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음….”
라온은 잔잔한 마음과 달리 턱을 바르르 떨었다.
“그리 긴장할 필요 없어. 가볍게 대화나 하자는 거니까.”
가장 앞에 있던 장발의 방계가 다가왔다. 저 녀석의 이름은 알고 있다. 크레인 지그하르트. 오전에 시비를 걸었고, 판별식에서 꽤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녀석이다.
“어이.”
크레인의 턱짓에 그의 옆에 있던 세 명의 아이가 자신의 왼쪽과 오른쪽 그리고 뒤에 붙었다.
“대화? 무슨 대화를 한다는 거지?”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세 명이 동시에 길을 막아 빠질 수가 없었다.
“따라오면 알게 될 거야.”
“조용히 와.”
크레인이 히죽 웃으며 손짓하자, 옆에 붙은 놈들이 어깨로 밀기 시작했다.
나이보다 몸집이 작은 라온과 또래보다 덩치가 큰 방계들이 함께 움직이니, 성인이 아이를 데려가는 모습 같았다.
“자, 잠깐만. 여기서 말하는 게….”
“이젠 늦었어.”
“그러게 적당히 까불었어야지.”
라온은 눈을 내리깔고 어깨를 움츠리자, 방계의 아이들은 낄낄 웃으며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웠다.
-보고 싶은 장면을 보여준다고 해놓고, 지금 무엇을 하는 거냐.
‘밥도 뜸을 들여야 맛있는 법이야. 좀 기다려.’
라온은 겉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윽!”
라온은 무기력하게 연무장 외곽으로 끌려가서 벽에 던져졌다. 구석지고 어두운 곳이라 지나다니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영약빨 새끼.”
“뭐?”
“직계에서 버림받은 주제에 운 좋게 먹은 영약으로 건방을 떨어?”
“성자께 받은 영약이 아니었다면 오늘 넌 뛰지도 못했겠지!”
“비겁한 놈!”
방계들의 표정이 먹잇감을 보는 맹수처럼 사나워졌다.
‘뭔 저따위 이유로….’
어린애임을 증명하듯 덤비는 이유가 참으로 유치하고 초라했다.
‘거기다 진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 하는 모양이네.’
라온이 피식 웃었다.
‘당연한 일인가.’
12살인 자신과 달리 방계의 나이는 13살이고, 덩치도 훨씬 컸다. 한참 전부터 수련을 해왔기 때문에 진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티 나지 않게 해줄 테니까.”
“우리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
“교관님 말 들었잖아. 동기끼리 대화 좀 하자는 거지”
방계들이 주먹을 돌리며 다가왔다.
“맞는 말이네.”
라온이 숙인 고개를 들어 올리며 빙긋 웃었다.
“처맞는 말.”
조금 전까지 그의 눈빛에 어려 있던 공포와 당황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가!”
오른쪽에 있던 바가지 머리가 주먹을 내질렀다.
어깨를 틀어 주먹을 피한 뒤 오른쪽 팔꿈치로 놈의 오른쪽 가슴을 후려쳤다.
“꺼어억!”
바가지 머리는 땅에 머리를 박은 채 꺽꺽댔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손톱으로 바닥을 긁었다.
“뭐, 뭐야!”
좌측에 있던 실눈이 앞으로 발을 차올렸다.
퍼어억!
왼손으로 올라오는 발을 쳐냈다. 앞으로 다가가 주먹으로 명치를 찍었다.
“끄으윽….”
실눈의 아이가 명치를 부여잡은 채 자빠져 눈을 까뒤집었다.
빠악!
뒤에 있던 녀석이 주먹을 뭉쳐서 내리쳤다. 손바닥으로 흘려낸 뒤 발로 복부를 걷어찼다.
“허어업!”
가장 덩치가 큰 녀석이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너, 너희 뭐 하는 거야! 왜 저딴 놈에게 당하는 거냐고!”
홀로 남은 크레인이 뒷걸음질 쳤다. 말을 더듬으며 눈동자를 바르르 떨었다.
“대화잖아. 네가 말한 동기간의 오붓한 몸의 대화.”
라온은 크라인이 물러난 만큼 다가갔다.
“오지 마!”
크레인이 악을 내지르고서 왼 주먹을 뻗어왔다. 바로 오른 주먹이 따라간다. 제대로 단련한 연계 공격이었다.
다만 그걸 받는 사람은 평범한 12살짜리 아이가 아니었다.
뿌득!
라온의 손이 독사처럼 꼬여 올라갔다. 크레인의 왼팔을 휘감아서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끄아악!”
팔이 꺾인 고통에 크레인이 오른팔을 다 내지르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직이야.”
왼손으로 수도를 세워 크레인의 우측 허리를 내리쳤다.
“컥! 커어억!”
크레인이 숨이 끊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훌륭한 비명이다. 다만 아직 대가리를 깨지 않았다. 당장 부수거라.
‘그놈의 대가리….’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바닥에서 버둥거리는 네 명의 방계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
라온이 목을 돌리며 방계들에게 다가갔다. 눈동자에 서늘한 살기가 어렸다.
“흐윽!”
“으으으!”
“뭐, 무슨….”
방계들은 오한이 걸린 듯 몸을 떨었다. 그들의 표정엔 당황을 넘어선 공포가 어려 있었다.
“으으….”
크레인은 추위를 탄 것처럼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이놈은 대체.’
직계인 버렌도, 그보다 더 나이가 많은 다른 직계들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기세였다. 라온에게는 오러 따위가 아닌, 어둑한 무언가가 어려 있었다.
‘어, 어른들을 보는 것 같아….’
그것도 보통 어른이 아니라, 가문의 기둥이 된 어른들의 눈동자를 마주한 듯한 서늘한 감각이었다.
“대화는 깊게 나눌수록 좋은 법이지.”
“으어억!”
“제, 제발!”
라온이 웃으며 다가가자, 방계들은 사신을 만난 듯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퍽! 퍼어억!
그의 주먹질에 방계들이 비명도 뱉지 못하고 굼벵이처럼 몸을 구겼다.
-시원하게 잘 패는군. 처음으로 네놈이 마음에 든다.
‘그거 고맙네.’
라온은 라스가 감탄할 정도로 방계들을 두들겨 팼다. 그것도 보이지는 않지만, 고통이 가장 심할 곳만 골라서.
“끄흡!”
“으어어억….”
방계들은 이제 라온의 눈도 쳐다보지 못했다. 뭍에 나온 새우처럼 몸을 움츠릴 뿐이다.
“제,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으으윽!”
라온은 방계들이 자신의 발끝도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확실하게 교육한 뒤 일어섰다.
“오늘 우리가 한 건 동기간의 대화다. 맞지?”
“에, 예!”
“그, 그렇습니다!”
“동기간의 대화를 어디 가서 털어놓진 않겠지?”
“다, 당연히!”
“물론입니다!”
그만 맞고 싶었던 크레인과 방계들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화를 끝내기 전에 마무리를 지어야겠지.”
“마, 마무리?”
“그게 무슨 소리인지….”
“너희를 자극해서 내게 보낸 놈은 누구지? 버렌인가?”
“어….”
“예? 그, 그건 아니고요.”
방계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뭔데.”
“버, 버렌 님은 지시를 내린 적이 어, 없으십니다.”
“예. 오히려 하지 말라고 하셨죠. 저희가 그냥….”
“그래?”
라온이 픽 웃었다. 다급한 표정을 보니, 거짓이 아니다. 정말 버렌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았다.
‘아예 썩진 않았군.’
버렌이 자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고, 입이 험한 건 분명하지만, 구제불능 쓰레기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내일도 나랑 대화하기 싫으면 알아서 피하는 게 좋을 거야.”
“예!”
“물론입니다!”
“그, 그림자도 밟지 않겠습니다!”
라온은 방계들의 대답을 들으며 몸을 돌렸다. 골목을 나가려고 할 때 알림음이 울렸다.
띵!
* * *
턱.
라온과 방계들이 떠난 골목 구석으로 리메르가 내려섰다.
“흐음!”
그는 빌빌대며 떠나가는 방계들을 보고서 입맛을 다셨다.
‘재밌는 걸 보게 되었군.’
평소처럼 시간을 죽이고 있었는데, 아주 좋은 구경을 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녀석이야.’
오늘 본 라온은 글렌과 실비아에게 들었던 불쌍한 환자의 모습과는 달랐다.
‘천재인가?’
라온은 무학을 배운 적이 없다. 누구를 때리거나 맞은 적도 없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 녀석이 보여준 움직임은 그와 달랐다.
첫 번째 주먹을 최소한의 거리로 회피한 뒤 바로 상대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두 번째와 세 번째도 적이 제대로 판단하기도 전에 급소를 쳐서 단숨에 끝내버렸다. 투박한 면은 있지만, 처음 싸운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의 주먹질이었다.
정신력만 대단할 줄 알았는데, 무학에 대한 재능도 있는 것 같았다.
‘피는 어디 가지 않는군.’
리메르는 방계들을 후려 팬 뒤 역으로 협박까지 하는 라온의 모습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한때 세상이 좁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최강이라 생각할 때 만난 글렌도 저랬다. 평범해 보였지만 나서기만 하면 그 누구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인간을 무시하던 자신이 감명받아 따를 정도였으니, 그가 어떤 남자였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방계들의 말을 역이용해서 협박하는 라온의 모습은 더더욱 글렌과 닮아 있었다.
“최고의 재능들 사이에 껴 있는 알 수 없는 재능이라….”
리메르가 피아노를 치듯이 바닥을 가볍게 굴렀다.
“심장이 뛰는군.”
그의 입매가 부드럽게 꼬여 올라갔다.
* * *
라온은 기숙사 앞에서 대기하던 교관이 내어준 열쇠 번호대로 405호실로 들어갔다.
별관에 있던 자신의 방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큼지막한 개인실이었다. 침대는 푹신해 보였고, 연공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그럼.’
방 구경은 간단하게 끝내고 침대에 걸터앉아 조금 전에 보았던 메시지를 불러왔다.
[<분노>가 당신의 행동에 만족했습니다.]
[민첩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라스가 만족했다는 내용과 함께 능력치가 올랐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런 방식으로도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건가?’
라스의 견제를 버틴 것만이 아니라, 만족시켜도 능력치가 생겨나는 것 같았다.
다만.
[<분노>가 악을 내지릅니다.]
-착각이다! 본왕은 만족하지 않았다! 아직 모자라! 놈들의 목이라도 따야 만족한단 말이다!
라스가 난리를 부리는 걸 보니, 본인과 상관없이 전해진 것 같았다.
-아까부터 전해지는 저 능력치는 대체 어디서 오는 거냐!
추가로 오르는 능력치가 어디서 왔는지는 라스도 모르는 것 같았다.
“너도 모르는 건가? 네 능력이라면서 아는 게 없네.”
-네놈이 본왕의 것을 가져가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걸 모르는 거냐!
“어쨌든 모르는 건 맞잖아.”
-끄으윽….
라스는 아까 기분 좋았던 것이 모두 사라진 듯 목소리가 부르르 떨렸다.
-좋다. 알아보고 돌아오마. 기다리고 있어라.
라스는 그 말과 함께 존재감을 감췄다. 팔찌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혼이 어디론가로 날아간 것 같았다. 손을 붕붕 휘둘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오랜만에 조용하네.”
라온이 손을 내렸다. 라스가 잠잠해진 틈을 타서 씻을 준비를 하고, 4층에 있는 욕실로 향했다.
간단하게 목욕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금 보니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네.’
손목에 걸린 꽃팔찌를 보며 픽 웃었다. 인정을 받거나, 방해를 견디는 걸로 능력치를 주다니, 공짜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겐 불의 고리와 수속성 저항력이 있어서 라스에게 질 일도 없다. 여러모로 이득뿐이었다.
‘돌아오기 전에 연공이나 할까.’
라온은 기분 좋은 감정을 유지한 채 불의 고리를 운용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고오오오!
집중력을 끌어올린 뒤 연공을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크으윽!
“벌써 왔나?”
혀를 차며 눈을 뜨자, 손목에 걸린 라스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 도둑놈!
“도둑?”
-네놈은 본왕이 본체에 남겨둔 힘을 훔치고 있었다!
‘본체?’
그러고 보니, 라스는 어딘가의 왕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본왕(本王)이라 칭했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기억하지 않았지만.
-마계다! 본왕은 마계의 군주였다!
‘그러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뿌드득!
라스에게서 이빨을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대답은 무엇이냐. 본왕에게서 힘을 얻어가는 똥파리 주제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란 말이다.
“어차피 네가 원해서 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고마워할 필요가 있나?”
-끄으윽….
라스는 할 말이 없는지 신음만 흘렸다.
-건방짐 하나는 정말이지 하늘을 찌르는구나.
“딱히.”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라스는 평생을 떠받들어 살아왔기 때문에 조금의 단호함도 견디지 못하는 것뿐이다.
-현재 본왕의 육체는 네놈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상태창의 능력이 네놈에게 전해진 것이지.
‘흐음….’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이 있다.
“제안?”
-본왕과 내기를 하자. 네가 이긴다면 능력치를 넘겨주마. 다만 진다면 본왕의 분노를 가져가라.
라스의 목소리에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울분과 분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분노>가 당신에게 내기를 제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