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뿌득!
라온이 이를 악물었다.
‘라스!’
무아지경에 도달하여 오러를 만들기 직전에 방해를 받자, 뭉치려던 오러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크읍!’
정신을 집중해서 사그라지려던 만화공의 오러를 응집시켰다. 억지로라도 오러를 안착시키려 할 때 서늘한 한기가 몰려들었다.
-말했잖느냐.
라스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어렸다.
-본왕은 네가 가장 약해진 순간을 노릴 거라고.
‘크으….’
그 말이 맞았다.
라스는 가장 위험한 순간에 공격을 들어올 거라 경고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순간을 예측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무아지경에 빠지면서 놈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이제 시작이다!
라스가 막대한 냉기를 폭발시키며 달려들었다. 식은땀조차 얼려버릴 서늘함에 이빨이 덜덜 떨렸다.
뼈가 얼어붙는 듯한 고통에 당장 눈을 뜨고 싶었지만 지금 움직였다간 마나가 역류하여 폐인이 될 수도 있었다.
‘이놈….’
한동안 조용해서 잊고 있었지만, 라스는 같은 편이 아니다. 악마. 그것도 마계의 왕이다. 육체를 망가뜨려서 영혼을 먹어 치우려는 것 같았다.
후우우욱!
라스의 냉기가 점점 더 독해지자, 숨죽인 듯 가라앉았던 마나 회로의 냉기까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으윽….’
비명이 입을 뚫고 흘러나왔다. 뼈와 피부가 쪼개지는 느낌이다. 차디찬 냉기와 분노의 감정이 정신까지 좀먹기 시작했다.
-끝났다.
라스의 서늘한 목소리에 분노가 아닌, 희열이 차올랐다.
-이제 네놈의 육체와 영혼은 본왕의 것이다.
놈의 말대로 전신에 시리고 시린 냉기가 차오른다. 통증을 넘어 감각이 사라져간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크으!’
라온이 혀를 깨물었다. 통증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잠시 정신이 들었다.
‘생각해라. 생각!’
라스의 냉기가 이미 전신을 뒤덮었다. 이대로라면 놈에게 몸이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만화공을 멈출 수도 없어.’
지금 와서 불의 고리를 운용해도 늦었다. 고리가 회전하기 전에 라스의 냉기가 몸과 정신을 집어삼킬 테니까.
‘살아날 구멍을 찾아야 해.’
끊임없이 만화공을 휘돌리며 버텼다. 그야말로 동아줄 하나로 절벽에 매달린 상황이었다.
-포기해라. 네놈의 육체는 이미 본왕에게 넘어갔으니까.
‘그거야 해봐야 아는 일이지.’
-불필요한 노력이다. 매일 숯가마를 태우는 저 노인네처럼.
‘숯가마…. 숯가마!’
있었다. 살아날 방법이.
꾸욱!
라온이 주먹을 바드득 말아쥐면서 마지막 힘을 다해 마나를 끌어당겼다.
고오오오!
숯가마의 열기에 데워진 자연의 마나가 아니라, 숯가마 내부의 마나를 빨아들였다.
-네놈. 무엇을 하는 것이냐!
‘발악!’
그래. 이건 발악이다. 아무것도 못 하고 죽는 건 전생으로 충분하다. 이번 생은 절대 허무하게 죽지 않는다.
쿠구구구!
단단한 진흙으로 굳힌 숯가마의 천장에서 낙엽이 바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 멈춰라!
‘끄윽!’
라스가 뿜어내는 냉기가 강해졌다. 피부를 넘어 뼛속까지 얼려버릴 위력. 이제 팔과 다리에선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악으로 버티며 마지막 숨을 들이마셨다.
퍼어억!
대지가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열기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숯가마 내부에서 터져 나온 불꽃이었다.
후우욱!
라온은 단숨에 그 열기를 빨아들였다. 태어나서 처음 호흡했던 그때처럼.
코와 입만이 아니라, 전신의 모공으로 받아들인 열기가 몸 전체를 잠식한 냉기를 밀어낸다. 압도적인 화력. 용암이 혈관을 질주하는 듯했다.
화아아아!
노도와 같은 열기에 라스의 냉기들이 봄눈처럼 녹아내렸다.
-이, 이게 무슨!
‘꺼져라. 라스!’
라온은 입술을 짓씹으며 만화공을 운용했다. 마나 회로에서 녹아내린 막대한 냉기까지 끌어당겨 단전으로 이끌었다.
고오오오!
꺼져 가는 아궁이의 불씨 같았던 만화공의 기운이 숯가마의 열기를 받아 뚜렷한 형상을 만들어 냈다.
우우웅!
그게 전부가 아니다.
완벽하게 형성된 만화공의 오러 바로 옆에 새하얀 기운이 유리구슬처럼 응집되었다. 마나 회로를 채웠던 혹한의 냉기였다.
-이, 이런 젠장!
‘후욱….’
라온은 라스의 분통 어린 비명을 흘려들으며 대기에 퍼진 열기와 육체 내부의 냉기를 모조리 갈무리했다.
극한의 집중력. 그는 라스의 방해를 이겨내고 두 번째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 * *
“후!”
발칸이 아궁이에 장작을 집어넣으며 탁한 숨을 뱉어냈다.
치이이익!
순식간에 불이 붙어 진한 불길을 일으키는 아궁이를 보자, 옛 기억이 떠오른다.
‘벌써 30년이 됐나.’
30년 전에 만든 마지막 걸작 진천검. 인생 최고의 명검인 진천검을 글렌 지그하르트에게 바치고서 자신의 삶은 막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바쳐도 다 쓰지 못할 재물도 있으니, 남은 삶을 즐기겠다고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불 앞에 앉아 있었다.
일찍 일어날 필요도, 용광로에 불을 지필 필요도 없지만,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공방으로 향했다.
멈췄지. 아주 단단히.
자신의 시간은 아직도 진천검을 만들었던 그 시절에 멈춰 있었다.
‘끊어내질 못하겠군.’
많은 검을 만들었고, 지그하르트에 큰 공헌도 했으며, 가주이자, 대륙 최강자 중 한 명인 글렌은 자신의 검을 사용한다.
이대로 은퇴해도 역사에 이름이 남겠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망치를 놓지도, 불에서 멀어지지도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유는 하나.
계속 일을 하고 싶어도 글렌에게 바친 진천검을 넘어서는 작품을 만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어설프게 불을 지피고, 망치를 들었지만, 돌아오는 건 허무함 뿐이었다.
‘그래서 이 가마를 만들었지.’
십여 년 전부터는 이 숯가마를 만들어서 숯을 생산했다. 흑탄과 백탄을 넘어서는 금탄을 만들기 위해서.
그 특별하다는 숯이 있으면 더 좋은 검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진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전설과 소문을 종합해서 수많은 방법을 사용했지만, 금탄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유일한 집착이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을 태우고 있을 때 그 아이가 찾아왔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 녀석은 처음 만난 그날부터 아궁이의 불씨와 호흡했다. 십수 년간 멈춰 있던 불꽃이 맹수처럼 이를 드러내고 타올랐다.
처음이었다.
화염이 반응한 것도, 화력이 올라간 것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무언가가 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라온에게 곁을 허락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여긴 불지옥이니까.’
이 가마가 내뿜는 열기는 산전수전 다 겪은 장인들도 피할 만큼 지독했다. 처음에 돕겠다며 찾아온 장인들도 며칠 견디지 못하고 슬금슬금 사라졌다.
하지만 아이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입술을 깨물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매일매일 찾아와 가마 앞에 주저앉았다.
처음엔 바닥에서 피어나는 열기에 연공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보였다. 둘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열기에 덜덜 떨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사흘, 나흘, 일주일, 한 달 그리고 세 달.
라온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숯가마에 찾아왔다.
그리고 오늘.
라온의 들숨과 날숨에 호응하듯 아궁이 속 불씨가 거세게 타오르고, 가마의 열기가 곱절 수준으로 강해졌다.
후우욱!
그는 불의 화신이 된 듯 이 공간의 불길을 지배했다.
‘이건!’
발칸은 이 순간이 자신에게 찾아온 중요한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새로운 숯을 만들어 내는 것만이 아니라, 다시 한번 장인으로서 살 기회.
“후우욱!”
온 정신을 집중하여 아궁이에서 타오르는 불길의 화력을 유지 시켰다. 불고, 부치고 불꽃을 키울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반복했다.
불씨가 살아 숨 쉰다.
중앙에 자리 잡은 투명한 불꽃이 탁하고 흐릿한 불길을 지워내며 더 짙은 화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숯가마에서 퍼지는 열기에 땀을 흘려야 할 라온의 전신 위로 서리가 내려선 것이다.
‘뭐지?’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냉기가 퍼진 곳은 오직 라온의 육체뿐이었다.
그 냉기는 점점 그의 전체에 퍼졌고, 결국에는 금빛 머리카락마저 얼어붙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라온의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좋지 않은 상태라는 건 알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때 건드려선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저대로 놔두었다간 죽을 것 같았다.
“이, 이봐! 너….”
“안 돼.”
발칸이 라온을 깨우기 위해서 손을 뻗으려고 할 때 리메르가 나타났다. 그야말로 바람 같은 움직임이었다.
“리메르! 뭐 하는 거냐! 저놈 저러다 죽겠어!”
“지금은 방법이 없어.”
리메르가 고개를 저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 더욱 심하게 떠는 라온을 바라보았다.
“외부에서 조금만 충격을 줘도 피를 토하고 죽게 될 거야.”
“저게 전에 말한 그 냉기인가?”
“그래. 저 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저런 냉기를 몸에 가지고 있었어.”
“그런….”
발칸이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저 어린놈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가 아궁이의 열기마저 지워버릴 정도로 지독한 냉기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 안쓰러웠고, 지금까지 버텨왔다는 것이 대견스러웠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나?”
“없어. 무엇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위험해.”
리메르의 표정도 평소와 달리 심각했다. 주먹을 말아 쥔 채로 라온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점점 라온의 몸을 덮어가는 냉기를 지켜보았다.
“이, 이대론 정말 죽겠어! 뭐라도!”
“잠깐! 라온이 움직였다!”
리메르의 표정에 희망이 깃들었다. 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라온을 바라보았다.
“뭐? 그게 무슨…어?”
발칸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숯가마를 태우는 아궁이의 불길이 갑자기 격해졌다.
쿠구구구!
불길은 아궁이 밖으로 뿜어져 나와 숯가마 전체를 휘감았다. 진흙으로 밀폐시켜놓은 숯가마가 터지며 무시무시할 정도의 열기가 허공을 뒤덮었다.
콰아아아아!
막대한 열기에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흐읍!”
대륙 장인으로서도 겪어 본 적 없는 열기에 몸을 숙였지만, 그 뜨거움은 순식간에 가셨다.
고오오오!
열기가 나선으로 회전하며 라온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어마어마한 열기가 응집되며 그의 전신을 덮은 냉기가 녹아내렸다.
화아아!
라온의 육체 위로 새빨간 불꽃이 타올랐다. 아니, 빨간색 불꽃이 아니다.
금빛.
동쪽의 산을 넘어 떠오른 금색 여명에 물든 황금색 불길이 피어났다.
라온은 금색 불꽃에 휩싸인 상태에서도 연공을 멈추지 않았다. 이 주변만이 아니라, 북망산 전체의 열기를 모조리 받아들였다.
우우웅!
태양이 그 웅장한 서광을 완전히 드러내고, 쏟아지던 빛이 아스라이 옅어질 때 라온이 두 눈을 떴다.
번쩍!
그 눈을 마주한 발칸이 마른침을 삼켰다. 발끝에서 시작된 전율이 뇌리를 꿰뚫었다.
진한 금광.
여명의 빛을 담아낸 황금의 불길의 그의 눈동자에서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