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5화 (25/653)

25화

마르타 지그하르트가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서 턱을 들었다. 거만한 눈빛. 단아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여기 터가 안 좋은 건가?’

라온이 연무장 바닥을 툭툭 찼다. 도리안이 경고를 해줬지만, 바로 시비를 걸어 올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정말이지 주변에 제대로 된 인간이 없다.

-뾰족귀보다, 파란 눈깔보다 건방진 놈이 나올 줄은 몰랐도다. 네 몸을 내놓아라. 본왕이 저 계집을 통째로 얼려버리겠다!

‘이럴 줄 알았어.’

마르타의 도발에 라스의 발작도 시작됐다. 느껴지는 분노의 폭을 보니, 평소보다 훨씬 격했다.

“흠.”

“마르타 지그하르트.”

어떻게 할까 생각할 때 옆에서 아이답지 않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품위 없게 지금 무얼 하는 거냐.”

버렌 지그하르트였다. 서늘한 눈빛으로 마르타를 노려보았다.

“앙?”

마르타가 입매를 구겼다. 명문가의 아이가 보여줄 만한 얼굴이 아니라, 어두운 세계에 발을 담근 인간들이 할 법한 표정이었다.

“지금 이 누님에게 한 말이야?”

그녀가 웃으며 버렌의 옆으로 다가갔다.

“주둥이 함부로 놀렸다간 그대로 뒈지는 수가 있어. 다음 말을 잘 고르는 게 좋을 거야.”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교관님과 가주님 앞에서 수석의 자리를 인정받았다. 넌 그걸 부정하겠다는 건가?”

버렌은 본인의 일처럼 나서서 마르타를 막아주었다.

“내가 알기론 너도 시험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난리를 쳤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르타의 입꼬리가 빙글 올라갔다. 선이 굵은 비웃음. 수석을 모른다고 한 것과 달리 시험 과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다.”

버렌의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시에 내가 보였던 추함을 또 보고 싶지 않아서 지금 네 앞을 막고 있는 거다.”

“어엉?”

“지그하르트의 이름에 먹칠하지 마라. 마르타 지그하르트.”

라온이 버렌의 등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저 녀석….’

버렌의 눈빛은 맑았다. 기 싸움을 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상황이 어지러지지 않게 막기만 하려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던 게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척!

마르타를 막으려는 사람은 버렌만이 아니었다. 루난이 라온을 지키려는 것처럼 앞으로 나왔다.

“너도 같은 생각이야?”

마르타가 루난과 버렌을 훑어보며 히죽 웃었다.

“가.”

루난은 뚱한 눈빛으로 짧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물러나라. 마르타.”

“내가 말했잖아.”

마르타의 눈이 번득였다.

“난 나보다 약한 놈의 말은 안 듣는다고!”

그녀의 주먹이 대기를 뚫어버리며 버렌에게 쏘아졌다.

후우웅!

오러까지 담긴 주먹이 버렌의 얼굴에 닿기 직전 녹색 바람이 치솟았다.

퍼엉!

단상 위에 있던 리메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나 마르타의 주먹을 막아냈다.

“너희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 내가 아무리 만만해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면 섭섭해.”

그는 빙긋 웃으며 마르타의 주먹을 밀어냈다.

“마르타. 넌 그 성질머리 때문에 낙제했다면서 아직도 그대로구나.”

“그건….”

“버렌이나, 루난은 몰라도 라온은 네 말대로 오러조차 익히지 않았어. 그래도 싸우고 싶어?”

“저도 오러를 쓸 생각 없어요.”

“그래도 같은 조건이 아니라는 건 잘 알잖아. 나중에 기회가 있을 테니까 오늘은 참아.”

“칫….”

마르타는 입을 삐죽이면서 한발 물러섰다. 다만 떠나지 않고 버렌을 노려보았다.

“버렌 지그하르트.”

“뭐지?”

“너희 형 나한테 얻어터져서 한 달 동안 누워만 있던 거 알고 있지? 건방을 떨려면 실력부터 키워.”

“난 형과 다르다.”

“그야 보면 알겠지.”

마르타는 가늘게 웃고서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루난과 버렌도 긴장을 풀고 옆으로 물러섰다.

그때.

마르타가 뒤를 도는 동시에 땅을 박찼다.

“난 건방진 놈들보다 남들 뒤에 숨는 겁쟁이가 더 싫어!”

순식간에 뛰어들어 라온에게 주먹을 내질러왔다.

“헉!”

“아!”

버렌과 루난은 반응하지 못했고, 리메르는 보고도 가만히 있었다.

‘역시.’

라온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등을 돌리면서 무게중심을 뒤쪽으로 놓았을 때 달려들 거라 예상했다.

타악!

가슴을 노리고 내달려온 마르타의 주먹을 손등으로 쳐냈다.

“어?”

“맞을 각오는 됐지?”

꽉 쥔 주먹을 내질렀다. 공호권의 회전이 담긴 주먹이 텅 빈 마르타의 복부를 향해 질주했다.

“헉!”

마르타의 눈동자에 당황이 어렸다. 이를 악문 그녀의 왼손에 갈색 기운이 어렸다.

터엉!

맨주먹과 오러가 담긴 팔뚝이 맞부딪치며 라온과 마르타가 동시에 밀려났다.

“오러는 쓰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라온은 빨갛게 달아오른 주먹을 툭툭 털어냈다.

“너, 너 뭐야!”

흑백이 뚜렷한 마르타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당당함만을 드러내던 그녀가 말까지 더듬었다.

“이야!”

“그, 그걸 막았다고?”

리메르가 낄낄 웃었고, 버렌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익!”

마르타가 갈색 오러를 전신으로 끌어 올렸다.

“거기까지.”

그대로 돌진하려고 할 때 리메르가 자세를 바로 하고 그 앞을 막아섰다.

“이 이상은 허가할 수 없어.”

웃고 있지만, 뿜어지는 기세가 날카롭다. 조금 전 장난을 칠 때와는 또 달랐다.

“하지만 전!”

“지금 오러 없이 싸워봐야 불완전 연소일 뿐이잖아. 나중에 라온이 오러를 익혔을 때 제대로 붙어봐. 그땐 허락해 줄 테니까.”

“후….”

마르타는 이를 갈며 라온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이번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나갔다.

“라온.”

리메르가 다가와 어깨를 잡았다.

“마르타의 공격을 어떻게 막았지. 꼭 미리 알고 있는 것 같던데.”

“무게중심입니다.”

라온은 별일 아니라는 듯 정답을 툭 던졌다.

“무게중심?”

반문은 버렌이었다. 루난 역시 궁금한 듯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그 여자 등을 돌려놓고서 무게중심은 앞이 아니라, 뒤에 맞췄습니다. 그 방향은 버렌도, 루난도 아니라 중앙인 저였죠. 무조건 달려들 거라 생각했습니다.”

“고작 그걸로….”

버렌은 답을 듣고 나서 오히려 인상을 찌푸렸고, 루난은 생각에 잠긴 듯 눈동자가 탁 풀렸다.

“흐음!”

리메르가 가벼운 탄성을 흘렸다.

‘역시 관찰력과 육체 능력은 대단하네.’

무게중심으로 상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즉시 반격하다니, 역시 보통 재능이 아니었다.

“…….”

버렌은 라온과 마르타가 맞부딪친 바닥을 쭉 살펴본 뒤 입술을 깨물고, 연무장을 떠났다.

“단단히 말해뒀으니, 한동안 귀찮게 하진 않을 거다. 대신 나중에 오러를 익히게 되면 마르타와의 싸움을 피할 수는 없겠지.”

“알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공호권의 회전은 아예 네 걸로 만들었네.”

라온이 마르타에게 날린 주먹엔 회전이 담겨 있었다. 반격 이상으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라온은 고개를 젓고서 뒤를 돌았다.

-지금 무엇을 한 것이냐. 본왕에게 주먹을 날린 계집을 그냥 보내다니! 사지를 찢고 만년빙하에 가두어야….

‘한 방 날렸잖아.’

-모자르다. 아예 머리통을 부숴놔야지!

‘이득이 없어.’

지금 이곳에서 주먹다짐을 해봐야 얻을 게 없다.

나중에 그녀에게서 얻을 게 있을 때 수석 자리를 걸고 내기를 하는 게 훨씬 도움 된다.

-크으으, 통째로 얼린 뒤 부숴버려야 하건만….

‘기다려. 더 시원한 모습을 보게 해줄 테니까.’

라온은 웃으며 연무장을 떠났다.

*     *      *

라온은 해가 뜨기 전에 연무장으로 나왔다. 혼자서 연공을 하고 싶었지만, 지시가 내려와서 어쩔 수 없었다.

수련생 대부분이 오러를 익히고 있었기 때문에 연무장에 나온 사람은 8명이었고, 전부 평민 출신 수련생이었다.

“도, 도련님.”

도리안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다가왔다.

“오, 오러를 익히다가 죽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정말일까요? 거기다 단전이 터질 것처럼 아프다는 말도 있고….”

그 말이 아예 잘못된 건 아니다. 실제로 좋지 않은 연공법을 익히다가 죽거나, 심하게 다치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물론 지그하르트에서 제공하는 연공법은 안정적이고, 주변에 뛰어난 교관도 있으니,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괜찮을 거다.”

도리안을 만날 때마다 하는 말을 읊어주었다.

“그, 그렇겠죠? 도련님이 말씀하시니까 좀 안정이 되네요.”

도리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호흡을 조절했다. 그리고 잠시 뒤.

“저, 정말 괜찮겠죠? 아무리 안정적이라고 해도 위험한 사람이 나올 수 있는데, 그게 저라면 다 끝장나잖아요! 어, 어떻게 하지? 죽으면….”

“…….”

라온이 고개를 돌렸다. 이 이상 말해도 도리안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딱히 녀석을 신경 쓸 이유도 없었고.

“오늘은 안 늦었지? 딱 좋은 시간이네.”

리메르가 평소처럼 담을 넘어 들어왔다. 해가 뜨지 않은 어둑한 하늘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곧 해가 뜰 테니, 바로 시작하자.”

“예!”

오러를 익힌다는 기대감에 아이들이 평소보다 훨씬 우렁찬 기합을 내질렀다.

“다른 아이들이 먼저 오러를 익히고 있다고, 뒤처졌다 생각할 필요는 없어. 오러는 평생을 익혀야 하는 무학. 다른 아이들이 딱 한발 먼저 갔다고 생각해라.”

“예!”

“그럼 옆에 있는 교관과 함께 개인 연공실에 들어가라. 너희가 안정적인 연공에 들어갈 때까진 교관들이 도와줄 테니, 궁금한 거 힘든 거 다 말해.”

리메르가 손뼉을 치자, 뒤에 물러서 있던 교관들이 아이들을 개인 연공실로 데리고 갔다.

“음.”

라온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자신의 옆에 아무도 없었다.

“넌 혼자 개인 연공실로 들어가라.”

“그럼 절 왜 부르신 겁니까?”

“연공서로 연공법을 익히다 보면 문제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거든. 내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마음 놓고 연공해.”

“…….”

못 믿겠는데.

지금까지 봐온 리메르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자신이 연공실에서 죽어가도 낮잠을 자고 있을 것 같다.

“그 눈은 뭐냐? 나 못 믿어?”

“아닙니다.”

고개를 젓고서 연공실로 들어갔다. 도움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적당히 호법 정도만 서주면 충분하다.

“후욱.”

라온이 눈을 감고, 만화공의 운용을 시작하자, 그의 어깨 위로 새빨간 불꽃이 날름거리며 타올랐다.

‘시작해볼까.’

*     *      *

리메르는 라온이 연공실에 들어가자마자, 자세를 바로 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하게 기감을 풀었다.

‘뭘 얻었나 볼까.’

펼쳐낸 기감으로 라온의 연공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마나의 파동을 읽어보았다.

‘화속성이군.’

뜨겁고 역동적인 마나가 라온의 주변에서 휘몰아쳤다.

‘보통 연공법이 아닌데?’

라온의 마나 회로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정상 수준을 한참 벗어났다. 막 터진 용암처럼 폭발적인 기운. 오러 연공법을 습득 중인 상태에서 저 정도 마나가 움직이다니, 평범한 연공법이 아니었다.

‘저건 동색의 패가 아니라, 금패를 줘도 얻지 못할 수준인데?’

린덴 연공법을 익히는 아이들에게 상위 연공법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라온의 것은 달랐다.

직계들이 배우는 연공법 그 이상.

저 연공법을 제대로 습득하게 된다면 라온의 단전에서 대체 어떤 오러가 생겨날지 기대되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만 오러의 흐름이 굉장히 난해하다. 습득할 때까지 시간과 노력이 굉장히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음?’

리메르가 가는 눈썹을 내렸다. 뜨거운 기운이 내달리는 라온의 마나 회로. 그 안에서 서늘한 한기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설마 저 녀석!’

라온이 움직이는 기운을 느끼고 나자, 자연스레 입이 떡 벌어졌다.

‘마나 회로의 냉기를 지우는 게 아니라, 그 기운을 함께 이끌어가고 있어!’

라온은 열기로 지워지는 냉기를 그냥 버리는 게 아니라, 단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게 마나를 처음 다루는 놈이라고?’

연공법을 배운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녀석이 마나를 자유자재로 운용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오러 연공법이 특징이 아니라, 저 녀석의 재능이야.’

뛰어난 연공법 이상으로 라온의 마나 제어 능력이 놀라웠다. 뱃속부터 마나를 통제해 왔어도 저 정도는 아닐 거다.

‘육체와 무학의 흐름만이 아니라, 마나에도 재능이 있었다니….’

라온은 판별식에서 마나에 최하위 재능을 가졌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버렌이나, 루난보다도 뛰어난 마나 운용 능력을 보여주었다.

‘저 녀석이 저 연공법을 제대로 익힌다면….’

리메르는 기대감이 어린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새로운 괴물이 탄생할지도 모르겠군.’

*     *      *

그로부터 한 시간 뒤.

라온 지그하르트가 뜨거운 숨을 내쉬며 연공실 밖으로 나왔다.

“라온.”

리메르는 단상에서 내려와 라온의 옆으로 다가갔다.

“너 내일부터는 숙소에서 수련해라.”

“예? 어제는 앞으로 매일 나오라고….”

“됐으니까. 숙소에서 수련해.”

숙소의 벽은 마법 처리가 되어서 오러 연공을 해도 외부에서 느낄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라온의 오러 연공법을 느꼈다간 심한 견제가 들어 올 가능성도 있다. 마법 처리가 된 숙소에서 연공하는 게 나았다.

“내가 한 번씩 가서 봐줄 테니까.”

“교관님이요? 음….”

“나라고 항상 게으르진 않거든?”

“알겠습니다.”

라온은 평소처럼 별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바로 알려드려야겠지.’

리메르는 라온의 몸에서 퍼지는 뜨거운 마나의 잔향을 느끼며 히죽 웃었다.

*     *      *

리메르는 모든 훈련이 끝난 뒤 알현실을 찾아갔다.

“요즘 자주 찾아오는군.”

석상이라도 된 듯 옥좌에서 움직이지 않던 글렌 지그하르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리메르가 씩 웃으며 중앙의 붉은 카펫을 걸어왔다.

“마르타가 수련에 참여했습니다. 듣던 것보다 성격이 더 뜨겁더군요.”

“그 아이는 또래의 누군가에게 패하기 전까지 변하지 않을 거다.”

글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만간 그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뭐?”

“라온과 살짝 부딪침이 있었습니다.”

리메르는 어제 일어났던 라온과 마르타 그리고 버렌과 루난의 대립을 말해주었다.

“그런가? 그 아이들이 벌써….”

글렌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표정 속에 자그마한 기쁨이 떠도는 것 같았다.

“아, 그런데 찾아온 이유는 그게 아닙니다. 라온에게 대체 무얼 주신 겁니까?”

리메르는 라온에게 보여준 모습과 달리 놀란 티를 내며 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복잡하면서도, 정돈된 흐름을 가진 연공법은 처음입니다. 거기다 그게 화속성이라니….”

“만화공이라는 연공법이다.”

글렌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만화공?”

“초대 가주님의 연공법이지.”

“아, 초대 가주님의 연공법이구나. 그러니 그런 수준의… 어? 어어?”

리메르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초, 초대 가주요?”

“그래.”

“허, 금패나 은패급의 연공법을 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초대의 연공법을 넘겨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가주님이 라온을 아끼긴 아끼시는군요.”

“만화공이 라온을 선택했을 뿐이다. 난 그 아이에게 그걸 넘겨줄 생각이 없었어.”

“음….”

글렌은 자세하게 이야기하진 않았다. 아마도 그 안에 이런저런 사정이 있던 모양이다.

“그걸 물어보러 온 거냐.”

“그게 아니라, 라온에 대한 이야깁니다. 그 녀석의 재능은 역시 정상이 아니에요. 무학만이 아니라, 마나에 대한 재능도 무시무시합니다!”

리메르는 오늘 본 라온의 마나 흐름을 모두 설명해주었다.

“판별의 검은 평범 이하로 나왔다면서요. 그거 어디 망가진 거 아닙니까?”

“…….”

글렌 지그하르트는 팔걸이를 쥐던 손을 떼서 턱을 쓸었다.

‘마나에 대한 재능도 있다라….’

모두가 나간 후 판별의 검에 금색 불길이 빛났던 건 역시 라온의 능력이 맞았던 모양이다.

“그 아이의 몸 상태는 괜찮나?”

“여전히 땀이 차갑고, 입에서는 냉기를 뱉어냅니다. 몸에 문제가 있는 건 분명하지만, 훈련 후에는 오히려 더 편안해 보입니다.”

“음….”

글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페드릭이 말해준 대로 활발하게 몸을 움직이는 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라온은 육체와 마나 모두 특별한 재능을 가졌습니다. 관찰력과 통찰력에 침착함까지 있죠. 또 하나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재능은 중요하지 않다. 만약 라온에게 그런 잠재력이 있다고 해도 녀석은 너무 어려.”

“그렇다고 불가능한 건 아니죠. 사실 전 예전부터 아드님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리메르는 가늘게 좁힌 눈으로 글렌을 올려 보았다.

“전 당신이라는 불꽃을 보고 지그하르트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후계자 중엔 제가 따르고 싶은 왕이 없습니다.”

“너 설마 그래서 교관으로….”

글렌이 눈매를 좁혔다. 아무리 약해졌다고 해도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던 리메르다.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교관이 된 이유가 스스로 왕을 찾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라온도 자격이 주어진다면 후계자에 설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다.”

“잘되었군요.”

리메르가 진녹색 안광을 발하며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 물러섰다.

“하나만 더. 라온에겐 재능만 있는 게 아닙니다. 뭐, 그건 저보다 가주님이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그는 알현실을 나가기 전 마지막 말을 흘리고 문을 닫았다.

“그래. 잘 알고 있다.”

글렌은 텅 빈 알현실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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