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4화 (34/653)

34화

마르타 지그하르트는 자존심이 강하다.

전 기수에서 낙제한 이유도 실력 부족이 아니라, 자존심을 건드린 직계 두 놈을 반 죽여놓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여러 귀찮은 일들이 생겼기 때문에 5 연무장에선 적당히 넘기려고 했지만, 신경을 건드리는 놈이 하나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아이 같지 않은 그 꼬맹이가 계속 거슬렸다.

당장 싸우자고 하고 싶었지만, 리메르의 말대로 오러조차 익히지 않은 녀석을 때리는 건 추한 짓이라 참았다.

그래서 라온이 오러를 익혔다고 들었을 때 다른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이전의 굴욕을 갚아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대련이 시작되었고, 라온과 검을 맞댔다.

놈의 검술 재능은 실전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처음 본 검술을 상대하면서도 거의 완벽한 방어를 선보였다.

하지만 타이탄의 오러를 운용한 순간부터 라온은 종이 인형처럼 가볍게 밀려났다.

예상대로였다.

오러의 크기와 정심함이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까.

모든 상황은 마르타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라온의 뼈를 부술 수 있을 정도.

그걸 알고 있을 텐데, 라온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얼마든지 와라!

라고 도발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누구 손에 목덜미가 잡혀 있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토끼를 보는 듯했다.

한심한 놈.

마르타는 이죽거리며 검을 내리쳤다. 더 강한 오러와 힘을 담았다.

쿵!

대련장에 작은 울림이 있었다.

하지만 놈은 버텼다.

연속으로 검을 내리쳐도 쓰러지지 않았다.

짜증이 났다.

재능이 바닥인 주제에 위를 향하려는 모습에 속이 끓어 올랐다.

‘날 원망하지 마라.’

사지가 부러져도 어쩔 수 없다. 마르타는 더 강렬한 오러를 끌어 올린 뒤 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강석의 자세.

날카로운 바위의 기세로 라온의 방어를 뚫어버릴 생각이었다.

땅을 박차려는 그때.

라온의 칼날의 끝에 붉은색 꽃이 타올랐다.

작디작은 불꽃.

하지만 무엇보다 새빨갛고 아름다운 불길을 본 순간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저게 뭐야.’

섬뜩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아니야!’

마르타가 이를 악물었다. 잠깐이지만 라온 따위에게 겁을 먹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기 싫었다.

우우웅!

수련검의 뭉툭한 칼날에 모아둔 타이탄 오러를 그대로 내리쳤다.

화르륵!

그 순간 라온이 한 발을 걸었다. 그의 수련검에서 타오르던 작은 불꽃이 하나의 선을 창출했다.

좌에서 우로 그어지는 붉은빛의 선. 그 선에 닿은 타이탄의 오러가 녹아내렸다.

그리고.

뿌득!

단단하기 그지없는 수련검이 반으로 쪼개져 허공을 노닐었다.

터억!

부러진 칼날이 연무장에 박히는 소리가 마르타의 귓속을 후볐다.

“아….”

마르타는 넋이 나간 눈으로 반쪽 반 검을 바라보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과 손을 동시에 떨었다.

“그게 네가 말한 재능인가?”

라온 지그하르트가 차가운 눈빛을 발한다. 검 끝에서 타오르던 불꽃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미숙한 칼질 한번 버텨내지 못하는 재능이라. 그 정도라면 의미 없다고 봐도 되겠어.”

“너, 너….”

마르타 지그하르트는 평소와 달리 어떠한 대꾸도 하지 못했다. 반으로 쪼개진 검처럼 고개를 숙였다.

*     *      *

“뭐, 뭐야! 방금 뭐가 어떻게 돌아간 거야!”

“타, 타이탄 오러를 두른 수련검이 일검에 잘렸어.”

“미, 미친….”

라온은 앞뒤로 쏘아지는 수련생들의 시선을 느꼈다. 당황, 불신, 경악. 숨 쉬는 것도 잊은 것 같았다.

“허….”

그건 앞에 있는 리메르도 마찬가지였다. 긴 귀를 더 뾰족하게 세운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일검에 마르타의 검을 베는 건 그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나도 놀랐으니.’

만화공의 첫 번째 단계 일화의 위력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제대로 조절하지 못했다면 마르타마저 베어버렸을 정도.

‘2성이 이 정도라면….’

3성 이후의 위력이 어떨지 기대되어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으으….”

아래에서 들려온 신음에 시선을 내렸다. 마르타의 검은 눈동자가 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대로는 인정 안 하겠군.’

굴복한 표정이 아니다. 검이 잘리는 걸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니,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인정 못 해.”

마르타의 입에서 예상했던 그 단어가 그대로 흘러나왔다. 그녀는 갈라진 검을 내던지고 주먹을 말아쥐었다.

고오오오!

타이탄 오러가 그녀의 육신을 감싸며 깨지지 않는 바위 같은 기세를 만들어 냈다.

“그럴 줄 알았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련검을 내려놓았다.

“네 입에서 졌다는 말이 나오도록 만들어주지.”

“그런 일은 없어!”

마르타가 땅을 박찼다. 이번에는 정면이 아니라, 좌측으로 돌진해온다. 딱딱한 움직임이지만, 빠르면서 묵직했다.

“으하합!”

순식간에 접근해 기합과 함께 주먹을 찔러왔다.

터엉!

라온이 팔꿈치로 주먹을 내리찍었다. 무지막지한 충격에 마르타의 몸이 뒤틀렸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끝까지 주먹을 쏟아냈다.

뻐억!

손아귀로 원을 그렸다. 주먹을 부드럽게 막아낸 뒤 발로 마르타의 복부를 후려쳤다.

“끄흡!”

정타가 들어갔음에도 마르타는 약한 신음만 흘릴 뿐 물러서지 않았다. 단단한 오러에 어울리는 두터운 정신력이었다.

“아, 아직이야!”

마르타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뻗어냈다. 명가의 무학은 이 순간에도 빛을 발하는지 당황한 와중에도 제대로 된 투로를 그렸다.

‘그래도 그 정도론 무리지.’

빠르고, 정확한 투로에 강력한 오러가 담겼지만, 그뿐. 단련은 한참 부족했다.

뻐억!

이마를 향해 쏘아져 온 주먹을 피하고, 손날을 세워 마르타의 허리를 후려쳤다.

“끄흡!”

타이탄의 오러를 뚫고 들어간 충격에 마르타의 입에서 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잠시 몸을 움찔거렸다가 더 빠르게 반격을 해왔다. 단아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흉폭함이다.

‘맷집 하나는 좋군.’

성인 검사도 쓰러질 주먹을 연속으로 얻어맞고도 반격이라니, 정신력과 육체 내구성은 수련생의 수준이 아니다.

“흐아압!”

마르타가 발을 굴렀다. 대련장의 바닥에 깔린 모래들이 들썩 일어나 잠시 시야를 가렸다. 기척을 파악하기도 전에 우측에서 주먹을 쏟아졌다.

콰앙!

투석기의 바위 같은 주먹이다. 팔뚝으로 막을 때마다 전신이 흔들렸다.

“으아아!”

마르타는 간신히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호흡을 멈추고 무수한 주먹을 뻗어냈다.

뻐억!

순식간에 스무 번의 주먹을 내지른 마르타가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멈췄을 때 라온의 주먹이 그녀의 복부를 강타했다.

“꺼헉!”

마르타가 배를 부여잡고 뒷걸음질 쳤다. 눈동자에 불신이 가득 깔려 있었다.

“선언한 말과 달리 주먹도 별론데.”

라온은 마르타의 주먹을 막아낸 팔과 손목을 가볍게 털어냈다.

“어, 어떻게….”

“잘.”

당황하는 마르타를 조롱하며 손목을 돌렸다.

‘만화공은 방어도 뛰어나군.’

꺼지지 않는 불길을 이미지로 삼은 덕분인지 만화공의 오러는 공격만이 아니라 방어에도 효율적이었다.

“후우욱….”

마르타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말아 쥔 주먹으로 타이탄 오러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고오오!

오러를 한곳에 모으는 일점이라는 기예. 저 나이에 벌써 저걸 사용하다니, 역시 뛰어난 자질이다.

더 이상 얼굴에 흥분도 보이지 않았다. 분노 가득했던 눈빛에 정광이 돌아왔다.

“인정하마. 네놈은 강해.”

마르타의 주먹에 모여든 기운이 제대로 된 형태를 갖췄다. 소드 유저 수준에 올라왔다는 뜻이다.

“이걸 넘어선다면 패배를 인정한다!”

마르타가 먹이를 본 곰처럼 내달렸다. 산 정상에서 바위가 굴러떨어지는 듯한 묵직함.

“후우.”

라온이 가는 한숨을 뱉어냈다. 진각을 밟으며 주먹을 내질렀다.

발목에서부터 시작된 회전이 대퇴근을 넘어 허리에 도달한 순간 내지르는 주먹에 폭발력이 담겼다.

콰아앙!

만화공의 불꽃이 깃든 주먹이 갈색 오러의 무더기를 깨뜨리고, 마르타의 팔을 뒤틀었다.

“아….”

타이탄 오러가 갈가리 쪼개지며 눈에 핏발이 선 마르타의 얼굴이 보였다.

화아아악!

권격의 후폭풍에 휩쓸린 그녀는 폭풍을 맞은 갈대처럼 휘청이며 튕겨 나갔다.

“으….”

마르타는 목을 바르르 떨다가 눈을 감고 뒤로 넘어갔다. 기절한 상태에서도 말아 쥔 주먹은 끝까지 풀지 않았다.

‘정신력 하나는 대단하군.’

곧 15살이 되는 아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정신력이다. 실력과 재능 이상으로 놀라웠다.

“허억!”

“어….”

“아, 압도적이잖아.”

“말이 안 돼. 어떻게 마르타 님을….”

마르타를 따르던 수련생도, 반대의 위치에 섰던 수련생들도 놀라 입을 다물질 못했다.

“라온 지그하르트….”

버렌은 말아 쥔 주먹을 바르르 떨며 라온을 노려보았다.

“…….”

루난은 평소처럼 뚱한 표정이었지만, 흥분했는지 뻐끔거리는 입에서 냉기가 흘러나왔다.

“어이구….”

리메르는 잠시 멍하니 섰다가 바로 쓰러진 마르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달려갔다.

“쯧, 잔소리를 퍼부어야 하는데 기절이라니.”

리메르는 마르타의 상태를 확인하고서 길게 혀를 찼다.

“오늘은 이걸로 끝이다. 모두 돌아가서 오늘 무엇이 더 모자랐는지 생각해보도록.”

“아, 예.”

“그럼 라온을 제외하고 모두 해산.”

“전 왜….”

“줄 것도 있고, 하지 않은 잔소리가 남았으니까.”

그는 씩 웃고서, 연무장의 벽을 넘어 의무실로 달려갔다.

“라온 지그하르트.”

라온이 리메르가 뛰어넘은 벽을 멍하게 보고 있을 때 버렌이 다가왔다.

“난 네 녀석이 따라올 거라 예상했다.”

그는 감탄한 것 같기도,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한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난 마르타와 다르다. 네가 토끼처럼 앞서가도 포기하지 않고, 거북이처럼 느리게 가도 방심하지 않는다. 훗날 치러질 졸업시험에서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널 꺾겠다.”

버렌은 그 말을 남기고, 연무장을 떠났다. 시원해 보이는 표정이다.

‘확실히 변했군.’

이전처럼 아집과 질시로 가득한 버렌은 없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자만심을 버리고 자신감을 채웠다.

툭툭.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보니, 루난이 보라색 눈동자를 말똥거리고 있었다.

꾸벅.

그녀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잘했다는 것 같았다. 구슬 아이스크림이 든 상자를 꼭 껴안은 채 종종걸음으로 연무장을 떠났다.

“나 참.”

라온이 어하고 입을 벌렸다. 저 녀석은 뭘 하고 싶은 건지 여전히 뭔지 모르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의자가 있는 단상 옆으로 걸어갔다.

의자에 걸터앉아 리메르를 기다리고 있을 때 단상 위에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리메르가 낮잠을 잘 때 베개 용도로 쓰던 책이다. 펼쳐보았다.

“어?”

내용을 살핀 라온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이건….’

베게 용도로 가지고 다니는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책 안에는 수련생들의 장점과 단점. 그리고 개선할 방법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첫 페이지에 적힌 버렌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자만심이 과함. 수련생 신분이 된 이후 많은 변화를 이룸. 자신의 부족함이 정신적인 부분이라는 걸 깨닫고 명상에 시간을 쓰고 있음. 우아하면서도 체계적인 검술을 사용하고 본인도 이를 중요시….’

수련생을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적기 힘든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글이 하나가 아니라, 수련생의 숫자대로 있었다.

‘나는….’

라온이 본인의 내용을 보았다.

‘검술과 권법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고, 마나에도 뛰어난 감각이 있지만, 오러 연공법의 습득에 애를 먹고 있음. 속성에 관한 교육이 필요함. 불을 느끼게 할 방법을 찾는 게….’

자신에 관한 내용도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리메르 교관….’

리메르가 항상 뺀질거리면서 노는 줄만 알았는데, 실제로는 모든 것을 세세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라온은 가슴을 따뜻하게 채우는 뭔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의외로군.

‘그렇지?’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전히 건방지고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라스는 자신의 몸을 먹어 치우는 걸 실패한 이후 세상을 더 염세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지상에서 뾰족귀와 난쟁이가 건너온 적이 있었다. 까부는 놈들을 모조리 얼려서….

‘말 진짜 많네.’

라온이 꽃팔찌를 툭 치자, 라스가 입을 다물었다. 점점 말이 많아져서 감당이 안 된다.

-끄윽, 본왕은 과묵의 대명사다. 마계의 군주 중에서도 말 없기로 제일이었는데, 말이 많다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말이 많다는 건….

‘어우.’

다시 팔찌를 쳐서 입을 다물게 했을 때 리메르가 벽을 넘어 돌아왔다.

도둑도 아니고 왜 맨날 문 놔두고 저렇게 들어오는 건지 모르겠다.

“라온.”

리메르가 웃으며 다가왔다, 그의 표정엔 여전히 놀람이 담겨 있었다.

“오러를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훌륭한 운용이었다. 다만 일부러 맞아주던가, 검을 버리는 건 할 필요 없는 행동이었어.”

리메르가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다만 그건 교관으로서의 의견이고, 나라는 개인으로서는 만족스러운 한 판이었다. 진짜 수석이 된 걸 축하한다. 이제 이건 네 거다.”

그는 품에 챙겨놓았던 목갑을 건네주었다. 마르타가 맡겨두었던 영약이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영약을 받으며 리메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너희끼리 내기한 거니,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아뇨. 감사합니다.”

이건 영약에 대한 감사가 아니다. 지금까지 수련을 지켜봐 주고, 여러 조언을 해준 것에 대한 감사다.

그는 지각하고, 농땡이를 부릴지언정, 필요할 땐 확신한 교육을 해주었다.

실제로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만화공을 익히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전생에선 스승이 아니라, 사육사만을 겪어 봤기에 리메르라는 사람은 감사를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하여튼.”

리메르는 픽 웃었다. 그저 기껍다는 얼굴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만.”

그는 검지와 중지를 모아서 손을 까딱였다.

“말했잖아 나와 갈 곳이 있다고.”

“갈 곳이요?”

“가주전 알현실.”

리메르가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서쪽을 가리켰다.

“가주께서 널 호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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