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20화 (20/653)
  • 20화

    “허….”

    리메르가 본인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벌어진 입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건 또 뭐야.’

    라온과 버렌의 대결은 처음부터 자신의 의도대로였다.

    라온을 수석으로 임명하는 순간 버렌이 이의를 제기해서 두 사람이 대련까지 갈 거라 예상했다.

    자기만 잘난 줄 아는 버렌의 버릇을 고치고, 라온의 특별함을 모두에게 선보이는 정도로 끝나는 상황. 그게 자신이 원한 전개였다.

    하지만 라온이 그 모든 계획을 바꿔버렸다.

    아니, 스토리 라인은 그대로였지만, 그 내용이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라온은 단순한 힘과 민첩성, 기술이 아니라, 공호권의 묘리를 역이용해서 버렌을 날려버렸다.

    ‘이게 말이 되냐고….’

    아무리 오러가 실리지 않다고 해도 버렌의 뛰어난 재능은 공호권의 묘리를 적절하게 살렸다.

    하지만 라온은 버렌이 만들어낸 권의 흐름을 파악하여 그 회전을 역으로 펼쳐냈다.

    아무런 무학도 익히지 않은 아이가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뒷골목 술집에서 말해도 뺨을 얻어맞을 정도로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음….”

    리메르가 마른침을 삼키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가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라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 가주님까지?’

    동상이라도 된 듯 무표정만 고집하던 글렌조차 놀라움에 눈매를 좁히고 있었다.

    “라온.”

    리메르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라온에게 다가갔다.

    “예. 교관님.”

    “너 방금 뭘 했지?”

    이 단순한 질문에 담긴 건 많았다. 정말 공호권을 본 것만으로 따라한 건지 혹은 누군가에게 배운 건지, 아예 다른 권인지를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버렌의 주먹에서 회전이 보였습니다. 회오리처럼 나선으로 돌아가고 있더군요.”

    맞는 말이다. 공호권의 특성 자체가 나선의 회전이니까.

    “제 주먹이나, 방어하는 손등조차 밀려날 정도로 빠른 회전이라, 그냥 싸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리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한 기대감에 대련을 시켰으니, 당연히 알고 있었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으니, 도망치면서 싸울까도 했지만, 버렌의 주먹을 보다 보니, 무언가가 느껴졌습니다.”

    “느껴졌다?”

    “네. 그의 주먹에서 이루어지는 흐름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습니다. 왠지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역으로 회전을 걸어서 버렌의 회전을 지워버렸습니다.”

    “아!”

    리메르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이 녀석은 진짜야!’

    북채로 가슴을 내려친 듯 심장이 울렸다. 상대의 무학을 보고 그 흐름을 파악하는 것만으로 천재라는 칭호를 얻는다.

    하지만 라온은 그 수준을 넘어섰다.

    상대의 흐름을 자신의 것으로 사용하다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천고의 재능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버렌의 아버지이자, 글렌의 둘째 아들 카룬 지그하르트가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동자엔 진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버렌의 경지가 낮다고 해도 한눈에 공호권을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실제로 나타났는데요?”

    리메르가 라온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버렌의 훈련을 훔쳐봐서 미리 알고 있던 게 분명하다! 혹은 누가 알려줬던가!”

    카룬의 살벌한 눈동자가 실비아와 라온에게 돌아갔다.

    “일단 난 게을러서 그런 걸 알려줄 사람이 아니고, 별관에서 사는 라온이 과연 누구에게 공호권에 대해 배웠을까요? 말이 안 되는데. 그렇다고 버렌이 공호권을 훔쳐 배우는 걸 그냥 놔둘 아이도 아니죠.”

    “으음….”

    그는 바득 인상을 찌푸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글렌의 눈치를 보느라 입을 열지 않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라온에게 도전하고 싶은 사람 있니?”

    리메르가 아이들을 바라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앞에서 본 게 있으니, 그 누구도 손을 올리지 않았다.

    “루난?”

    “…….”

    루난은 고개를 저으며 라온의 옆으로 다가가 그가 보여주었던 역회전의 공호권을 따라 했다.

    “훗.”

    리메르는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예상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결과 자체는 훨씬 좋아졌다.

    “라온. 네 승리다.”

    “감사합니다.”

    리메르가 방긋 웃었고, 라온은 고개를 꾸벅였다.

    “나한테 감사할 게 있나. 네가 알아서 한 거지. 동급의 패는 가주님께서 잘 챙겨주실 거다.”

    “네.”

    리메르는 대답하는 라온을 잠시 훑어보았다. 혹시나 해서 그의 상태를 살폈지만, 역시 오러 같은 건 없었다.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몸을 돌렸다.

    “가주님. 끝났습니다.”

    글렌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일어섰다. 그는 잠시간 라온, 버렌, 루난을 비롯한 아이들을 살피고서 그대로 연무장을 떠났다.

    “조언 한마디만 해주고 가시지.”

    리메르는 쩝 입맛을 다시고서 아이들을 불렀다.

    “합격자는 일주일 동안 휴식을 한 뒤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이곳으로 오도록. 불합격자도 너무 실망하지마라. 곧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올 테니까. 그럼 해산! 모두 가족이랑 좋은 시간 보내라.”

    리메르는 손뼉을 짝 치고서는 연무장의 담벼락을 넘어갔다.

    “라온!”

    “라온 도련님!”

    그가 떠나자마자 실비아와 헬렌이 달려와 라온을 껴안았다.

    “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도련님. 어디 아프신 곳은 없습니까?”

    두 사람은 여전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했냐가 아니라, 지겨울 정도로 몸이 괜찮은지를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라온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이제 집에 가자. 오랜만에 스튜가 먹고 싶어.”

    “스튜? 아, 알겠어! 가자!”

    “전 먼저 가서 준비해놓겠습니다!”

    헬렌은 빠른 걸음으로 연무장을 빠져나갔고, 라온은 실비아의 손을 잡고 그 뒤를 쫓았다.

    “허어….”

    “대체 6개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라온 지그하르트….”

    “저런 재능이 존재했다니….”

    연무장에 남은 사람들은 벙찐 표정으로 라온과 실비아의 등을 바라보았다.

    “끄읍….”

    그리고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난 버렌은 피나도록 입술을 깨문 채 땅만 바라보았다.

    *     *      *

    연무장 외벽의 끝. 새가 간신히 앉을 법한 얇은 담벼락 위에 다섯 명의 남녀가 서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붉은 불길에 타오르는 검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어떻게 봤어?”

    첫 번째 줄에 앉아 있던 장발의 남자가 물었다.

    “천재다. 그것 말고는 할 말이 없다.”

    “저게 정말이라면 그 녀석 이상의 재능이겠어.”

    “흐름을 넘어 재현이라. 어처구니가 없군.”

    “…….”

    네 명의 남녀는 각자가 느낀 바를 솔직하게 대답했다.

    “루난이랑 버렌을 보러 온 건데, 좋은 구경했네.”

    그의 말에 동의하는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도 알겠지만, 최근 우리 적운대에 피해가 많았잖아. 그래서 말인데 버렌이나 루난은 너희가 알아서 데려가고, 라온은 내가 찜….”

    “죽고 싶나?”

    “저 천고의 재능을 날름 삼키겠다고?”

    “여기서 피를 보기 싫으면 말을 잘 골라라.”

    “…!”

    네 명의 남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당장에 칼을 뽑을 기세였다.

    “노, 농담이야. 농담.”

    장발의 남자는 핼쑥해진 미소로 손을 저었다.

    “어찌 됐든 저 아이로 인해 많은 게 변하겠네.”

    “…….”

    네 명의 남녀는 연무장을 나서는 라온의 뒷모습을 보며 침묵으로 동의했다.

    지그하르트 무력의 중심인 대(隊) 그들의 눈에도 라온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     *      *

    리메르는 교관들에게 뒷일을 맡기고 글렌을 따라 가주전으로 들어갔다.

    “점점 약해지는 놈이 뭐 하러 직접 나선 거냐.”

    글렌은 옥좌에 몸을 묻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도 제가 수석 교관인데 할 일은 해야죠.”

    “리메르 님.”

    가주전에서 대기하던 집사 로엔이 차를 건네주었다.

    “오랜만이네. 로엔.”

    “예.”

    겉보기엔 로엔이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실제 나이는 리메르가 훨씬 많았기에 말을 놓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지?”

    글렌이 금색 팔걸이에 턱을 괴며 물었다.

    “라온과 버렌을 왜 붙인 거냐.”

    “뭐, 어쩌다 보니….”

    “네가 예상한 대로 흘러갔을 텐데, 어쩌다?”

    “와, 역시 가주님은 속일 수가 없네요.”

    리메르는 민망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버렌은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편협합니다. 라온은 특별한 무언가를 가졌지만, 밝혀지지 않았죠. 두 사람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대련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

    “가주님도 보셨다시피 라온의 육체는 여전히 냉기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신력만큼은 이미 경지를 이룬 무인과도 맞먹을 정도죠.”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저도 가주님도 몰랐던 게 있습니다.”

    리메르는 검질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바로 천재성입니다. 사실 제가 보고 싶었던 건 라온의 정신력이었습니다. 뛰어난 무학을 배운 버렌을 상대로 어떤 대응을 보여줄지를 기대했습니다.”

    리메르의 눈동자가 별을 박아 놓은 듯 반짝였다.

    “다만 이번에 라온이 보여준 건 정신력이 아니라, 재능. 그것도 천고의 재능이었습니다. 한번 본 것으로 상대 권법의 흐름을 파악해서 역습을 가하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수많은 전장을 봐왔지만 처음 보는 재능입니다!”

    “이전에 돌팔이 녀석이 그런 말을 한 적이있다. 혹한의 저주에 걸린 아이는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돌팔이라면 넝마의 성자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글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냉기 마법이나 오러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거나, 경국지색의 외모를 얻게 된다고 하더군.”

    “바로 그겁니다!”

    리메르가 쿵하고 발을 굴렀다.

    “그 재능이 발휘된 거라구요! 그 녀석은 무학에 절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겁니다!”

    “흐음….”

    “버렌이나, 루난 그리고 다른 손자, 손녀들도 특별하지만, 라온은 그 이상입니다. 대륙의 정점에 설 수 있는 기질이에요!”

    신이 난 리메르와 달리 글렌의 표정은 덤덤했다.

    “저 역시 그런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대주분들에게서도 보지 못한 재능이었죠.”

    글렌과 함께 대련을 보았던 로엔 역시 놀라움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 아이를 제대로 키워야 합니다. 라온에게 동색의 패가 넘어갔지만, 은패 이상의 보상을 내어주시면….”

    “그럴 일은 없다.”

    글렌은 단호함이 깃든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 유치한 계략 덕분에 라온에게 선물을 주게 되었지만, 단계까지 올려서 보상을 주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엑! 하지만….”

    “너도 그 아이를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줄 필요는 없다.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도록.”

    “진짜 정 없다니까…윽!”

    글렌의 서늘한 눈동자에 리메르가 찔끔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라온은 진짜입니다. 몸이 약하다고 껴안고 있지만 말고, 제대로 키워줘야 해요. 100년 만의 천재라던 가주님의 둘째 손자나 슬리온 가문의 첫째보다 위일지도 모르니, 잘 생각해주세요.”

    “말이 많아졌구나.”

    “진짜를 봤으니까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차별은 없다. 그 아이가 가문의 이름을 드높인다면 모를까.”

    “에이, 그래도 냉기를 지울 수 있는 최상급 영약이나, 연공법….”

    리메르는 글렌이 올린 손에 입을 다물었다.

    “돌팔이가 말했다. 이 이상 화속성 영약을 사용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고 하더군.”

    “이야! 관심 없는 척하시더니, 다 알아보고 계셨군요!”

    “헛소리. 그 말 많은 놈이 혼자 주절거렸을 뿐이다.”

    “오….”

    “흐음!”

    리메르와 로엔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글렌을 바라보았다.

    “하여튼.”

    글렌은 쯧 혀를 차고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등 뒤로 금색 불꽃이 타오르며 지그하르트 보고의 철문이 솟구쳤다.

    “난 보고를 정리할 테니, 너희는 돌아가라.”

    글렌은 그렇게 말하고서 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주전에 남은 리메르와 로엔은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가 이제와서 보고 정리를 할 리가 없었다.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시다니까.”

    *     *      *

    라온은 별관으로 돌아와 실비아와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실비아가 워낙에 많은 것을 궁금해해서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자정이 되어서야 방으로 돌아갔으니, 6시간 이상 말만 한 것 같았다.

    ‘힘드네.’

    라온은 방문을 닫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비아와 함께하는 시간은 마음이 편하지만, 수련 이상으로 힘들었다.

    -크흠,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식사였도다. 앞으로 네놈은 매일 이곳에서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거라.

    리메르는 별관의 음식과 간신이 마음에 들었던지 오랜만에 화를 내지 않고 있었다.

    -연무장의 그 개밥 같은 식사는 이제 꼴도 보기 싫다.

    “미안하지만, 그거 계속 먹어야 하는데.”

    이제 정식 수련생이 되었으니, 몇 년 동안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런 빌어먹을!

    라스는 바드득 이를 갈았다. 맛을 따지는 기생 마왕이라니, 어이가 없는 놈이다.

    -그러고 보니 네놈에게 물을 게 있었지.

    “물을 거?”

    -라온 지그하르트.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팔에 걸려 있던 라스가 푸른 불꽃 형태로 돌아갔다.

    -본왕은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을 보았고, 인간의 육체로 산 세월도 수백 년이 넘는다. 하지만 너 같은 놈은 본 적이 없다.

    라스의 불길이 폭발할 듯 타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 이상의 불꽃이었다.

    -본왕은 느낄 수 있다. 네놈에겐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걸. 말하라. 네놈의 정체를….

    “야 라스.”

    -인간 주제에 본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내 정체나, 네 이름보다 중요한 게 있잖아.”

    -무슨….”

    “생각보다 기억력이 나쁘네.”

    라온이 라스를 내려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와의 내기는 끝났다. 헛소리 말고 보상부터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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