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2화 (22/653)

22화

“저 책은….”

라온은 불타오르는 책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책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낡았지만, 장대한 금빛 서광을 뿜어내 알현실을 밝혔다.

우우웅!

여름의 끝을 알리는 꽃잎처럼 떨어진 책이 손끝에 닿았다. 불길에 타오르고 있음에도 뜨겁지 않고, 체온처럼 따스했다.

‘만화공?’

책 표지에 적힌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표지를 넘기려고 할 때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가며 더 큰 불길을 일으켰다.

스스스.

순식간에 끝 페이지에 도달한 책은 수명을 다한 장작처럼 재가 되어 흩어졌다.

“어?”

라온이 사그라지는 책을 움켜쥐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종이는 가루가 되었고, 불꽃은 연기가 되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서 멍하니 서 있을 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만화공(萬火功) : 만겁의 불길과 마주했습니다.]

[만화공이 기억됩니다.]

그 메시지가 끝나기 무섭게 뇌리에 벼락이 내리친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흡!’

누군가가 뇌에 거대한 침을 쑤셔 넣는 듯한 느낌이다. 라스의 정신공격보다 더한 통증에 무릎이 휘청였다.

“후욱….”

다행히 고통은 찰나의 순간에 끝나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도련님!”

바로 옆에 있던 로엔이 다가와 부축해주었다.

“괘, 괜찮습니다.”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흔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너 방금 뭘 한 거냐.

‘나도 몰라. 그런데….’

기억난다. 가루가 되어 사라진 만화공의 내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라온 지그하르트.”

자그마한 떨림이 깃든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글렌이 평소와 달리 화등잔만 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방금 무엇을 한 거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 손에서 사라진 연공법의 내용은 기억납니다.”

“그 책의 이름은?”

“만화공입니다.”

“…….”

라온의 대답을 들은 글렌은 눈을 내리감았다. 석상이라도 된 듯 한참 동안 멈춰 있던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더 이상 당황은 보이지 않았다.

“내용이 기억난다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되었다.”

글렌은 평소처럼 냉담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동색 패의 보상은 이루어졌다. 이만 나가보거라.”

“음….”

라온이 슬쩍 로엔을 보았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황급하게 평소같은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라온은 고개를 꾸벅였다. 뒷걸음을 걸어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그때까지 글렌과 로엔은 움직이지 않았다.

“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다.

‘만화공의 내용이 내 기억에 박힌 것도 시스템의 능력인가?’

-시스템이 네 기억력과 사고력을 높여주긴 하지만 강제로 뇌에 집어넣는 능력은 없다.

라스의 목소리에도 의문이 담겨 있었다.

‘음….’

라온은 가주전의 복도를 걸어가며 머리에 박힌 만화공의 정보를 훑어보았다.

대충 보아도 알 수 있다.

만화공은 그림자 오러 연공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묘하고 정심한 연공법이었다.

‘거기다….’

만화공 안에는 오러 연공법만이 아니라, 하나의 검술과 옛 세상의 정보도 담겨 있었다.

머리에 각인된 만화공을 제대로 익힌다면 전생과는 차원이 다른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이걸 왜 넘겨줬지?’

만화공은 동패 따위로 얻을 수 있는 오러 연공법이 아니다.

은패. 아니, 금패를 줘도 바꾸지 않을 물건인데, 왜 넘겨준 건지 모르겠다.

-이미 받아놓고, 뭘 그리 걱정이 많은 게냐.

‘하긴.’

글렌 정도 되는 사람이 준 물건을 뺏을 리 없다. 이미 날아가서 달라고 해도 줄 수도 없지만.

‘돌아가자.’

지금은 기억만 있을 뿐 습득한 게 아니기 때문에 당장 돌아가서 연공을 하고 싶었다.

라온은 가주전을 나가자마자 별관으로 뛰었다. 전력으로 달리가는 그의 눈빛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라온이 떠난 알현실은 밤과 같은 침묵이 짙게 깔려 있었다.

“가, 가주님. 라온 도련님이 가져가신 연공법이 설마….”

“그래. 그분의 것이다.”

글렌은 책장 첫 번째 칸의 비어버린 공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화공을 가져가다니….’

지그하르트 역사상 아무도 꺼내지도, 읽지도 못했던 초대 가주의 연공법이 바로 라온에게 넘어간 만화공이었다.

동패가 아닌, 은패 수준의 연공법을 넘겨주기 위해서 최초의 책장을 꺼냈는데, 만화공을 가져갈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꿀꺽.

로엔은 재가 되어버린 연공서의 조각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알려졌다간 라온 님과 실비아 님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다. 만화공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글렌이 고개를 저었다. 만화공에 대해 전해지는 건 가주가 된 이후다. 가문의 역사를 샅샅이 뒤지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음, 그럼 연공서가 아예 사라져 버린 건 어떻게….”

“그것도 괜찮다. 사람에게 전해졌지 않느냐.”

라온의 연공서의 내용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무엇이 그런 현상을 만들어냈는지는 모르지만, 전해졌다면 그만이다.

“그래도 만화공은 지그하르트의 가주에게 전해지는 연공법인데….”

“어차피 쓰지도 못하는 연공법이었다.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저기서 썩어 문드러졌겠지.”

놀란 건 사실이다.

아니, 경악했다는 게 맞다. 다만 판별식에서 금색 불꽃을 만들어낸 라온이기에 오히려 주인을 찾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초대 가주님의 연공법을 얻었으니, 라온 도련님은 그 누구보다 강해지시겠군요.”

“아니.”

글렌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강해지기 위해선 재능도, 무학도 중요하지만, 어떤 인간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아무리 강한 무학도, 강한 인간을 넘을 수는 없는 법이지.”

글렌이 마의 벽은 넘은 이후에도 판별식을 진행하는 이유는 재능을 발현한 아이들에게 그에 맞는 조언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그는 아이들의 미래를 단순한 재능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운 걸 봤더니, 저도 모르게.”

로엔이 손을 가슴에 얹고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경지에 오른 글렌은 재능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해왔다.

물론 가문 사람들은 여전히 뛰어난 무학과 재능만을 따졌지만.

“앞으로 무언가가 변할 것 같구나.”

글렌은 옥좌의 등받이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그 누구에게도 손길을 허락하지 않았던 만화공. 가문에서 딱 한 번만 나왔던 금색 불꽃. 모두 라온이 가져갔다.

‘라온 지그하르트.’

자신의 손자이지만, 대놓고 사랑을 줄 수 없는 그 아이 때문에 가문 내외로 많은 변화가 찾아올 것 같았다.

“지켜보는 재미가 있겠어.”

시간이 허락한다면 말이지. 글렌은 그 말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     *      *

라온은 돌아오자마자 방으로 들어갔다. 모두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만, 혹시 몰라서 문까지 잠갔다.

-거창하구나.

‘너도 알 텐데. 오러 연공을 하는 중에 방해를 받으면 죽을 수도 있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다면 모를까 연공이 궤도에 오르기 전에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큰 문제가 생긴다.

개인 침대에서 잘 때까지 불의 고리를 연성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너도 방해하지 마.”

-흐음!

“너 설마….”

-딱 한 번이다.

푸른 불꽃 사이로 빙글거리는 미소가 피어났다.

“한 번?”

-본왕은 네놈이 그 연공인가 뭔가를 하는 동안 딱 한 번 방해하겠다.

“그러다가 네가 내 몸을 가져가기 전에 폐인이 될 수도 있는데?”

-상관없다.

라스에게서 짐승의 목 울림 같은 비웃음이 들려왔다.

-넌 극복하지 못하겠지만, 본왕은 네놈의 사지가 잘리고, 단전이 터져도 살려낼 수 있다.

사이한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섬뜩함이 등골을 스쳤다.

-네가 폐인이 되어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가 본왕에겐 기회가 되겠지.

‘이놈은 역시….’

다시 한번 깨닫는다.

라스는 아군이 아니다. 기회만 된다면 언제라도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먹어 치울 마계의 악마이자, 분노의 화신이었다.

“한 번이라고 했나?”

-본왕이 거짓을 말하지 않는 건 너도 알고 있을 터. 그 연공법을 습득할 때까지 딱 한 번만 끼어들겠다.

“어쩔 수 없겠네.”

라온이 손목을 문질렀다. 하지 말라고 말한다고 들을 놈도 아니다. 받아들이기 싫어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매일 불안에 떨며 살아라. 본왕이 언제 네놈의 정신을 찌를지 모르니까.

라스의 목소리에 격한 흥분이 담겼다. 처음으로 놀릴 기회가 생겨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왕이라는 놈이 고작 이런 거 가지고.’

매번 본왕이라는 유치한 호칭법을 사용하고, 마계의 군주이니, 분노의 왕이니 하는 놈이 이런 사소한 것에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우습기만 했다.

‘그렇지만….’

라스가 한 번의 방해만 한다고 해도 위험한 건 사실이다.

만화공은 자연의 마나를 흡수해서 단전에 오러를 쌓는 연공법. 중요한 순간에 방해를 받았다간 마나 회로나 단전이 망가져 폐인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마나 회로에 냉기가 박혀 있는 자신은 더더욱 위험하다.

‘그래도 밀릴 순 없지.’

라스는 약하게 나오면 더 세게 밀고 들어오는 성격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강하게 나가야 한다.

“그래. 해봐.”

라온은 속마음을 감추고 여유롭게 웃었다.

-그 건방진 표정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지켜보지.

“그럼 평생 지켜만 봐야 할 텐데.”

-…지금 당장 네 정신을 부수고 싶군.

“해봐. 난 가만히 있다가 능력치만 받아먹으면 되니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버러지가 한마디를 안 지는구나.

“이 버러지의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까. 언제든지 두드려라.”

-끄으윽!

손을 휘휘 젓고서 침대 아래에 앉았다. 라스가 폭주하듯 소리를 질렀지만, 시원하게 무시했다.

‘놈이 생각이 있다면 지금 건드리진 않겠지.’

찬찬히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들이키는 숨결에 자연의 마나를 담았다. 청량함으로 전신을 채우고, 다시 날숨. 마나 회로에 깃든 탁한 기운을 뱉어냈다.

‘좀 겹치는데.’

만화공의 흐름과 불의 고리의 흐름은 그 이름처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인 마나를 마나 회로에 가라앉혔다.

우측 손목에서 만화공의 흐름이 시작된다. 그 기운은 불처럼 과격하면서도 물처럼 도도했다.

고오오오!

뜨거운 마나가 전신을 질주한다. 장중한 흐름에 마나 회로에 박혀 있던 냉기들이 쓸려나갔다.

‘이것도 놓칠 순 없지.’

저 순수한 냉기를 버리기엔 아까웠다. 만화공의 기운과 함께 단전까지 이끌었다.

후우웅.

순식간에 단전까지 내달린 만화공의 기운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당연하겠지.’

한 번의 연공으로 만화공을 습득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만화공의 흐름이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해지면 그 기운이 자연스럽게 단전에 안착할 것이다.

‘거기다.’

만화공의 기운만이 아니라, 마나 회로의 냉기도 흡수하고 있으니, 냉기 저항력도 빠르게 성장하게 될 거다.

“후….”

한 번의 순환을 끝낸 라온이 뜨거운 숨을 뱉어내며 눈을 떴다.

-화속성인가.

“단일 속성이라는 게 조금 걸리지만, 연공법 자체는 굉장히 뛰어나.”

-너 치고는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뭐?”

-속성을 어설프게 익힌 놈들이 문제지. 제대로 익힌 단일 속성은 만능자에 비해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냉기로 하나의 성을 얼려버린 이야기는 역사에도 남았지….

“음.”

라온은 자기 자랑을 시작하는 라스의 말을 흘려들으면서 그가 전에 했던 말에 주목했다.

‘제대로 익힌 단일 속성이라.’

그의 말이 맞다.

한 가지 속성을 어설프게 익힌 자들은 반푼이 취급을 받지만, 격을 넘어선 사람들은 절대자 취급을 받는다.

한 번의 연공으로도 알 수 있다.

만화공은 특별하다. 전설로 내려오는 불의 고리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제대로 익혀봐야겠어.’

한동안 만화공에 모든 것을 바쳐야겠다고 다짐하며 일어섰다.

“그 전에.”

-이제 처리하려는 거냐?

“그래. 밤마다 찾아오는 걸 보면 우연은 아니니까.”

라온의 빨간 눈동자가 사신의 그것처럼 번들거렸다.

오랜만에 복직 좀 해볼까.

*     *      *

주디엘은 한 달 전 별관에 들어 온 신입 시녀다.

좋은 인상과 밝은 성격, 깔끔한 일 처리 덕분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별관 사람들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

다만 하루 업무를 끝낸 뒤 휴식을 취하러 간다던 그녀는 정원의 나무 위에 숨어 라온의 방을 엿보고 있었다.

‘또 혼잣말인가.’

주디엘은 방에서 중얼거리는 라온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많지는 않지만, 가끔 허공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고 하니, 그 영향일 지도 모르겠다.

허공과 대화하던 라온이 눈을 감은 채 자리에 앉자, 주변 마나의 흐름이 급변했다.

저렇게 명상에 빠진 적은 많았지만, 마나의 파동이 일어난 건 처음이었다.

‘역시 가주전에 가서 오러 연공법을 배워왔군.’

라온은 동색의 패를 이용해서 오러 연공법을 얻어 온 것 같았다. 마나의 흐름이 굉장히 격렬했다. 생각보다 강한 연공법이었다.

‘보고할 게 늘었어.’

주디엘은 라온이 다시 눈을 뜨고, 방에 불이 꺼지고 나서야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정원의 끝에 있는 작은 호수에 가서 땅에 숨겨둔 종이와 연필을 꺼냈다. 그 종이에 라온이 별관에 돌아온 이후의 행적과 파악한 내용을 전부 적었다.

신기하게도 종이는 글씨를 적자마자, 바로 사라져서 옆에서 보기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 짓도 할 게 못 된다니까.”

주디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어린아이의 약점이 될 정보들을 보고하다니, 갑작스럽게 허무함이 찾아왔다.

“그래도 해야지.”

씁쓸함은 잠시였다. 지켜야 할 게 있는 이상 어쩔 수가 없다는 핑계로 허무한 마음을 채웠다.

툭.

주디엘은 종이를 엄지손톱 크기로 접어 호수 위에 띄웠다. 저 종이는 내일 아침에 카룬 지그하르트의 손에 들어가게 될 거다.

“그럼 돌아가…아!”

몸을 일으키다가 황급히 멈춰 섰다. 뒷목에 닿는 서늘한 날붙이의 감각에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입을 열면 죽는다.”

어쩔 줄을 모르고 눈동자를 굴릴 때 뒤에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움직여도 죽는다.”

죽음을 담은 듯한 목소리에 솜털이 우수수 돋아났다.

“눈을 내려 호수를 봐라.”

목소리의 지시에 눈동자를 깔아, 호수를 보았다.

“아….”

밤하늘을 머금은 어둑한 호수 위. 라온 지그하르트의 붉은 눈이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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