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8화 (38/653)
  • 38화

    새해가 밝았다.

    14살이 된 라온의 생활은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수련. 가장 먼저 연무장에 도착해서 가장 늦게 돌아가는 수련 귀신의 생활을 계속 이어갔다.

    루난의 눈은 여전히 맹했지만, 검술의 예리함과 수속성 오러의 서늘함은 비할 수 없이 깊어졌다.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한 버렌은 많은 수련생의 마음을 확실하게 휘어잡았고, 수석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 밤낮으로 절치부심 검을 휘둘렀다.

    마르타는 첫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 휴식조차 마다하고 검을 휘두르고, 오러를 연공했다.

    다만 가뜩이나 더러웠던 성격이 더 난폭해져 이젠 그녀에게 가까이 오려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딱 한 명. 라온 앞에서는 달랐다.

    교관의 말도 제대로 듣지 않는 마르타가 라온의 말이라면 입을 다물고 그대로 따랐다. 옆에서 보면 충실한 하인처럼 보일 정도.

    수련생들은 저 태도가 내기의 약속이라는 걸 알아서 며칠 안 가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마르타는 새해가 밝아도 라온의 말을 충실하게 따랐다.

    모두가 당황했다.

    입이 걸고, 성격이 더러운 마르타가 라온과의 약속을 지킬 줄은 몰랐으니까.

    그렇게 라온은 마지막 방해꾼마저 굴복시켜 5 연무장 수련생 모두의 인정을 받았다.

    *     *      *

    “집합.”

    라온의 부름에 연무장 이곳저곳에서 몸을 풀던 수련생들이 동시에 그를 보았다.

    “쯥.”

    “응.”

    버렌이 살짝 혀를 차고서 라온의 앞에 섰고, 루난은 주인을 본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왔다.

    “…….”

    마르타는 살벌한 눈빛을 번쩍였지만, 별말 없이 두 사람의 옆에 섰다.

    연무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루난과 버렌, 마르타가 라온의 지시대로 움직이니, 다른 수련생들은 당연히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왜 모이라고 했지?”

    버렌이 고개를 틀어 텅 빈 단상을 보았다.

    “오늘 오전은 개인 수련이잖아.”

    “아니. 오늘은 정규 훈련이다.”

    “그런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수석 교관님이 전하는 걸 깜빡했다고 하시더군.”

    라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리메르는 어제저녁에 갑자기 찾아와서 오전에 수련생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모아놓아 지시했었다.

    “하여튼 그 남자는….”

    버렌이 이를 갈았다. 여전히 리메르를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어찌 됐든. 오늘은 정규 수련이니 여기서 대기하도록. 몸만 가볍게 풀어.”

    “에이.”

    “까마귀고기를 삶아 먹었나. 뭘 매일 까먹지?”

    “술 먹고 노느라 그랬을걸. 어제 술집에 있었다던데.”

    “하루이틀이냐. 그냥 준비나 하자.”

    수련생들은 작게 툴툴거렸지만 라온의 지시를 따라 연무장 중앙에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잠시 후 수련 시간이 5분 정도 지났을 때 연무장의 문이 끼익 열리고, 교관들이 들어왔다.

    “하아암.”

    맨 뒤에 있던 리메르는 손으로 다 가리지 못할 정도로 큰 하품을 하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지각입니다. 교관님”

    버렌이 손을 들고 외쳤다.

    “에, 오늘은 원래 자율 수련이지만, 우리 교관이 너희들을 위해서 준비를 하다가 늦었으니, 딱히 지각은 아니지.”

    “그거랑 이건 상관이 없….”

    “자, 늦은 만큼 바로 수련을 시작하자!”

    리메르가 버렌의 말을 무시하고 손을 흔들었다.

    뒤에서 버렌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지나도 저 둘의 관계는 변하질 않았다.

    “오늘 너희들의 개인 수련 시간을 뺏은 건 다름이 아니라, 검사에게 가장 중요한 걸 전수해주기 위해서다.”

    “거, 검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

    “그게 뭐지?”

    “새로운 검술?”

    “검술 비기?”

    “연공법?”

    기대감이 어린 수련생들의 눈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흐음!”

    리메르는 그 눈빛을 한참 동안 즐기다가 아이들의 목소리가 가라앉았을 때 천천히 입을 뗐다.

    “바로 보법이다.”

    “엑?”

    “보법이요?”

    “그게 왜 검사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

    “어휴, 이럴 줄 알았어.”

    보법이라는 소리에 수련생들은 실망 어린 표정으로 발을 굴렀다.

    ‘역시 보법이었군.’

    하지만 라온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법이란 걷는 법.

    검술이나 권법을 펼칠 때 더 공격적이거나, 더 방어적 혹은 더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서 만든 체계적인 걸음이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어.’

    권법과 검술에 익숙해졌고, 오러도 적당히 만들었으니, 보법을 배울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중급 수준의 검술을 익힌 녀석은 꽤 되지만, 보법을 제대로 익힌 경우는 거의 없더라고.”

    “음….”

    “그건 그렇죠.”

    수련생들은 반박하지 못하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버렌과 루난, 마르타 역시 입을 다물었다.

    “너희들의 목표가 검사이니, 검술이 중요한 건 맞다. 하지만!”

    리메르는 씩 웃으며 단상 위에서 뛰어내렸다. 촛불을 끈 듯 그의 몸이 훅 사라졌다.

    “그 검술을 더 날카롭고 빠르게 만들어주고, 훗날 목숨까지 구해주는 건 보법. 즉, 발놀림이다.”

    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앞에서 사라졌던 리메르가 맨 뒤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헉!”

    “어, 언제….”

    “뭐지?”

    수련생들이 입을 떡 벌렸다. 리메르가 바람 소리 하나 없이 뒤에서 나타난 모습에 혀가 절로 튀어나왔다.

    “너희는 대련을 하며 홀로 수련할 때와 상대에게 검을 휘두를 때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건….”

    “맞아.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지.”

    “검도 궤도대로 흐르지 않았고.”

    수련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는 대련을 겪으며 실전과 수련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전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검술 이상으로 보법을 단련해야 한다. 난 일대일 대련에서 가장 중요한 무학은 검술도, 오러도 아닌 보법이라 생각해. 가주님도 그 의견에 동의하셨지.”

    “가, 가주님이?”

    “헉!”

    “그분이 그러셨다면….”

    수련생들이 입을 떡 벌렸다. 가장 존경하는 글렌이 보법이 중요하다고 했다고 하니, 리메르가 말할 때와는 무게감이 달랐다.

    “보법….”

    버렌이 척추를 똑바로 세웠다.

    ‘그래. 그때 보법이 있었다면….’

    자신의 장점은 예리함과 정확성 그리고 속도다. 라온과 대련을 할 때도 기본 발놀림이 아니라, 제대로 된 보법을 운용했다면 그렇게 맥없이 패배하진 않았을 거다.

    “과연….”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버렌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르타가 주먹을 말아쥔 채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똑같군.’

    조용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마르타는 겉이 아닌 가슴 속에 라온을 꺾겠다는 열의를 태우고 있었다.

    “보법은 강물의 흐름을 담은 가람보법부터 시작한다.”

    리메르가 강가의 자갈밭을 걷듯 가볍게 다리를 튕기자, 그의 몸이 단상 위로 펄쩍 올라섰다.

    “음….”

    그는 보법을 시연할 것처럼 자세를 잡다가 귀찮네라고 중얼거리며 드러누웠다.

    “숙련된 조교 앞으로.”

    리메르가 손벽을 치자 뒤에 있던 교관이 앞으로 나와서 가람보법의 자세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뚜둑.

    버렌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보법을 확실하게 익혀서 언젠가 저 게으른 교관의 콧대를 눌러버리겠다고 다짐하며 가람보법의 자세를 확실하게 눈에 익혔다.

    *     *      *

    가람보법의 형은 12개뿐이었고, 자세 역시 간단해서 시범을 보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기본이로군.’

    라온은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가람보법의 형태와 자세, 흐름까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 보는 보법이지만, 기본자세에 충실했고, 흐름이 부드러워 어디에도 끼워 넣을 수 있는 보법이었다.

    “교관들이 돌아다니며 자세를 잡아줄 테니, 일단 보고 느꼈던 대로 보법을 펼쳐보아라.”

    “예!”

    수련생들은 연무장에 넓게 펴져서 가람보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다만 라온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불의 고리를 휘돌리며 교관이 보여주었던 가람보법을 머릿속에서 재생했다.

    ‘방어 6에 공격 4.’

    가람보법은 기본 보법답게 공격과 수비의 비율이 비슷했다. 방어 쪽이 조금 더 높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연계가 장점인 보법이야.’

    가람보법의 특징은 보법이 강물처럼 부드럽게 흐른다는 점이다. 짜 맞춘 듯한 딱딱함보다 조금 흐트러지더라도 쭉 연결되는 흐름이 중요하다.

    “후….”

    라온이 들뜬 숨을 뱉으며 눈을 떴다. 열린 시야 사이로 가람보법의 모든 것이 보이고 있었다.

    턱.

    먼저 오른발을 뻗었다.

    잘 다져진 연무장 바닥을 짓누르는 감각을 즐기며 왼발을 따라 붙였다.

    양쪽 발이 부드럽게 교차하며 가람보법의 첫 번째 형 유화가 펼쳐졌다.

    투웅!

    바닥을 가볍게 스치며 몸을 우측으로 회전시켰다. 적의 공격을 회피하고, 검을 내지르는 두 번째 형 개류가 연무장 모래를 울렸다.

    교관이 보여주었던 자세보다 더욱 완성에 가까운 모습.

    치잉!

    라온은 어깨 위로 흘러가는 쾌감을 즐기며 미소를 피워냈다. 그의 발은 태어났을 때부터 가람보법을 알고 있던 것처럼 그 유연한 흐름을 그대로 재연했다.

    *     *      *

    “흐아아암!”

    리메르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고서 눈을 꿈뻑였다.

    “졸리구만.”

    며칠 동안 수련생들에게 적합한 보법을 찾고 보완하느라, 잠을 못 잤더니, 온몸이 나른했다.

    ‘나도 늙긴 늙었나 보네.’

    픽 웃으며 단상 아래를 내려보았다.

    가운데 선 라온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교관의 보법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좋은 방법이긴 하지….’

    심상 속에서 무학을 그려보는 건 분명 좋은 수련법이다. 다만 그건 어느 정도 실력이 무르익었을 이후여야 한다.

    방금 보법을 배웠기 때문에 지금은 머리에 그리기보다 몸을 움직일 때였다.

    ‘나중에 똥폼 잡지 말라고 해야겠네.’

    리메르는 놀릴 게 생겼다고 중얼거리고 버렌 쪽을 보았다.

    ‘꽤 잘하는군.’

    버렌은 이전에 보법을 익힌 경험이 있는지 가람보법의 형태를 거의 그대로 따라 했다. 진의는 없지만, 자세는 얼마 안 가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쪽도 마찬가지고.’

    마르타 역시 보법을 한참 동안 익힌 사람처럼 가뿐하게 발을 내뻗고 몸을 회전시켰다. 버렌보다 더 나은 자세였다.

    “하.”

    리메르가 버렌과 마르타의 보법을 보고 웃음을 흘렸다.

    ‘라온을 생각하고 있군.’

    두 사람은 보법을 배우는 와중에도 라온과 대련했을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까 일대일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게 보법이라고 말했던 게 제대로 먹혀든 것 같았다.

    ‘그리고….’

    우측에서 가람보법을 연습하는 루난을 보았다. 그녀의 움직임은 앞선 두 명과는 달랐다.

    상대를 두기보다는 보조하는 듯한 움직임. 루난이 도와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뻔히 보였다.

    리메르는 그 뒤로도 수련생 모두를 살펴보고, 말해줘야 할 장점과 단점을 기억해두었다.

    ‘재밌다니까.’

    아직 어리고 순수하기 때문일까. 수련생들이 훈련하는 걸 지켜만 보아도 각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으아아.”

    리메르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처럼 길게 기지개를 피며 일어섰다.

    번뜩.

    수련생들에게 기억해두었던 지적을 하려고 할 때 석상처럼 서 있던 라온이 두 눈을 뜨고 발을 뒤로 뺐다.

    ‘아….’

    선명한 붉은 눈 그리고 학처럼 뻗어간 발에 오싹 소름이 돋아올랐다.

    라온이 발이 천천히 전진한다. 가람보법의 첫 번째 유화가 강물의 흐름을 담아 연무장 바닥을 흘러갔다.

    터엉!

    그가 두 번째 자세를 취한다. 불길처럼 전진하며 몸을 펼치는 모습에서 시퍼런 칼날이 비치는 듯했다.

    “허!”

    리메르가 헛웃음을 흘렸다.

    ‘저 녀석….’

    라온의 유화는 자신이 직접 보법을 전수해준 교관보다 더 완성에 가까워 있었다.

    그 뒤로 라온은 가람 보법의 열두 가지 형태를 물 흐르듯이 펼쳐냈다. 조금의 실수도, 부족함도 없이 완벽에 가까운 자세였다.

    “어….”

    “뭐, 뭐야.”

    수련생들 그리고 교관까지 모조리 멈춰서서 라온의 보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심상으로 보법을 익혔다고?”

    리메르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전신으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저 괴물의 끝은 대체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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