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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6화 (46/653)

46화

라온이 전방으로 쇄도해 검을 내리그었다. 붉게 타오른 칼날이 저녁 공기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찌지직!

대기를 가르고도 남은 오러의 잔향이 짐승의 발톱처럼 연무장을 긁어냈다.

연성검술과 가람보법의 마지막 초식을 합친 돌진형 검술이었다.

‘나쁘지 않네.’

라온이 검을 휘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력이 좋고, 속도가 빨라 보고도 막기 힘든 검술이었다.

‘물론 그게 전부가 아니지만.’

이 초식은 등 뒤에 숨겨둔 칼처럼 언제, 어느 때라도 펼칠 수 있는 기습형이다.

아직 암살자의 기질이 남아 있는지, 기습을 염두에 두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흥흥.

뒤에서 들린 콧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루난이 맹한 눈으로 자신의 검을 보고 있었다.

다란 그 맹한 눈동자의 아랫부분이 살짝 반짝인다. 기대감이 어린 표정. 검술을 알려달라는 것 같았다.

“흡!”

루난은 따라 하려는 듯 땅을 박차고 허공에 검을 내질렀다.

속도도, 위력도, 기습의 묘도 없이 자세뿐이다. 다만 워낙에 능력과 재능이 뛰어난 녀석이다 보니 웬만해선 막기 힘들 초식이 되었다.

“맞아?”

루난은 몇 번 더 검을 휘두른 뒤 고개를 살짝 꺾고 이게 맞냐고 물어왔다.

“그렇게 하지 말고 일단 다리부터….”

저대로라면 대련하다가 사람을 죽일지도 몰라서 자세만 살짝 봐주었다.

후우웅!

루난의 자세를 어느 정도 잡아줬을 때 연무장 담장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리메르였다.

그는 정시에 도착하면 문을 걷어차며 들어오고, 늦으면 담벼락을 넘어온다.

즉, 지금은 훈련 종료 시간이 조금 지나갔다는 뜻이다.

“음!”

리메르는 단상 위에 걸터앉아 수련생들을 내려보았다.

“교관님. 10분 늦으셨습니다.”

“오늘 훈련 수고했다.”

그는 버렌의 지적을 못 들은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10분이면 검을 만 번 휘두를 수 있는 시간입니다.”

“에이, 그건 아니지! 윽!”

버렌의 어이없는 말에 대답한 리메르가 인상을 찡그렸다. 당했다는 표정이었다.

“커흠, 어쨌든 오늘 전해줄 소식은 두 가지. 첫 번째는 6 연무장에 관한 이야기다.”

“6 연무장이요?”

“거길 갑자기 왜?”

“여기서 떨어진 녀석들이 간 곳이잖아요.”

수련생들은 떨어진 녀석들이 간 연무장을 왜 말하냐며 고개를 흔들었다.

“오웬 왕국 사절단이 6 연무장을 무시하고 5 연무장에만 대련을 신청해서 자존심이 상한 것 같더군. 우리를 따라잡기 위해서 피나도록 수련한다고 한다.”

리메르는 6 연무장의 수련생들이 대견하다며 씩 웃었다.

“부상 때문에 낙오되었던 직계와 방계도 새로 들어갔고, 힘든 수련만 골라서 진행 중이라고 하니, 방심해선 안 된다. 그 아이들에게 따라잡히지 않도록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해라.”

“예.”

“에에….”

“뭐, 따라잡힐 수 있어야 말이지.”

수련생들이 입을 삐죽하게 내밀었다. 이미 한참 차이가 나는데, 뭐하러 대비하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훗.”

리메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두 번째 소식을 전했다.

“다음 주에 아주 특별한 훈련을 할 생각이다.”

“어, 어떤 겁니까?”

벌써 겁을 집어먹은 도리안이 어깨를 달달 떨었다.

“특별한 훈련이라.”

“뭐지? 뭘 할 게 남았나?”

리메르가 워낙에 별난 일을 벌인 적이 많았기 때문에 도리안만이 아니라, 수련생 모두가 불안해했다.

“그거야 비밀이지.”

“아….”

“교관님. 어떤 훈련인지 미리 말씀을 해주셔야 그에 따른 대비를 하지 않겠습니까.”

버렌이 손을 들어 올리며 정론을 말했지만 리메르에겐 당연히 통하지 않았다.

“알려주면 재미없잖냐. 열심히 수련하면 뭐가 되었든 해낼 수 있어.”

“음….”

맞는 말이긴 해서 버렌이 입을 삐죽이며 손을 내렸다.

“그래도 힌트를 하나 주자면….”

리메르가 손가락을 펴며 웃었다. 평소처럼 가볍거나 경쾌한 웃음이 아닌, 진한 투지가 비치는 미소였다.

“실전이다.”

“실전이요?”

“갑자기?”

대련이 아니라, 실전이라고 말하니 수련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가 아니라, 이제 할 때도 됐지. 준비한다고 했으니 확실하게 말해주마.”

리메르의 입매를 맴돌았던 능글맞음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진지함 그 이상의 섬뜩함이 미소에 어렸다.

“이번에는 피를 볼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거야.”

*     *      *

리메르는 훈련을 끝낸 뒤 가문을 나와 서쪽 외곽 유흥 거리로 향했다.

유흥 거리는 검사들과 사용인들이 휴식을 위해 찾는 곳으로 다양한 상점과 식당, 주점이 있는 곳이었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리를 걷다가 동쪽 끝 목련이라는 이름의 주점으로 들어갔다.

단아한 이름과 달리 주점은 낡았고, 너저분했다. 자리는 만석에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청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리메르는 그 난잡한 분위기를 즐기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우측에 홀로 앉아 있는 중년인에게 다가갔다.

“빨리 왔네.”

그가 중년인의 앞자리에 앉으며 씩 웃었다.

“마법사들은 남는 게 시간이니까요.”

검은색 로브를 입은 채로 책을 읽던 중년인이 고개를 까딱였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리메르 님.”

“술친구. 잘 지냈어?”

“저야 뭐 잘 놀고, 먹고 있습니다.”

“부탑주가 되더니 아주 여유롭네?”

“허허, 여유가 넘치는 건 리메르 님 아니십니까. 월급 도둑이라는 말이 누구 때문에 생겨났는데.”

중년인이 책을 덮으며 픽 웃었다.

“요즘엔 좀 바쁘다 보니, 너랑 술만 마시던 시절이 그립다.”

“수련생들에게 시간을 많이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정성을 다해서 돌보신다고.”

“그 정도는 아니고.”

깊은 친분이 있는지 두 사람의 대화는 벨벳처럼 매끄러웠다.

“베르빈. 넌 요즘 뭐해?”

“리메르 님이 술자리에 나오시질 않으니, 책 읽는 낙으로 살고 있죠.”

베르빈이라고 불린 남자가 손에 든 책을 흔들었다.

“마탑에서 할 일이라고는 연구와 책 읽는 것뿐이니까요.”

“하긴.”

리메르가 베르빈의 손에 들린 마법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표정을 보니 단순히 술이나 마시자는 건 아닌 것 같고.”

“술이 좀 당기기도 했고, 부탁이 있어서.”

“부탁이요?”

“우리 애들 실력이 꽤 올라와서 몬스터와 실전을 시켜보려고.”

“음, 그거라면 정식 요청하셔도 될 텐데요.”

베르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련생들에게 몬스터와 대전을 시켜주는 건 정식 커리큘럼 중 하나다. 이렇게 찾아와 부탁할 필요 없었다.

“거기에 몇 가지 추가를 해보고 싶어.”

“추가라고 하신다면?”

“우리 애들이 좀 강해서 그냥 몬스터는 별로 도움이 안 돼.”

“아, 오웬 왕국의 수련 기사들을 때려눕혔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렇지.”

리메르가 콧대를 들어 올리며 히죽거렸다. 오랜 친구에게 제자들의 칭찬을 들으니, 술에 취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수련생들과 대련을 할 몬스터들을 강화시키고 싶어. 소드 비기너 상급 수준으로.”

“가능합니다. 몇 년 전에 입탑 한 녀석의 전문 분야가 몬스터 소환과 운용이거든요. 지렁이를 용처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 그게 된다고?”

“농담인데요.”

“아, 넌 진짜….”

“지렁이를 용처럼 만들 수는 없지만, 오크를 비기너 상급으로 만드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물론 다수는 안 되고, 한 번에 한 마리씩만.”

베르빈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중얼거렸다.

“고마워 그리고 하나만 더.”

“뭐죠?”

“몬스터가 인간처럼 보이도록 환상 마법을 걸 수도 있지?”

“그것도 쉬운 일이죠. 아직 익스퍼트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니까. 환상 마법이 걸린 아티펙트 하나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잘됐네. 그럼 그것도 그렇게 해줘.”

리메르가 손가락을 튕기고,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그런데 강화와 환상을 동시에 사용하면 수련생들이 이겨내기 힘든 시련 아닐까요?”

베르빈이 술잔을 매만지며 눈매를 좁혔다.

“육체 능력이 강화된 오크와 싸우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텐데, 놈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보인다면 검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할 겁니다.”

“캬아아! 이 맛에 살지!”

리메르는 테이블에 맥주잔을 쾅 내려놓으며 탄성을 흘렸다.

“뭐라고 했어?”

“수련생들이 이기기 힘들 거라고 했습니다. 몬스터 강화야 그렇다 치겠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는 몬스터를 죽이는 건 어린아이들에게 어려운 일이니까요.”

“괜찮아. 우리 애들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검사니까. 그리고….”

리메르가 씩 웃었다. 진녹색 눈동자에 기대감과 즐거움이 어우러졌다.

“그 녀석들 강해. 몸도 마음도.”

*     *      *

마법등이 5 연무장에 내려앉은 어둠을 걷어냈다.

대부분의 수련생들이 본가로 돌아갔지만, 아직 남아서 검을 휘두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루난 슬리온도 그중 하나였다. 연무장에 남아 라온이 보여주었던 찌르기를 연습했다.

파앙!

루난이 자세를 낮추고 검을 내질렀다. 빠르고, 강맹한 검격이 허공을 꿰뚫었지만, 이 느낌이 아니었다.

‘잘 안 돼.’

라온의 찌르기는 강하다기보다는 부드럽고 여유로웠다. 너무 자연스러워 찌르기가 온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몇 번을 해봐도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

실내 수련장 쪽을 바라보았다. 라온은 지금 근력 단련을 하는 중이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몇 번 더 해보자.’

루난은 새롭게 자세를 잡고 허공으로 검을 찔렀다. 자세를 바꿔보았지만, 검세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다시.’

칼날이 공기를 꿰뚫는 소리가 살짝 변했다. 속도와 위력은 조금 줄었지만, 검 끝에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조금 됐어.’

루난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고쳐 잡았다. 계속해서 같은 자세를 반복하며 검을 내질렀다.

그녀는 동쪽에서 떠오른 달이 손가락 두 마리 위로 올라가고 나서야 손을 멈췄다.

“후우.”

루난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조금은 됐어.’

라온을 따라잡으려면 멀었지만, 연성검술의 마지막 초식은 확실히 변했다. 위력과 속도가 줄어들었지만, 연계와 부드러움은 훨씬 나아졌다.

“음.”

루난이 다시 실내 단련장을 보았다. 불은 여전히 켜져 있고, 라온과 버렌, 마르타가 기합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할 때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구슬 아이스크림 사놓을 테니까. 주말에 빨리 오렴.

‘가야지.’

루난이 바로 수련검을 집어넣었다. 모자란 부분은 다음 주에 물어보기로 하고 연무장을 나왔다.

시녀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빨리 돌아가기 위해서 연무장 외곽으로 달려가려 할 때였다. 어둑한 골목에서 한 남자의 그림자가 비쳤다.

“루난.”

무시하고 가려고 할 때 그림자가 한 발 걸어 나오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

루난이 우뚝 멈췄다. 항상 맹했던 그녀의 눈동자가 파도를 맞은 듯 흔들렸다.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짧게 자른 은발과 진한 보라색 눈동자. 루난과 비슷한 외모의 미청년이었다.

“오…빠?”

“오랜만이구나.”

루난이 입술을 떨며 한발 물러섰고,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세 걸음 다가왔다.

시리아 슬리온.

루난의 오빠이자, 슬리온 가문의 역대급 천재라 불리며 대륙십이성에 이름을 올려놓은 남자였다.

“아….”

다만 오랜만에 시리아를 본 루난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오빠가 아니라, 강대한 적을 마주한 것처럼.

“루난. 내가 그런 얼굴 하지 말라고 했지?”

시리아가 빙긋 웃었다. 미소는 여유롭고, 말투는 부드럽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본 사람은 무언가 섬뜩함을 느끼게 될 거다. 입매와 달리 눈은 조금도 웃지 않고 있었으니까.

“으….”

루난이 이빨을 딱딱 부딪치고 고개를 숙였다. 흔들리는 감정을 억지로 가라앉혔는지 떨리던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그래야지.”

시리아가 미소를 유지한 채 다가와 루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메르의 훈련이 괜찮나 보네. 생각보다 강해졌어.”

그가 허리를 숙여서 루난과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시리아의 얼굴에서 가면이 떨어져 나갔다. 표정은 썩은 나무처럼 굳어졌고, 눈동자에서 색이 사라졌다. 감정이 마모된 괴물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전장에 나간다던가, 목숨을 건 대련을 하는 건 아니겠지?”

목소리도 변한다. 생명을 말려 죽이는 사막의 삭풍처럼 지독하리만큼 건조한 음성이다.

“아아….”

루난의 어깨가 덜덜 떨렸다. 손을 부여잡고 뒷걸음질 쳤다.

“흠, 조금 풀렸나? 다시 각인시켜줘야겠는데.”

시리아가 코트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에 눈이 동그란 다람쥐가 한 마리 잡혀 나왔다.

“네가 옛날에 키우던 다람쥐 이름이 루비였었지?”

“오, 오빠?”

루난이 뒷걸음질을 멈췄다. 다람쥐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이제 기억날 거야. 루비가 어떻게 죽었는지. 네가 왜 피를 무서워하게 됐는지.”

“자, 잠깐!”

시리아는 멈춰버린 눈으로 웃으며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퍼엉 소리와 함께 다람쥐가 잡혀 있던 그의 손에는 한 줌 핏물만 남았다.

“아아아악!”

루난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지만, 시리아가 설치한 기막 때문에 누구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루난.”

시리아가 주저앉은 루난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귓가에 입을 대고 생기 없는 목소리를 속삭였다.

“넌 내 거다. 정해진 날이 올 때까지. 위험한 일도, 어려운 일도 하지 마.”

“아….”

“내가 원할 때까지는 그저 숨만….”

콰앙!

시리아가 루난에게 세뇌의 말을 새기려고 할 때 골목의 굉음이 울렸다.

바닥이 뭉개지며 솟구친 모래 먼지를 가르고 금발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붉은 눈동자로 시리아를 틀어보았다.

“너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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