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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5화 (35/653)

35화

“저를요?”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대련이 끝나자마자 호출이라니,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아,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석 수련생을 데리고 오라 하셨지.”

리메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수석 수련생이라.’

그 뜻은 누구라도 수석이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였다. 아무래도 글렌은 이번 대련에서 마르타가 이기리라 생각한 것 같다.

‘웃기는 일이로군.’

버렌에 이어 마르타까지. 글렌이 기대했던 수석 후보를 차례로 깨부순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호출 이유는 뭐죠?”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냐.”

리메르가 입을 빼죽 내밀고 고개를 저었다. 저 표정을 보니, 이유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알려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언제 가야 합니까?”

라온은 주머니를 꽉 채운 목갑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서 몸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그러고 가려고? 옷도 안 갈아입어?”

“네.”

“너 가주님 안 무섭냐?”

“잡아먹으려고 부르는 것도 아닐 텐데, 무서워할 필요는 없죠.”

글렌의 그 차가운 눈빛이 거북한 건 사실이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역시 넌 재밌다니까.”

리메르가 낄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라온의 어깨를 툭툭 쳤다.

“가자.”

“예.”

라온은 리메르의 뒤를 따라서 가주전 알현실로 향했다.

“정말 마르타 님이 졌다고?”

“저렇게 작은 아이에게….”

“믿을 수가 없군.”

“나이도, 나이지만 재능이 다를 텐데.”

“운이다. 운일 수밖에 없어!”

지나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신기하거나, 놀란 눈빛으로 라온을 힐끔거렸다.

“네가 마르타를 꺾은 사실이 벌써 퍼진 모양인데.”

리메르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그게 벌써요?”

“지그하르트는 폐쇄적인 가문이니까.”

그는 외부에 폐쇄적이니, 내부의 소문은 바람처럼 퍼질 수밖에 없다고 중얼거렸다.

“거기다 마르타는 같은 직계를 꺾을 정도로 뛰어나잖냐. 그런 아이를 정면에서 이겼으니 소문이 퍼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군요.”

“그러니 주의해야 해. 올라가는 것만큼 아래로 추락하는 것도 빠르거든.”

리메르는 그렇게 말하며 엄지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켰다. 단전이 망가진 뒤 추락했던 본인의 모습을 말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축하한다. 이건 좋은 일이니까. 즐겨.”

그는 휘파람을 불면서 가주전으로 들어갔다.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지, 무인들은 막지 않고 길을 비켜주었다.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1층의 대복도를 지나 알현실 앞에 서자, 글렌의 집사 로엔이 방긋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덜컹.

심장이 멎을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문이 갈라지고, 하늘을 뚫을 듯한 장대한 기운이 문밖으로 퍼져 나왔다.

라온이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 정도였던가….’

오러를 익히니 글렌의 기세가 더 거대하게 느껴진다. 끝을 알 수 없는 막강한 기파에 손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인간 따위가….

라스 역시 글렌의 기운에 짓눌린 것처럼 목소리가 떨렸다.

“오러가 있으니, 제대로 느껴지지?”

리메르는 이마 위로 땀 한 방울을 흘리며 웃었다.

“저게 우리들의 왕이다.”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음….”

마른침을 삼키고, 그를 따라갔다. 걸어갈수록 글렌의 기세가 강해진다. 막대한 기파에 어깨가 짓눌리는 것 같았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라온은 리메르와 같은 선상에 서서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글렌의 기파가 줄어들었다.

찰나의 순간에 기세를 조절한다. 하늘에 닿은 무력. 데루스조차 따라가지 못할 것 같았다.

“일어나라.”

명령과도 같은 말에 라온의 목이 자동으로 올라갔다. 글렌의 붉은 눈을 마주하자, 주변의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정말이지 압도적인 존재감이다.

“호출하신 수석 수련생을 데리고 왔습니다.”

“…….”

글렌은 리메르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기도 혹은 평온해 보이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읽히지 않았다.

“만화공을 습득했나.”

“예.”

“얼마나 걸렸지?”

“7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느리군.”

그는 턱을 살짝 틀었다. 한심해하는 것 같았다.

“오러를 일으켜보아라.”

글렌의 지시에 라온을 리메르를 보았다. 가주 앞에서 오러를 꺼내도 되냐고 눈빛으로 물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안 되지만, 본인이 하라고 말씀하시잖냐.”

“알겠습니다.”

라온이 일어서서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화르륵!

죽어가던 잔불이 일어서는 듯한 소리와 함께 새빨간 불꽃이 피어났다. 만화공 일화. 하나이자, 첫 번째 불꽃이 타올랐다.

“그게 만화공의 첫 번째인가.”

진흙 밑바닥에 가라앉은 듯한 글렌의 눈동자에 작은 흔들림이 있었다.

“넌 무엇을 추구하며 그 오러를 피워냈지?”

“꺼지지도 꺾이지도 않는 불입니다.”

“꺼지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절대 꺼지지 않는 불꽃을 그렸습니다.”

글렌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라온의 손아귀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조금 감격한 것처럼 보였다.

“괜찮구나.”

“예?”

그에게서 생각지도 않았던 칭찬이 들려왔다. 잘못 들었나 싶어서 귀를 만져보았다.

“화속성 검사나, 마법사는 최고의 화력을 자랑하지만, 그만큼 지속력과 방어력이 약하다.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면 너 하기에 따라 그 약점을 극복할 수도 있겠지. 어떻게 사용할지를 잘 궁리해보도록.”

“…알겠습니다.”

라온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글렌이 갑자기 저런 조언을 해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판별식에서 해주지 못했던 말을 지금 해줬을 뿐이니까.”

“아….”

뭔지 알겠다. 글렌은 예전 판별식에서 자신에게만 조언을 해주지 않았었다. 그때의 말하지 못한 조언을 지금 해준다는 것 같았다.

‘신기한 성격이네.’

글렌은 빙하를 깎아 인간으로 조각한 듯 차갑지만, 챙겨줄 건 챙겨준다.

겉으로는 챙겨주지만, 속으로는 인간을 물건처럼 사용하는 데루스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이제 널 부른 이유를 말하겠다.”

글렌이 턱을 괴며 라온을 굽어보았다.

“내년쯤 너희들에게 임무를 내리겠다.”

“임무라고 하셨습니까?”

“임시 수련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너희들이 수련을 시작한 지 1년이 한참 넘었다. 전부 오러를 습득해 소드 비기너가 되었으니, 밖으로 나가봐도 괜찮겠지.”

“음….”

“너희가 어리다고 생각하나? 전투에 나이는 상관없다. 검사는 검을 들 수 있다면 언제, 어느 때라도 싸워야 한다.”

‘그게 아니라, 늦었다고 생각한 건데?’

전생에선 14살이 아니라, 8살에 암살 임무를 받았었다. 지금 나이라면 빠른 게 아니라, 느린 편이다.

“너만이 아니라, 수련생 모두 단단히 준비하라 일러두어라. 어떤 때, 어떤 상황에서도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그만 나가보도록.”

글렌은 눈을 내리감고 손을 저었다. 라온은 다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뒤 알현실을 나갔다.

“임무를 할 때가 되긴 했지.”

리메르가 깍지 낀 손으로 뒷머리를 잡으며 히죽 웃었다.

“저희가 수행할 임무는 뭡니까?”

“아직 정하지 않았어. 몬스터 토벌, 요인 호위, 던전 탐사, 산적 소탕. 무엇이 나올지 모르니, 가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 있게 준비해야 할 거야.”

“교관님도 같이 가시는 거 아닙니까?”

“가긴 가지만, 내 임무와 너희의 임무는 달라. 교관의 목적은 너희들의 보호니까.

“알겠습니다.”

“엥?”

리메르는 자신이 당황할 줄 알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임무는 당연히 스스로 하는 거지.’

8살에 임무를 받았을 때도 지원 따위는 없었다. 유사시에 보호해 줄 교관이라니, 얼마나 사치인가.

‘지그하르트는 내 생각보다 유순한 곳이네.’

라온은 역으로 당황한 리메르를 뒤로 하고 웃는 얼굴로 가주전을 나섰다.

*     *      *

라온이 별관으로 떠난 뒤 리메르는 다시 알현실로 들어갔다.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리메르는 단상 위에 선 글렌을 보며 빙긋 웃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다.”

“에이, 그런 거치고는 입꼬리가 2mm 정도 올라가 있잖습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마르타의 상태나 말해라.”

“타박상이 심하지만, 요양하면 나을 상처입니다. 문제는 정신적인 충격이죠.”

“그 정도도 극복하지 못한다면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달 이유가 없지.”

글렌은 8살에 입양된 마르타에게도 예외 없이 지그하르트의 정신을 말했다.

“라온이 불의 이미지를 그릴 때 네가 도움을 준 건가?”

“저도 나름 스승이니까요. 다만 선택한 건 라온입니다. 전 여러 개의 길이 있다는 것만 알려줬을 뿐입니다.”

리메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기대하던 초대 가주의 오러를 보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적혀 있던 그대로였다. 화염으로 이루어진 꽃을 보는 듯 아름답더군. 그 위력 역시 크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고.”

“네. 4년 넘게 쌓은 마르타의 타이탄 오러를 아예 부숴버렸죠. 말이 되지 않는 위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색이 황금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색은 불꽃의 위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거다. 그 아이가 앞으로도 제대로 된 길을 걸을 수 있게 지도해주어라.”

“역시 가주님은 그 아이를 특별하게 생각하시는군요.”

“…….”

글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손을 저었다. 귀찮으니, 나가라는 뜻이었다.

“그럼 아이들의 임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건 내 소관이 아니라, 총관부에서 알아서 할 일이다. 넌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아이들이 어떠한 임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강건하게 키우도록.”

“옙! 아이들이 나태해지지 않도록 확실하게 교육하겠습니다.”

“너나 잘하라는 말밖에 나오질 않는군.”

글렌이 리메르의 당당한 표정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게 반면교사라는 거죠.”

리메르는 지지 않고 씩 웃었다.

*     *      *

“음?”

주디엘은 정원 앞을 손질하다가 뒤에서 들린 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헉, 라, 라온 도련님!”

라온이 자신을 지그시 내려보고 있었다.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오셨습니까!”

일어서며 그의 모습을 살폈다. 옷에 먼지가 많이 묻었지만, 다친 곳은 전혀 없어 보였다.

‘설마 이긴 거야? 그 마르타를?’

한 달 전부터 나온 이야기니, 오늘 라온이 마르타 지그하르트와 대련을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길 줄은. 그것도 저렇게 멀쩡하게 이길 줄은 생각해보지 못했다.

“대련에서 이기신 겁니까?”

“어떨 거 같아?”

라온이 빙긋 웃었다.

“아….”

승리를 말하는 웃음을 보자 그날 밤이 생각났다. 호수 위로 떠오른 붉은 눈. 그건 공포의 현신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 이 괴물이 고작 천재에게 질 리 없지.’

다시 깨닫게 되었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조만간 중무전에서 다시 연락이 올 거다. 나를 더 확실하게 조사하라고.”

“그, 그렇겠죠.”

“네가 알아서 적은 뒤 나한테 가져와라.”

“알겠습니다.”

그는 소름이 돋아오르는 미소를 지으며 별관으로 들어갔다. 주디엘은 식은땀이 등 뒤를 적시는 걸 느끼며 손에 쥔 잡초들을 떨어뜨렸다.

“천재를 꺾는 괴물….”

*     *      *

“라온!”

라온은 별관에 들어가자마자, 옷을 걸치던 실비아와 마주쳤다.

“어디 가려고?”

“어딜 가긴! 집에 돌아온다고 한 날인데, 오질 않아서 찾으려고 한 거지!”

실비아가 땅을 박차고 달려왔다. 웬만한 검사들보다 빨라 보였다.

“괜찮아? 다친 곳은?”

그녀의 눈동자는 떨어지는 낙엽처럼 좌우로 쉴새 없이 움직였다.

“안 다쳤어.”

“어후….”

실비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만 라온의 몸을 살피는 눈동자는 멈추지 않았다.

“대련이 취소된 거야?”

“아니. 이겼어.”

“그런데 다친 곳이 없다고?”

“안 맞았으니까.”

“하, 한 대도 맞지 않고 이겼다고?”

“응.”

“지, 진짜요?”

헬렌이 들고 있던 실비아의 겉옷을 떨어뜨렸다.

마르타의 재능이 직계와도 비슷하다는 건 모두 아는 정보였기 때문에 저들이 저렇게 당황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아, 안 다쳤으면 일단 밥부터 먹자! 헬렌. 바로 식사를 준비해줘!”

“괜찮아.”

“응? 저녁 안 먹었잖아.”

“오늘은 할 일이 있거든.”

라온은 주머니에서 영약이 든 목갑을 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또 한 번 강해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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