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지그하르트는 검사 위주의 가문이지만, 여러 필요성에 의해서 독립적인 마탑을 운용하고 있었다.
마탑 마법사들의 대우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지만, 주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검사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경우가 잦았다.
마탑에 속한 5서클 마법사 제이크 역시 그런 점을 아쉬워했다.
급여, 자유시간, 연구비 모두 상급의 직장이지만, 검사들에게 무시를 받거나, 이 집단의 주요 라인이 아니라는 게 답답했다.
그런 그는 처음으로 지그하르트의 주역 중 주역인 카룬 지그하르트가 기거하는 중무전에 초대되었다.
꿀꺽.
제이크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카룬 지그하르트가 가공할 위압감을 뿜어내며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저절로 목이 떨려왔다.
‘날 대체 왜 부른 거지?’
카룬과 자신의 지위는 하늘과 땅 차이였고, 자그마한 관계도 없었다. 그가 왜 자신을 호출했는지 이해가질 않았다.
“다음 주에 5 연무장의 실전 훈련 지원을 나간다고 하던데.”
“아, 예! 그렇습니다.”
제이크가 떨리는 목으로 고개를 숙였다. 부탑주 베르빈의 지시로 5 연무장에 실전 훈련 지원을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자네를 불렀네.”
“부탁….”
카룬은 지그하르트의 실세 중 한 명이다.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장래에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마, 말씀하십시오.”
제이크가 말을 살짝 더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 실전 훈련. 아이들을 상대로 오크를 소환한다지?”
“그렇습니다.”
“그 오크 말이야. 강화시킬 수 있나?”
“그건 이미 5 연무장의 수석 교관에게 부탁받았습니다. 수련생들의 무력이 뛰어나서 일반 오크로는 훈련이 되지 않는다더군요.”
“아, 그 정도가 아니야. 아예 이기지 못할 정도로 강화시킬 수 있냐는 말일세.”
‘이기지 못할 정도로?’
제이크가 마른침을 삼켰다.
‘노리는 아이가 있는 건가?’
카룬은 5 연무장의 아이 중 하나를 죽이거나, 다치게 할 생각인 것 같았다.
“가능합니다! 노리는 수련생이 누구인지 말씀해주시면….”
“노린다? 자네 말이 이상하군.”
카룬의 차가운 목소리가 넓고 높은 중무전을 아릿하게 울렸다.
“아, 죄, 죄송합니다. 가끔 제 마력이 어긋나서 주의가 필요한데, 어떤 수련생에게 신경을 쓰면 좋겠습니까?”
“음, 라온일세.”
자신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카룬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제이크가 눈을 빛냈다. 라온은 카룬의 아들인 버렌을 꺾은 적이 있다. 이제야 카룬의 의도가 이해되었다.
‘라온을 노리고 있었어.’
그는 얼마 전 오웬 왕국 삼왕자를 꺾어 수련생 중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카룬이 노리는 사람은 라온 지그하르트가 확실했다.
“아무리 훈련이라고 해도 실전 연습을 하다 보면 부상을 입는 경우는 흔한 편이지. 아주 가끔은 영구적인 부상이 있을 수도 있고.”
“맞습니다. 저도 몇 번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괜찮은 몬스터 하나를 구해놓았네.”
카룬이 손가락을 튕기자, 우측에 있던 집사가 2m가 넘는 오크 한 마리를 앞으로 끌고 왔다.
꿀꺽.
제이크가 마른침을 삼켰다. 수많은 오크를 다뤄보았기에 알 수 있다. 앞의 오크는 평범해 보이지만 비범의 격에 오른 놈이다.
“돌란 산맥에서 데리고 온 오크일세.”
“돌란 산맥….”
돌란 산맥은 강한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험지다. 그곳에서 살아온 오크라면 일반적인 오크와 강함의 격이 달랐다.
“그 아이에게 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이 오크를 내보내서 잘 챙겨주길 바라겠네.”
카룬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챙겨주라 말하지만, 저 오크를 이용해서 영구적인 부상을 입히라는 말이었다.
“아, 혹시라도 오크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바로 처리하게. 이번 일을 잘 끝낸다면 훗날 자네를 마탑의 부탑주로 추천하도록 하지.”
“가, 감사합니다!”
“그럼 가보도록.”
“예!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제이크는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꾸벅였다. 세이빙 몬스터 마법으로 돌란 산맥의 오크를 저장한 뒤 카룬의 방을 떠났다.
“오는 길에 본 사람은 없겠지?”
카룬이 오크를 데리고 왔던 집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쪽으로 돌아왔으니, 저 마법사가 이곳에 온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눈치가 빠른 놈이야.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밀어주도록 해.”
“부탑주까지 올려줍니까?”
“그럴 리가 있나. 놈이 아쉬워서 간이고 쓸개고 빼주려 할 정도로만.”
“알겠습니다.”
집사가 빙그레 웃었다. 고개를 조아리고서 문밖으로 나갔다.
“라온 지그하르트….”
카룬이 라온의 이름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놈은 자신의 아들인 버렌을 이기고, 마르타를 꺾고, 오웬의 미래라는 삼왕자마저 무릎 꿇렸다.
중무전주이자, 전마대주인 자신의 입장에서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놈의 움직임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건 가주인 아버지의 시선이 조금씩 라온에게 향한다는 것이다.
가주가 되는 데 위협이 되지는 않겠지만, 거슬리는 건 빨리 치워버리는 게 정답이다.
‘더 크기 전에 처리해버리는 게 좋겠지.’
그게 지금까지 이곳에서 성장해온 방식이고, 이 차가운 대지에서 배웠던 방법이었다.
* * *
라온은 연무장에서 야간 훈련을 끝낸 뒤 별관으로 돌아왔다. 늦은 시간이라 조용히 복도를 지나갈 때 실비아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라온!”
문이 벽을 침과 동시에 눈에 새빨간 불을 켠 실비아가 튀어나왔다.
“윽!”
“엄마를 보고 윽? 으으으윽?”
“아니, 그게….”
“오늘 엄마랑 정원 산책하기로 약속했어? 안 했어?”
“아!”
라온이 입을 떡 벌렸다.
‘까먹었다.’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수련에 정신이 팔려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까먹었구만! 까먹었어!”
“그게 아니라.”
“아니기는! 3일 동안 네가 깨어있는 얼굴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야!”
실비아가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들었다.
“어, 엄마?”
라온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러섰다.
“내가 왜 산책 약속을 하자고 했게?”
“응?”
“훈련도 좋지만, 쉬는 것도 중요해. 휴식은 훈련의 일환이거든.”
실비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라온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연무장에서 매일 같이 단련하고 있으니까. 이곳에 와서는 좀 쉬어. 반나절만이라도.”
“아, 응.”
라온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어쩔 줄을 모르겠어.’
실비아도, 헬렌도, 시녀들도 싫은 게 아니다.
정말 싫었다면 진즉에 도망갔겠지.
태어났을 때부터 만난 저들에게 애정이 점점 커지는 게 무서워서 억지로 거리를 두는 중이었다.
“다친 곳은 없지?”
“올 때마다 그 말을 하네.”
“아들의 목표가 검사인데 당연히 물어봐야지!”
그녀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얼굴과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괜찮다고 대답해도 무시하고 확인이 끝난 뒤에야 놓아주었다.
“다친 곳 없다고 했잖아. 난 그럼 들어….”
“아직이야.”
실비아는 고개를 젓고서 라온을 꼭 끌어안았다.
“땀냄새 나는데.”
훈련 후 씻지 않고 바로 왔기 때문에 상태가 말이 아니었지만, 실비아는 떨어지지 않았다.
“전혀 안 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음….”
“오랜만에 아들 안아보니까 좋네. 얼마나 컸는지도 알 수 있고.”
실비아는 한참 동안 자신을 안고 있다가 놓아주었다. 그녀의 눈빛은 기껍다는 듯 별처럼 반짝였다.
“밥은 먹었어?”
“당연히 먹고 왔지.”
“훈련하느라 수고했어. 가서 쉬렴.”
실비아는 오랜만에 아들을 안아봐서 꿀잠을 자겠다고 중얼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방으로 돌아가려 할 때 복도 끝에 서 있던 헬렌과 눈이 마주쳤다.
“도련님. 물 받아놓을 테니, 씻고 쉬세요.”
그녀는 빙그레 웃고서 옆으로 귀신처럼 사라졌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에 웃음이 흘렀다.
“하아….”
이곳에만 오면 제 능력도, 감정도 통제가 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싫지도 않으니 애매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라온은 훈련을 했던 것보다 더한 피로를 느끼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 피곤해….”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도련님. 목욕물을 받아놓았습니다.”
헬렌이라고 생각했지만, 주디엘의 머리가 쑥 들어왔다.
“알겠어.”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서려 할 때 주디엘이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왔다.
“중무전에 관한 일입니다.”
“중무전?”
중무전은 카룬 지그하르트의 성이자, 주디엘을 이곳에 보낸 곳이었다.
“말해.”
라온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붉은 눈을 빛냈다.
“예.”
주디엘이 라온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왕과 신하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중무전에서 라온 도련님이 별관에 돌아온다면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파악해서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무언가 술수를 부리고 있다는 뜻이겠군.”
“그런 것 같습니다.”
“…실전인가.”
라온이 오늘 리메르가 말해주었던 단어를 읊었다.
“실전이라면….”
“리메르 교관이 다음 주에 실전 훈련을 한다고 했었다. 아무래도 그 훈련에 손을 쓰려는 것 같군.”
“아!”
주디엘이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수련생들의 실전이라 하면 몬스터와 결투를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나도 들었어.”
오늘 훈련을 끝낼 때 도리안이 몬스터와 결투를 할 것 같다고 비명을 지른 게 기억났다.
“그럼 몬스터에 손을 쓰거나 몬스터를 다룰 마법사에게 손을 쓰거나 혹은….”
라온이 눈을 내리감으며 말을 이었다.
“그 둘 다일 수도 있겠군.”
* * *
다음 주 월요일.
제이크는 원래 약속된 시간보다 한 시간 빨리 5 연무장으로 향했다.
‘잘해야 해.’
이 망할 대지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줄을 잘 타야 한다.
지금까지는 썩어 문드러진 줄도 떨어지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내려온 건 단단한 줄 정도가 아니라, 하늘 끝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였다.
미래를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 라온에게 큰 부상을 입혀야 한다. 그래야 카룬 지그하르트의 눈에 들 수 있다.
‘뒷일은 생각할 필요도 없어.’
라온 지그하르트의 뒷배경은 없다시피하고, 카룬은 차기 가주가 될지도 모르는 남자다. 누구를 위해 움직여야 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후….”
제이크는 숨을 고르고서 5연무장의 문을 열었다. 얇은 모래 먼지 뒤로 검을 수련하는 수련생들이 보였다.
아직 훈련 시작 시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무장 외곽으로 걸어가 수련생들을 지켜보았다.
‘저 아이가 버렌, 옆이 마르타인가.’
제이크는 이전에 들었던 인상착의를 통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주요 수련생들을 파악했다.
‘저쪽이 슬리온 가의 막내 루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연무장 우측에서 검을 내리치는 금발의 아이에게 향했다.
‘저 녀석이 라온인가? 잘 생기긴 기가 막히게 잘 생겼군.’
발을 휘돌리고 검을 내지르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죽이지는 않으마.’
제이크는 입술을 깨문 채로 라온에게 아주 자그마한 살의를 일으켰다. 자신도 모르게 일어난 미약한 기세. 감각이 좋은 검사나, 야생동물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얕았다.
하지만.
한 명은 반응했다.
검에 온 정신을 집중하던 라온의 두 눈동자가 제이크를 향했다.
“으헉!”
제이크가 기겁하며 벽에 등을 부딪치고 주저앉았다. 라온의 붉은 눈을 본 순간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끄윽….”
발가벗은 채 맹수 앞에 선 듯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 저놈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