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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8화 (28/653)

28화

마르타의 수련검이 초여름의 선선한 공기를 가른다. 예리하면서도, 부드러운 연계. 지그하르트의 기본 검술 중 하나인 연성검이었다.

후우웅!

그녀는 전장의 한복판에 선 것처럼 살벌한 눈빛으로 검을 내리쳤다. 그 강렬한 기세에 연무장에서 피어오른 모래조차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후우웅!

그런 마르타의 우측에서 비슷한 검풍 소리가 들려왔다. 금발적안의 소년. 라온 지그하르트였다.

그의 뭉툭한 수련검은 마르타와 똑같이 연성검의 초식을 펼쳐내고 있었다.

한참 뒤떨어졌던 라온이 결국 마르타를 따라잡은 것이다.

하지만 그걸 지켜본 마르타의 얼굴엔 예전 같은 초조함과 긴장감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라온에게 박수를 보냈다.

“잘하네.”

마르타가 수련검을 내려놓으며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무학을 배우는 속도는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야. 그런데….”

그녀는 말을 살짝 끌며 손가락을 돌렸다.

“마나 감응력이 그따위라면 돼지 목에 진주나 다를 바가 없지. 그런 반쪽짜리 재능은 별로 부럽지가 않네.”

마르타의 목소리는 컸다. 수련생 모두가 그 말을 들었지만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차라리 오러와 무학에 대한 재능이 반씩 있는 게 낫지. 네 재능으로 할 수 있는 건 검술 교관 정도일까?”

라온에게 도움을 받은 수련생도, 버렌도, 옆에 서 지켜보던 리메르와 교관들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마르타가 더욱더 진한 비웃음을 흘렸다.

‘저 멍청이가 4달 동안 오러를 익히지 못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테니까.’

오러 수련이 정규 훈련에 들어간 지 4달이 넘었지만, 라온은 오러를 익히지 못했고, 그의 단전은 빈털터리였다.

‘처음엔 식겁했지.’

어마어마한 속도로 발전해 나가는 라온을 보며 진심으로 경악했다.

어마어마한 재능이 쫓아오는 공포에 잠조차 설칠 정도. 매일 새벽부터 밤까지 수련해도 그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카멜의 말을 듣고 난 이후로 모든 게 바뀌었다.

‘정말 반쪽짜리였어.’

라온이 판별식에서 최악의 마나 감응력을 보여주었다고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연공을 시작하고 4달이 지난 오늘까지도 단전에 오러를 만들지 못했다.

검술이나 권법을 아무리 잘 배우고, 익히면 무엇을 하겠는가. 그 주먹과 검에 담겨야 할 힘이 없는데.

“후후.”

마르타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검을 휘두르는 라온을 비웃으며 턱을 틀었다.

‘신경 쓸 가치도 없었어.’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아니다. 라온은 버렌이나, 루난은커녕 겁쟁이 도리안 수준도 되지 않았다.

다만 라온에게 반격을 당했던 건 아직 머릿속에 꽉 박혀 있었다.

‘이제 잊어도 되겠네. 오러를 쓰는 대결에선 상대조차 안 될 테니까.’

마르타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았다.

“응?”

루난 슬리온이 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가.”

“할 말은 그것뿐?”

“가.”

“재촉하지 않아도 갈 거야. 수준 높은 수련을 할 시간이거든.”

부드럽게 손을 흔들어주고, 연무장을 떠났다.

후웅!

마르타가 한껏 조롱하고 떠났지만, 라온은 반응하지 않았다. 입에서 하얀 김을 뿜어내며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의 빨간 눈동자에 비치는 건 오직 검뿐이었다.

*     *      *

라온은 야간 수련까지 끝낸 뒤 실내 단련장을 쭉 둘러보았다.

‘다 돌아갔나.’

내일부터 이틀간 휴일이라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훈련장에 남아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후….”

라온은 들뜬 숨을 내쉬며 검을 내려놓았다.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검술에만 집중했더니, 밤이 된 줄도 몰랐다.

암살하기 직전의 집중력과 같은 수준. 수련할 때 발휘하기 어려운 극한의 집중력이었다.

‘검술이 꽤 늘었는데.’

검에만 집중한 덕분에 연성검의 성취가 꽤 올라갔다. 조금만 더 익히면 실전에서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을 거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거냐!

오늘 수련에 만족하고 있을 때 분노로 가득 찬 라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도발 당하고도 가만히 있다니. 한심한 놈!

‘도발?’

-그 검은 머리 계집이 계속 주절거렸지 않느냐!

‘아, 그랬어?’

라온이 픽 웃었다. 수련에 집중하느라, 마르타가 떠드는 것도 몰랐다.

-본왕에게 그따위 말을 주절거렸다면 전신을 얼린 뒤 갈기갈기 깨부숴버렸을 거다!

‘전에도 말했잖아. 지금은 싸워봐야 이득이 없다고.’

지금 도발에 넘어가서 싸워봐야 마르타에게 뽑아 먹을 게 없다.

수석 자리를 걸고, 그녀에게 내기를 걸어 영약이나, 무학서 하나라도 챙기는 게 훨씬 낫다.

‘어차피 뭘 해도 이길 수 있으니까.’

만화공을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도 마르타 같은 애송이를 이기는 건 간단하다. 그녀에게 괜찮은 보물이 들어왔을 때가 싸움을 걸 때다.

‘일단 돌아갈까.’

라온이 정리를 끝내고 단련장의 마법 등을 끄려고 할 때 문에서 작은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탁.

작고 가벼운 발소리. 매일 들어서 알 수밖에 없는 루난의 걸음 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보라색 눈동자를 반짝이는 루난이 서 있었다. 평소처럼 맹한 눈이 아니었다.

“자.”

그녀가 뒤로 숨기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벽돌보다 조금 작은 상자였다.

“이게 뭔데?”

루난은 대답하지 않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뚜껑과 함께 솟구친 새하얀 냉기 아래 엄지손가락만 한 구슬이 하나 있었다.

“어….”

라온은 상자에 든 구슬과 루난의 보랏빛 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거 가져가라고?”

“응.”

루난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상자에 담긴 구슬을 손에 올려주었다. 손바닥 위로 기분 좋은 시원함이 올라왔다.

“먹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뭐지?’

이게 뭔지 모르겠다. 다만 저렇게 냉기가 모여 있는 상자에 보관하고 있는 걸 보면 귀한 게 분명했다.

“음….”

암살자의 삶에서 배운 대로라면 먹지 않아야 하지만, 루난의 눈동자에 담긴 기대감에 손이 움직였다.

“후….”

이 녀석이 이상한 걸 주진 않겠지.

눈 딱 감고 구슬을 입에 넣자, 혀끝에서 바로 녹아내렸다. 초콜릿을 얼린 듯한 시원한 단맛이 입안 전체를 휘감았다.

“허….”

헛웃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시원하고 달콤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이런 맛이 있다니!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도 느껴본 적 없는 단맛이다! 아니, 시원함 때문에 단맛이 올라간 건가? 더, 더 가져와라! 더 먹어보고 싶다!

감각을 연결했었는지 라스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펄쩍펄쩍 뛰었다.

‘좀 가만히 있어.’

라온은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라스를 팔꿈치로 밀어냈다.

“어때?”

“마, 맛있네.”

“구슬 아이스크림이야.”

루난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선 그대로 단련장을 나갔다.

“어? 야!”

손짓하며 불렀지만, 루난은 돌아보지 않았다.

-…별종이로다. 근데 하나만 더 줬으면 좋았을 것을.

‘걱정해준 건가.’

루난은 오늘 마르타가 대놓고 조롱한 것을 걱정해서 구슬 아이스크림을 준 것 같았다.

별관에서 가끔 아이스크림을 먹어보긴 했지만, 이런 형태와 맛은 처음이었다.

상자의 크기를 보았을 때 끽해야 아이스크림 4개가 들어가 있었을 텐데, 그중 마지막 하나를 건네준 모양이다.

‘마지막 남은 걸 주다니.’

루난은 아이답게 단 음식을 굉장히 좋아한다.

마지막 남은 아이스크림에 집착을 가질 만도 한데, 망설임 없이 건네다니 보통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아껴둔 간식을 들고, 우물쭈물하는 루난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 참.”

라온이 픽 웃었다. 저런 아이까지 걱정하게 만든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해졌다.

‘근데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정말이다.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은 누구보다도 높고, 험난한 길. 그리고 만화공은 그 길을 더 쉽게 걸어가게 해줄 길잡이다.

그런 뛰어난 길잡이가 쉽게 힘을 빌려줄 리가 있겠는가.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나중에 보답 좀 해야겠네.’

라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훈련장을 나왔다. 지쳐있던 발걸음이 풀잎처럼 가벼워졌다.

*     *      *

“세상에! 라온 도련님!”

라온이 별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입구에 서 있던 헬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가왔다.

“웬일이세요?”

“라온이 왔다고?”

헬렌의 목소리를 들은 실비아가 방문을 걷어차고 달려와 라온을 부둥켜안았다.

“이게 얼마 만이야! 몇 달째 찾아오지도 않고!”

“지난주에 봤잖아.”

라온이 볼을 비비는 실비아를 밀어냈다. 수련생이 된 이후엔 주말 면회가 가능했기 때문에 실비아는 일주일마다 숙소로 찾아왔었다.

“그거랑 이건 다르지!”

실비아는 허공을 내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밥 안 먹었지? 금방 준비할게. 헬렌!”

“도련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실비아는 시녀들을 데리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울리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비프스튜를 해주려는 것 같았다.

뭐라고 할까.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별관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전생에 없던 진짜 집이 이러할까.

“빨리 만들어! 라온이 배고플 거라고!”

“알겠어요! 근데 재료가….”

“일단 있는 거 다 때려 부어!”

라온은 주방에서 들려오는 정겨운 소리를 들으며 욕실로 향했다.

*     *      *

다음날 새벽.

주디엘은 라온의 방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라온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손에 쥔 종이를 툭툭 쳤다. 이전에 호수에서 찾아냈던 달빛 종이와 같은 물건이다.

“고개를 들어라.”

엄숙한 목소리에 주디엘이 몸을 떨며 머리를 들어 올렸다.

“중무전에서 내려온 이야기는?”

“따, 딱히 없습니다. 이전에 도련님이 권법과 검술을 익히는 속도가 빨라서 더 자세히 조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오러를 익히지 못한 지금은 관심이 멀어진 것 같습니다.”

“역시 그런가.”

라온이 빙긋 웃었다. 오러는 모든 무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 그 재능이 뒤떨어지는 자신에게 관심이 떨어진 것 같았다.

“어머니에 대한 건?”

“실비아 님에 대한 관심도 줄어든 것 같습니다. 이대로라면 제가 철수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철수하면 좋지 않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아니다.

‘이용할 구석이 사라지지.’

주디엘을 이중 첩자로 만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건 좋은 흐름이 아니었다.

“저, 저기 혹시 지금까지 일부러 오러를 익히지 않으신 건지….”

주디엘이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뗐다.

“글쎄.”

라온은 답을 해주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그것만으로 주디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도 그날의 공포가 그녀를 지배하는 것이다.

“수고했다. 나가보도록.”

“예, 예!”

주디엘은 눈동자를 떨며 일어섰다. 공포와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기뻐하며 빠르게 문을 열고 나갔다.

-누가 들으면 일부러 익히지 않은 줄 알겠군.

‘분위기와 상황을 잘 이용하는 것도 능력이지.’

라온이 손목에 매달린 라스를 툭 쳤다. 주디엘은 알아서 착각하고 자신의 존재감과 공포를 더욱 키울 거다.

-오러를 익히는데 그렇게 힘들어하다니 한심하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는 한 번 배운 마법과 무학은 눈을 감고도 행할 수 있었지.

‘그러게 참 한심하네.’

라온은 여유롭게 대답하며 방을 나갔다. 마음이 여유롭기에 라스의 놀림도 웃어넘길 수 있었다.

“음?”

새벽 단련을 위해서 정원으로 가려 할 때 멀리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 붉은색 머리칼에 기분 좋은 바람을 몰고 다니는 엘프. 리메르였다.

“교관님?”

“잘 잤어?”

리메르는 새집이 지어진 머리를 한 채로 손을 흔들었다.

“새벽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예전에 약속한 거 못 지켰잖아. 그게 미안해서 조금 도움을 주려고.”

“약속이요?”

“권법 수련 첫날 진승권을 알려준다고 하고 도망갔잖아.”

“아!”

“그건 이미 늦었으니, 다른 교육을 해줄게.”

그는 씩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 진녹색 바람이 치솟았다.

“네게 속성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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