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새하얀 눈발 사이로 은빛의 선이 흘러간다.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행군이었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곰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거대한 덩치의 중년 기사가 바로 옆에서 걷고 있는 소년을 내려보았다.
“아직은 괜찮소. 다만 예상보다 눈발이 거세 수련 기사들이 버거운 것 같소.”
왕자라 불린 소년이 뒤를 돌았다. 담담한 표정의 왕자와 달리 수련 기사들은 티가 날 정도로 지쳐있었다.
“지그하르트까진 아직 멀었소?”
“폭설이 점점 거세지는 걸 보니, 거의 도착한 것 같군요.”
“거의 도착했다니, 그럼 지그하르트의 검사들은 매일같이 이런 눈발을 견딘단 말이오?”
“그건 아닙니다.”
중년 기사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그하르트로 가면 갈수록 날씨가 사나워지지만….”
그의 입을 떼기 무섭게 쏟아지던 눈덩이가 그치고, 회색 구름 뒤에 숨었던 태양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그하르트 내부의 날씨는 청아하기 그지없습니다. 물론 기온 자체는 더 내려가지만요.”
“허….”
왕자는 헛바람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끝을 모르고 쏟아지던 눈 폭풍이 꿈이라 생각될 정도로 하늘이 맑았다.
“우와!”
“누, 눈이 단번에 그쳤어.”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렸다.
“타르탄 공작. 이 날씨는 대체….”
“마법 같지만, 마법이 아닙니다. 이런 괴이한 자연환경 때문에 지그하르트를 천혜의 요새라고 말하는 겁니다.”
타르탄 공작이라 불린 중년 기사가 빙긋 웃으며 전방에 보이는 거대한 성벽을 가리켰다.
“물론 이런 지그하르트도 뚫린 적이 있지만요.”
“음….”
왕자는 그게 언제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에서도 기다리고 있으니, 일단은 들어가시죠.”
타르탄 공작이 지그하르트의 성벽 아래에 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거인이 드나들어도 될 정도로 거대한 철문 앞에 붉은색 코트를 두른 검사들이 날카로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겠소.”
왕자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 지그하르트의 문지기들이 서 있는 철문으로 향했다.
* * *
라온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시 연무장으로 돌아가다가 멈춰 섰다.
‘뭐지?’
정문 방향에서 많은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갑옷과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 평소 지그하르트에선 들기 힘든 금속음이었다.
잠시 후 외총관 일리운이 모습을 드러냈고, 은빛 갑옷을 두른 기사들이 그 뒤를 따라갔다.
‘오웬 왕국….’
은빛 갑옷의 왼쪽에 사자 머리가 그려져 있었다. 오웬 왕국의 문양이었다.
다른 수련생들이나 검사들도 멈춰서서 오웬 왕국의 기사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웬 왕국의 사절단이네요.”
도리안이 옆으로 다가오며 낮은 휘파람을 불었다.
“사절단?”
“며칠 전부터 오웬 왕국의 사절단이 도착한다고 하다고 가문 구석구석 청소했었잖아요. 모르셨나요?”
“몰랐어. 그런데 사절단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좀 작은데.”
라온이 기사들 뒤에 있는 체구가 작은 아이들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아, 저들은 오웬 왕국의 3왕자와 함께 온 수련 기사들이에요. 경험을 늘리기 위해서 함께 왔겠죠.”
“아는 것도 많군.”
“이미 소문이 돌았으니까요. 다들 아는 표정이잖아요.”
“그렇긴 하네.”
모르는 사람은 수련에 빠져 있던 자신과 평소엔 그저 멍한 루난 뿐인 것 같았다.
라온이 왕국 사절단을 쭉 살펴보았다.
‘꽤 강하네.’
같은 육황임을 증명하듯 수련 기사들의 무력은 5연무장의 수련생들과 비슷할 정도였다.
‘강하던 말던 나랑은 상관없지만…음?’
연무장으로 가기 위해 고개를 돌리다가 수련 기사 중 가장 앞에 선 자와 눈을 마주쳤다.
하늘을 담은 듯한 푸른 눈에 굳건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
‘나이답지 않은 무력이군.’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알았다. 저 수련 기사가 저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걸.
‘그렇지만.’
그건 10대 수준에서의 평가일 뿐. 자신의 눈에 차기에는 한참 멀었다.
예상대로 푸른 눈의 아이는 자신의 기운을 읽지 못하고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저런 거에 신경 쓸 시간은 없지.’
보법과 검법의 완성도를 높이느라 바쁘다. 왕국 사절단과는 부딪칠 일이 없으니 잠시 본 것으로 족했다.
라온은 머릿속에 보법의 흐름만을 생각하며 연무장으로 걸어갔다.
* * *
‘뭐야 이건….’
오웬 왕국의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척추가 곤두서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위를 향할수록 숨통이 조여왔다.
그 모든 것은 저 위에 앉은 남자 때문이다.
북패왕 글렌 지그하르트. 대륙 최강의 검사라는 남자의 눈빛을 받는 것만으로 손발에 힘이 빠졌다.
“오느라 수고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옆에서 들린 타르탄 공작의 목소리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선왕의 어린 시절이라 해도 믿을 법하구나. 그가 아끼는 이유를 알겠어.”
자신의 얼굴을 본 글렌 지그하르트가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가, 감사드립니다.”
입안에 침이 말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자그마한 기세도 피우지 않았는데 저런 존재감이라니, 왕국 제일검을 마주했을 때도 느끼지 못한 경험이었다.
“저, 전하께서 전해주신 서신이 있습니다.”
삼왕자는 품에서 금색의 봉투를 꺼냈다. 휘청이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줘서 일어섰다.
“끄읍….”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단상으로 다가가 글렌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흠.”
그 모습에 글렌의 눈동자에 작은 이채가 발했지만 금세 사라졌다.
“자네들이 요구했던 대로 수련생들의 훈련을 참관할 수 있도록 조치했네.”
글렌이 편지를 옆에 놓으며 느릿하게 입을 뗐다.
“저녁 연회를 준비했으니, 오늘은 편히 쉬고 내일부터 돌아보도록 하라.”
“가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
“예.”
삼왕자는 뒤로 세 걸음 물러선 후 허리를 숙인 후 일어섰다.
“공작은….”
“저는 가주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쉬고 계십시오.”
타르탄 공작이 옅게 웃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알겠소.”
삼왕자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알현실을 떠났다.
“재능이 뛰어난 아이로군. 왕위보다 검좌에 오르는 게 빠르겠어.”
잠시간의 침묵 후 글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역시 한눈에 파악하시는군요. 삼왕자께선 차기 왕국 제일검이라 불리고 계십니다.”
“확실히 보기 드문 재능이야.”
“재능만이 아니라, 의지도 굳건합니다. 로베르트 검술을 견식하기 위해 남쪽에도 가셨었죠.”
타르탄 공작은 삼왕자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기껍다는 듯 웃었다.
“흐음.”
글렌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재능과 노력 그리고 의지라….’
삼왕자의 눈만 봐도 그가 어떤 재능을 가졌고,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보였다.
어린 나이에 많은 경험을 쌓고, 노력해왔을 것이다. 다만 글렌은 그보다 더한 녀석을 알고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라온이 해온 노력과 의지를 알고 있으니, 삼왕자의 대단함이 그리 눈에 차지 않았다.
“왕자를 자랑하러 오진 않았을 테니, 본론으로 들어가지.”
글렌의 손에 들린 편지가 화르륵 소리와 함께 타올랐다.
“보지도 않고 태워버리시는군요.”
편지가 타버렸음에도 타르탄 공작의 표정은 별반 변화가 없었다.
“그 남자가 중요한 편지를 애송이에게 맡겼을 리 없으니까.”
“역시.”
타르탄 공작은 삼왕자를 자랑할 때와 달리 진중한 기세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오웬 왕국의 국왕 레크로스 알버른 드 오웬 2세의 말씀을 전합니다.”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의 눈빛에 엄숙함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다섯 개의 어둠(五魔)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 * *
투웅!
라온의 오른발이 물살을 가르는 연어처럼 부드럽게 전진한다.
그 뒤를 이어 왼발이 따라붙는다. 하체의 움직임에 수풀을 누비는 사슴처럼 유려했다.
빠르지 않지만 부드럽고, 강하지 않지만 표홀하다.
그가 펼치는 가람보법의 12가지 형은 바람을 탄 나뭇잎처럼 경쾌한 자유로움이 담겨 있었다.
쿵!
라온은 땅을 울리는 진각을 끝으로 가람보법의 수련을 끝냈다.
“후욱….”
들뜬 숨을 뱉어내며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보고 있군.’
뒤를 돌아보자, 자신의 보법 훈련을 보고 있던 수련생들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가람보법을 배운 첫날 이후 수련생들은 교관이 아니라, 자신을 보며 보법을 수련해왔다.
그건 버렌이나, 루난, 마르타도 예외가 아니었다.
“음!”
“흥.”
눈을 마주친 버렌과 마르타는 콧방귀를 뀌며 몸을 돌렸다.
“응.”
물론 루난은 뭐 어쩔 거냐는 듯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와서 보법을 펼쳤다. 가르쳐 달라는 뜻이었다.
“하여튼.”
라온은 고개를 젓고서 루난의 보법에서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주었다.
“도련님. 저도 좀 봐주실 수 있나요?”
도리안이 배 주머니를 살살 긁으며 다가와 보법을 보여주었다.
“일단 넌 자세가 높다. 조금 더 낮추고….”
그에게 문제점을 말해줄 때 연무장의 문이 열리고 리메르가 들어왔다.
‘웬일이지?’
라온이 리메르의 종종걸음을 보며 콧등을 찡그렸다. 휴식 시간에 찾아온 건 또 처음이었다.
“오늘 오웬 왕국의 사절단이 온 건 전부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버렌이 앞으로 나오며 대답했다. 그 역시 휴식 시간에 찾아온 리메르가 놀라운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저녁에 사절단을 위한 연회를 연다고 한다. 수련 기사들도 있어서 또래인 너희도 참여 가능하다고 하더군.”
“오!”
“연회요?”
오웬 왕국의 기사들을 보고, 수련 기사들과 친분을 쌓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련생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데!”
리메르가 쓱 고개를 저었다.
“너희는 아직도 가람보법도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잖아. 나라면 창피해서 그런데 못가지. 암!”
“윽!”
“그, 그건….”
수련생들은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어? 설마 가려고 한 거야? 수련할 게 많이 남았는데? 검술도, 보법도 완성 못 했는데?”
그가 얼굴을 쭉 내밀고, 수련생들을 놀리듯이 훑어보았다.
“제, 젠장!”
“후우….”
수련생들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축 내렸다.
“여기서 갈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인데.”
리메르의 시선이 라온에게 향했다.
“넌 어떻게 할 거지?”
“관심 없습니다.”
라온은 고개를 젓고, 수련검을 챙겼다. 가람보법은 거의 완벽해졌지만 검술과의 조화시키려면 아직 멀었다.
지금은 연회에 가서 인맥을 쌓을 때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수련할 시기였다.
“좋은 자세야.”
리메르가 빙긋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 만족이 담긴 웃음이다.
“뭐, 정 가고 싶으면 보내는 줄 텐데, 가고 싶은 사람?”
그는 라온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수련생들을 쭉 둘러보았다.
제일 강한 라온도 수련을 하겠다고 남았는데, 너희들이 가려는 거냐는 듯한 모습이다.
“흥!”
“…없습니다.”
마르타와 버렌이 고개를 돌리고 수련을 위해 뒤로 물러섰다.
“…….”
루난은 처음부터 리메르의 말을 듣고 있지 않고, 보법만 밟고 있었다.
“그럼 계속 수련하도록. 강해지면 연회에 참석할 기회는 수없이 많을 거야! 난 그럼 간다.”
리메르는 수련생들을 놀리듯이 손을 휘젓고서 연무장을 떠났다.
“음….”
라온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뺨을 긁적였다. 평소 리메르의 성격상 연회 정도는 보내줄 만한데, 막은 게 조금 이상했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 * *
격렬한 폭설 대신 찬란한 조명이 쏟아져 내리는 지그하르트 본관 연회장.
오웬 왕국의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은 입맛을 다시며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피곤하군.’
몇 시간 째 지그하르트의 인사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역시 이런 자리는 불편하다 그냥 검이나 휘두르고 싶었다.
이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분위기와 장소에 온 이유는 국왕의 명령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그하르트의 검.
그리고 그 검을 연마하는 검사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후우.”
삼왕자가 테이블에 놓인 음료를 단번에 들이켜고서 인상을 찡그렸다.
‘확실히 대단한 무인들이야.’
지그하르트 검사들이 가진 기파는 고고하고, 강렬했다. 오웬 왕국의 기사들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 무력에 가슴이 뛸 정도.
‘하지만.’
정작 보려고 했던 지그하르트의 어린 검사들의 무력은 실망 그 자체였다.
다른 가문이나, 왕국이라면 분명 뛰어난 인재라 불릴 만한 아이들이지만, 육황의 수련생이라기엔 모자람이 보였다.
‘로베르트에도 미치지 못하겠어.’
지그하르트에 오기 전에 갔었던 남방의 주인 로베르트 가문의 어린 검사들이 더 뛰어났던 것 같다.
“내일 돌아볼 필요도 없겠군.”
글렌이 수련생들의 훈련을 참관할 수 있게 배려해줬지만, 저 정도면 딱히 찾아갈 이유가 없었다.
“실망스러우신 모양이군요.”
“헉!”
뒤에서 들린 가벼운 목소리에 황급히 몸을 돌렸다.
“에, 엘프?”
붉은 머리에 진녹색 눈동자를 가진 엘프가 뒷짐을 진 채로 빙긋 웃고 있었다.
“진짜를 보여드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