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라온이 만화공을 익히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새벽과 저녁에 이어 밤에도 연공을 지속했지만, 오러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특별한 연공법은 무엇보다 강한 위력을 지닌 만큼 습득 난이도도 상상을 초월했다.
물론 마나 회로 내부의 냉기를 함께 운용하기에 성취가 더딘 것도 있었지만.
‘천천히 하자.’
연무장 중앙에 선 라온이 덤덤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불의 고리가 있으니까.’
불의 고리가 있는 이상 육체와 마나적인 재능은 언젠가 끝까지 차오른다. 지금은 조급하게 발을 내디딜 때가 아니라 더 단단하게 토대를 다질 때다.
터엉!
정규 훈련 시간이 되자마자, 연무장 문이 시원하게 열리고 리메르가 들어왔다. 웬일로 지각이 아니었다.
“오늘부터 오전 시간에는 무학을 배운다.”
“오오!”
“우와아아아!”
“드디어!”
“검술이다! 검술!”
아이들은 손을 들어 올리며 왁왁 소리를 질렀다.
수련생들은 시험에 합격한 이후에도 한 달 동안 체력 단련만 해왔다. 저런 환호가 나오는 건 당연했다.
“대륙에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떨친 건 검술이지만, 권법도 그에 못지 않다. 지금부터 기본 권법의 형태를 보여주겠다.”
리메르는 보여주겠다고 말해놓고 단상에 드러누웠다.
“숙련된 조교 앞으로.”
그가 하품하며 손짓을 하자, 뒤에 있던 교관이 앞으로 나와 권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칠형권이군.’
일곱 가지 형태를 갖춘 권법이자, 모든 권법의 기본이 되는 주먹질이었다.
형을 알고는 있지만, 익힌 적은 없었다. 전생에서 내뻗은 손은 항상 적을 단숨에 죽이기 위한 칼날이었으니까.
“아, 칠형권….”
“저건 이미 아는데.”
“에휴, 지겹겠네.”
칠형권을 본 아이들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익혔던 권법이라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지루한 표정들이네.”
리메르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너희 중에 칠형권을 미리 배워온 녀석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니 제대로 익혔다는 걸 확인하면 바로 다음 진도로 나갈 수 있게 해주마.”
“다음 진도? 그게 무슨 말이에요?”
겁은 많은 주제에 궁금한 게 많은 도리안이 손을 들어 올렸다.
“너희는 같은 수련생 신분이지만, 같은 수준은 아니다. 즉, 똑같은 교육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내가 정한 선을 넘기만 한다면 바로 다음 단계로 보내주마.”
리메르는 지난 수련 방식은 너무 고루한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좋네. 마음에 들어.”
마르타 지그하르트가 방긋 웃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또 지루한 칠형을 배울 줄 알았는데, 이게 맞지. 뛰어난 인간이 뒤떨어지는 인간에게 맞춰 줄 필요는 없잖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만. 어쨌든 지금부터 각자의 자리에서 방금 보았던 칠형권을 재현해라. 말했듯이 내 마음에 들면 바로 다음 수련을 시작하게 해주마.”
리메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이 칠형권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기초가 잘 잡혀있군.’
라온은 주변에서 칠형권을 펼치는 아이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괜히 명가가 아니야.’
기본이라 어설프게 배우고 넘어갔을 줄 알았지만, 아이들은 정확한 방향과 힘을 가지고 주먹을 뻗어내고 있었다.
“흠, 역시.”
리메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타 지그하르트, 버렌 지그하르트, 루난 슬리온,….”
그가 제대로 된 칠형권을 선보인 수련생의 이름을 부르자, 중앙에 남은 인원은 20명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붉은 눈동자를 빛내는 라온 지그하르트도 있었다.
* * *
“흠.”
리메르는 라온 지그하르트가 펼치는 칠형권을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모르고 있었군.’
그의 주먹질은 제대로 된 형이 잡혀있진 않은 날것이었다. 실비아에게 들었던 대로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모양이다.
다만 라온은 버렌이 사용한 공호권의 흐름을 따라 한 적이 있으니, 며칠 안에 완벽하게 숙달할 수 있을 거다.
‘다른 아이들도 좀 볼까….’
라온에게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글렌에게 주의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도 제대로 살폈다.
‘나쁘지 않군.’
추천을 받아서 들어온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눈과 육체가 뛰어났다. 저 아이들도 금세 칠형권을 익혀서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역시 경쟁이 좋다니까.’
이건 오래달리기나 마찬가지다.
앞서 나아가는 아이들은 후위 아이들에게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뒤의 아이들은 선두를 따라잡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훈련의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럼 다음으로.’
리메르는 칠형권을 통과한 마르타와 버렌, 루난을 비롯한 수련생들을 살폈다.
마르타는 2단계에서 배워야 할 권법까지 완벽하게 익혔기에 3단계 벽력권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당연하겠지.’
마르타가 중간에 낙제하긴 했지만, 그건 실력이 아니라 성격 때문이다. 저 아이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다른 수련을 준비해 주어야 할 것 같다.
물론 거친 성격을 조금 유하게 만들 방법도 같이 생각해 보고.
‘저쪽도 잘하고 있네.’
버렌과 루난도 2단계에서 배우는 진승권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저 둘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3단계 벽력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다.
리메르는 드러누운 채로 노트에 아이들에 대한 정보를 적었다.
‘자, 그럼 다시…어?’
연무장의 아이들을 모두 훑어본 뒤 다시 라온에게 향한 리메르의 동공이 출렁였다.
‘뭐야….’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한 이 짧은 순간에 라온 지그하르트의 권로에 칠형권의 형태가 새겨지고 있었다.
‘이게 말이 돼?’
리메르는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라온은 마르타, 루난, 버렌과 다르다. 분명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건만 지금은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칠형권이 아무리 기본 권법이고, 따라 하기 쉽다고 해도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눈에 띄게 성장을 하는 건 말이 되질 않는다.
‘뭐 이런 괴물이….’
마나 운용 능력에 놀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무학 습득 능력에 경악하게 되었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후.”
라온이라고 특별취급을 할 생각은 없었다.
권법의 기본을 확실하게 다진 뒤 다음 단계로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 순간이 굉장히 빠르게 다가올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내일 아니. 오늘 저녁일지도….’
* * *
마르타 지그하르트는 경쾌하게 주먹을 내지르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 교관들은 마음에 드네.’
지금까지 뒤떨어지는 놈들을 기다려왔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다.
재능 있는 사람은 위로 올라가고, 재능 없는 사람은 그 발판이 되는 게 옳은 방식이었다.
좌측으로 시선을 돌리자, 칠형권을 배우는 아이들이 보인다.
자신이 저걸 익힌 건 2년 전. 이제야 저 권법을 배우는 아이들이 자신을 따라오는 건 평생이 걸려도 불가능하다.
저들이 칠형권을 익힌 뒤 2단계에 도착했을 때 자신은 벽력권을 끝내버리고 검술을 시작하고 있을 테니까.
‘저 녀석도 있군.’
마르타는 중앙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라온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라온 지그하르트.’
지독한 냉기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스스로 훈련에 참여한 후 결국 수석을 따낸 별종.
한 달 전 자신의 기습을 막았을 때를 생각해 보면 감각도 움직임도 뛰어났었다. 재능있는 녀석이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
13살이 되어서야 오러를 익히고, 권법을 시작한다는 건 출발 신호가 울리고 한참 뒤에 달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녀석이 날 따라잡을 일은 없겠군.’
자신의 오러는 이미 3성의 경지에 올랐고, 권법만이 아니라 검술들도 섭렵한 상태다.
어렸을 때부터 수련을 시작한 버렌이나, 루난이면 모를까. 라온은 경쟁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그저 발판이지.’
라온 지그하르트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낮은 발판에 불과했다.
“흥.”
마르타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라온에게 관심을 끄고, 벽력권의 수련에 정신을 집중했다.
해가 질 때까지 벽력권의 성취를 올리고 있던 마르타의 옆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아가씨. 직계 수련을 할 시간입니다.”
그녀의 집사인 카멜이었다.
“알겠어.”
마르타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뒤를 돌았다. 다른 아이들은 아직도 수준 낮은 권법을 수련하고 있었다.
“한심해.”
“라온 지그하르트.”
그들을 비웃으면서 돌아가려고 할 때 리메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합격이다. 다음으로 가도록.”
바람을 탄 듯한 가벼운 음성에 뒤를 돌았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마르타가 눈을 부릅떴다. 하루. 아니, 고작 반나절 만에 칠형권을 완성 시켰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나도 4일이 걸렸는데.’
천재적인 재능 덕분에 지그하르트에 입양된 자신조차 4일이 걸려서야 칠형권을 익혔다.
저 발판 놈이 고작 반나절 만에 그 경지에 올랐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럼 다음 권법을 알려주시죠.”
“이미 해가 졌잖냐. 귀찮으니까. 내일 하자.”
“귀찮다니 교관이 할 말이 아니….”
“잠깐.”
마르타가 대화 중인 라온과 리메르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교관님. 지금 저 녀석이 합격했다는 건가요? 오늘 배운 칠형권을?”
“그래.”
리메르가 녹색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다고 너무 대충 통과시키는 거 아닌가요?”
“대충?”
“칠형이 아무리 기본 권형을 담고 있다고 해도 각을 잡으려면 꽤 시간이 걸려요. 저 녀석이 그 각을 반나절 만에 완성했을 리 없을 텐데요.”
“당연히 완성은 아니지. 다만 진승권으로 넘어갈 수준은 돼.”
“하, 그 수준이 너무 낮다는 겁니다.”
“흐음….”
리메르는 턱을 긁적이다가 라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는데? 라온. 한 번 보여줘.”
“싫습니다.”
라온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 이미 교관님의 통과 선언을 들었는데, 뭐하러 다시 해야 하죠?”
“너….”
“그럼 내일 알려주려고 한 진승권을 지금 알려주지.”
마르타가 나서기 전에 리메르가 먼저 입을 뗐다.
“후, 알겠습니다.”
라온이 작게 한숨을 쉬며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렸다. 호흡을 멈추고 주먹을 뻗어낸다. 묵직한 정권이 저녁 공기를 뚫었다.
발을 앞으로 내밀며 좌측 주먹을 내지른다. 꺾여 오는 방향이 흡사 부메랑과 같았다.
우측으로 회전하며 허리춤에 놓았던 오른 주먹을 후려친다. 경쾌한 바람에 마르타의 앞머리가 나풀거렸다.
그 뒤로 이어진 라온의 자세는 표홀하면서도 박력 넘쳤다. 그는 칠형권의 일곱 가지 형태와 기세를 정확하게 표현했다.
꿀꺽.
마르타가 마른침을 삼켰다.
리메르가 대충 넘긴 게 아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정말 반나절 만에 칠형권의 형과 의를 익혀냈다.
“너 미리 알고 있었지!”
“아니.”
라온은 뭔 헛소리냐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끄….”
할 말이 없었다. 아까 보았을 때 라온의 주먹질은 분명 초보자 수준이었으니까.
“어때 마르타. 이 정도면 인정할만하지?”
리메르가 자신을 놀리듯이 끌끌 웃었다.
“저걸 반나절 만에?”
“내가 뭘 본 거지?”
“와….”
“진짜 미쳤네.”
교관들과 아이들도 놀라웠는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그 정도는 나도 했어.”
마르타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서 등을 돌렸다. 입술을 깨물고 그대로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괜찮아.’
고작 칠형권이다. 검술도 아닌, 권법의 기초 중 기초. 저걸 조금 빨리 익혔다고 해도 자신을 따라잡는 건 무리다.
그래.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지.
마르타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직계 훈련장으로 향했지만, 머릿속엔 라온이 휘두른 주먹의 궤적이 깊게 남았다.
* * *
“어쩌라는 건지.”
라온은 손을 털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놀라서 그러는 거다.”
리메르는 연무장을 떠나는 마르타를 보며 픽 웃었다.
“사실 나도 놀랐어. 너 정도로 빠르게 습득하는 녀석은 처음 봤거든.”
“칭찬은 감사하지만, 다음 권법부터 알려주세요.”
“하, 그래야지.”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허리와 손목을 풀고서 하늘을 보았다.
“근데 라온.”
“네?”
리메르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불안감이 들었다.
“오늘은 너무 늦었다. 내일 보자!”
그는 바람을 불러일으켜 시야를 가린 뒤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재빠르고 단호한 움직임에 막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
-본왕이 전에 말했잖느냐. 저 뾰족귀는 뒤통수칠 관상이라고. 전장에서 네놈을 버리고, 홀로 도망칠 놈이니라.
언제부터 점쟁이가 되었는지, 라스는 리메르의 미래에 대해서도 늘어놓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어.’
라온은 입맛을 쩝 다셨다. 리메르의 반응을 보았을 때부터 저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버렌이 묵직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난 지금부터 직계만 받을 수 있는 훈련을 받으러 간다.”
알고 있었다. 저녁 이후 수련생들이 개인 단련을 하는 동안 직계들은 추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불합리하다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꺾을 거다.”
그는 잠시 라온을 노려보다가 연무장을 떠났다.
-저 건방진 눈깔은 여전하군. 언젠가 꼭….
‘아니, 달라졌어.’
라온이 버렌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한 달 전부터 버렌의 눈빛이 맑아졌다.
경쟁심은 여전했지만, 이전처럼 추한 짓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자박.
뒤에서 들린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루난이 맹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넌 안 가?”
“안 가.”
“가는 게 좋지 않나?”
“안 가.”
“강한 검술도 배우고….”
“안 가.”
루난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쯥.”
라온이 입맛을 다시고서 단련실로 향했다. 뒤에서 루난이 따라오는 걸음 소리가 사박사박하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