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기세?”
라온이 입매를 찡그렸다.
‘체력과 정신력을 시험할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리메르가 지시했던 훈련을 생각해보면 체력과 정신력을 시험해야 하건만, 그의 선택은 기세였다.
“기세라고?”
“저 아이들에게 기세를 시험한다니….”
“저자는 여전히 정도를 모르는군.”
아이들의 부모들도 시험의 내용이 의외였던지 목소리를 높였다.
“교관은 저니까 전부 조용히 해주시죠.”
리메르가 코웃음을 치며 손을 저었다.
“무인들의 삶에서 기세라는 건 떼고 싶어도 뗄 수가 없는 요소. 그 중요한 능력을 시험하겠다는데, 왜들 그렇게 불만이 많은지.”
틀린 말은 아니다. 기세란 무인이 가진 기질과 격의 조화. 강력한 기세를 가진 무인이 싸우기도 전에 적들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경우도 흔했다.
“아이들은 오러를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소. 기세의 시험이라니, 이치에 맞지 않아.”
“오러 자체를 익히지 않은 아이도 있지.”
“시험이 너무 불공평합니다!”
“역시 잘 모르시네요. 기세라는 건 단순한 오러의 발현이 아닙니다.”
리메르가 긴 손가락을 진자처럼 좌우로 흔들었다.
“진정한 기세란 무인이 이뤄낸 업적(業績)이 쌓여 만들어진 격(格). 오러 없이도 발현할 수 있는 무인의 증명이오.”
그의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서늘한 녹풍이 연무장 전체를 휘감았다.
‘이건….’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방금 리메르는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 기세를 펼쳐냈다. 스스로 뱉은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그래도 불만이면 가주님께 여쭈어보시죠.”
리메르가 획 몸을 돌렸다. 언제 진지했냐는 듯 히죽 웃으며 글렌 앞에 고개를 숙였다.
“존경하는 가주님. 무인의 기세라는 건 오러로 만들어지는 겁니까?”
‘허.’
라온이 헛바람을 뱉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가주를 끌어들이다니, 리메르라는 인간. 아니, 엘프는 움직임이 예측되질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오러를 익히지 않은 자도 살아온 방식에 따라 각자만의 기세를 가지게 되는 법이니까.”
“이야, 역시 가주님!”
리메르는 뒤를 돌면서 손뼉을 쳤다.
“으음….”
“이런.”
“가주님께서 저리 말씀하신다면….”
글렌이 직접 말했기 때문에 직계든, 방계든 더 이상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저 뾰족귀가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소리는 하는구나. 마나, 마기, 오러 따위로 만드는 기세는 가짜다. 영혼에 업적을 쌓은 기세만이 진짜이니라.
라스는 옳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제대로 되지 않은 마족들이 설치기 시작했을 때 본왕은 막대한 기세를 끌어 올려 그 가짜들을 굴복… 윽!
또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팔찌를 쳤다.
“지난 6개월간 아이들은 스스로가 가진 한계를 끝없이 넘나들었습니다. 제 디테일한 훈련 덕분에….”
“거짓말하지 마라.”
버렌의 아버지이자, 글렌의 둘째 아들 카룬 지그하르트가 리메르에게 노려보며 일어섰다.
“정규 수련 시간에 네가 드러누워 낮잠을 잤다는 걸 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제대로 훈련을 시키긴 했나?”
“저도 들었습니다. 훈련 시간에 나타나기만 할 뿐 관심이 전혀 없다고.”
“매일 잠만 자고, 훈련은 알아서 하게 놔둔다고 했습니다!”
“오, 잘 아시네요.”
리메르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보력이 대단하다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것 역시 제 훈련의 일환입니다.”
“그게 훈련이었다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전력을 다하는 경우와 타인의 지시에 따라 전력을 다하는 경우. 어느 쪽이 더 많은 성취를 이룰 수 있을까요?”
“당연히 전자다.”
“맞습니다. 제가 이번에 이 아이들에게 바란 게 바로 그 정신력이었습니다. 체력도, 기술도 키워줄 수 있지만, 의지를 높이는 건 쉽지 않으니까요. 전 정신력이 뛰어난 아이들을 선발해서 육성하고 싶었습니다.”
리메르는 평소와 같은 말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말엔 현기가 담겨 있었다.
“스스로 한계를 극복한 아이들은 작게나마 나름의 격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건 아이들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되겠죠.”
그의 자신감 있는 목소리에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정말 그의 말대로 자신의 아이들이 얼마나 변했는지에 기대감으로 눈동자를 반짝였다.
“다들 이해하신 듯하니, 시험을 시작할….”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카룬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눈매에 내려앉았던 불신은 여전했다.
“수련생들이 전부 같은 수련을 했다고 해도 각자가 가진 격의 수준은 다르다. 그걸 어떻게 시험한다는 거지?”
“초기에 아이들이 가진 기질에서 얼마나 성장했냐를 볼 겁니다. 그중 가장 많은 성장을 이룬 임시 수련생이 수석입니다.”
“초기라면 6개월 전 아이들을 말함인가? 160명이 넘는 아이들의 기질은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그것도 못 하면 교관 때려치워야죠.”
리메르가 씩 웃었고 카룬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 방해꾼. 아니, 부모님들도 다 인정하셨으니, 바로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루난은 내 앞으로 나오고, 나머지는 뒤로 물러서도록.”
루난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리메르의 앞에 섰고, 다른 아이들은 모두 뒤로 빠졌다.
“루난 슬리온. 내가 내보낼 기세는 네가 최선을 다해 수련을 해왔다면 이겨 낼 수 있는 수준이다.”
리메르는 여전히 가벼운 미소를 입에 건 채 말을 이었다.
“내 기세를 뚫고 내 몸을 닿는다면 합격이다.”
“네.”
루난이 작게 대답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마.”
리메르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눈빛에 어린 녹광이 번쩍이며 강대한 기세가 일어났다.
쿠구구구!
갑작스럽게 불어온 위압적인 기파에 루난의 무표정이 무너졌다.
“으윽!”
루난이 입술을 깨물며 새우처럼 몸을 움츠렸다.
“오러를 사용하면 실격이다. 네가 지금까지 수련하며 버텨온 정신력을 일깨워라.”
“흐읍!”
그녀는 운용하려던 오러를 가라앉히고, 발을 내디뎠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끝까지 참고 잔걸음을 걸어 앞으로 향했다.
타악.
루난은 느리지만 정확하게 손을 내뻗어 리메르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여유로운 합격이다. 그간 최선을 다해선 수련한 성과가 보인다.”
리메르는 씩 웃고서 루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아!”
루난은 거친 숨을 흘리며 옆으로 빠져나왔다.
“다음 도리안.”
“아, 저요? 벌써요? 정말 저예요?”
라온의 뒤에 숨어있던 도리안이 바들거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불안한지 배에 찬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이, 이거 순서가 어떻게 되는 건….”
“내 맘이다. 빨리 나와.”
“으흐윽!”
도리안은 찔끔 눈물을 흘리고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흡사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엑!”
다시 헛구역질이 시작되었다.
“루난이 하는 걸 봤겠지. 네가 단련을 하며 쌓아온 정신력으로 내가 펼치는 기세의 벽을 뚫어라.”
“그, 그게 될까요? 전 정신력이 없기로 유명한데….”
“안 되면 떨어지는 거지.”
리메르가 두 번째 기세를 뿜어냈다. 루난 때보다는 확연히 약해진 기세. 아이들마다 다른 수준의 기세를 보낸다는 게 진짜였다.
“우헤헥!”
도리안은 너구리 같은 소리를 내고서 뒤로 물러섰다.
“그 이상으로 물러나면 바로 실격이다.”
“어우욱….”
“마지막 조언을 해주지. 넌 겁이 많지만, 수련엔 진심으로 임했다. 너를 믿고 들어와라.”
“아, 알겠습니다.”
리메르의 안정된 목소리에 도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서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아이가 걸음마를 하듯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나아가 손을 내뻗었다.
타악.
도리안의 손이 리메르의 허리춤에 닿았다.
“합격이다. 넌 실력에 비해 자신감이 너무 없다. 앞으로는 당당하게….”
“꾸에엑!”
아쉽게도 도리안은 토하느라 바빠서 리메르의 조언을 들을 수 없었다.
“흠. 계속하지.”
리메르는 곧바로 다음 사람을 호명했다.
* * *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떠 있던 태양이 서쪽으로 처지면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시험을 치렀다.
시험에 통과한 아이들의 숫자는 꽤 되었지만, 그보다 몇 배나 많은 아이들이 떨어져 울음을 터트렸다.
신기하게도 라온에게 자극을 받아 그의 근처에서 체력 단련을 했던 소수의 아이들은 대부분 합격했다.
하지만 버렌을 따라 체력이 아니라, 검술이나, 권법을 다듬은 아이들은 절반 이상이 떨어졌다.
시험이 진행될수록 버렌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졌고, 마지막 순서인 라온을 남기고 그의 차례가 되었다.
“버렌 지그하르트. 앞으로 나와라.”
“예.”
버렌이 묵직한 걸음으로 리메르의 앞에 섰다. 그의 표정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찌그러져 있었다.
‘당연하겠지.’
라온이 픽 웃었다. 버렌의 예상과 달리 그와 함께했던 수련생들이 많이 떨어져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그럼 시작하자.”
리메르가 웃음기를 유지한 채 기세를 펼쳐냈다. 루난과 같은 급의 막강한 기세가 녹색의 바람이 되어 버렌에게 밀어닥쳤다.
쿠구구구!
몰아치는 기세의 폭풍에 버렌을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 이걸 견디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옆에서 보는 기세와 앞에서 직접 느끼는 기세는 차원이 달랐다.
루난. 자신과의 경쟁을 포기한 겁쟁이가 이 정도 기세를 뚫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끄으윽!”
입술을 깨물어도 발이 나아가질 않았다. 너무도 힘겨웠다.
‘설마 나에게만 더 강하게 하는 건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뒤를 돌아 아버지를 보았다. 하지만 그는 표정을 굳히고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시험에 잘못된 부분이 없다는 소리였다.
“너의 재능은 특별해. 160명의 인재 중에서 널 따라갈 사람은 손에 꼽는다. 다만.”
리메르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와 널 따르던 아이들은 시간을 낭비했어. 진의를 알지도 못하는 형태뿐인 검술을 수련할 시간에 체력과 정신력을 단련했어야 했다.”
“끄으으윽!”
버렌은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앞으로 나아갔다. 단전의 오러가 절로 일어나고 있었다.
“넌 어려울 때마다 오러를 사용했지. 이번에도 오러를 사용하면 바로 실격이다.”
“사, 사용하지 않습니다.”
솟구치는 오러를 억지로 잠재우며 발을 굴렀다. 한 발을 걸을 때마다 용암 위를 걷는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흡!’
등 뒤에서 서늘한 시선이 느껴진다. 아버지의 그것이다.
‘이걸 이겨내지 못하면 버려진다….’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아 버림받은 두 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패배자가 될 수는 없었다.
“으아아아아!”
버렌은 직계로서 보여선 안 될 추한 목소리와 표정을 드러내며 기다시피 걸어갔다. 죽을힘을 다해서 리메르의 옷을 움켜쥐었다.
“합격이다.”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기세를 꺼뜨렸다.
“후억억!”
버렌은 그대로 자빠져서 거친 숨을 마구 내뱉었다. 항상 여유롭던 그에게서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넌 아직 12살이다. 어른스러운 척하지 말고, 그 나이에 맞는 단련을 해. 위만 보고 걷다간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지는 법이야.”
리메르는 버렌에게도 조언을 해주고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마지막으로 라온 지그하르트.”
“네.”
그의 부름에 라온이 앞으로 나아갔다.
“준비는 됐나?”
“물론입니다.”
“그럼 시작하지.”
리메르의 기세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루난, 버렌에게 뿜어낸 그 이상의 기세가 폭풍이 되어 라온을 휩쓸었다.
“라온!”
“라온 도련님!”
뒤에서 실비아와 헬렌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거 제 시험 맞습니까?”
라온이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이 이곳에 왔을 때의 격은 루난이나 버렌은커녕 중하위권 아이들에게도 미치지 못했다. 그걸 생각하면 이 기세는 너무 강대했다.
“글쎄?”
리메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본 네 재능은 루난이나 버렌 이상이거든. 한 번 견뎌봐.”
“그렇습니까?”
녹색 바람에 잠긴 라온의 눈동자에서 붉은 불꽃이 타올랐다.
“그럼 그 기대를 배신해선 안 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