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44화 (44/653)
  • 44화

    끼이이잉!

    라온과 삼왕자의 기운이 정면에서 부딪치며 서로의 검이 비명을 내질렀다.

    찌지지잉!

    발목에서부터 올라온 힘이 라온의 전완근에 담겼다. 바위를 업은 듯한 묵직함이 검면에서 폭발했다.

    “끄읍!”

    검을 쥔 삼왕자의 양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이런 미친!’

    한 번의 패배를 통해 라온이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정면에서도 압도할 무력을 가졌을 줄은 몰랐다.

    “크어어어!”

    삼왕자는 이를 악문 채 기합을 내질렀다. 여기서 밀리면 죽는다는 각오로 끝까지 검을 내질렀다.

    콰아아앙!

    수련검과 수련검이 비껴나가며 라온이 좌측으로 삼왕자가 우측으로 밀려났다.

    “윽!”

    삼왕자가 왼발을 축으로 몸을 돌려 자세를 잡았다. 빠르고 정립된 움직임. 어떤 공격이라도 받아낼 기세였다.

    하지만 상대는 그의 예측을 벗어났다.

    투웅!

    라온은 가람보법을 밟아 자세를 다잡으며 이동을 함께했다. 미끄러지듯 움직여 삼왕자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크윽!”

    삼왕자도 제 실력을 발휘했기에 이전보다 반응 속도가 빨라졌다. 뒤로 물러서며 검을 내질렀다.

    치이잉!

    라온은 검면을 틀어 손목을 노린 삼왕자의 검을 밀어냈다.

    “아직이야!”

    삼왕자의 검이 살아 있는 뱀처럼 휘어지며 손목이 아닌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 그의 눈동자에 승리에 대한 갈망이 담겼다.

    캬앙!

    라온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수련검에 역회전을 걸어 삼왕자의 검에 담긴 회전을 풀어버렸다.

    “크흡!”

    삼왕자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밀려났다.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턱을 떨었다.

    “어, 어떻게….”

    “한번 경험해 봤거든.”

    라온이 삼왕자의 뒤에 보이는 버렌을 흘낏 보았다. 녀석과 싸울 때처럼 검에 담긴 있는 회전을 지워버렸을 뿐이었다.

    “괴물인지, 천재인지….”

    삼왕자가 입술을 깨물며 자세를 낮췄다. 검을 양손으로 잡고 사선으로 틀었다. 계속 보았던 자세지만, 이전과는 다른 기세가 풍겨 나왔다.

    ‘페레스 검술.’

    오웬 왕국의 미래만이 익힌다는 세 가지 왕국 검술 중 하나 페레스 검술이었다.

    수백 년 전 대륙제일검사 페레스가 남긴 검술로 하늘의 흐름을 담아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상승의 무학이었다.

    “하압!”

    삼왕자가 단단한 기합을 내지르며 발을 굴렀다. 질풍처럼 달려와 검을 올려 친다.

    터엉!

    라온은 삼왕자의 검에 맞서지 않고 가람보법을 운용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가지처럼 검을 스쳐 지나갔다.

    삼왕자가 올라간 검을 내리치며 따라붙었다. 오러의 운용이 정심해 속도가 빠르면서도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다.

    캬앙!

    라온은 연성검법으로 삼왕자의 검을 튕겨내면서 뒤로 물러섰다.

    “이젠 놓치지 않는다!”

    삼왕자는 추적을 늦추지 않으며 더 완성도 높은 페레스 검술을 펼쳐냈다. 하늘을 담았다는 뜻대로 검날에 웅장하면서도 현묘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나쁘지 않군.’

    라온은 이마 위로 스쳐 지나가는 삼왕자의 검을 느끼며 픽 웃었다.

    ‘아까와는 달라.’

    이전에 싸웠을 때와는 무력도 의지도 달라졌다.

    ‘역시 명문 왕국인가….’

    괜히 육황의 한 축인 오웬 왕국에서 인정을 받는 자가 아니었다. 저 어린 나이에 싸움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다.

    언젠가 오웬 왕국과 싸울 가능성도 있다. 그날을 위해서 왕국의 상급 검술을 눈에 익혀둘 생각이었는데 제대로 공부가 되고 있었다.

    거기다 삼왕자는 싸우면서 계속 생각을 하고 움직임을 조절한다. 재밌는 상대였다.

    쩌엉!

    라온이 목을 노리고 휘어진 삼왕자의 검을 격하게 쳐냈다. 날카로운 검격. 하지만 파악은 이미 끝났다.

    불의 고리를 운용하면서 싸웠기 때문에 그의 검술을 파악하기 어렵지 않았다. 삼왕자가 펼친 검술은 모두 자신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쩡! 쩌저정!

    라온은 더 이상 보법을 밟지 않았다. 다 다리로 대지를 누르며 삼왕자의 검술을 모조리 받아냈다.

    “허….”

    “미친!”

    삼왕자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지고, 타르탄 공작이 입을 떡 벌렸다.

    “후욱….”

    삼왕자가 긴 숨을 뱉어내며 한발 물러섰다. 어깨를 펴며 검을 다잡았다.

    “아직이오. 마지막 한 수가 남았어.”

    그 말과 함께 검을 들어 올렸다. 하늘을 받치는 상단의 자세. 그대로 땅을 박찼다.

    ‘비기인가.’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상급 검술에는 그 이름값을 할 비기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삼왕자는 페레스 검술의 비기를 사용하려는 것 같았다.

    후우웅!

    삼왕자의 전신에서 퍼진 기류가 몸을 압박해왔다. 상대의 회피를 막고, 정면에서 검을 내리치는 돌진형 검술이었다.

    ‘받아주지.’

    라온이 검을 좌측으로 젖혔다. 검술 구경은 할 만큼 했으니 끝낼 시간이다.

    만화공 일화.

    회축.

    검 끝에서 피어난 새빨간 불꽃이 톱니처럼 회전하며 대련장의 열기를 갈랐다.

    “하아압!”

    삼왕자는 라온의 검에서 솟구친 불꽃을 보고도 물러나지 않았다. 본인의 오러와 검을 믿는 것이다.

    치이이잉!

    가늘게 치솟은 불꽃이 삼왕자의 오러를 가른다.

    “허!”

    갈라지는 푸른 오러 사이로 삼왕자의 쩍 벌어진 눈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는 괜히 오웬 왕국의 삼왕자가 아니었다.

    마지막 오러를 끌어올려 갈라진 오러를 메꿨다.

    “소용없어.”

    라온이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수련검을 끝까지 베어냈다.

    “아직이다! 내 검은…어?”

    삼왕자가 턱을 떨며 내리치던 검을 멈춰 세웠다.

    아니,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검은 이미 부러졌으니까.

    라온의 회축은 삼왕자의 오러만이 아니라, 그의 수련검까지 베어버렸다.

    “허….”

    삼왕자가 털썩 주저앉았다. 멍한 눈으로 부러진 검을 바라본다.

    “히, 힘과 속도는 내가 유리했는데….”

    “보법을 밟고 물러난다고 하여 무조건 힘이 밀려서는 아닙니다. 기회를 잡기 위해서 일부러 물러나기도 하죠.”

    “…확실히 느꼈소.”

    삼왕자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그는 부러진 검을 챙기고, 갑옷과 머리를 정돈한 뒤 다시 라온의 앞에 섰다.

    “고맙소. 두 번째 대련을 받아준 덕분에 많은 것을 느꼈소. 세상이 넓다는 말은 진실이었군.”

    그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왕자라고 생각될 정도로 정중한 몸짓이었다.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라온도 삼왕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처음에 무시해서 미안하오. 이 못난 놈이 보는 눈이 없었다고 생각해주시오.”

    “괜찮습니다.”

    “몇 살이오?”

    “14살입니다.”

    “하, 나보다 어린 검사에게 검으로도, 인성으로도 졌구려.”

    삼왕자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의 원래 성격이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당신이라면 괜찮을 것 같소.”

    그는 갑옷 안쪽에 손을 넣어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사자가 그려진 패를 꺼냈다. 뒤에는 그리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받아주시오.”

    “이건….”

    “오웬의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이 그 어떠한 부탁이라도 들어주겠다는 증거요.”

    “네?”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삼왕자가 넘겨준 건 왕자를 상징하는 패로 그의 말대로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걸 왜 제게….”

    “패했지만 정신은 오히려 시원해졌소. 이런 적은 처음이야. 뭔가를 깨달은 듯한 기분이오.”

    삼왕자는 그 대가에 비하면 저 패는 싼 거라고 중얼거렸다.

    “음….”

    라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패를 받아들였다.

    “당신과는 훗날 다시 만나겠지. 그때도 지금처럼 내 위에 있어 주길 바라오. 따라잡는 재미가 있을 것 같소.”

    삼왕자는 구김 없이 웃었다. 대련장에서 내려와 리메르의 앞에 섰다.

    “리메르 교관. 우리가 패했소. 내기는 이야기한 대로 이루어질 거요.”

    “알겠습니다.”

    리메르는 여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르탄 공작.”

    “예.”

    “돌아갑시다. 당장에 해야 할 일이 생각났소.”

    “예!”

    삼왕자와 타르탄 공작은 수련 기사들을 이끌고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흥! 끝까지 잰 척하네. 짜증나게!”

    마르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무너진 대련장을 걷어찼다.

    “있어 보이는 척이라….”

    라온은 사라지는 삼왕자의 등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삼왕자의 눈에 어지러움은 없었다.

    ‘아닐 거야.’

    그는 변했고, 변할 것이다. 버렌과 마르타가 그랬듯이.

    ‘그리고….’

    라온이 손에 들린 패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저 수련을 위해 대련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런 물건을 받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신기하네.’

    대가도 없이 암살만 하던 전생을 겪어서 그런지 이런 갑작스러운 대가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무슨 의도로, 왜 줬는지 모르겠다. 다만 나쁜 의미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번 삶도 생각한 대로 돌아가지는 않는군.’

    *     *      *

    삼왕자는 그 길로 알현실을 찾아갔다. 예정보다 빠르게 돌아가겠다고 전했을 때 알현실 문이 열리고 수석 집사 로엔이 걸어 나왔다.

    “가주님께서 들어오라 하십니다.”

    “…알겠소.”

    삼왕자는 침을 꼴깍 삼키고서 로엔을 따라 알현실로 들어갔다.

    “흡….”

    처음 보았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듯한 글렌의 눈을 마주한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눈빛이 변했군.”

    한쪽 무릎을 꿇으려 할 때 글렌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부끄럽지만 전 스스로를 최고라 생각했습니다. 오웬 왕국만이 아니라, 다른 육황의 재능들과 부딪쳐도 꺾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삼왕자는 가라앉은 눈빛을 세우며 말을 이었다.

    “그건 이곳 지그하르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연무장을 돌아보았지만, 마음에 차는 수련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건 5 연무장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 세 명의 강자가 있었지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삼왕자가 라온에게 얻어맞았던 오른 손목을 문질렀다.

    “그곳에는 제가 파악조차 못 한 강자가 있었습니다. 라온 지그하르트. 저보다 어린 수련생의 무력을 무시했다가 일방적으로 패했습니다. 억지로 우겨서 치렀던 두 번째 대련 역시 패했습니다.”

    “흐음.”

    글렌의 반응에 삼왕자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알현실의 분위기가 살짝 부드러워진 듯한 기분이었다.

    뭐랄까? 더 해보라는 것처럼. 어서 말해보라는 것처럼.

    “음, 전 육황 중 세 곳을 돌아보았고, 대련도 해보았지만 라온 같은 수련생은 보지 못했습니다. 무력, 인성, 정신 모든 것이 이미 완성된 무인을 보는 듯했습니다. 그런 아이에게 패했기 때문인지 기분이 나쁘긴커녕 오히려 깨우친 기분이었습니다.”

    삼왕자는 말을 이어갈수록 알현실 분위기가 봄처럼 따스해졌다.

    “저보다 어리지만 배울 점이 많은 검사였습니다.”

    “그런가?”

    “예. 그래서 지금 당장 돌아가려는 겁니다. 그 아이를 보고 깨달은 점을 당장 체화시키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알겠다. 현왕에게 편지는 잘 받아보았다고 전해주도록.”

    “감사합니다.”

    삼왕자는 글렌에게 예를 갖춘 인사를 건넨 뒤 알현실을 벗어났다.

    “…흡.”

    둘이 남은 알현실에서 웃음을 참든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로엔이 글렌을 보며 입을 막고 있었다.

    “왜 웃는 게냐.”

    “가주님이 미소를 짓고 계신 모습을 보니,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습니다.”

    “미소?”

    글렌이 손을 가져다가 입매를 만져보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오웬 왕국의 삼왕자가 라온 도련님의 이름을 말했을 때부터 미소를 짓고 계셨습니다. 손자가 타국의 왕자에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착각이다.”

    글렌은 괜한 헛기침을 하며 왼 주먹으로 턱을 괴었다.

    “흐흡.”

    “웃지 마라.”

    “옙!”

    로엔이 더 크게 웃음을 흘렸지만, 글렌의 말에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요즘 리메르랑 붙어 다니더니, 그놈의 병이 옮았군.”

    글렌은 한숨을 내쉬고서 눈을 감아버렸고, 로엔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떠날 줄 몰랐다.

    *     *      *

    “삼왕자님. 떠날 준비를 마쳤습니다.”

    삼왕자가 가주전을 나왔을 때 타르탄 공작이 다가왔다.

    “수고하셨소. 인사는 드렸으니, 바로 돌아가도 될 거 같소.”

    “알겠습니다. 모두 열을 맞춰라.”

    “예!”

    타르탄 공작의 말에 기사와 수련 기사들이 그의 뒤로 붙었다.

    “가자.”

    “음….”

    삼왕자가 가장 앞에서 걸어갔고, 타르탄 공작은 그 옆에 붙어 입맛을 다셨다.

    “무슨 할 말 있소?”

    “그 라온이라는 수련생과 대련을 할 때 말입니다. 감춰둔 힘을 개방하고, 페레스 검술까지 사용했던 건 조금 과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힘은 적당히 숨기는 게….”

    “나도 알고 있소. 확실히 과했지.”

    “예. 페레스 검술은 왕국의 최상급 검술. 공개해서 좋을 게 없습니다. 거기다 신패를 내놓으시다니 너무 과한….”

    “그건 아니오.”

    타르탄 공작의 말이 삼왕자의 손에 의해 막혔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내게 호의를 베풀었소. 이쪽이 무시로 시작했지만, 예의로 대해주었지.”

    “음….”

    “나도 그에게 예의를 차렸을 뿐이오. 거기다 그 친구 역시 비기라고 할 법한 검술을 보였잖소.”

    “…그건 그렇습니다.”

    “그리고 신패를 준 건 투자요.”

    “투자라고 하신다면?”

    타르탄 공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어린 나이에 그런 무력과 인성, 정신력이면 방계라고 해도 대륙 전체에 이름을 날릴 거물이 될 거요. 그런 이와 친분을 만들어 둔다면 훗날 내게 도움이 될 가능성도 있지 않겠소.”

    “그렇군요. 그 순간에 거기까지 보시다니, 대단하십니다.”

    “가슴과 혀에 칼을 달고 사는 왕국에서 자랐는데, 그 정도 계산도 못 하면 죽어야지.”

    삼왕자는 픽 웃고서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흠….”

    타르탄 공작이 턱을 긁적였다. 조금 전 삼왕자의 옆에 있을 때와 달리 표정엔 냉정함만이 가득했다.

    ‘확실히 달라지셨군.’

    이곳에 오기 전 삼왕자의 기질에 어린 자만심은 아예 사라졌다. 지금 그의 눈빛에서 새어나오는 건 발전을 위한 열의였다.

    “정말 술이라도 사야겠는데?”

    타르탄 공작은 옆에 보이는 5 연무장을 보며 픽 웃었다.

    “나중에 만난다면 말이야. 그리고….”

    그는 연무장 내부에 있을 라온을 생각하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궁금하군.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 그가 어떤 괴물이 되어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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