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32화 (32/653)
  • 32화

    연무장으로 향하는 라온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경쾌했다. 기분 탓이 아니다. 바람을 탄 것처럼 몸 자체가 가벼워졌다.

    ‘오러 덕분이지.’

    능력치가 오르고, 체질이 바뀐 것도 있겠지만 가장 큰 차이는 오러다.

    오러는 마나의 응집체. 그 존재만으로 인간의 육체 능력을 상승시킨다.

    지금 자신의 단전에는 그 오러 2개가 뭉쳐 있었으니, 평소보다 몸이 가볍고 활력 넘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야.’

    더 감각이 더 세밀해졌다.

    바람의 흐름, 풀잎을 뛰노는 산짐승의 발걸음 그리고 산 아래를 지키는 검사들의 기척까지. 주변의 모든 게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흐음.”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시험해보고 싶은데.’

    실전에서 힘을 발휘하려면 지금의 내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오늘 수련이 끝나면 다시 산에 가봐야겠어.’

    이전에 리메르가 바람을 알게 해준 북망산의 공터에서 시험을 해보면 될 것 같다.

    -크아아!

    기대감에 미소를 지으며 연무장으로 걸어갈 때 라스가 악 소리를 질렀다.

    -제기랄!

    녀석은 지금까지도 흉폭한 냉기와 분노를 뿜어내고 있었다. 물론 힘이 빠져서 조금도 위협적이진 않았다.

    -어떻게 그 순간에 가마를 보았단 말이냐!

    ‘그러게. 운이 좋았어.’

    -웃기지 마라! 네놈이 끌어당긴 걸 모를 줄 알았던 거냐!

    라스가 바드득 이를 갈았다.

    ‘이 괴물 같은 놈!’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냉기와 정신공격을 막는 능력이 있다는 건 예상했다.

    ‘뭐가 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

    금세 놈의 육체와 영혼을 먹어 치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아니었어.’

    놈은 달랐다.

    처음부터 인간의 정신이 가장 약해지는 시기. 연공의 극에 이르러 정신의 방벽이 가장 낮아진 무아지경 상태를 노렸다.

    그동안 모아놓은 분노의 감정과 냉기를 모조리 폭발시켰음에도 라온의 정신은 무너지지 않았다.

    극한의 정신력으로 버티다가 가마의 열기를 이용해서 자신을 밀어내 버렸다.

    그 완벽한 계획이 무너진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어디서 이런 놈이….’

    산전수전 다 겪은 마족들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저 어린놈이 아무렇지도 않게 참아냈다.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없었다.

    꿀꺽.

    라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평생 저 꼬마의 팔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어.’

    이를 악물었다. 이전에도, 오늘도 실패했지만 이렇게 계속 퍼줄 수는 없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좋아하지 마라. 본왕은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그래. 열심히 해.”

    라온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연무장을 발걸음을 옮겼다. 저 무덤덤한 반응. 보면 볼수록 짜증이 나는 놈이다.

    -귓구멍 씻고 들어라. 본왕은 포기라는 걸 모르는 마족이다. 네놈의 육체를 집어삼켜서 주변의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 버….

    “힘내라.”

    -으아아악!

    라온의 담백한 대답에 라스는 결국 두 번째로 폭발했다.

    *     *      *

    루난은 연무장 중앙에 서서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오지?’

    최근 라온의 상태는 수련생 모두가 알 수 있을 정도로 좋지 않았고, 그 이유도 알고 있었다.

    오러.

    라온보다 연공을 늦게 시작한 아이들도 모두 오러를 만들었지만, 그는 7개월이 지난 지금도 오러를 안착시키지 못했다.

    5 연무장에서 오러를 습득하지 못한 건 라온뿐이었다.

    버렌을 꺾은 뒤 그를 수석으로 인정하던 아이들도 생각을 달리했다. 마르타나 버렌 혹은 자신에게 수석의 자리가 가길 원했다.

    ‘도와주고 싶어.’

    라온에겐 큰 도움을 받았다. 옆에서 수련하면서 더 높은 성취를 이뤘고, 그에게서 풍기는 시원한 향기에 훈련할 때 항상 기분이 좋았다.

    ‘엄마도 말했으니까.’

    엄마는 고마운 사람에게 보답하라고 했었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구슬 아이스크림을 다시 가져왔다.

    지난번에는 마지막 남은 하나를 줬지만, 이번에는 3개나 남아 있었다. 이걸 먹고 기운을 차려줬으면 좋겠다.

    달칵.

    루난이 구슬 아이스크림이 든 상자를 매만지고 있을 때 연무장 문이 열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라온이 들어왔다.

    탁탁.

    쪼르르 달려가서 라온의 앞에 섰다. 이제 붙는 게 익숙해졌는지 라온은 별반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부스럭.

    그런 그에게 가지고 있던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힘내.”

    루난은 얼떨결에 상자를 받은 라온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음?’

    평소처럼 다섯 걸음 거리로 떨어지려고 할 때 라온에게서 풍기던 시원한 향기가 더 진하게 느껴졌다.

    킁킁.

    잘못 느낀 게 아니다. 가슴이 떨릴 정도로 청량한 향기였다.

    루난은 두 눈을 빛내며 평소보다 한 발자국 더 라온에게 다가갔다.

    *     *      *

    ‘또 왜 이래?’

    라온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기분 좋게 하산해서 왔는데, 루난이 평소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흥흥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루난에게 받은 상자를 보았다. 구슬 아이스크림이 담겨 있던 그 상자였다.

    열어보니, 하얀 냉기가 피어나며 색이 다른 구슬 아이스크림 3개가 놓여 있었다.

    -헉! 구슬 아이스크림이 아니더냐!

    라스에게서 기대감이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먹으라고?”

    “응.”

    흥흥거리던 루난이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저 아이를 본왕의 아이스크림 소녀로 인정한다. 라온. 다 먹어라! 본왕은 다른 맛도 느껴보고 싶도다. 일단 중앙에 있는 검은색부터….

    ‘좀 가라.’

    상자에서 검은색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서 입에 넣었다.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초콜릿이 입안에서 팔랑였다. 음식으로 행복을 느끼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달콤했다.

    -미쳤도다! 시원함이 입안을 적시고, 그 위로 달콤한 초콜릿이 리본처럼 혀끝을 감싸는구나. 황홀한 맛이야!

    라스는 평론가라도 된 거처럼 아이스크림의 맛을 세세하면서도 매끄럽게 설명했다.

    -더, 더 먹어라! 이번엔 저 빨간색을….

    “헤….”

    루난은 먹고 싶었던지 살짝 침을 흘리며 입맛을 다셨다.

    “잘 먹었어.”

    라온은 아이스크림 2개가 남은 상자를 루난에게 돌려주었다.

    “더 안 먹어?”

    루난은 멍한 눈으로 되돌아온 상자를 바라보았다.

    “충분해. 고마워.”

    -충분하긴 무슨! 본왕은 아직 배고프다! 다 먹어!

    ‘얘 먹고 싶어 하는 거 안 보이냐? 나잇값 좀 해.’

    라온은 난동을 부리는 라스를 손바닥으로 짓눌러버렸다.

    “그럼 기운 났어?”

    “응? 아….”

    라온은 자신과 상자를 번갈아 쳐다보는 루난을 보며 픽 웃었다.

    ‘역시.’

    먹고 싶어 하는 표정을 보니 확실해졌다. 루난은 기운을 차리라고 이 아이스크림을 건네준 거다.

    표정 변화가 적고, 말수도 적지만, 루난은 선하고 다정한 아이였다.

    “기운 났어. 고마워.”

    “응!”

    루난은 작게 웃으며 상자를 받았다. 보물을 찾은 탐험가처럼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근데.”

    “응?”

    “아냐.”

    루난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점은 평소보다 거리가 가까웠고, 흥흥거리며 냄새 맡는 횟수가 좀 많이 늘어났다.

    ‘정말 모르겠다니까.’

    라온은 어깨를 으쓱이고서 뒤처리를 하고 올 리메르를 기다렸다.

    *     *      *

    “한 달 뒤에 좀 특별한 걸 해보려고 한다.”

    수련 시간에 10분이나 늦게 나타난 리메르가 히죽 웃었다.

    “교관님 오늘도 지각하셨습니다. 10분이면 검을 100번 넘게 휘두를 수 있는 시간인데.”

    버렌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아, 미안. 준비가 좀 필요했거든.”

    리메르는 익숙한 손짓으로 사과를 한 뒤 말을 이었다. 말은 미안이라고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그저 웃는다.

    “으음.”

    버렌은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이 역력했지만, 손은 내렸다.

    “너희도 즐거울 거야. 오랜만에 훈련다운 게 왔으니까.”

    리메르는 입꼬리를 빙글 말아 올리며 뒤를 가리켰다. 뒤쪽 연무장에 원형으로 금이 그어져 있었다.

    “7개월 동안 기초를 쌓고, 연공을 계속했으니 달궈볼 때가 되었지. 한 달 뒤에 대련을 실시한다.”

    “우오오!”

    “드디어!”

    “대련!”

    아이들이 포효와 같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동안 반복해서 단련해온 오러와 검술을 시험해볼 기회가 왔으니, 기뻐하는 건 당연했다.

    찌그러졌던 버렌의 인상도 펴졌고, 마르타는 서늘한 미소를 피워냈다. 루난의 맹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대련의 승패는 너희들의 졸업 점수에 들어가서 순위를 매기게 될 거다. 한 달간 열심히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잠시만요.”

    여유롭게 웃고 있던 마르타가 리메르를 불렀다.

    “아직도 오러를 만들지 못한 뒤떨어지는 친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름을 칭하지 않았지만, 모두 라온을 바라보았다.

    라온은 수련생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리메르의 입만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 친구도 오러를 만들었다고 하더라고.”

    “네? 대체 언제….”

    “어젠가? 오늘인가?”

    “아, 그래요?”

    마르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검은 눈동자가 진흙에 묻힌 흑진주처럼 번들거렸다.

    “드디어 기회가 왔네. 너무 길어서 지루해 죽을 뻔했는데.”

    그녀가 다가오며 미소를 지었다. 비웃음과 거만함이 어우러진 웃음이었다.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지. 난 나보다 약한 놈의 지시는 듣지 않는다고. 이 정도면 참을 만큼 참아줬다고 생각해. 이번에 끝을 내자. 넌….”

    “마르타 지그하르트. 물러나라.”

    라온이 나서기도 전에 버렌이 옆으로 끼어들었다.

    “오러를 습득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녀석과 한 달 뒤에 대련하겠다니, 네겐 검사의 명예도 없는 건가.”

    “하! 명예?”

    마르타가 입꼬리를 길게 꼬아 올렸다. 노골적인 비웃음을 그리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가문에서 귀하게 크신 분은 명예가 밥 먹여주는지 아시나 보네.”

    “마르타.”

    “명예라는 것도 그에 걸맞은 사람에게나 보여주는 거야. 저기 뒤떨어지는 녀석들도 한 달 만에 오러를 익혔지만, 우리 수석께선 반년이 넘게 걸렸어.”

    그녀는 린덴 오러 연공법을 익히고 있는 추천생들을 가리켰다.

    “상급 이상의 연공법이라고 해도 7개월 만에 오러를 만들었다는 건 저놈에겐 재능이 없다는 뜻이야. 같이 판별식을 치렀으니, 네가 가장 잘 알지 않아?”

    “으음….”

    버렌이 인상을 찌푸리다가 입매를 내렸다.

    ‘확실히….’

    자신도 최상급의 오러 연공법을 2주일 만에 익혔었다. 아무리 대단한 연공법이라고 해도 1성을 습득하는데 반년 넘게 걸린 건 문제가 있었다.

    “저 녀석에게 검술이나, 권법 재능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뿐이야. 오러에 재능이 없다면 아무 의미도 없어.”

    “으음.”

    “맞는 말이긴 하지”

    “이름난 무인 중에 오러가 약한 사람은 없으니까.”

    마르타의 말에 동의하듯 수련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관님이 갑자기 대련하겠다는 것도 수석을 바꾸고 싶어서 아닌가요?”

    “글쎄?”

    리메르는 눈썹과 어깨를 동시에 으쓱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네 능력치고는 수석 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잖아. 널 따르는 아이도 없…. 아니. 몇 명뿐이니, 이제 그 자리를 내놓을 때가 된 것 같은데?”

    마르타는 라온의 뒤에 있는 도리안과 몇몇 수련생들을 힐끔 보고서 픽 웃었다.

    “전에 말이 나왔던 대로 대련에서 이긴 사람이 수석 수련생의 자리를 갖는 걸로….”

    “싫다.”

    라온은 마르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을 고개를 저었다.

    “뭐?”

    “넌 돈도 없이 도박판에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수석의 자리를 건다면 너도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꺼내.”

    “너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여기에 네 편은….”

    “겁나?”

    라온이 턱을 살짝 틀며 미소 지었다. 마르타가 보여준 것보다도 더 진한 비웃음이었다.

    “겁? 지금 나한테 한 말이야? 하! 좋아. 네 마지막이 될 도발 정도는 받아주지.”

    마르타가 피식 웃었다. 검은 눈동자에 짜증을 휘감으며 품에 있던 작은 목갑을 꺼내 놓았다.

    “아버지께서 내어주신 영약 구화단이야. 대련에서 네가 이긴다면 이걸 주지.”

    구화단은 아홉 가지 약초를 모아 만든 영약으로 육체와 오러를 강화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라스. 지금이 내가 예전에 말한 순간이다.’

    -그게 무슨 말이지?

    ‘마르타에게 뽑아먹을 게 생길 거라고 했지? 그게 지금이라고.’

    마르타에게 저 영약이 있다는 건 수다쟁이 도리안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구화단이면 적당하지.‘

    라온이 구화단이 든 목갑과 도발에 넘어간 마르타를 보며 가는 미소를 지었다.

    무조건 이기는 내기의 상품으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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