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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7화 (47/653)

47화

라온은 실내 단련장에서 근력과 민첩성 훈련을 끝낸 뒤 실외 훈련장으로 나왔다.

‘없네.’

밖에서 검을 내지르는 소리가 계속 들려서 루난이 있는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웬일로 먼저 집에 간 것 같다.

‘있을 땐 귀찮은데, 없으니까 조금 아쉽군.’

루난은 항상 훈련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개를 꾸벅이는 인사를 하고 돌아간다.

평소에는 별 느낌 없었는데, 그 인사를 못 받으니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게 아쉽다니, 세뇌라도 당한 건가.’

라온은 피식 웃으며 연무장을 나왔다. 안에 아직 버렌과 마르타가 있으니, 평소처럼 마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한심한 놈.

‘뭐?’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닐 텐데?

‘무슨 말이지?’

-…….

라스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서쪽만 보고 있었다.

‘뭐지?’

라온이 라스가 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가 느껴지지는 않지만, 기분이 미묘했다.

‘혹시 모르니까.’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며 만화공의 오러를 끌어 올렸다. 설화의 감각까지 발동시켜 기감을 넓게 퍼뜨렸다.

티익!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기감에 무언가가 잡혔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뜻은.

‘누군가가 기막을 썼다는 거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오러를 이용해서 소리와 기척을 차단했다는 의미다.

‘가야겠지.’

평소라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라스의 반응 때문에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언제라도 발을 뺄 수 있도록 그림자 보법을 사용해서 완벽하게 기척을 죽이고 기막이 설치된 곳으로 달렸다.

가문의 경계 검사들도 보이지 않는 어둑한 골목 안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루난이었고, 반대편에는 키가 큰 남자가 있었다.

‘쟤가 왜 저기에 있지? 그리고 저 표정은….’

집에 돌아간 줄 알았던 루난이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평소와 비슷한 표정이지만, 눈동자가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았다.

반대편의 남자를 보았다.

실비아와 같은 은발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자가 등에 대검을 매고 있었다.

‘시리아 슬리온.’

전생에서도 들었던 이름이다.

슬리온 가문의 천재이자, 차기 대륙십천이 될 거라 예상되는 열두 명의 괴물. 대륙십이성에 이름을 올린 남자.

‘그런데 왜 겁을 먹고 있지?’

루난은 오빠를 보았음에도 웃거나, 반가워하지 않고 맹수를 만난 토끼처럼 겁을 먹고 있었다.

시리온이 루난에게 뭐라 말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품에서 귀여운 다람쥐 한 마리를 꺼내서 루난에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루난이 손을 내밀 때 다람쥐를 터트려버렸다.

아아아악!

기막 때문에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루난이 비명을 지른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시리온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건조한 표정으로 루난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막아야 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저 말이 계속되면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라온이 만화공의 오러를 가득 담아 진각을 밟았다.

콰앙!

바닥이 뭉개지며 굉음이 터졌다. 시리아가 루난에게 떨어지며 인상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너 뭐냐?”

라온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루난의 앞에 섰다. 고개를 비딱하게 틀며 시리아를 노려보았다.

“뭔데 루난을 괴롭히고 있지?”

누구인지 모르는 척해야 해.

시리아와 루난이 가족이라는 걸 안는 상태라면 끼어들 수가 없다. 남의 가족이니까.

하지만 모른 척한다면 끼어들 여지가 생긴다.

“남의 이름을 물으려면 먼저 본인의 이름을 밝히는 게 순서 아닌가?”

시리아가 여유롭게 웃었다.

“이런 골목에서 기막을 설치한 놈이 할 말은 아니지. 도둑놈이냐?”

“음….”

라온의 조롱에 시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뭐랄까. 연기를 하는 것 같았다. 진짜 당황하거나 화난 게 아니라, 화난 연기를 하는 느낌.

‘이런 놈이 어떤 인간인지 알지.’

전생의 자신을 죽였던 데루스 로베르트. 시리아에게서 그놈과 같은 악취가 풍겼다.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하지만 난 도둑도, 남도 아니고 그 아이의 오빠거든.”

시리아가 라온의 뒤에 있는 루난을 가리켰다.

“…….”

라온은 시리아의 시선을 막고, 루난을 슬쩍 보았다. 멍한 표정이지만 평소의 멍함이 아니라, 심한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작은 어깨가 안쓰러울 정도로 떨렸다.

“겁을 집어먹은 것 같은데요? 정말 오빠가 맞습니까?”

“아, 오랜만에 봐서 장난을 좀 쳤더니 저러라고.”

“다람쥐를 손에 쥐고 터트리는 게 장난입니까?”

“아, 이거 진짜 아니야. 장난감일 뿐이야.”

시리아가 손을 휘돌리자, 그의 손과 바닥에 깔린 핏물들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오러로 핏물과 살덩이를 모조리 녹여버린 것이다.

“내가 진짜 다람쥐를 죽일 리가 있겠어?”

그의 전신에서 섬뜩한 기세가 피어난다. 죽음의 악취. 데루스에게 죽기 전에 느꼈던 그 향과 비슷했다.

-건방지도다. 인간 따위가 감히 본왕의 빙의체에 협박을 해?

라온은 답을 하지 않고, 기세를 끌어 올렸다. 라스의 말대로 저건 협박이다. 네놈도 이렇게 죽일 수 있으니 물러나라는 경고.

하지만 이 자리에 그냥 온 건 아니었다.

“라온! 너 이 자식 가문의 기물을 부순 거냐!”

연무장에 있던 버렌이 튀어나왔고, 경계를 서는 검사들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멀리서 수련을 방해했다는 마르타의 욕설도 들려왔다.

“라온. 라온 지그하르트였구나. 어쩐지.”

시리아의 눈동자가 먹물을 바른 구슬처럼 껌껌해졌다. 감정이 마모된 듯한 눈빛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근데 정말 오해야. 복구하자마자 장기 임무를 받아서 동생에게 간식을 주려고 왔을 뿐이니까.”

그는 품에서 직사각형 상자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형태와 무늬는 조금 달랐지만, 구슬 아이스크림 상자였다.

“루난.”

시리아의 눈동자가 또 한 번 변했다. 사랑스러운 동생을 바라보는 오빠는 눈빛이다.

“아주 좋은 친구를 뒀네.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도록 해.”

“으응.”

“오빠가 장난이 심해서 미안해. 건강하게 지내. 다음에 보자.”

그는 손을 흔들고 그대로 사라졌다. 흡사 바람으로 화한 것처럼.

“설마 저 남자 대륙십이성 시리아 슬리온이야?”

버렌이 시리아가 있던 곳을 보고 헉 소리를 뱉었다.

“분위기가 다르네. 괜히 십이성이 아니야.”

“그래. 다르더군.”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재이자, 영웅이라 불리는 그가 저런 미친놈일 줄은 몰랐다.

“루난.”

뒤를 돌아 루난을 보았다. 평소와 같은 표정이지만, 눈동자가 흔들린다. 아직도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가자. 바래다줄게.”

시리아가 임무를 받았다고 했으니, 가문에는 없을 거다.

“…응.”

루난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

버렌이 구슬 아이스크림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별일 없었어.”

라온은 상자를 대신 받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냐.”

버렌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라. 같은 수련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도와주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골목을 떠났다.

‘진짜 많이 컸네.’

버렌은 보는 사람이 뿌듯해질 정도로 달라졌다.

-그래도 본왕은 저놈의 눈깔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고맙다.’

-뭐?

‘네 덕분에 루난을 구할 수 있었어. 정말 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커험! 저 아이는 본왕의 아이스크림 소녀가 아니더냐. 문제가 생기면 아이스크림을 못 먹을 것 같아서 말해줬을 뿐이다.

‘그니까 그게 고맙다고.’

-그럼 저 아이스크림 좀 달라고 하면….

‘그 말만 아니어도 널 다시 볼 뻔했는데.’

라온이 손바닥으로 라스를 쳐냈다. 정말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군주놈이다.

“가자.”

“응.”

루난을 슬리온 가문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라온은 루난의 옆에서 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의 가족. 더군다나 정확한 상황도 모르는데 어설픈 위로를 해봐야 도움이 되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루난의 걸음이 느려지면 느려진 대로, 멈추면 멈추는 대로 그저 조용히, 발을 맞춰서 그녀의 옆을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슬리온 가문의 마차와 시녀들이 보였다.

라온은 루난이 마차에 탈 때까지 지켜보다가 손에 든 아이스크림 상자를 넘겨주었다.

“고마워.”

루난은 예전에 들뜬 음성으로 했던 단어를 침울한 목소리로 말한 뒤 떠났다.

*     *      *

루난이 가문의 저택에 도착하자, 로칸 슬리온이 마중을 나왔다.

“루난! 훈련하느라 수고했다.”

“응.”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서 내렸다.

“네 오빠는 봤니? 직접 선물을 주고 간다고 했었는데.”

“…응.”

루난은 심호흡을 한 뒤 손에 든 아이스크림 상자를 보여주었다. 평소처럼 멍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네. 그 녀석 임무와 수련으로 바쁜 와중에도 꼭 너는 생각하더라.”

로칸이 내 선물은 없다고 중얼거리며 껄껄 웃었다.

루난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모든 사실을 밝힐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지켜온 것들이 무너질 것 같았다.

“…나 쉴게.”

할 말을 목구멍에 가두고, 천천히 저택의 계단을 올랐다.

“그래. 피곤할 텐데, 푹 쉬어라.”

“응.”

로칸은 어서 들어가라는 듯 손짓했다. 루난은 고개를 끄덕이고 2층으로 올라갔다.

“하아.”

방에 들어간 루난이 깊은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입술을 꾹 깨물며 아이스크림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었지만, 손이 가지 않았다. 오빠의 얼굴만 생각났다.

‘또 왔어. 그대로야.’

시리아 슬리온이 처음부터 저런 건 아니었다.

두 번째 임무에서 혼자 살아서 돌아온 이후 사람이 바뀐 것처럼 저렇게 변해버렸다. 그것도 내게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예의 바르고, 친절한 천재 검사였지만, 자신에게만큼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집착의 괴물이 되었다.

‘루비….’

그가 말했던 루비는 어렸을 때 근처 나무에 살던 빨간 눈동자의 다람쥐다.

친해지게 되어 루비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매일 함께 놀았었는데, 어느 날 루비가 손등을 할퀴었다.

임신 중이라 스트레스 때문에 아주 작은 상처를 입혔을 뿐인데, 시리아는 그걸 보고 루비와 근처에 있던 다람쥐들을 모조리 잡아 눈앞에서 터트려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넌 내 거라고. 다치면 안 된다고. 숨만 쉬고 살아가라고.

이걸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면 가문도 박살 낼 거라고. 너만 살리고 모조리 불태워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날 이후 루난은 입을 다물었다.

혹시라도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어서 사람도, 동물도 가까이하지 않고, 말수도 극단적으로 줄였다.

그렇게 홀로 살다가 똑같은 외톨이를. 아니, 나 보다도 더 외롭고 괴로울 것 같은 소년을 만났다.

라온.

처음엔 빨리 성장하는 방법과 좋지 않은 체질과 체력으로 어떻게 버티는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그냥 호기심. 그의 성장이 조금 궁금해서 다가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라온이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노력하고, 얼마나 힘든 시간을 버텼는지를.

노력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까지 바꾸는 그 아이의 모습에 나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고, 변하기 시작했다.

라온과 5 연무장의 수련생들 덕분에 시리아에 대한 두려움이 잊혀지고 있었는데, 오늘로 그 공포가 되살아났다.

루난은 상자 안에 담긴 아이스크림 전부 녹을 때까지 그저 지켜만 보았다.

“나만.”

무릎 사이로 고개를 숙인 채 물기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만 참으면 돼. 괜찮아.”

아무래도 다시는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할 것 같다.

*     *      *

라온이 루난을 데려다준 뒤 숙소로 돌아갈 때 라스가 팔찌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놈 정말 인간이었냐?

‘뭐?’

-아이스크림 소녀의 오빠라는 놈 말이다.

‘아, 이상한 놈이긴 하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리아는 분명 친근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의 남자였지만, 어둠을 마주한 듯한 섬뜩함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특히 협박할 때 그의 눈빛은 말라버린 풀처럼 생기가 빠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

다만 연기 하나는 잘했다. 만약 다람쥐를 터트리고, 루난을 협박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자신조차 속아 넘어갔을 거다.

‘데루스 같은 미친놈이야.’

시리아는 인간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신처럼 교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딘가 망가진 인간 같았다.

‘그래도 장기 임무라고 했으니, 한동안은 안 오겠지.’

-그놈이 아이스크림 소녀의 오빠인 이상 문제는 계속 생길 거다.

‘그건 그렇지.’

시리아가 가문에 몇 년 후에 온다고 해도 루난과 가족이니 계속 만나게 될 수밖에 없다.

아니, 계속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건조한 눈빛에 담긴 건 분명 집착이었으니까.

-몸을 넘겨라. 그놈만 죽이고 돌려주마.

‘어?’

-본왕은 은혜는 2배로 원수는 10배로 갚는다. 그 아이가 구슬 아이스크림이라는 신세계를 보여주었으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

‘웃기고 있네.’

라온이 피식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진심이다!

‘진심이라고 해도 그건 안 돼.’

-왜지?

‘놈은 루난에게 트라우마를 걸었어. 네가 죽여도 그건 풀리지 않지. 오히려 더 옥죄일 수도 있고. 이런 경우는 스스로 일어서야 해. 그리고….’

라온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놈을 죽이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루난은 전생과 현생의 삶을 통틀어 처음으로 자신을 배려해준 타인이다.

큰 도움을 받았으니, 시리아를 죽여주는 정도는 해줄 수 있다.

-네가 제대로 미쳤구나. 그놈은 네가 100명이 있어도 이길 수 없다. 이미 경지에 오른 놈이다.

라스가 개소리하지 말라며 인상을 찌그러뜨렸다.

‘확실히 강하긴 해.’

-그걸 알고 있으면서 무슨 헛소리냐.

‘그렇다고 목에 칼이 안 들어가는 건 아니니까.’

라온이 검집을 두드리며 서늘한 기운을 피워냈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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