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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7화 (37/653)

37화

자주색 노을이 번져가는 저녁 하늘 아래. 마르타가 입을 꾹 다문 채 서 있었다.

시야가 깜깜한 어둠으로 물들 때까지 석상이 되어 있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져서는 안 됐는데.”

마르타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핏줄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엄마를 찾을 때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져선 안 됐는데….”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절대 패배하지 않기로 다짐했건만, 져버렸다. 그것도 너무나 추하게.

억지로 마음을 비틀고, 욕을 달고 살고, 사람들과 거리를 둔 보람도 없이 그야말로 발려버렸다.

“빌어먹을!”

양아버지인 데니어 지그하르트는 자신의 재능을 보고, 지그하르트에 입양했다.

그런데 방계이자, 나이도 한 살 어린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져버렸으니, 아버지가 어떤 조치를 할지 예상되질 않았다.

데니어는 부드러운 사람이었지만, 그 모든 게 연기일 가능성도 있다. 최악의 경우 쫓겨날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그렇게 되면 엄마를 찾을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다. 바지를 붙잡아서라도 매달려야 했다.

“후우….”

“아가씨.”

극도로 긴장한 마르타는 집사인 카멜의 부름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데니어 님의 편지입니다.”

데니어 지그하르트가 편지를 보냈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마르타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파도처럼 출렁였다.

“여기 있습니다.”

마르타는 마른침을 삼키고 편지를 펼쳤다.

[마르타. 첫 번째 패배를 축하한다. 한 번 졌다고 네 이름에 패배자 딱지가 붙는 건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말 거라. 다만 왜 졌는지, 어떻게 졌는지를 수없이 생각해라. 그 반성이 훗날 네 성장의 밑거름이 되어줄 테니까. 직접 가서 위로해주고 싶지만, 임무가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구나. 가지 못해 미안하다.]

질책도, 조롱도 없었다. 진심으로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가 보낸 편지였다.

[네 친엄마의 흔적은 계속 수색 중이다. 내가 포기하지 않았으니, 너도 포기하지 말거라.]

마르타가 떨리는 손으로 편지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지갑을 확인하듯 주머니를 꾹 눌렀다.

“하아….”

부서졌던 마음의 조각을 다시 모아주는 듯한 편지였다. 특히 마지막 글귀 때문에 어깨를 짓눌렀던 우울함과 불안함이 모두 가셨다.

“아버지께 명심하겠다고 전해드려. 정말. 정말로 감사하다고도.”

“알겠습니다.”

카멜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가씨.”

“응?”

“라온 도련님과 내기에서 건 복종에 대한 게 신경 쓰이신다면 별관을 압박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직계의 힘을 이용한다면 조용히 처리할 수….”

“아니. 하지 마.”

마르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흑진주 같은 눈동자는 이전과 달리 선명한 빛을 발했다.

“진 건 진 거야. 그것도 처참하게 졌지.”

라온에게 패배한 이유는 누구보다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방심해서가 아니야. 그냥 졌어.’

라온은 그 뻘건 오러를 사용하여 자신의 검을 베어버렸다. 검사가 검을 잃었으니, 사실 승부는 거기서 끝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똑같이 검을 버리고 주먹으로 두 번째 승부를 내주었다.

그렇게 싸워준 사람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다면 아버지가 더 실망하실 게 분명했다.

“멍청한 약속을 했더라도 일단은 지키는 게 지그하르트다운 모습이겠지.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실 거야.”

“물론입니다. 데니어 님이라면 분명 그리 말씀하셨을 겁니다.”

“딸인 내가 그분을 망신시킬 수 없어.”

“그럼요.”

카멜은 대견하다는 듯 입매를 크게 올리며 웃었다.

“카멜. 칼 있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줘봐.”

“여기 있습니다.”

마르타는 카멜이 준 얇은 단검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검집에서 꺼냈다.

파악!

마음을 정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흑단 같은 머리카락의 중간을 단호하게 베어버렸다.

“아, 아가씨!”

“괜찮아. 멍청하고 추잡했던 과거를 떠나보내는 것뿐이니까.”

마르타는 잘라낸 머리카락을 바람에 흘려보내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웃음이 눈송이처럼 반짝거렸다.

“허….”

카멜은 이런 장면은 생각지도 못했는지 헛바람을 흘렸다.

“내일 오전 직계 수련 취소해줘.”

“예? 취소가 어려운 건 아니지만, 무엇을 하시려고….”

“갈 곳이 있어.”

마르타는 그렇게 말하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카멜은 저택에 들어가는 마르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마르타는 휴가 마지막 날 새벽 훈련만 마치고 바로 저택을 나왔다.

아침도 안 먹고 어딜 가냐는 카멜과 시녀들을 따돌리고 홀로 서쪽 별관으로 향했다.

상당히 멀었지만 길이 잘 닦여있어서 별관을 찾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서쪽으로 계속 걷고 있으니, 작은 정원에 둘러싸인 아담한 집이 보였다.

‘저기 사는 건가.’

마르타가 눈매를 좁혔다. 본관의 건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초라했다.

다만 자신이 입양되기 전 집은 저 별관보다 훨씬 작았기 때문에 별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정원으로 걸어갔다.

‘누가 있네.’

금발 소년 하나가 화단에 쪼그려 앉아 흙을 파고 꽃을 심고 있었다.

‘어?’

마르타가 눈을 부릅떴다.

‘라온 지그하르트?’

시종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꽃을 심고 있는 녀석은 자신에게 처음 패배를 안겨 준 라온 지그하르트였다.

라온도 자신을 발견했는지 손을 탁탁 털고 일어섰다.

“무슨 일이지?”

“…….”

마르타는 대답하지 않고, 라온이 가꾼 화단 앞에 섰다. 금방 물을 줘서 그런지 꽃들이 건강하고 생생해 보였다.

‘이 녀석이 이런 취미가 있었나?’

아이답지 않은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또 아이다워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할까.’

오늘 마르타가 라온을 찾아온 이유는 간단하다.

재대결.

아버지의 말을 듣고 패배에 대해 생각해봤지만 어떻게 졌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걸 모르니, 실력 차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그걸 메울 방법은 없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즉, 반성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재대결이 필요했다.

머리에 열이 오르지 않은 상태에서 라온과 싸워 실력 차이를 알고 싶었다.

“후우….”

마르타는 탁한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호수처럼 잔잔한 라온의 눈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너와 다시 붙어보고 싶다.”

“아직도 패배를 인정 안 한 건 좀 추한데.”

“아니. 내가 발린 걸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야. 다만 어떻게 당했는지를 몰라. 그걸 알고 싶어서 찾아왔어.”

“…….”

라온의 눈동자가 짧게 반짝였다. 의외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럼 대가는?”

“뭐?”

“패자가 승자에게 도전을 하려면 뭐 하나는 들고 와야 하지 않나?”

“지랄! 싸우는데 꼭 대가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

“난 필요해.”

“윽….”

마르타가 가는 신음을 흘렸다.

‘이런 점이야.’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 이런 점 때문에 라온이 아이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없어? 없으면 곤란한데.”

라온은 싸울 생각이 없어진 듯 팔짱을 꼈다.

“으음….”

어떻게 할까. 입술을 깨물며 라온을 보다가 그 아래에 있는 꽃을 보았다.

‘살짝만 밟을까.’

이런 시간에 화단을 가꾸는 걸 보면 꽃을 아끼는 게 분명했다. 조금 건드려서 자극하면 덤벼들지도 모른다.

“어울리지 않게 꽃을 좋아하나 보네.”

마르타가 화단 쪽으로 슬쩍 발을 움직였다.

“별로.”

예상과 달리 라온은 모종삽을 툭툭 치며 고개를 저었다.

“뭐?”

“꽃 안 좋아한다고, 왜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머니 때문에 조금 다듬어줬을 뿐이야.”

“…….”

화단의 꽃을 밟으려던 마르타가 우뚝 멈췄다.

“왜? 안 밟아?”

라온은 이쪽의 의도를 알고 있었는지 옅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빌어먹을.”

마르타가 욕을 내뱉으며 발을 뺐다.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화단을 가꿨다는 소리에 꽃을 밟을 마음이 사라졌다.

“젠장.”

혀를 차고 등을 돌리려 할 때 별관의 문이 열리고 긴 금발을 뒤로 묶은 미모의 여성이 달려 나왔다.

“라온!”

“어?”

얼음장처럼 냉정했던 라온의 눈빛에 당황이 비쳤다.

“어, 엄마.”

“안 보인다 했는데, 화단을 가꿔주고 있었구나. 그런데 이 친구는 누구니?”

여성의 눈빛에 호기심이 어렸다.

‘이 사람이 실비아 지그하르트인가.’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가문을 떠난 뒤 아이를 살리기 위해 돌아온 가문의 망신이자, 폐급이라 불리는 여자.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일까.

마르타에겐 폐급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용기를 낸 어머니로만 보였다.

“치, 친구도 아니고, 아무도 아니야. 내가 정리할 테니 들어가.”

라온이 드물게도 말을 더듬었다.

“이 친구도 예쁘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아! 네가 마르타구나!”

실비아는 손뼉을 치며 활짝 웃었다.

“…….”

마르타는 말없이 고개를 꾸벅였다.

“라온하고 대련했다고 들었는데, 다친 곳은 없니?”

그리운 엄마의 눈빛과 같았기에 알 수 있다. 실비아의 장밋빛 눈동자는 정말 자신의 몸을 걱정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실비아가 옅게 웃었다.

“데니어 오라버니가 재능이 뛰어난 아이를 데리고 왔다고 들었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어.”

그녀는 자신의 이곳저곳을 살피고 정말 예쁘다고, 너무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니?”

“잠깐 전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다 끝났으니 가볼게요.”

마르타가 다시 고개를 꾸벅이고 돌아가려 할 때였다.

꼬르르륵.

새벽 수련 후 아침을 굶었던 대가가 찾아왔다.

“아….”

마르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뒤돌아서 달려가려고 할 때 따스한 무언가가 손목을 잡았다.

실비아였다.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손을 까딱였다.

“밥 먹고 가렴.”

마르타는 왜인지 모르게, 그 가는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     *      *

이게 뭐지?

라온은 식탁 앞에 마주 앉은 마르타를 보고 눈매를 좁혔다.

‘도통 모르겠네.’

실비아가 배꼽시계가 울린 마르타에게 밥을 먹고 가라고 한 건 이해할 수 있다. 워낙에 착한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저 광녀가 실비아에게 끌려와 식탁에 앉고, 조신하게 음식을 기다리는 모습은 생각도 못 한 장면이다.

머리카락을 자르더니, 성깔도 같이 잘린 게 아닌가 싶다.

“라온이 고기 스튜를 좋아하거든. 그래서 우리 식탁에는 스튜 하나는 꼭 있어.”

“아, 네.”

실비아는 뭐가 그리 기쁜지 방실방실 웃었고, 마르타는 부끄러운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대답만 했다.

-저 계집 지금 뭐 하는 거냐? 원래 저런 성격이 아니지 않느냐.

‘나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어.’

지그하르트 가문에서 태어난 이후 이렇게까지 의외의 상황이 벌어진 건 처음이었다.

곧 식사가 나왔다. 스튜와 소고기구이 그리고 채소와 데운 빵이었다.

“라온보다 한 살이 많지?”

“네.”

“훈련할 때 어려운 건 없니?”

“별로 없어요.”

실비아는 식사하면서 마르타에게 말을 걸었고, 마르타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질문에 곧잘 답을 해주었다.

‘허….’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쟤 진짜 왜 저래?’

마르타는 남이 말을 걸면 일단 욕부터 나오는 인간이다. 저렇게 호의적인 모습을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음….”

라온은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스튜를 꿀떡 넘겼다.

“우리가 요리는 정말 잘하는데, 고기 질이 본관에 비해 좀 떨어져.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 먹으렴.”

“…….”

실비아의 조언에 포크를 쥔 마르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발작을 일으킬지도 몰라서 막을 준비를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후 다시 고기를 찍어 먹었다.

사람의 감정은 잘 모르지만, 그녀의 손에서 뭔지 모를 서글픔과 그리움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잘 먹었어요.”

그렇게 어색한 식사가 끝나고 마르타가 일어섰다.

“맛은 어땠니?”

“맛있었어요.”

“다행이네. 앞으로는 라온과 친하게 지내주렴.”

실비아는 문 앞에서 마르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네.”

마르타는 의외로 정상적인 대답을 하고 별관을 떠났다.

‘진짜 뭐지?’

시비를 걸러 왔던 게 분명한데, 갑자기 저런 태도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뭐 잘못 먹은 건가?

‘그럴지도.’

인간의 감정이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     *      *

마르타는 별관을 나오자마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렇지 않았다간 바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닮았다.

얼굴도, 머리 색도, 입은 옷도, 목소리도 달랐지만, 장미색 눈빛이 실종된 엄마와 너무도 닮았다.

그래서 그녀가 손목을 잡았을 때 뿌리치질 못했다.

라온은 날 미쳤다고 생각했겠지.

녀석의 눈빛이 그렇게 흔들리는 건 처음 보았다.

늦게라도 나갈까 고민했지만, 밥을 먹고 나가길 잘했다. 실비아의 다정한 눈빛과 목소리 그리고.

꼭꼭 씹어 먹으라는 엄마가 가장 많이 했던 잔소리를 들었을 땐 정말 엄마와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엄마를 찾고 싶었다.

‘백혈교. 이 개새끼들.’

엄마를 납치해 간 놈들은 오마 중 하나 백혈교다. 그 광신도들을 모조리 죽여서라도 엄마를 찾아낼 것이다.

마르타는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본관으로 돌아갔다.

“아가씨 어딜 다녀오신…어? 혹시 우셨습니까?”

문 앞을 쓸고 있던 카멜이 눈을 부릅떴다.

“뭔 소리야! 울기는 누가 울어!”

마르타가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빠르게 문을 열고 저택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카멜. 혹시 질 좋은 소고기 좀 구해줄 수 있어?”

“소고기요? 그거야 얼마든지 가능하죠. 그런데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

“쓸데가 있으니까. 구해서 내 방 앞에 놔줘!”

마르타는 대답을 하자마자 문을 닫고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훗.”

카멜은 그 모습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 모습이 훨씬 보기 좋다는 걸 아실까 모르겠군.”

*     *      *

다음날.

라온은 새벽 연공을 끝내자마자 연무장으로 향했다. 평소처럼 도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제 찾아온 마르타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지만, 그냥 개꿈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가볍게 몸을 푼 뒤 연성검 수련을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며 아이들이 하나둘씩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수련생들의 잡담 소리를 들으며 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 갑자기 모든 소리가 확 꺼졌다.

고개를 돌리니, 활짝 열린 연무장으로 마르타가 걸어왔다.

단발로 자른 머리 때문인지 수련생들이 입을 떡 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마르타가 자신의 앞에 멈춰 섰다.

“흘러간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지. 그동안 시비를 걸었던 걸 어설픈 사과로 퉁 치진 않겠다.”

그녀의 눈빛은 어제보다도 더 잔잔했다. 멈춰 있는 호수를 보는 것 같았다.

“대신 약속은 지킨다.”

“약속?”

“대련을 하기 전에 했던 패자가 승자의 말에 복종한다는 약속.”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뒤를 돌았다. 눈을 보니, 완벽하게 패배를 받아들인 것 같았다.

‘생각보다 더 큰데….’

그 짧은 시간에 변했다니, 그녀 역시 보통 그릇이 아니었다. 다만 어제 왜 밥을 먹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왜 길을 막고 지랄이야. 꺼져!”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마르타가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도리안을 걷어찼다.

“아욱! 죄, 죄송합니다.”

“쯧.”

그녀는 혀를 차고서 평소의 자리로 돌아갔다.

라온이 픽 웃었다. 아무래도 변한 건 자신에 대한 태도뿐인 것 같았다.

‘여긴 전부 특이한 녀석들 뿐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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