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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1화 (21/653)

21화

“설마 잊었다고 하진 않겠지?”

라온이 어깨 위에 떠 있는 라스를 툭 쳤다.

-본왕은 마계를 지배하는 분노의 군주다.

라스에게서 푸른 냉기가 뿜어진다. 뼈가 시릴 정도로 서늘한 기운이었다.

-존재를 갖게 된 이후로 거짓을 뱉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존재를 가지게 된 이후라는 말은 한 번도 거짓말을 말한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본왕과 네놈은 내기라는 계약으로 묶여 있다. 싫다고 해도 넘어가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말 거라.

“그니까 뜸 그만 들이고 달라고.”

-그 전에 하나만 묻겠노라.

“뭘?”

-네놈이 그 뾰족귀의 기세를 뚫은 방법 그리고 그 건방진 놈의 무학을 따라한 방법이 무엇인냐.

라스는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질문을 해왔다.

“일단 보상부터 줘. 그게 먼저야.”

-음, 알겠다.

라스의 푸른 불꽃이 나비처럼 팔랑이자, 허공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와의 내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승리 보상이 지급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2포인트 상승합니다.]

능력치가 오르면서 솟구치는 육체의 희열에 입술을 깨물었다. 다만 보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분노>가 가진 특성 중 하나가 임의로 생성됩니다.]

[<설화의 감각>이 선택되었습니다.]

[특성 <설화의 감각(1성)>이 생성되었습니다.]

“설화의 감각?”

라온은 특성의 이름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하찮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좋은 특성이 걸렸군.

“능력이 뭐지?”

-감각의 범위를 늘려주는 능력이다. 1성이니, 대략 1할의 거리가 늘어나겠지.

“1할이라….”

현재 기감으로 10M를 파악할 수 있다면 그 범위가 11m가 된다는 뜻이었다.

지금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감각 범위가 늘어날수록, 그 효용이 급상승할 특성이었다.

-본왕의 경우엔 원래 가진 감각의 10배 이상을 감지할 수 있었노라.

“그래?”

그러고 보니, <설화의 감각> 뒤에 1성이라는 표현이 붙었다. 그 말은 저 특성도 불의 고리처럼 성장한다는 뜻이었다.

“괜찮은데.”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암살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무력 이상으로 감각을 중요시해왔다. 감각의 범위가 늘어난다고 하니, 어떤 특성도 부럽지 않았다.

“근데 왜 설화의 감각이지?”

-취향이다. 존중해라.

“허.”

얼음꽃 팔찌도 취향, 설화라는 이름도 취향. 센스가 참으로 구렸다.

-본왕과의 내기는 끝이 났으니….

라스가 다가오려 할 때 새로운 메시지가 올라왔다.

[<분노>와의 내기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칭호 <최초의 승리>가 생성되었습니다.]

[칭호의 효과로 모든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합니다.]

“어?”

-이런!

라스는 상태창을 볼 수 없는 대신 메시지는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내용을 보고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이 쥐새끼 같은! 본왕의 능력치를 또 빼가다니!

“내가 한 게 아니라, 네가 만든 시스템이 알아서 해주고 있는 거잖아. 거기다 네 본체가 가진 능력에 비하면 능력치 1 정도는 눈곱만큼도 안 되는 거 아닌가?”

-무, 물론이다!

“그럼 별 상관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라스가 어색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래. 됐다. 이제 네 차례다. 네 정체가 무엇인지 말해라.

“싫어.”

-뭐? 지금 뭐라고….

“싫다고.”

라온은 평소처럼 무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본왕을 능멸하는 것이냐! 분명 네 능력을 알려준다고….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 일단 보상부터 달라고 했지.”

-어….

기억을 되새기던 라스가 입을 쩍 벌렸다.

“맞지? 난 네게 답을 준다고 한 적이 없어.”

라온이 옅게 웃었다.

‘환생에 대해서 말해줄 수는 없지.’

암살자 라온의 격을 끌어온 걸 말하려면 환생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라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환생만큼은 꺼내선 안 된다.

‘불의 고리도 마찬가지.’

불의 고리에는 육체와 정신을 보호하고, 성장시키는 효과 말고도 무학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건 자신의 무학만이 아니라, 적의 무학도 포함되기에 대련에서 버렌의 공호권을 따라 할 수 있었던 거다.

물론 상태창의 강화 효과와 버렌의 공호권 성취가 불의 고리보다 낮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처음부터 라스에게 정보를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녀석은 적이니까.’

조금 가까워진 것 같지만, 라스는 여전히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노리고 있다. 자그마한 정보라도 넘겨줘선 안 된다.

-본왕을 농락한 것이냐!

라스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냉기의 불꽃을 내뿜었다. 수만 개의 얼음 칼이 피부를 꿰뚫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래도 참을만해.’

수속성 저항력을 얻은 이후에 라스를 만나 다행이었다. 저항력이 없던가, 라스가 화속성을 가졌다면 진즉에 무너졌을 거다.

라온은 가슴을 들끓게 만드는 라스의 냉기를 억누르며 미소를 지었다.

“너도 학습 능력이 낮군. 이렇게 평온한 상태에서 공격해봐야 너만 손해야.”

-닥쳐라!

라스의 불꽃이 한층 더 거세졌다.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든다. 오한 때문에 손발이 덜덜 떨렸다.

화아아!

외부에서 전해지는 냉기가 너무도 강했기 때문인지, 마나 회로에 박혀 있던 냉기까지 살아나 더 죽을 맛이었다.

“후우….”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조금씩 고통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지독한 놈! 대체 어떻게 견디는 거냐!

“정신력.”

가볍게 대꾸해줬지만 속은 말이 아니었다.

불의 고리와 수속성 저항력이 있음에도 견디기 힘들다. 전생에서 지옥 수련을 견딘 경험이 없었다면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이를 바득 깨물고, 죽을힘을 다해서 버티고 있을 때 눈앞에 푸른 창이 올라왔다.

[<분노>의 공격에서 극한의 정신력을 발휘하셨습니다.]

[민첩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체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능력치가 올랐다는 메시지가 나타나자, 정신과 육체에 활역이 차올랐다. 마나 회로를 짓누르던 냉기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라스가 악을 지르며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분노는 여전했지만, 제 살 깎아 먹기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네놈은 대체 무엇이냐! 본왕의 지켜본 인간의 역사에 너 같은 건 없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놀리는 말이 아니다.

왜 환생을 했는지, 왜 지그하르트에서 태어난 건지, 왜 라스와 엮인 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본왕을 얕보지 마라. 어떻게 해서든 네놈의 정체를 밝히고, 그 육체와 영혼을 씹어 삼킬 테니까!

“계속 말했잖아. 할 수 있다면 해보라고.”

미소를 짓고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오늘도 한 건을 해주었다.

“그런데….”

창밖을 보는 라온의 눈빛이 서리를 덮은 듯 차갑게 일렁였다.

“저건 뭘까.”

*     *      *

카룬 지그하르트가 머무는 중무전. 화려함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담아낸 듯한 방안은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으….”

벌써 네 시간 가까이 차려자세로 서 있는 버렌 지그하르트의 입에서 참고 참던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책상에 앉아 있던 카룬의 눈동자가 그에게 향했다.

“버렌 지그하르트.”

“예엑.”

긴 시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에 버렌의 입에서 탁하고 억눌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네게 무엇을 지시했지?”

“수, 수석 수련생 자리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지지 말라고 하, 하셨습니다!”

“그래.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슬리온 가의 계집을 꺾고, 라온을 짓밟은 후 수석에 이름을 올리라고 말했지.”

카룬의 눈동자가 뻘겋게 타올랐다.

“그런데 그 계집도 아니고, 직계에서 떨어져 나간 버러지의 자식에게 패해? 그것도 모두의 앞에서?”

방을 울리는 낮고 서늘한 목소리에 심장이 우그러지는 것 같았다.

“날 어디까지 망신시키고 싶은 거냐. 셋째나 넷째처럼 되고 싶은 건가?”

“아, 아닙니다!”

버렌이 덜덜 떨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이젠 이름조차 불리지 않는 두 형들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

“넌 이미 첫 번째 기회를 상실했다.”

카룬의 눈빛에는 오랜만에 만난 아들에 대한 반가움은 없었다. 분노와 짜증만이 가득했다.

“아, 알고 있습니다.”

버렌은 그 섬뜩한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발끝만 보며 입술을 씹었다.

“기초 수련을 끝낸 후 수련생을 졸업할 때 그간의 성적을 매겨 다시 수석을 뽑을 거다. 그 자리를 가져와라.”

“예….”

버렌은 마른침을 꾹 삼키고서 피를 토하듯 대답했다.

“지그하르트의 직계답게 살고 싶다면 네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카룬이 나가라는 듯 손을 저었다.

“가, 감사합니다.”

버렌은 6개월 만에 만난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고개를 숙인 채 방을 나왔다.

“젠장!”

중무전을 나온 버렌이 악을 내지르며 벽을 후려쳤다.

“그 망할 놈 때문에….”

이가 바드득 갈린다. 평생 칭찬만을 듣고 살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꾸중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특히 라온이라는 버러지 하나 때문에 이런 꼴이 됐다는 게 너무도 화가 났다.

“후욱!”

가슴을 가득 채운 짜증을 한숨으로 뱉어냈지만, 속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기분을 전환 시키기 위해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내가 왜 여기에….”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5연무장에 도착해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다. 벽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버렌이 코웃음을 쳤다. 외부 문은 닫혀 있었지만, 실내 단련장이나, 휴게실의 문은 그대로 열려 있었다.

“멍청한 교관들.”

입을 삐죽이며 휴게실로 향했다. 열린 문을 닫으려고 할 때 라온의 이름이 걸려 있는 사물함이 보였다.

“음.”

보기만 하는 거라고 중얼거리며 라온의 사물함 문을 열었다. 내부는 깔끔했다. 밑에 둔 상자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상자를 여기다…어?”

상자를 열어본 버렌이 입을 떡 벌렸다.

“뭐, 뭐야! 이 신발 숫자는!”

상자 안에는 밑창이 다 닿거나, 뜯어진 수련용 단화가 있었다. 그것도 한두 켤레가 아니라, 열 켤레 넘게.

‘이걸 6개월 만에 썼다고?’

믿을 수 없어서 신발들을 살펴봤지만, 전부 크기와 형태가 똑같았다. 모두 보급받은 라온의 신발이었다.

“허.”

버렌이 헛웃음을 흘렸다. 라온과 같은 수련용 단화를 보급받았지만, 교체한 건 고작 2번이다.

‘이게 말이 되나?’

자신이 신발을 두 번 바꾸는 동안 라온이 10번 이상 교체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미친….”

몇 년은 신은 듯한 신발들을 보자, 몽둥이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었을 때보다 더한 충격이 온몸을 휩쓸었다.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야.’

찬물을 뒤집어쓴 듯 머리가 맑아지자, 억지로 무시했던 것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라온이 그 누구보다 빨리 연무장에 나와서 그 누구보다 늦게 들어갔던 것.

식은땀을 흘리고, 입에서 냉기를 내뿜으면서도 단 한 번도 훈련을 포기한 적이 없던 것.

실내 단련장에서 근력 단련을 끝낸 뒤 깜깜한 연무장을 홀로 달리던 모습들이 하나하나 생각났다.

‘내가 겉멋으로 검을 휘두르고, 숙소에서 쉬는 동안 놈은 매일 한계를 넘은 거야….’

라온의 기세가 임시 수련생 누구보다도 뛰어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거야말로 지그하르트다운 모습인데.’

5연무장에서 가장 지그하르트 검사다운 모습을 보여준 건 라온이었다.

‘그리고 난 반대로….’

라온을 비꼬고, 조롱했으며, 시험에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다가 추하게 패배까지 해버렸다.

“끄으으!”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졌다. 질투에 눈이 멀어 추잡하고 더러운 짓만 해온 자신에게 혐오감이 들었다.

버렌은 텅 빈 휴게실에서 한참 동안 주저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녹색 눈동자는 연무장에 들어올 때와 달리 정광이 어려 있었다.

“다시는….”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 앞으로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게 지그하르트다운 모습이고, 지금이라도 추구해야 할 자세였다.

“후우!”

버렌은 깊은숨을 내뱉어 마음속에 쌓인 아집을 비웠다. 연무장을 떠나는 그의 발걸음은 리메르의 그것처럼 가벼웠다.

*     *      *

별관으로 돌아와서 휴식을 취한 지 이틀째. 라온의 일과는 연무장에 있을 때와 똑같았다.

새벽부터 별관 주변을 달렸고, 아침을 먹은 뒤엔 기구 대신 맨몸운동으로 근력을 단련했다.

어제 실비아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방해할 놈은 딱 하나뿐이었다.

-또 수련인가. 정말이지 지겹도다. 본왕을 위해 다른 재롱이나 부려보아라.

아낌없이 주는 라스를 무시하고 계속 수련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찾아왔다.

“가주전의 수석 집사 로엔이라고 합니다.”

머리의 반이 구름색으로 물든 인자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가주님께서 도련님을 호출하셨습니다.”

그는 공손한 예를 다하여 고개를 숙였다.

“호출이라고 하셨습니까? 절 왜….”

“동색의 패를 수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음.”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그냥 사람을 보내서 패를 줄줄 알았는데, 직접 부를 줄은 몰랐다.

“헙!”

건물 안에 있던 실비아가 창문을 넘어서 뛰어나왔다.

“로, 로엔 님.”

“실비아 님.”

두 사람은 당연히 서로를 알고 있었기에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아버. 아니, 가주님께서 직접 부르셨다구요?”

“그렇습니다.”

“저기 혹시….”

“특별한 일은 없을 겁니다. 말 그대로 수여식일 뿐이니까요.”

로엔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선하게 웃었다.

“라온….”

“괜찮아. 다녀올게.”

라온은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서 겉옷을 걸쳤다.

“잠깐만! 옷은 갈아입고 가!”

“이대로도 괜찮아.”

글렌은 천생 무인이다. 수련하다가 왔다는 티를 내면 싫어하진 않을 거다.

“그럼 가시죠.”

로엔은 빙긋 웃고서 앞장을 섰고, 라온은 실비아에게 눈짓을 보내고서 가주전으로 향했다.

*     *      *

“…….”

라온은 금빛 옥좌에 앉은 글렌을 올려보며 손끝을 떨었다.

수백 명이 들어와도 넉넉한 알현실에서 글렌과 일대일로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입안이 바싹 말라갔다.

-저놈 조금 강하다고 재는 것이냐. 붉은 눈알을 찔러버리고 싶도다.

물론 아예 정신이 나간 라스는 예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약속은 지켜야겠지.”

글렌은 필요 없는 말을 앞에 걸치고서 로엔에게 손짓했다.

“예.”

로엔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은은하게 빛나는 동색의 패를 가지고 왔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로엔의 손에서 전해지는 동색의 패를 받았다. 패의 중앙엔 지그하르트의 문양인 불꽃으로 타오르는 검이 그려져 있었다.

“네게 동색의 패를 수여한다. 넌 동패를 반납하며 그에 합당한 물건을 요구하거나, 부탁을 할 수 있다.”

“그럼 지금 당장 말씀드려도 됩니까.”

라온은 패를 움켜쥔 채 글렌을 올려보았다. 이 패를 어떻게 사용할지 이미 생각해놓았다.

“…말해보라.”

글렌은 잠시 침묵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실비아 지그하르트.”

“음?”

“제 어머니를 원래의 직위로 올려놓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로엔만이 아니라, 글렌도 눈을 크게 뜬 채로 자신을 내려보았다.

“원래의 직위라면 직계를 말함이냐”

“그렇습니다.”

글렌이 입을 다물었다. 진의를 알아보려는 듯 전신을 훑었다. 그의 눈길을 받는 것만으로 심장이 우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실적이다.”

“실적이라 하시면….”

“나만이 아니라, 가문 모두가 인정할 실적을 쌓는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

“그럼 가능은 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글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전보다 조금 더 밝아진 눈으로 말을 이었다.

“다만 불가능에 가깝다. 다양한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는 건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도 힘들 테니.”

그는 비웃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넌 절대 이루지 못하리라 장담을 하는 것 같았다.

-시건방지도다. 본왕이 본체를 찾는다면 수천 합 안에 죽일 수 있는 놈이 감히!

라스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글렌을 노려보았다. 다만 수천 합을 겨룬다는 건 라스에게도 버거운 초강자라는 뜻이었다.

“그럼 되었습니다.”

라온은 로엔에게 동패를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실적 쌓기는 전생에서 숨 쉬는 것처럼 해온 일이다. 어떤 임무를 완수해서라도 실비아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겠다고 다짐하며 일어섰다.

“잠깐.”

돌아가려 할 때 단상 위에서 글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아직 보상을 말하지 않았다.”

“예?”

“넌 질문을 했을 뿐이다. 그런 건 패 없이도 들려줄 수 있는 말이다.”

뒤를 돌아보니, 글렌이 차가운 눈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변한 것 같았다.

‘뭐지?’

글렌이 저런 말을 할 줄은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억지로라도 패를 받아갈 줄 알았는데, 의외의 모습이었다.

“소원을 말하라.”

“….”

라온은 아로엔의 손에 들려 있는 동패를 보며 눈을 빛냈다.

‘다음 소원이 정해져 있긴 하지.’

실비아의 복귀 질문 이후 무엇이 필요한지는 이미 생각해 두었다.

‘오러 연공법.’

불의 고리는 분명 천고의 연공법이지만, 육체와 영혼을 단련시켜 줄 뿐 오러를 만들지는 못한다.

전생에서 익혔던 그림자 오러 연공법보다 뛰어난 오러 연공법이 필요했다.

“오러 연공법이 필요합니다.”

“오러 연공법? 그건 기초 수련을 진행하며 교관들이 전수해줄 거다.”

그 말은 맞았다. 기초 수련에서 주어지는 연공법도 대륙 전체로 본다면 중상급의 연공법이다.

하지만 그 수준으론 안 된다.

실비아의 지위를 회복하고, 데루스의 목을 베기 위해선 그 이상의 연공법이 필요하다.

“그것보다 뛰어난 오러 연공법이 필요합니다. 동급의 패에 해당하는 연공법을 내어주셨으면 합니다.”

“…….”

글렌이 눈을 내리감았다. 계속 느끼지만, 그는 암살자인 자신 이상으로 감정 표현이 적었다. 냉혈이라는 별명이 참 잘 어울렸다.

딱!

그가 눈을 감은 채로 손가락을 튕기자, 가주전 바닥이 지진 난 듯 흔들렸다.

쿠구구구!

바닥에서 금색 불꽃이 돋아났다. 나선을 그리며 타오른 불꽃 속에서 원형의 책상이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이건….”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책장은 알현실의 높고 높은 천장에 닿을 정도로 거대했고, 칸막이마다 형형색색의 책이 꽂혀 있었다.

“지그하르트의 책장 중 하나다. 중앙에 손을 올린다면 지금 네게 가장 필요한 책이 내려올 거다.”

“아. 알겠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며 책장으로 다가갔다. 올려다보니 목이 아플 정도였고 책의 개수는 셀 수도 없었다.

‘그림자 연공법보다 좋은 거면 돼.’

그림자 오러 연공법보다 뛰어난 오러 연공법이 나오길 바라면서 책장에 손을 얹었다.

우우우웅!

책장이 진동한다. 책들이 들썩이며 추위를 타듯 덜덜 떨었다.

책장은 바람을 탄 듯 회전하다가 우뚝 멈춰 섰다.

파앙!

제대로 보이지도 않은 첫 번째 칸의 첫 번째 책이 저절로 빠져나와 펼쳐졌다.

화아악!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로 거대한 금빛 불꽃을 뿜어내면서.

“이 무슨!”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글렌 지그하르트가 옥좌의 손잡이를 으깨며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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