕분에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설명은 해야겠지. 오늘 훈련은 몬스터와의 실전 전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가 어려 있던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연무장의 분위기 자체가 무거워졌다.

“몬스터의 도끼엔 자비가 없다. 너희끼리 혹은 수련 기사와 대련할 때와 달리 절대 멈추지 않아. 방심하지도, 긴장하지도 마라. 평소와 같이 차분한 마음으로 전투에 임하도록.”

“예!”

수련생들이 주먹을 말아쥐며 연무장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이분이 오늘 우리 수련을 도와주실 마탑의 마법사 제이크 님이다. 인사드려라.”

“잘 부탁드립니다!”

“저,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제이크가 마주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눈을 돌려 라온을 찾았다.

‘지금은 괜찮은데?’

아까 심장을 조였던 그 기이한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길에서 만나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눈이었다.

‘하지만….’

아까의 그 기세가 착각일 리가 없다. 카룬이 노리고 있는 걸 보면 분명 저 아이에게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그럼 마법사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제이크는 손을 흔드는 리메르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단상 앞으로 나갔다.

“서먼 몬스터.”

제이크가 영창을 외운 뒤 지팡이로 땅을 찍자, 연무장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원을 그리며 생성된 푸른 문자 위로 녹색의 빛이 솟구쳤다.

우우웅!

천천히 빛이 사라지고, 거대한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2m가 넘는 신장, 부풀어 오른 근육, 입 밖으로 튀어나온 뻐드렁니와 녹색 피부까지.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위험한 몬스터 오크였다.

“크르르륵!”

“흡!”

“으억!”

오크가 손에 든 도끼를 들어 올리며 이를 갈았다. 갑작스럽게 치솟은 야생의 살기와 노린내에 수련생들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은 제 통제하에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이크가 손가락을 빙글 돌리자, 오크가 그 방향대로 몸을 돌렸다.

“오늘 여러분들이 상대할 몬스터가 바로 이 오크입니다.”

“역시 오크였어!”

“드디어 실전인가….”

“후우.”

수련생들은 긴장과 흥분이 반반씩 섞인 얼굴로 제이크를 올려보았다.

“교관님이 말씀하셨듯이 오크라고 방심을 해선 안 됩니다. 제가 멈출 수 없는 순간이 있기에 항상 집중력을 유지해주세요. 그리고….”

제이크가 오른손에 착용한 반지로 오크를 가리켰다.

우웅.

오크를 휘감고 있던 마법진이 덩굴처럼 꼬이며 찬란한 오색 빛을 뿜어내자, 오크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튀어나온 뻐드렁니가 쑥 들어가고, 녹색 피부가 허옇게 타올랐다. 몇 초 지나기도 전에 오크는 갈색 머리칼에 도끼를 든 평범한 중년 남자가 되어 있었다.

“사, 사람?”

“뭐야 이거!”

“왜 갑자기 사람이….”

“여러분들은 그냥 오크가 아니라, 마법으로 인간의 모습이 된 오크를 상대하셔야 합니다.”

제이크는 사람처럼 보이게 된 오크의 도끼를 움직여 수련생들을 겨누었다.

“허억!”

“으윽!”

“저, 저건 그냥 사람이잖아!”

수련생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깜짝 놀라 넋이 나간 얼굴로 사람이 된 오크를 바라보았다.

“내가 하나만 더 말하지.”

리메르가 제이크의 앞으로 나오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오늘 전투는 그저 오크를 꺾거나, 무력화시키는 게 다가 아니다. 저놈의 목을 베어야 끝난다.”

그는 올린 손가락으로 인간의 모습을 한 오크를 가리켰다.

“아….”

“그, 그런….”

수련생들은 당황하여 서로 눈치만 보고 나서지 못했다.

“마법사에게 잡힌 오크는 대부분 사람을 죽였던 놈들이다. 자비를 베풀 필요 없으니, 전력을 다해 싸워 이겨라.”

리메르는 평소와 달리 무거운 음성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도리안의 정보가 정확했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훈련이야.’

대부분의 검사는 사람과의 첫 실전에서 검을 끝까지 내리치지 못한다.

실제로 뛰어난 무력을 갖추고도 첫 실전을 넘지 못해 죽는 비운의 천재들도 많았다.

오늘 전투는 그런 허무한 죽음에 대비하기 위해서 단순히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훗날 사람과의 실전을 대비하기 위한 이중훈련이었다.

‘그리고….’

라온이 옆에 붙어 있는 루난을 보았다. 목을 베어야 한다는 말에 그녀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이 녀석의 저주를 풀기에 딱 좋아.’

리메르는 몰랐겠지만, 이 훈련 덕분에 루난의 뇌리에 심어진 시리아의 세뇌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버러지 마법사는 신경도 쓰지 않는 거냐?

‘당연히.’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끽해봐야 어디서 구해온 조금 사나운 오크를 강화시켜서 덤빌 게 뻔하다. 긴장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루난의 머리에 박힌 피의 공포를 제거하는 거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싸울 분은….”

“제가 하겠습니다.”

제이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버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아시죠? 중무전주의 아들입니다. 오크의 육체 능력을 많이 강화시켜주세요.”

“알겠습니다.”

제이크가 리메르의 말을 들으며 입맛을 다셨다. 이번 일을 준 사람의 아들인데 모를 리가 없었다.

“룹 어질리티, 룹 스트렝스.”

민첩성과 근력 강화 주문을 외우자, 오크의 주변으로 푸른빛이 노닐었다. 놈의 노란 눈빛이 더 흉악한 기세를 띄었다.

“가라.”

제이크가 손가락을 앞으로 뻗자, 중년인의 외모를 한 오크가 묵직한 걸음 소리와 함께 앞으로 걸어갔다.

꾸우욱.

버렌은 주먹을 몇 번 쥐었다가 편 후 이전에 보급받은 진검을 뽑았다. 제이크를 보며 준비됐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제이크가 손가락을 튕기자, 오크의 몸 주변을 휘감고 있던 문자들이 사라졌다.

“끄어어어!”

오크가 괴성을 터뜨리며 땅을 박찼다. 짐승처럼 내달려 버렌의 머리를 향해 도끼를 내리쳤다.

“다 보인다.”

버렌이 오러를 운용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쩌어엉!

녹슨 도끼와 잘 닦인 검이 맞부딪치며 뻘건 불똥이 튀어 올랐다.

“크흡!”

버렌이 눈을 치켜떴다. 검을 쥔 손이 삐걱거리듯 흔들렸다.

‘이 무게는 뭐….’

오크를 본 적도 상대한 적도 없었지만, 지금의 자신이라면 가볍게 벨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크의 도끼에 담긴 무게는 쉽게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전에 싸웠던 오웬 왕국의 수련 기사에 비해 조금도 모자르지 않았다.

“흐아압!”

버렌이 손목을 강하게 돌려 오크의 도끼를 튕겨냈다.

“크르륵!”

오크는 두 발자국 밀려났지만, 더 빠른 속도로 다시 돌진해왔다. 샛노랗게 달아오른 눈. 버렌을 찢어 죽이겠다는 기세로 가득했다.

뒤에 있는 수련생들이 그 살기에 깜짝 놀랐지만, 버렌은 위축되지 않았다.

“감히!”

오히려 분노를 일으키며 검을 내리그었다.

쩡! 쩌저정!

오크가 생사대적을 만난 것처럼 도끼를 내리그었을 때 버렌의 검이 놈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피익!

오크의 어깨와 허벅지에서 빨간 핏물이 치솟았다.

“크아아아!”

하지만 더 격한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든다. 이젠 숫제 짐승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끝내주마!”

버렌이 오크의 아래로 짓쳐 들어 검을 올려 쳤다.

치이잉!

도끼를 밀어내며 오크의 목을 베려던 찰나 버렌의 검이 우측으로 틀어졌다. 오크의 목이 아닌 팔뚝이 반 가까이 찢어졌다.

“으음….”

끝낼 수 있음에도 끝내지 못한 버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크어어!”

오크는 어깨와 팔꿈치가 크게 찢어졌어도 황소처럼 밀고 들어왔다. 힘은 빠졌지만 기세는 줄지 않았다.

촤아악!

버렌은 보법을 밟아 느려진 오크의 뒤로 짓쳐 들었다. 검을 횡으로 그어 오크의 목을 노리려는 찰나 그의 검이 다시 한번 우뚝 멈췄다.

“젠장!”

버렌이 욕을 내뱉으며 물러섰다. 검끝이 겁에 질린 듯 떨렸다.

“버렌.”

단상 위에 누워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리메르가 몸을 일으켰다.

“널 죽이려는 게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라는 걸 알면서도 못 베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듯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네가 선해서 그렇다. 저 몬스터가 인간으로 보이다 보니 검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겠지. 다만….”

리메르가 이를 가는 오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까 말했듯이 저 오크는 이미 인간의 피를 맛본 놈이다. 마법사들이 데리고 있는 대부분의 몬스터는 인간을 죽여본 놈들이지.”

“맞습니다.”

제이크가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죽이지 못해도 괜찮다. 이건 연습일 뿐이니까. 하지만 전장에 나가서 손이 멈춰버린다면 네가 죽이지 못한 검사나, 몬스터가 네 동료를 죽이게 될 거다.”

“윽….”

버렌은 오크의 도끼를 튕겨내며 리메르의 담담한 조언을 귀담아들었다.

“그리고 네 목표를 잡으려면 여기서 멈출 수 없잖아?”

그 말에 버렌의 고개가 라온을 향했다. 붉은 눈과 마주친 그의 검 위로 처음보다 짙어진 오러가 치솟았다.

“크아아아!”

“어딜!”

오크의 도끼가 수직으로 떨어질 때 버렌이 굽혔던 무릎을 펴며 공간을 꿰뚫었다.

“흐아압!”

기합과 함께 그의 검이 반원을 그렸다.

촤악!

하늘에 붉은 선이 그어지며 오크의 머리가 떨어지고, 놈의 몸이 무너졌다. 생이 끊어지자, 인간처럼 보이던 놈의 외형이 원래의 오크로 돌아왔다.

“허억! 허억!”

버렌은 검을 땅에 박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다만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본인이 만들어낸 시체를 끝까지 쳐다보았다.

“잘했다.”

리메르가 빙긋 웃었고, 버렌은 그를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고 처음으로 인상을 쓰지 않은 순간이었다.

“…….”

버렌은 마지막으로 라온을 힐끔 쳐다보고서 자리로 돌아갔다.

딱!

제이크가 손가락을 튕기자, 오크의 시체가 사라졌다. 다만 연무장 바닥을 적신 핏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 그럼 다음은….”

“나!”

마르타가 자신감으로 넘치는 손짓과 함께 일어섰다. 오크를 향해 다가가는 발걸음에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흠….”

라온은 마르타의 당당한 등에서 돌려 루난을 보았다.

“으….”

마르타와 정반대로 루난은 바닥에 흥건한 피를 보며 입술을 떨고 있었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라온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루난은 예전부터 피를 보는 일을 극도로 자제해왔다.

수련생과 대련을 할 때도, 수련 기사와 대련을 할 때도 상처를 입히지 않고 틈을 노려 제압만 했었다.

그때는 별생각 안 했는데, 지금 보니 그녀는 피가 무서워서 그런 전투방식을 했던 것 같다.

‘역시 피였어.’

시리아 슬리온은 루난에게 피를 보여주며 공포를 새겼다. 다람쥐를 터트려 죽였던 건 그 트라우마를 되살리기 위해서였을 거다.

라온의 붉은 눈 위로 서늘한 한기가 가라앉았다.

‘시리아 슬리온.’

네가 루난에게 건 저주는 내가 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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