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자, 주목!”
리메르가 단상 위로 올라가 손뼉을 쳤다. 수련에 빠져 있던 수련생들이 모두 고개를 들었다.
“저분들 보이지?”
그는 연무장 우측에 서 있는 오웬 왕국의 기사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웬 왕국의 손님들이 우리에게 대련을 신청하셨다.”
“대, 대련이요?”
“이렇게 갑자기?”
수련생들은 생각지도 못한 대련이라는 단어에 당황하여 입을 떡 벌렸다.
“갑자기? 뭘 갑자기야. 내가 항상 말했잖냐. 검사란 자다가 일어나도 바로 검을 휘두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리메르는 혀를 차며 너희는 아직 멀었어라고 중얼거렸다.
“으음!”
“그래도 오웬 왕국인데….”
“조금 준비하고 싸우는 게 나, 낫지 않을까요?”
리메르의 조언에도 수련생들의 긴장 어린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다만 전혀 다른 생각을 한 수련생도 있었다.
버렌과 마르타는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으로 오웬 왕국의 수련 기사들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루난은 앞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수련만 계속했다.
“흐흐!”
수련생들의 당황을 즐기던 리메르의 시선이 라온에게 향했다. 넌 어때라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흠….”
라온이 쓱 고개를 돌려 오웬 왕국의 수련기사들을 살폈다.
‘대련이라….’
기사라면 모를까 수련 기사 중에 자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저 중심에 있는 왕자라면 가람보법과 연성 검술의 조화를 연습하기에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리메르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진하게 치솟았다.
“모두 동의했으니, 시작해도 되겠네. 인원은 20명이다. 그리고….”
리메르는 수련생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내 월급 전부 내기에 걸었으니까. 무조건 이겨라. 지면 진짜 뒤진다.”
“어엉?”
“예? 그, 그게 무슨….”
“대련을 준비해라!”
수련생들이 입을 쩍 벌렸다. 따지려고 했지만 리메르가 먼저 몸을 돌리며 교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예!”
교관들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수련생들을 퍼뜨리고 연무장의 중앙에 대련을 위한 판과 장치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하.”
라온은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이거였군.’
며칠동안 리메르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했던 게 모두 이 대련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오웬 왕국의 사절단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지금의 대련을 준비했을 것이다.
‘대단하다니까.’
아직 검사나 기사의 자격을 얻지 못한 아이들이라고 해도 육황끼리의 대련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저리 물 흐르듯 대련을 진행하다니 리메르는 역시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집합.”
라온은 뒤를 돌며 모두를 불러 모았다.
“응.”
지금까지 그 누구의 말에도 신경 쓰지 않았던 루난이 검을 멈추고 가장 먼저 다가왔다.
“쯧.”
“…….”
버렌과 마르타. 수련생들도 루난의 옆에 섰다. 라온을 중심으로 5 연무장의 수련생 모두가 원을 그리고 모였다.
“들었듯이 대련은 이미 결정됐다. 20명을 뽑아야 하니, 지원할 사람은 거수하도록.”
“나는 무조건 나간다.”
“마찬가지. 다 날려버려서라도 나갈 거야.”
버렌과 마르타가 동시에 손을 들어올렸다.
“라온도 할 거야?”
“그래.”
“그럼 나도 할게.”
루난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들었다. 그 뒤로 수련생 10명 정도가 손을 들어 올렸다.
“…….”
“으음….”
다만 다른 수련생들은 섣부르게 손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겁을 먹은 건가.’
오웬 왕국의 수련 기사들은 정식 작위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도 갑옷을 입고 있었다.
자신의 실력에 완연한 자신이 없는 상태에서 당당하게 서 있는 수련 기사들의 위압감에 몸과 마음이 굳은 것 같았다.
“쯧.”
귀찮지만 수석의 자리에 있으니, 수련생들을 움직이는 것도 자신의 역할이었다.
“저들이 당당해 보이나?”
라온은 대련을 준비하는 오웬 왕국 수련 기사들을 가리켰다.
“그게 좀 그렇잖아.”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요.”
수련생들은 슬금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 기사들의 손을 자세히 봐라.”
“응?”
수련생들의 시선이 라온의 손가락을 따라 수련 기사들의 손으로 향했다.
“음?”
“사, 살짝 떨리는 거 같은데?”
“같은데가 아니라, 떨리고 있어….”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다.”
수련생들은 다른 수련 기사들의 손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저들이 멋들어진 갑옷을 입고 있는 건 맞지만, 대련 전의 떨림과 긴장을 숨기지 못하는 수련생일 뿐이다.”
“아….”
“즉, 너희와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 아이라는 거지.”
라온이 몸을 돌리고 수련생들을 바라보았다.
“겁먹을 필요 없다. 너희는 다른 육황이나, 오마에 절대 밀리지 않는 훈련을 해왔어. 배운 대로 싸우면 꼴사납게 지는 일은 없을 거다.”
“으음!”
“하, 하긴 우리만큼 수련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훈련하며 흘린 피와 땀은 누구에게도 안 밀리지.”
라온이 진중한 목소리로 전하는 인정에 수련생들의 눈동자에 생기와 투지가 타올랐다.
“다시 묻겠다. 대련에 나가고 싶은 사람은 거수해라.”
훅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수련생 모두가 손을 들어 올렸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버렌과 루난, 마르타를 포함한 20명의 수련생을 뽑았다.
뽑힌 수련생도, 뽑히지 않은 수련생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기세로 오웬 왕국을 보았다.
‘귀찮군.’
어린아이들을 챙겨주는 건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다.
다만 수련생들과 시간, 공간을 공유하다 보니, 약간이나마 정이 들었나 보다. 아예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럼 대련 순서를 정하겠다. 첫 번째는 마르타. 할 수 있겠지?”
“조지고 올게.”
마르타가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봉은 수련생들의 사기를 끌어 올릴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에 5 연무장에서 두 번째로 강한 마르타가 가는 게 맞았다.
“그 뒤로….”
수련생들의 대련 순서를 하나하나 정했다. 루난이 18번째, 버렌이 19번째 그리고 마지막이 자신이었다.
“준비가 끝났으면 가운데로 모여주십시오.”
“가자.”
라온은 리메르의 얄미운 목소리를 들으며 연무장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 * *
마르타는 대련장 위에 올라온 수련 기사를 보고 턱을 모로 틀었다. 잘 닦인 은빛 갑옷, 큼지막한 덩치는 완연한 기사를 생각나게 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자신을 힘으로 짓눌러버린 그 망할 놈에 비하면 조금도 커 보이지 않았다.
“타르스요.”
덩치 큰 수련 기사가 검집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꾸벅였다.
“마르타 지그하르트.”
마르타는 이름을 밝히고서 발을 어깨의 절반 너비로 벌렸다.
“성장하지 않은 육체가 무섭도록 단련되어 있군. 좋은 승부를 부탁하겠소.”
타르스라 이름을 밝힌 수련 기사는 마르타의 단아한 외모와 작은 체구에도 방심하지 않고 그녀의 기운을 파악했다. 괜히 수련 기사 중 선봉으로 나온 게 아니었다.
“좋은 승부? 어차피 얻어터질 텐데, 똥폼 잡지 말고 덤벼.”
마르타는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흠.”
타르스가 콧김을 내뿜으며 검을 뽑았다. 일반적인 기사의 검보다 두꺼운 대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보다 입이 험하군. 검술도 그 정도 되기를 바라겠소.”
“주절주절 말 많네. 안 오면 내가 간다!”
마르타가 땅을 박참과 동시에 검을 뽑았다. 새하얀 칼날이 달아오른 열기를 갈랐다.
“멍청한!”
타르스 차가운 눈빛을 빛내며 대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둔탁한 대검의 날에서 강렬한 풍압이 치솟았다.
화아아악!
묵직한 바람이 마르타의 육체를 짓누르려는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쿠웅!
마르타는 진각을 밟으며 검을 올려 쳤다. 폭포를 오르는 연어처럼 풍압을 가르고 대검과 맞부딪쳤다.
쩌어어엉!
쇳덩이가 터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고 타르스의 대검이 튕겨 나가 땅에 꽂혔다.
“허억!”
타르스가 깜짝 놀라 뒤로 몸을 뺐지만, 마르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바로 따라붙어서 검면으로 타르스의 복부를 후려쳤다.
“끄르륵!”
배를 얻어맞은 타르스는 거품을 뿜어내며 뒤로 넘어갔다.
“힘으로 싸우는 놈이 일격에 모든 걸 담지 않다니 한심하네.”
마르타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검을 집어넣고, 몸을 돌렸다.
“마르타 승리!”
리메르는 흡족한 웃음을 그리며 마르타쪽의 손을 들어 올렸다.
“흐음….”
라온은 마르타의 뒷모습을 보며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군.’
자신에게 패한 이후 마르타가 검술에 부드러움을 담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부드러움을 추가하는 게 아니라, 힘과 속도를 더 올려서 위력을 강화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단순함이다.
‘꺾이지 않는 의지인가.’
마르타의 타협하지 않는 성격은 분명 그녀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 것이다.
‘꽤 재밌는데?’
-재미? 어린 개미들의 싸움을 보고 있는 게 재밌나? 본왕이 볼 때는 지루하기만 하다.
‘개미들도 항상 어린 것만은 아니니까.’
-한심하군.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어린 마족들을 불러다가 대련을 시켰을 때도 이런 허접함은 보이지 않았… 컥!
라온은 꽃팔찌를 건드려서 라스의 입을 다물게 한 후 다음 대련을 기다렸다.
‘난 재밌으니까. 조용히 좀 해.’
* * *
마르타가 최고의 시작을 선보였지만, 오웬 왕국의 수련 기사들은 만만치 않았다.
정예만 온 것인지 5 연무장의 수련생들과 승리와 패배를 번갈아 하며 접전을 벌였다.
그렇게 17번의 대련이 진행되며 5 연무장의 수련생들은 8승 9패의 결과를 만들었고, 18번째 루난의 차례가 되었다.
“루난 네 차례야.”
“응.”
루난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대련장 위에는 루난과 비슷한 키의 여성 기사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에델리아.”
“루난 슬리온.”
루난과 에델리아는 각자 기사와 검사의 예의를 차리고서 마주 섰다.
“…….”
루난은 검조차 뽑지 않고, 평소처럼 멍한 눈으로 에델리아를 보았다.
“그 맹한 눈 왠지 마음에 안 드네.”
에델리아가 콧등을 찡그리고서 루난을 향해 돌진했다. 창처럼 세운 검 끝에 붉은 화염이 치솟았다.
후우욱!
화염의 오러. 에델리아가 작은 체구로도 후반에 나온 이유를 보여주는 한 수였다.
“불은 싫어.”
루난은 거의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입을 내밀며 검을 뽑았다.
화아아!
은빛 칼날보다 더 새하얀 서리가 허공을 뒤덮었다.
찌이잉!
화염의 검과 냉기의 검이 맞부딪치며 새하얀 수증기가 치솟았다.
루난은 가람보법을 밟아 냉기와 연기 사이로 몸을 숨겼다.
“냉기 따위 지워버리면 그만이야!”
에델리아는 검신 위에 차오른 불꽃을 횃불처럼 휘둘러 냉기와 연기를 동시에 지워버렸다.
“거기!”
그녀는 냉기 사이의 일렁임을 놓치지 않고 검을 내질렀다.
“어?”
에델리아가 눈을 부릅떴다. 검 끝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고, 검에 꿰뚫린 허공은 텅 비어있었다.
“윽!”
그녀는 목 부근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치이잉.
루난이 시퍼런 눈빛을 발하며 에델리아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졌어.”
에델리아는 입술을 깨물고 검을 떨궜다.
루난은 그녀의 목에 대고 있던 검을 치워 검집에 넣었다.
“좋은 싸움…어?”
에델리아가 손을 내밀었지만 루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려가서 라온의 앞에 섰다.
“봤어?”
“보법이 익숙해졌네. 잘했어.”
“응.”
루난은 고개를 꾸벅이고서 라온의 옆에 푹 주저앉았다.
라온은 루난의 차가운 기세를 느끼며 옅게 웃었다.
‘내 보법을 실전에서 사용하다니.’
이번에 루난이 사용한 보법은 혼자 수련할 때 연습했던 가람보법의 은신형이었다.
약간의 조언만 해줬을 뿐인데, 루난은 그것만으로 색다른 응용보법을 만들어냈다.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저리 잘 따라오는 걸 보니, 괜히 뿌듯했다.
“양쪽 9승 9패라. 이거 재밌게 돌아가네요. 그럼 19번째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리메르는 흥미로운지 히죽히죽 웃으며 버렌과 수련 기사를 불렀다.
“흐음….”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꽤 강하네.’
버렌과 마주 선 수련 기사의 자세는 안정되어 있고, 눈빛에 정광이 흐른다. 삼왕자를 제외한다면 지금까지 본 수련 기사 중 가장 강했다.
두 사람의 무력은 비슷했다. 순간의 실수로 결과가 정해질 수준. 저쪽에서도 비밀병기라고 할 법한 수련 기사를 내보낸 것 같았다.
“수련 기사 세툰 카젤이라고 합니다.”
“수련생 버렌 지그하르트입니다.”
수련 기사와 버렌은 서로에게 정중한 인사를 한 뒤 검집에 손을 올렸다.
“19번째 대련을 시작한다!”
리메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련장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사라졌다.
콰앙!
보법으로 땅을 박차고 나선 버렌과 세툰이 중앙에서 검을 맞부딪쳤다.
‘알고 있군.’
두 사람도 아는 것이다. 서로의 힘이 호각이며 방심하는 순간 바로 끝난다는 것을.
쩡! 쩌정!
버렌의 검은 빠르면서 정확했고, 세툰의 검은 무겁고 강했다.
두 검사는 상대를 짓누르기 위해 스스로가 가진 장점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검을 내리쳤다.
그야말로 접전. 수련생만이 아니라, 검사들마저 대련에 빠져들었다.
피이익!
버렌의 어깨에서 피가 튀고, 세툰의 흉갑이 쩍 갈라졌다.
검사와 기사는 피가 흐르고, 살이 뜯어져도 검을 놓치지 않았다.
생사대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상대의 약점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트드득!
세툰의 묵직한 검격에 뒤로 밀려난 버렌이 이를 악물었다. 검을 세우고, 오러를 전력으로 끌어올렸다.
“흡!”
세툰도 버렌의 기운을 느끼고 단전의 오러를 모조리 운용했다.
“흐아압!”
버렌이 바람에 몸을 실어 나아갔고, 세툰은 두 다리를 땅에 박은 채 검을 내리쳤다.
콰아앙!
대련장이 뭉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회색 연기가 치솟았다.
잔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두 사람의 움직임이 멈췄다.
후우웅!
리메르는 콧노래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녹색 바람이 불어와 대련장의 연기를 밀어냈다.
버렌과 세툰은 주먹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멈춰 섰고, 두 사람의 검은 반으로 갈라져 땅에 박혀 있었다.
“어?”
“저, 저렇게 되면….”
“비긴 거잖아.”
수련생들의 말대로 두 사람은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체력과 오러를 모조리 사용해 사지를 덜덜 떨고 있었다.
“19번째 대련은 무승부!”
리메르의 선언을 들으며 버렌이 억지로 몸을 세워 대련장을 내려왔다.
“젠장….”
그는 이를 악문 채로 인상을 구겼다.
“잘했다. 저 수련 기사 오웬 쪽에서 가장 강했어.”
“그게 무슨 소용이냐.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걸고 나갔다면 무조건 이겼어야 했어!”
버렌은 말아쥔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힘이 없어서 피부가 찢겨나갔다.
“흐음.”
라온은 버렌과 싸웠던 세툰을 보았다. 그 역시 분했는지 점잖았던 표정이 나무껍질처럼 구겨져 있었다.
‘명예라….’
전생이고, 현생이고 살기 위해 바빴기 때문인지 아직도 명예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럼 승패를 결정할 마지막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리메르의 경쾌한 음성을 들으며 일어섰다.
“걱정하지 마.”
라온은 입술을 구기는 버렌을 돌아보았다.
“내가 이길테니까.”
“…….”
버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나름대로 믿는다는 표현 같았다.
라온은 몸을 돌려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명예 따윈 모르겠지만, 모두가 한마음이 되었으니 이겨줄 생각이다. 아니, 이기고 싶었다.
“지그하르트의 직계인가?”
대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삼왕자가 검병을 두드리며 고개를 틀었다.
“아닙니다. 방계입니다.”
“쯧, 버리는 말과 싸우게 되다니.”
방계라고 하자 삼왕자의 이마가 구겨졌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무력을 알아보지 못한 상태였다.
“제안이 있소.”
삼왕자는 라온을 쳐다보지도 않고 리메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떤 제안이십니까?”
“저쪽의 둘.”
그가 대련장을 지켜보는 루난과 마르타를 가리켰다.
“제대로 힘을 쓴 거 같지도 않은데 내가 이자를 꺾으면 재대련을 하는 게 어떻겠소?”
“흐음….”
리메르가 떨리는 턱을 긁적였다. 표정을 보니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뭐, 그렇게 하죠. 이.기.신.다.면요.”
“그럼 저들에게 몸을 풀라고 하시오. 금방 끝날 테니까.”
삼왕자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게 빨리 끝나겠네.”
라온의 눈동자에 서늘한 한기가 번뜩였다.
내가 이기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