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라온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커튼을 치고 방문을 잠갔다. 들어오지 말라고 말해놓았지만, 혹시나 하는 대비였다.
“라스.”
그는 손목에 걸린 얼음꽃 팔찌를 툭툭 쳐서 라스를 불렀다.
-버러지 인간 주제에 본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그럴 거면 이름을 알려주지 말던가.”
-네놈이 본왕의 빙의를 견뎌낼 줄은 몰랐으니까!
라스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먹어 치우기 전 마지막 배려로 본인의 위대한 이름을 알려준다고 중얼거렸다.
“위대한 이름은 모르겠고, 이번에도 방해할 생각이냐?”
-본왕은 마계의 군주로서 한 번 입에 담은 말은 지킨다. 앞으로 네놈이 연공을 하는 동안 건드리는 일은 없다.
“하긴 그동안 모아두었던 힘을 다 쏟아부었을 테니.”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는 한 달 전 만화공을 익힐 때 전력을 다해 공격을 해왔었다. 그때 소모한 힘을 벌써 회복했을 리 없다.
-멍청한 놈! 분노의 기운은 언제라도 꺼낼 수 있다. 그저 군주로서 내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서….
“아, 됐어.”
-이 콩알만 한 놈이 정말!
말을 끊자, 라스가 부들부들 떨며 냉기를 내뿜었다.
“아쉽네. 또 능력치를 올릴 기회였는데.”
-크으으….
라스는 이를 바득 갈았다. 화가 폭발하기 직전인지 냉기의 불꽃 사이로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라온이 바르르 떠는 라스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놈 앞에서는 방심할 수가 없지.’
라스는 동료가 아니라 적이다. 놈의 앞에서는 연공 중이든, 수련 중이든 방심해선 안 된다.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자, 그럼.”
주머니에서 구화단이 든 목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가을 산에서 맡을 법한 마른 수풀의 향이 진하게 풍겨 나왔다.
냄새 좋네.
약향이 방에 퍼지는 것만으로도 약효가 뛰어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후.”
라온은 천천히 숨을 내쉬고, 구화단을 입에 넣었다. 씁쓸하면서도 진한 약향이 입안 전체를 휘감았다.
‘씹어서 먹으라고 했었지.’
리메르의 조언대로 구화단을 씹어서 삼키자, 목구멍에서 탁하고 풀어졌다.
후우우우.
구화단에 담겨 있던 진하디진한 기운이 굴뚝의 연기처럼 전신의 마나 회로로 퍼져나갔다.
눈을 감고 앉아서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고, 만화공을 운용했다.
구화단의 기운이 전신을 휘돌며 근육을 팽창시켰다. 단전이 찌릿거리며 확장되고, 마나에 대한 감각이 극한으로 치솟았다.
화아악!
숯가마에서 데운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기운이 마나 회로를 질주했다.
화아아!
마나 회로 내부에서 녹아내린 순수한 냉기는 만화공이 닦아 놓은 길을 따라 전신을 휘돌았다.
‘불의 고리를 먼저 운용하길 잘했군.’
불의 고리가 마나 회로 내부의 냉기와 노폐물들을 깔끔하게 닦아내고, 만화공의 기운이 그 길을 빛살처럼 내달려 영약의 낭비를 줄였다.
두 연공법은 꼭 하나처럼 서로의 장점은 극대화하고, 단점은 상쇄시켰다.
우우웅!
구화단의 마나가 모조리 녹아내리며 불의 고리와 육체 그리고 단전이 붉은 선으로 이어진다.
라온은 끝없이 이어지는 마나의 흐름을 느끼며 점점 더 깊은 연공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 *
떠오른 해가 다시 서산 아래에 걸려 노을이 비칠 때 라온이 두 눈을 떴다.
[네 번째 <불의 고리>가 생성되었습니다.]
[<불의 고리>가 4성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불의 고리(4성)>가 육체와 영혼의 격을 상승시킵니다.]
[<불의 고리(4성)>의 효과로 근력, 민첩성, 체력이 상승합니다.]
[<불의 고리(4성)>의 효과로 기력, 정신력, 감각이 상승합니다.]
라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메시지가 아니라도 심장을 세차게 휘도는 네 번째 고리를 느낄 수 있었다.
[체질<운동능력 저하>가 사라집니다.]
[체질<마나감응력 저하>가 사라집니다.]
[<수속성 저항력>이 4성에 올랐습니다.]
[<설화의 감각>이 2성에 올랐습니다.]
불의 고리가 4성에 오른 게 전부가 아니었다. <수속성 저항력>과 <설화의 감각>의 성취도 올라갔다.
‘대단하네.’
중급 영약 하나를 먹은 것치고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물론 영약 하나 때문은 아니다.
1년 가까이 전력을 다해서 수련해오며 쌓인 노력이 영약으로 인해 터졌을 뿐이다.
라온이 어깨를 돌리며 일어섰다. 단전은 뜨겁고 서늘한 기운으로 가득 찼고, 몸은 바람을 탄 풀잎처럼 가벼웠다.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몸 상태가 완벽했다. 지금이라면 육체 능력만으로 오러를 사용한 마르타를 가볍게 깨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화아악!
상태창을 불러오려 할 때 팔찌에 있던 라스가 푸른 불꽃과 함께 치솟았다.
-4성?
‘음?’
-4성의 수속성 저항려어어역?
라스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려왔다. 녀석은 <불의 고리>의 내용은 보지 못하고, 마지막 떠오른 수속성 저항력만 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몰랐지.’
라스는 메시지는 볼 수 있지만, 상태창은 볼 수 없다. 수속성 저항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이 얍실한 놈! 4성의 수속성 저항력을 가지고 본왕을 속였던 거냐!
“물어본 적도 없잖아.”
-으윽!
라스가 시퍼런 눈빛을 번쩍였다.
-저항력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4성. 그것도 성장형일 줄이야. 이 추잡한 놈!
“수속성 저항력이 있다고 추잡하다니….”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수속성 저항력으로 저 난리를 치는 걸 보니, <불의 고리>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발광을 하겠군.’
육체와 영혼의 격을 올려주는 <불의 고리>나 환생에 대해 알게 되면 라스가 기절하는 꼴을 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말했잖아. 넌 날 못 이긴다고.’
-닥쳐라. 본왕이 원래의 힘을 발휘한다면 네놈 따위는 가볍게 얼음덩이로 만들 수 있다.
‘근데 못하잖아.’
-입을 열 때마다 화를 돋우는구나!
라스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냉기의 불길을 터트리며 돌진해왔다.
화아아아!
찰나의 순간 입술을 시퍼렇게 만들 정도의 냉기가 전신에 회오리쳤다.
“음.”
라스도 성장했는지 냉기와 감정의 자극이 이전보다 강해졌다.
‘하지만.’
<불의 고리>와 수속성 저항력은 그 이상으로 성장했다. 자연스럽게 회전하는 네 개의 고리 앞에서 라스의 분노는 애교일 뿐이었다.
콰아아아아!
전신에 내리꽂히는 푸른 냉기를 꾹 참고 있으니,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의 공격을 버텨냈습니다.]
[<체력> 능력치가 상승했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라스는 몬스터 같은 괴성을 지르고 나서 라온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팔다리가 다 잘린 것 같도다. 방법이 없어! 방법이!
놈은 이제 여유 있는 척을 그만두고 악을 내질렀다.
“그래서 말했잖아. 넌 안 된다고.”
-본왕의 능력은 냉기만이 아니다.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인 분노를 끌어 올리는 게 진정한 능력이지.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도 분노를 건드려 자폭시킨 마족이 수만 마리….
“근데 그것도 나한테 안 통하잖아.”
-끄어어억!
라스의 푸른 불꽃이 뻘게지기 시작했다.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였지만 능력치를 주기는 싫은지 다시 달려들지는 않았다.
“이제 좀 조용하네.”
라온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상태창을 켰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최초의 승리
상태 : 혹한의 저주(여섯 가닥)
특성 : 분노, 불의 고리(4성), 수속성 저항력(4성), 설화의 감각(2성) 만화공(2성), 혹한의 냉기(2성), 화속성 저항력(2성).
근력 : 40
민첩성 : 41
체력 : 41
기력 : 29
감각 : 53
상태에 닻처럼 박혀있던 운동능력 저하와 마나 감응력 저하가 사라진 게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참을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볍고 마나가 모공으로 들어오는 듯한 감각이 괜히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능력치도 많이 올랐고.’
모든 능력치가 두 단계 이상 상승했다. 지금 육체 능력과 감각은 정규 검사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것이다.
‘수속성 저항력도 큰 수확이고.’
수속성 저항력이 4성으로 올랐으니, 앞으로는 4서클 수준의 마법도 어렵지 않게 견딜 수 있다.
이 저항력은 검사를 상대할 때보다 마법사나, 주술사와 싸울 때 큰 도움이 될 거다.
‘얻은 게 많네.’
구화단이 좋은 영약이라고는 하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냉소적인 자신이 미소를 지우지 못할 정도로.
‘몸만 좀 풀어볼까.’
변화한 몸과 오러를 확인해보고 싶어 방문을 열었다.
“헉!”
“어!”
문 앞에 서 있던 실비아와 헬렌이 깜짝 놀라서 뒤로 황급히 물러섰다.
“뭐해?”
“아, 아니. 연공을 한다기에 호법을….”
“저도 마찬가집니다.”
두 사람의 눈동자는 살짝 충혈되어 있었다. 밤새 숨소리도 내지 않고 여기서 자신을 지켜준 것 같았다.
기감을 뿌려보니, 창밖에 다른 시녀들도 있었다.
“음….”
라온이 눈을 내리감았다. 만화공을 운용했을 때보다 더한 따스함이 심장을 달궜다.
잠시나마 마나 회로의 냉기가 지워진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고마워.”
두 사람과 밖에 있는 시녀들에게 고맙고도 미안하여 고개를 숙였다.
“흐윽!”
“마님!”
“헤, 헬렌. 어쩌지?”
실비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옆으로 픽 쓰러졌다.
“우리 아들 너무 잘 컸잖아!”
“그러게요! 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마님!”
“헬렌!”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훌쩍였다.
‘이게 제일 힘들어.’
라스의 정신 공격이나 마나 회로의 냉기, 글렌 지그하르트의 압박보다 실비아와 헬렌을 대하는 게 제일 버거웠다.
“후우….”
라온은 두 사람이 얼싸안을 때 빠른 걸음으로 별관을 나섰다.
* * *
라온은 이틀 동안 변화한 몸에 적응을 끝냈다.
육체와 감각은 상태창에서 본 것보다 많이 차이가 있었다.
처음 검술을 펼쳤을 땐 내 몸이 아닌 줄 알았다. 같은 검술을 펼쳐도 위력과 속도가 차원이 달라졌으니까.
그렇게 큰 차이가 난 이유는 간단하다.
체질의 변화.
체질에 적혀있던 운동능력 저하와 마나 감응력 저하가 사라지자 몸 상태가 최고조로 올라갔다.
생각을 한 그대로 몸이 움직이고, 모래같이 잘았던 마나가 구슬처럼 크게 느껴졌다.
‘이것도 하나의 토대지.’
강해진 무력 이상으로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토대를 세운 것 같아 뿌듯했다.
그래서 휴일 마지막 날인 오늘은 휴식 삼아 정원의 화단에 나와 꽃을 손보고 있었다.
-멍청한 놈. 흙을 속을 때는 먼저 아래에서 퍼야 한다. 영양이 있는 흙이 잘 섞이도록 모종삽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야 하느니라.
라스는 어울리지 않게도 꽃과 나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가져온 책을 펼쳐볼 필요도 없이 화단을 정리할 수 있었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얼음꽃으로 화단을 가득 메운 적이 있었다. 화단을 본 마족들은 경배하듯이 꽃에 고개를 숙였지. 그건 본왕에 대한 칭송이자, 경외….
“하아.”
저 주절거림만 없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라스는 말이 정말 더럽게 많았다. 특히 ‘본왕이 마계에 있었을 때.’로 시작하면 최소 10분 동안은 말이 멈추질 않는다.
매일 마계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젠 가본 적도 없는 마계가 친숙해질 지경이다.
-그게 아니다! 꽃잎은 섬세하게 다뤄야 한다. 못하겠으면 일단 얼려!
“알겠다고.”
라온이 인상을 찌푸리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마나를 다루듯 아주 조심스럽게 꽃을 심자, 라스의 잔소리가 그쳤다.
우측의 화단을 모두 정리하고, 좌측의 화단을 보려고 할 때였다.
“음?”
별관 입구에서 가느다란 인영이 걸어온다. 긴 머리카락이 단발로 변했지만,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다.
마르타 지그하르트.
이틀 전 패배했던 마르타가 인상을 잔뜩 쓴 채 다가왔다.
“시비라도 걸러 왔나?”
라온이 흙 묻은 손을 탁탁 털고 일어섰다.
그럼 환영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