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3화 (33/653)
  • 33화

    한 달 후 대련장을 시행하겠다는 리메르의 선언 이후 아이들은 미래의 상대를 상상하며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누구와 싸우더라도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서 검술을 다듬고, 오러를 연공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지 않은 수련생도 있었다.

    라온과 마르타. 이미 상대가 정해진 두 사람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라온은 평소처럼 새벽부터 밤까지 전력을 다해서 수련했고, 마르타는 수련생 중 최강자답게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각자가 전력을 다해 수련하는 한 달이 훌쩍 지나가 대련 날 아침이 밝았다.

    1년 가까이 단련해 온 무력을 증명하고, 교관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을 기회였기 때문에 수련생들의 얼굴에는 흥분과 긴장이 가득했다.

    반면 마르타는 그런 것 따윈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한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제야 갚아줄 수 있겠네.’

    7개월 전 라온에게 반격을 당해서 얻어맞았던 팔뚝을 움켜쥐었다.

    ‘처음이었지.’

    이곳에 오기 전 뒷골목에서도 또래에게 맞은 적은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당한 망신이라 지금도 잊히지 않았다.

    그날의 굴욕을 갚아 줄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8개월 만에 드디어 그날이 찾아왔다.

    ‘오늘로 끝이야.’

    라온 지그하르트가 오러를 익힌 시간은 한 달밖에 되지 않았고, 자신은 3년이 넘었다. 사실상 의미 없는 대련이었다.

    비겁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재능이 없는 놈을 언제까지고 기다려주는 것도 시간 낭비다.

    ‘나는 할 일이 있어.’

    라온 같은 얇은 벽에 막혀 있을 때가 아니다. 최대한 빨리 강해져서 구할 사람이 있다.

    우우웅!

    마르타는 손아귀에서 솟구치는 황색의 오러를 움켜쥐며 입매를 굳게 다물었다.

    *     *      *

    라온은 임시로 만든 대련장 우측에 앉아서 상태창을 확인했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최초의 승리.

    상태 : 혹한의 저주(여섯 가닥), 운동능력 저하, 마나 감응력 저하.

    특성 : 분노, 불의 고리(3성), 수속성 저항력(3성), 설화의 감각(1성), 만화공(2성), 혹한의 냉기(2성), 화속성 저항력(2성)

    근력 : 35

    민첩성 : 36

    체력 : 35

    기력 : 26

    감각 : 50

    특성의 개수도 많이 늘어났지만, 그동안 한계를 넘어서는 수련을 통해 능력치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괜찮네.’

    라온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상태창의 수치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 주목!”

    상태창을 껐을 때 리메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대련장 바닥을 전부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의 전투를 보는 건 직접 대련하는 것만큼이나 도움이 된다. 다른 수련생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대련에서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계획을 세우도록.”

    “예!”

    “그럼 첫 번째 버렌 지그하르트. 도리안.”

    “네!”

    “헉!”

    버렌은 당당하게 일어서서 대련장으로 들어갔지만, 도리안은 게걸음을 걸으며 바들바들 떨었다.

    “저, 저기 교관님?”

    “뭐지?”

    “기권합니다!”

    도리안은 힘차게 손을 들어 올리며 기권을 외쳤다.

    “…….”

    그 절박한 목소리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물론 뭐 저런 놈이 다 있냐라는 눈빛이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만?”

    리메르가 당황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모,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어제부터 몸살과 오한이 와서. 콜록!”

    도리안은 어색한 마른기침을 하며 입술을 떨었다.

    “어우, 진짭니다.”

    배에 달린 주머니에서 얼음주머니를 꺼내 머리에 얹었다. 준비성 하나는 정말 철저한 놈이다.

    -한심하도다. 본왕의 부하라면 당장에 목을 베었을 것이야!

    ‘예상대로긴 한데.’

    도리안이 저렇게 나올 건 알고 있었다. 평소 녀석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도리안. 그래도 한 번은 싸워봐. 패하더라도 배우는 바가 있을 거다. 다치기 전에 말릴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 그럼 사람이라도 바꿔주시면… 흡!”

    도리안은 고개를 들어 올리다가 버렌과 눈을 마주치고서 찔끔 몸을 떨었다.

    “네가 밖에서 어떤 신분이었든. 지금은 지그하르트의 수련생이다. 지그하르트의 명예를 떨어뜨린다면 지금 이곳에서 목을 베어주마.”

    버렌의 목소리는 아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살벌했다.

    “허억!”

    도리안이 입을 떡 벌리고서 리메르의 뒤로 몸을 숨겼다.

    “도리안. 말 그대로 대련일 뿐이다. 무섭게 여기지 말고, 지금까지 네가 해온 걸 보여준다고 생각해.”

    “아, 알겠어요.”

    리메르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도리안의 떨림이 살짝이나마 가셨다.

    “버렌. 너도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명예도 좋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들은 세상에 많으니까.”

    “…….”

    버렌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기세를 풀었다.

    “음….”

    라온은 버렌과 도리안 사이에서 웃고 있는 리메르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잘 통하네.’

    그의 조언은 양쪽 모두에게 적절하게 먹혀들었다. 매일 놀기만 하는 것 같아도 수련생들을 잘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저게 스승이라는 건가.’

    전생에서 암살자로 사육될 때 저런 일이 있었다면 교관은 도리안과 버렌의 목을 둘 다 베어버렸을 거다.

    저렇게 달래주고,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진짜 스승인 것 같다.

    “그럼 준비.”

    리메르 덕분에 정리가 끝났고, 버렌과 도리안이 마주 섰다.

    “시작!”

    시작 소리와 동시에 버렌이 달려가 검을 내질렀다.

    오러를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의 대결 때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히이익!”

    도리안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틀었다. 덕분에 버렌의 검은 종이 한 장 차이로 허공을 찔렀다.

    “도망치지 마라!”

    버렌은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내리쳤고, 도리안은 수련검을 휘적거리며 발만 놀렸다.

    “우아악!”

    버렌이 휘두르는 검이 다섯 번이 넘어갔지만, 도리안은 끝까지 도망만 다녔다.

    “언제까지 도망만 칠 거냐.”

    버렌이 눈매를 좁히며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좁혀드는 거리. 숨겨둔 실력을 발휘한 것이다.

    “우허헉!”

    도리안이 급하게 몸을 빼려 했지만, 늦었다. 버렌의 수련검은 이미 그의 허리에 닿아 있었다.

    뻐어억!

    강렬한 소리와 함께 도리안의 몸이 우측으로 튕겨 나갔다.

    “어우욱, 하, 항복! 항복합니다!”

    도리안은 허리를 부여잡고, 버둥거리며 항복이라 소리쳤다.

    ‘역시 몸이 유연하군.’

    라온은 바닥에 누운 도리안을 보며 피식 웃었다. 녀석의 재능은 나쁘지 않다. 특히 오러 운용 속도와 발 빠르기는 직계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버렌의 실력을 감당하기엔 한참 무리였지만.

    “버렌. 넌 아직 감정을 조절 못 하고 있다. 제대로 상대했다면 다섯 합 안에 검이 닿았을 거다.”

    “…맞습니다.”

    버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물러났다.

    “도리안. 넌 왜 자꾸 도망만 치는 거야. 할 수 있다니까. 도망치지 않고 맞서서 싸웠으면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어.”

    “죄, 죄송합니다. 근데 무, 무서워서….”

    “무서울 수는 있지만 여기서 극복하지 못하면 실전에선 서 있을 수도 없다. 검사가 되기 위해선 그 공포를 이겨내야 해.”

    도리안은 버렌과 달리 한참 동안 잔소리를 듣다가 돌아갔다.

    “다음 루난이랑 크레인.”

    “네.”

    “예!”

    루난과 방계 크레인이 대련장으로 걸어갔다.

    크레인은 꽤 힘 있는 방계의 아이로 예전에 자신에게 덤볐던 버렌의 졸자 중 하나다. 실력은 괜찮지만, 루난의 상대는 되지 않는다.

    “시작.”

    리메르가 손을 아래로 내리자마자, 루난과 크레인이 앞으로 뛰어들었다.

    “흐압!”

    선공은 크레인이다. 이를 악문 채 좌측으로 젖혀둔 수련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

    루난은 평소의 표정을 유지하며 하얀 냉기가 뿜어지는 검을 올려 쳤다.

    떠엉!

    쇳덩이가 찌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크레인의 검이 떨어져나와 잘 다져진 대련장의 땅에 박혔다.

    루난은 뒤늦게 검을 내지르고서도 크레인을 검을 쳐내버린 것이다.

    “끄윽….”

    크레인이 손을 바르르 떨며 뒷걸음질 쳤다.

    “거기까지.”

    리메르는 턱을 긁적이며 대련장으로 나왔다.

    “크레인. 긴장을 너무 많이 했다. 손목과 손아귀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어. 검을 잡을 땐 여유를 주어야 한다.”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루난. 후발선공의 묘리는 좋았지만, 검 끝까지 오러가 담기지 못했다.”

    “네.”

    루난은 담백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였다.

    “수고했어. 그럼 다음….”

    *     *      *

    대련 훈련은 해질녘까지 계속되었고, 남은 사람은 두 명이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마르타 지그하르트. 앞으로.”

    “기다리다 늙어 죽는지 알았네”

    마르타의 검은 눈동자가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반면 라온은 덤덤한 눈으로 마르타와 마주 섰다.

    “8개월이면 나치고는 많이 참았지. 이제 끝을 내자고.”

    “내기 하나만 더 걸까?”

    라온은 이를 드러내는 마르타에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뭐?”

    “패한 사람이 승자. 즉, 수석의 말에 복종하는 게 어때?”

    “복종이라. 너 같은 둔재의 복종 따윈 필요 없지만, 상관없겠지.”

    마르타는 가늘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진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의 마지막 대련이네. 모두 잘 봐두도록. 그럼….”

    리메르가 알기 힘든 미소를 지으며 손을 올렸다.

    “시작!”

    리메르의 손이 내려가자마자 마르타가 땅을 박찼다. 터엉 소리와 함께 그녀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후웅!

    내려치는 마르타의 수련검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캬앙!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튀어나온 불똥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왜 오러를 사용하지 않았나 궁금해?”

    마르타는 검을 밀어붙이며 히죽 웃었다.

    “먼저 검술로 붙어보자고, 그 뒤에 오러가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알게 해줄 테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순간 검술이 급격하게 변화했다. 속도와 힘만이 아니라, 궤도마저 현묘해졌다.

    캬앙!

    라온이 마르타의 수련검을 쳐내며 눈매를 좁혔다.

    ‘모르는 검술이군.’

    빠르고, 강하면서도 현묘하다. 직계 교육을 받을 때 배운 고급 검술인 것 같았다.

    ‘강하긴 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검술. 차라리 모두가 아는 연성검을 펼치는 게 더 나았을 거다.

    컁! 캬아앙!

    라온은 연성검의 다섯 초식을 연거푸 펼쳐 마르타의 검술을 막아냈다.

    “전부 막아?”

    새로운 검술을 수십 번 내치고도 자신의 방어를 뚫어내지 못하자 마르타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모든 검술은 다섯 가지 형태에서 시작한다. 그것만 알고 있다면 막아내는 건 어렵지 않아.”

    마르타가 내지른 검을 쳐내고 근접하여 주먹을 내질렀다.

    후우웅!

    그녀는 우측으로 보법을 밟아, 주먹을 피해냈다. 빈틈을 노리듯 허리를 향해 검을 후려쳤다.

    캬아앙!

    라온은 검을 사선으로 세워 공격을 흘려낸 뒤 마르타를 밀어붙였다.

    “역시.”

    마르타가 검을 휘돌리며 뒤로 물러섰다.

    “인정하지. 넌 재능이 있어. 다만 그건 검술 하나일 뿐이야. 오러가 약한 반쪽짜리 무인이 갈 길은 이미 정해져 있어!”

    그녀의 주변으로 황색 기류가 피어났다. 대지 속성 오러에 연무장이 잘게 흔들렸다.

    쿠우웅!

    마르타가 발을 굴렀다. 땅이 파여나가며 그녀의 수련검이 대기를 꿰뚫었다.

    “흡!”

    쏟아져 내리는 황색 기운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콰아앙!

    검을 막아내는 것만으로 다리가 휘청였다. 아까와 같은 돌진이었지만, 그 속도도 위력도 차원이 달라졌다.

    “오, 막았네?”

    뭉툭한 칼날 사이로 보이는 마르타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이제 좀 알겠지? 제대로 된 오러가 담긴 검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그녀는 손목과 허벅지를 떨고 있는 라온을 보며 턱을 치켜올렸다.

    “오러는 검술 이상으로 재능을 타지. 7개월 만에 콩알만 한 오러를 만든 네 재능으로 검사는 무리야.”

    마르타가 내려치는 검의 위력과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검격을 막아낼 때마다 몸 전체가 휘청였다.

    “지금 이 오러도 내 전력이 아니야. 마지막 기회를 주지. 지금 항복해. 다음에는 뼈를 분질러 줄 테니까.”

    “말 참 많네.”

    라온이 우측으로 칼을 내리쳤다. 쾅 소리와 함께 마르타가 밀려 나갔다.

    “마지막 배려를 걷어차다니, 진짜 멍청하네.”

    마르타가 음성이 북풍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말끝마다 재능. 재능. 이 집안의 인간들은 귀찮을 정도로 재능을 좋아한다니까.”

    라온이 코웃음을 쳤다.

    ‘재능은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재능 이상으로 무인의 기질이 중요하다. 아무리 강한 무학을 익히고, 뛰어난 재능을 가졌어도 인간이 약하다면 아무 소용도 없다.

    “재능이 없는 네겐 시끄럽게만 들리겠지만 난 재능 소리를 들을 때마다 즐거워.”

    마르타의 입꼬리가 풀잎처럼 올라갔다.

    “그러니 확실하게 보여줄게. 진짜 재능이 무엇인지를!”

    그녀의 몸에서 피어나던 갈색 기운이 진해졌다. 날카롭게 갈린 바위 그 자체가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난 반대로 보여주지.”

    재능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라온의 눈에 황혼이 비치고, 시퍼런 검날에 새빨간 불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만화공 일화(萬火功 一火)

    첫 번째이자, 하나의 불꽃.

    지그하르트의 전설이 천년의 세월을 넘어 라온의 검 끝에서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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