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 넌 그게 얼마나 무거운 건지 알고 있느냐?”
글렌 지그하르트의 눈동자에 자그마한 기세가 담겼다.
“크윽!”
라온이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살이 짓눌리는 것 같아.’
글렌은 거대한 바다에서 바닷물 한 바가지를 퍼 올렸을 정도로 작은 기세를 뿜어냈을 뿐이지만, 심장이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등줄기에서 흐른 식은땀 때문에 옷이 등에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불의 고리를 연성하지 않았다면 방금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이게 북멸왕이라 불리는 무인인가….’
눈빛만으로 질릴 정도라니, 데루스 로베르트 이상의 무력이다. 고개를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해보아라. 넌 지금 한 말을 책임질 수 있느냐?”
“가, 가주님. 라온은 아직 어립니다. 무얼 알고 한 말이 아니에요.”
“그렇습니다! 라온 님은 별관에만 계셔서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실비아와 헬렌이 옆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일 뿐입니다. 기세를 거두어 주십시오.”
데니어 지그하르트가 일어서며 기세를 막아주었다.
“데니어 님!”
“저런 건방진 녀석조차 챙기시다니, 역시 데니어 님이라니까.”
“무력보다도 마음이 넓으신 분이잖아.”
데니어의 언행에 방계들이 찬사를 보냈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다.”
“윽!”
“끄윽….”
글렌의 패도적인 음성에 데니어와 실비아가 동시에 물러섰다. 그들이 움직인 게 아니라, 글렌이 목소리만으로 두 사람을 밀어낸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데니어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실비아는 달랐다.
“아, 아버지….”
오러조차 없는 몸으로 글렌의 기세를 견디고 자신에게 다가왔다.
“라온은 아직 훈련을 받을 상태가….”
실비아의 눈동자엔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뿐이었다.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모르겠어.’
이 울컥하는 감정이 그녀에 대한 동정인지, 걱정인지 혹은 또 다른 무언가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녀가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항상 행복하게 웃었으면 좋겠다.
‘난 암살자였지.’
암살자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 삶이 아닌, 죽음과 친숙하게 지내며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이젠 아니야.’
더 이상 암살자로 살지 않겠다.
암살자 라온이 아닌, 라온 지그하르트로서 실비아를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겠다고 다짐했다.
캬앙!
그렇게 생각한 순간 목에 매달린 쇠사슬 한 가닥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알지 못합니다.”
라온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글렌의 위압적인 눈동자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당장에 눈을 감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전 이 본관이 아니라, 별관에서 자랐습니다. 지그하르트가 얼마나 높은지, 얼마나 잘난 곳인지 모릅니다.”
“라, 라온!”
실비아가 다급하게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니 훈련에 참여하여 지그하르트가 어떤 곳인지 알아보려 합니다.”
라온의 말이 끝나자, 모두가 숨을 멈추고 글렌을 바라보았다.
“…….”
글렌의 한쪽 눈썹이 살짝 내려앉았다.
“그 말은 기초 수련으로 지그하르트의 수준을 판단하겠다는 거냐?”
“그게 지금의 제가 지그하르트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교관에게 단단히 준비하라 지시해야겠구나. 널 실망시키지 않도록.”
글렌의 붉은 눈동자에서 피어오른 불길에 알현실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크으….”
라온은 참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숙였다. 지금 자신은 겨우 열두 살이다. 아직은 글렌의 천분의 일도 감당할 수 없는 아이였다.
다만 굴복한 건 아니다.
불의 고리를 꾸준히 연성하고, 뛰어난 된 오러 연공법을 익힌다면 언젠가 그 앞에서도 당당히 설 수 있다.
라온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언젠가는.’
* * *
모두가 떠난 후 침묵이 내려앉은 알현실엔 글렌과 그의 집사 로엔만이 남아 있었다.
“봤나?”
“예. 확실하게 봤습니다.
글렌의 질문에 로엔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녀석은 물건이다.”
글렌의 입매는 조금 전과 달리 살짝 위로 올라가 있었다.
“내 압박을 견디면서 당당히 말하는 열두 살이라니, 지금까지 그런 녀석은 없었어.”
“저도 처음 보았습니다.”
로엔이 흘러내린 머리를 정돈하며 씩 웃었다.
“외모만이 아니라, 기세도 어렸을 적 가주님을 쏙 빼닮았습니다.”
“이상한 소리 말거라.”
글렌은 헛소리 말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지만, 그의 입가는 바람을 탄 풀잎처럼 조금 더 올라갔다.
“기초 수련의 난이도를 올리실 생각이십니까?”
“들은 귀가 많으니, 그래야겠지.”
“라온 님이 수련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기초 수련에 참여조차 힘들 거다.”
글렌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영약 덕분에 몸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지만, 체격도, 체력도 좋지 않아. 좀 더 회복되면 모를까. 지금은 무리다.”
“그럼 왜….”
“말했잖느냐.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받은 자에게 차별은 없다고.”
“음.”
로엔이 입맛을 다셨다.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시다니까.’
수십 년을 함께 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글렌이 대놓고 라온을 부른 건 그를 압박하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 역으로 보호하려는 의도였다.
아마 라온이 훈련에서 떨어지면 미운 놈 떡 하나 주는 것처럼 영약을 내려주실 거다.
물론 라온이 직접 나섰던 건 글렌조차 몰랐을 테지만.
“전 라온 님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만, 걱정스러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직계와 방계 아이들 때문이겠지.”
“네. 크게 반응하진 않겠지만, 이전과 달리 주목을 받게 될 겁니다. 아무리 적은 양이라고 해도 가주님의 기세를 견뎠으니까요. 미리 조치를….”
“아니, 지켜보기만 해라. 괜히 자극할 필요는 없어.”
“알겠습니다.”
로엔은 본인의 생각이 있음에도 글렌의 지시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있어서 글렌은 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가주님. 한 가지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음?”
“혹시라도 라온 님이 기초 수련을 통과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통과?”
글렌이 턱을 괴며 7년 전 판별식을 떠올렸다.
‘금색 불꽃.’
우연인지 혹은 이상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지만, 라온은 초대 가주만이 사용했다는 금색 불꽃을 피워냈었다.
“그럴 일은 없다. 다만 만분의 일이라고 그렇게 된다면….”
피식 웃으며 옥좌에서 일어섰다.
“그에 합당한 보상을 내려야겠지.”
* * *
라온은 별관에 돌아가자마자, 실비아의 방으로 끌려갔다.
“라온.”
실비아가 라온의 양쪽 어깨를 꽉 부여잡았다.
“대체 왜 그런 거야.”
“음….”
“지그하르트의 훈련은 아이라고 봐주지 않아. 지금의 네 체력으론 버틸 수 없어. 다치기만 할 거라고.”
실비아의 목소리가 축 가라앉았다.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손이 떨리고 있었다.
“참을 수가 없었어.”
“뭐?”
“나도 내가 어떤 감정으로 움직였는지는 정확히 몰라.”
라온이 눈을 내리감았다. 정말이다. 실비아, 헬렌과 12년을 살았지만, 아직 자신의 감정은 파스텔톤 하늘처럼 연하다.
“하지만 본관에 가서 엄마가 무시당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 그래서 한마디 하고 싶었어.”
실비아와 헬렌에게만큼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솔직한 마음을 뱉어냈다.
“아….”
“라온 도련님.”
실비아의 입이 벌어지고, 헬렌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후우.”
실비아는 어깨를 잡은 손을 놓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라온. 네가 날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넌 아직 어려. 한참 응석을 부려야 할 나이에 벌써 엄마를 생각해줄 필요 없어.”
“하지만.”
“넌 모르겠지만, 엄마 꽤 강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실비아는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기 위해서 혀를 씹었다.
‘이런 아이를….’
라온은 자신에게 과분할 정도로 착한 아이였다. 가문의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다른 아이들처럼 어리광을 부리지도 않았고, 몸이 아파도 홀로 참아냈다.
그렇게 착하고 다정한 아이였기에 스스로 힘든 곳으로 걸어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
“엄마가 할아버지에게 다녀올게. 훈련을 딱 1년만 미뤄달라고 부탁하면 그분이라도….”
“해볼게. 아니, 할 수 있어.”
라온이 고개를 흔들었다. 실비아를 위해 나선 것도 맞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기초 훈련은 실비아와 헬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대놓고 육체 수련을 할 기회였다. 알아서 찾아와준 행운을 날려 보낼 수는 없었다.
“정말이야. 할 수 있으니, 믿어줘.”
“할 수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네 몸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다는 게 문제야.”
“음….”
라온이 흔들리는 실비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 소리였군.’
서로의 시선이 달랐어.
자신은 훈련에 버틸 수 있다를 말했고, 실비아는 몸 상태를 걱정했다.
암살자로서 실적만을 따지던 그 시간 때문에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몸 상태가 나빠지면 바로 포기할게.”
실비아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 새로운 대답을 말했다.
“넌 아파도 말하지 않는데, 널 어떻게 믿어!”
“약속할게”
“하아….”
실비아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비아 님. 라온 도련님을 한 번 믿어보는 건 어때요?”
“헬렌도 라온이 어떤 앤지 알면서….”
“훈련 강도가 높은 건 맞지만, 이번 수석 교관님은 지그하르트에서 보는 눈이 가장 좋은 분이에요. 도련님의 상태를 알고 있을 테니, 심해지기 전에 중지시키실 거예요.”
“하아….”
헬렌의 말을 들은 실비아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지그시 내려보았다.
“라온. 정말 약속할 수 있니?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이 있으면 바로 말해야 해? 알겠지?”
“응.”
라온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만 믿어볼게.”
“고마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네?”
“5 연무장에 다녀올게. 말이라도 해놔야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바로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라온 도련님.”
실비아가 나가자마자 헬렌이 무릎을 꿇고, 눈을 마주쳤다.
“절대. 절대 무리하면 안 돼요! 힘드시면 바로 포기해야 합니다. 아시겠죠?”
“알겠어. 몇 번을 말하는 거야.”
“몇 번이 아니라, 몇십 번을 말해도 부족해요. 도련님은 다른 아이들보다 약하다는 걸 기억하고, 오기를 버려야 해요.”
“그래.”
헬렌 역시 실비아 정도로 걱정이 많았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내가 먼저 포기할 일은 없어.’
폐가 터져서 죽더라고 멈출 생각은 없었다. 힘들면 힘들수록 불의 고리의 경지가 올라, 육체와 정신을 강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 * *
라온은 별관 뒤에 있는 작은 정원으로 향했다.
“본관에 갔다 오니, 텅 빈 느낌이네.”
본관에는 넓은 연무장과 세련된 정원을 비롯한 여러 시설이 있지만, 별관에는 작은 정원과 호수가 전부였다.
너무 작아 실비아의 눈을 피해 수련할 수 없었지만, 나름의 운치는 있었다.
라온은 정원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훈련은 꽤 힘들겠지.’
실비아나, 헬렌의 걱정대로 자신의 몸은 아직 완벽하지 않다. 마나 통로에 냉기도 남아 있고, 성장도 늦으며, 체력도 부족하다.
지그하르트의 훈련은 악명 높기로 유명하니, 아이들의 기초 훈련이라고 해도 버거울 거다.
다만 자신에겐 그 이상의 지옥을 걸어온 전생의 경험이 남아 있다. 그 기억이 있다면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이제 진짜 시작이야.’
태어난 이후 불의 고리를 익힌 게 토대였다면 다음 달부터 진행될 훈련은 집을 짓기 위한 기초 공사였다.
그 공사를 잘 다져놓아야 훗날 높은 건물을 쌓을 수 있다.
“보여줘야지.”
그 어떠한 직계보다도 뛰어난 성취를 보여줘서, 우리를 조롱하던 놈들의 입을 전부 닥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놈. 데루스 로베르트.’
이곳의 일로 복수가 조금 늦어지겠지만, 자신의 진짜 목표는 천검성 데루스 로베르트다.
데루스의 가면을 벗기고, 목을 베는 그날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후….”
라온이 서산 아래로 잠겨가는 금빛의 태양을 보며 눈을 감고 마나를 받아들였다.
그의 심장을 휘도는 불의 고리가 세차게 회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