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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한 암살자는 검술 천재-5화 (5/653)

5화

딱!

글렌이 손가락을 튕기자, 알현실 내부의 마나가 들썩였다.

쿠구구구!

잔잔한 호수 같았던 마나의 흐름이 급속도로 출렁이며 바닥에서 거대한 철문이 치솟았다.

화아아아!

천장에 닿을 정도로 웅장한 철문은 금빛 불길에 타오르고 있었다.

“가, 가주님?”

로엔이 눈을 부릅떴다. 저 문은 가주만이 소환할 수 있는 지그하르트의 보고다. 글렌이 저 문을 소환하는 건 10년 만에 처음이었다.

“잠시 다녀오마.”

글렌이 손을 올리자, 금빛 철문이 기름을 칠한 듯 부드럽게 열렸다.

그는 잠시 뒤를 돌아 석검 위로 타오른 금색 불길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보고의 내부엔 셀 수 없이 많은 보물이 쌓여 있었다.

최상급 영약과 무기들, 성을 살 수 있는 보석과 여러 종류의 서적까지. 하나만 나와도 대륙에 피바람이 일으킬 보물들이었다.

글렌은 자신을 열렬히 드러내는 무기나 보석, 정갈하게 쌓인 영약에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보고를 일직선으로 걸어가 가장 깊은 곳에 세워진 거대한 책장으로 향했다.

원통형 책장은 세계수라도 된 듯 보고의 끝까지 솟구쳐 있었고, 칸마다 가지각색의 책이 꽂혀 있었다.

탁.

글렌이 땅을 가볍게 차자, 그의 몸이 중력을 무시하고 떠 올랐다. 허공을 밟아 책장의 첫 번째 칸으로 향했다.

첫 번째 칸엔 다른 곳과 달리 딱 두 권의 책만 놓여 있었다.

그는 앞에 꽂힌 누렇고 낡은 책을 잡아서 빼내려 했다. 하지만 책은 바위에 깔린 듯 요지부동이었다.

“역시 움직이지 않는군.”

글렌은 혀를 쯧 차고서 바로 옆에 있는 붉은빛 책을 꺼냈다.

두 번째 책은 첫 번째 책과 달리 부드럽게 빠졌고, 보존이 잘 되어 있어서 보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타다닥.

빠르게 책의 내용을 훑어보던 글렌의 손이 중간에서 뚝 멈췄다.

“음….”

그는 책에 적힌 글귀를 읽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초대 지그하르트 가주의 오러는 태양 같은 금빛이었으며, 마계의 불꽃마저 녹여버리는 초월적인 화력을 보여주었다….”

글렌은 눈을 내리감고, 라온이 만들어낸 금색 불길을 떠올렸다.

“금색 마나, 금색 불길.”

노란색 오러는 자주 나왔지만, 진한 금빛의 마나는 지그하르트 역사상 단 한 번 밖에 나오지 않은 색이었다.

“라온. 넌 대체….”

*     *      *

“엄마가 미안해.”

실비아는 별관에 돌아오자마자 라온을 끌어안았다. 평소보다 더 꽉 잡혀서 숨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괜찮아.”

라온은 실비아의 등이 바르르 떨리는 걸 보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전생에선 감정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다.

죽이라면 죽였고, 납치하라면 납치했고, 훔치라면 훔쳤다. 사육사와 개. 명령과 복종의 관계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실비아와 헬렌 그리고 시녀들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자신에게 주기만 했다.

받기만 한 삶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지금 가슴을 찌르르 울리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하나는 안다.

실비아와 시녀들이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항상 웃지는 못하더라도 슬프지 않기를 바랐다.

‘날 비웃었다면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겠지.’

하지만 가주전에 있던 자들은 실비아를 비웃었다.

단상 아래의 방계들은 대놓고 낄낄거렸고, 단상 위의 직계들은 벌레를 보듯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알려줘야겠지.’

실비아를 비웃은 그들 모두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오늘 그들이 보여준 추잡한 행동이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를.

*     *      *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정원 잔디 위에 남자아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짙은 금발이 잔잔한 바람에 휘날리는 아이의 이목구비는 어려 보임에도 이미 완벽에 가까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다만 몸이 좋지 않은 것처럼 얼굴이 창백한 것이 약간의 흠이었다.

“후우….”

두 눈을 감은 채 한참 동안 앉아 있던 아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불의 고리가 세 개가 되기 직전이군.’

아이가 아니라, 소년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성장한 라온이 옅게 웃었다.

‘벌써 7년이 지났나.’

첫 번째 판별식 이후로 7년이 지나, 어느새 열두 살이 되었다.

그 시간 동안 꾸준히 연공을 한 덕분에 두 개의 불의 고리가 세 개로 늘어나기 직전이었다.

‘조금 아쉽네.’

전신에 퍼진 냉기만 없었다면 진즉에 3성에 올랐겠지만, 아쉽게도 냉기와 함께 연공을 하느라 진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얻은 게 없지는 않았다.

‘상태창.’

속으로 이젠 익숙해진 단어를 외쳤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없음.

상태 : 혹한의 저주(아홉 가닥), 저질 체력, 운동능력 저하, 마나 감응력 저하.

특성 : ???, 불의 고리(2성), 수속성 저항력(2성)

*추가 능력이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수속성 저항력이 2성으로 올랐고, 상태에서 전신 냉증이 사라진 덕분에 전처럼 손발이 굳는 증상은 사라졌다.

물론 다른 체질 때문에 몸을 움직이는 건 여전히 힘들었지만, 그건 불의 고리 성취가 올라가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였다.

“흐음.”

라온이 상태창을 끄고, 잔디밭에서 일어섰다.

‘이제 육체 수련도 시작해야 하는데….’

추위를 덜 타게 된 덕분에 실비아와 시녀들의 걱정은 줄어들었지만, 몸을 움직이려고만 하면 쫓아와서 말린다.

불의 고리 성취를 빠르게 높이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수련도 필요했기 때문에 대놓고 훈련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당당하게 수련할 방법 없나?’

억지로 수련을 할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실비아의 말은 거역하기가 힘들었다. 명령이 아니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별관에서 헬렌이 달려 나왔다.

“판별식에 참여해야 하는데 아직도 그러고 계시면 어떻게 해요. 하여튼 마님이랑 똑같다니까.”

“아, 그랬지.”

판별식은 외부에 나가 있거나, 임무 수행 중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참여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도 가야만 했다.

“그 짜증 나는 것들 또 보겠네.”

몇 년 전 2번째 판별식에 참여했을 때도 노골적인 조롱을 받았다. 이번에도 비겁자니, 도망자니 알아듣지도 못할 소릴 짓거릴 것이다.

“도, 도련님. 그런 말씀은 작게….”

헬렌이 주변을 돌아보며 입에 손가락을 올렸다.

“다른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 가문 내부의 눈과 귀는 항상 열려 있어요.”

“걱정도 팔자지만, 알겠어.”

라온은 짧게 혀를 차고서 별관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예복 차려입은 실비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힘들면 방에서 쉴래? 엄마 혼자 가도 돼.”

눈가에 주름이 조금 늘어난 실비아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라온은 고개를 젓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우릴 비웃은 놈들이 어떻게 변했나 확인해야 하니까.’

암살자에게 표적의 변화는 최우선으로 확인해야 하는 과제였다.

라온은 즐거운 마음으로 판별식에 참여하기로 했다.

*     *      *

라온은 실비아, 헬렌과 함께 판별식이 열리는 알현실로 들어갔다.

“여전히 키가 작군.”

“비짝 말랐네. 금발적안만 빼면 다른 가문의 아이라고 해도 믿겠어.”

“지그하르트의 이름에 어울리는 건 저 잘난 외모뿐이지.”

“창백해서 얼굴도 별로 같은데?”

예상대로였다. 관심 없다는 듯 무시하는 직계들과 속삭이듯 비꼬는 방계들은 여전했다.

‘다행이야.’

저들은 여전히 자신과 실비아를 조롱하고 있었다. 그 태도가 달라지지 않아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조애나, 헨리, 데니어….’

라온은 단상 위부터 아래를 둘러보며 직계와 방계들의 이름을 하나씩 되뇌었다.

단상 아래 맨 뒷자리에 앉아, 30분 정도 대기하니 가주 글렌 지그하르트가 입장했다.

그는 여전히. 아니, 7년 전보다 더한 위엄을 두른 채 단상 위로 올라가 판별식을 진행했다.

직계는 한 명도 없었고, 방계와 봉신 가문의 아이들만 판별식을 진행했기 때문에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 식이 종료되었다.

방계 아이들의 마나 순도가 높았기 때문에 중간중간 자신과 비교하는 놀림이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오늘 판별식은 종료되었습니다. 모두 수고….”

“잠깐.”

글렌이 손을 들어 올리며 판별식이 끝났다는 사회자의 말을 끊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옥좌에 앉아 천하를 굽어보는 절대자의 시선이 처음으로 라온을 향했다.

순간 정적이 일어나며 이 공간에 있는 모두의 관심 역시 그에게 집중되었다.

‘나?’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호명될 줄은 생각도 못 했기에 당황스러웠다.

“가, 가주님?”

“으음….”

실비아가 당황하여 눈동자를 바르르 떨었다. 옆에 있던 헬렌이 손을 꽉 잡아 주었다.

“가문의 일원으로서 기초 수련에 참여하라는 명령서가 떨어졌을 텐데, 왜 한 달이 지난 지금도 답을 보내오지 않았지?”

‘기초 수련 참여?’

그런 건 받은 적도 없다. 옆을 보니, 실비아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가, 가주님. 라온은 다른 아이들과 다릅니다. 아직 몸속의 냉기가 남아 있어서….”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받은 자에겐 예외도, 거부도 없다.”

“제대로 걷기도 힘들어하는 아이입니다. 훈련을 버티지 못할 거예요.”

실비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걷지 못하면 기어서라도 훈련을 받아라. 그게 지그하르트다.”

글렌이 오른손으로 턱을 괴며 눈을 내리감았다.

“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니, 최소한 조금의 시간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또 집을 나갈 건가? 그 핏덩이를 데리고?”

“그, 그건….”

오른손을 잡은 실비아의 손이 축축이 젖어 드는 게 느껴졌다.

“이 땅에선 지그하르트로서 살 수밖에 없다. 싫다면 나가거라.”

글렌의 목소리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에게 말하듯 냉담했다.

“저러다 또 도망치는 거 아니야?”

“그것도 볼만하겠지만, 이제 깰 단전이나 마나 회로도 없잖아.”

“저런 사람이 가문의 직계였다니. 쯧쯧”

“…….”

라온은 실비아와 글렌 그리고 이 방에 있는 모두를 보며 서늘한 눈빛을 가라앉혔다.

‘이제야 알겠군.’

실비아가 직계이면서도 이런 처참한 대우를 받는 이유를. 직계만이 아니라 방계에게도 무시 받는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가문을 나갔던 거야.’

그녀에겐 무예를 익힌 흔적이 있지만 오러가 없다. 단전을 폐하거나, 오러를 익히지 않았다는 뜻인데, 예상대로 전자였다.

실비아는 단전과 마나 회로를 망가뜨린 뒤 가문을 나가 아버지와 결혼을 했던 게 분명했다.

‘날 임신한 뒤 아버지가 죽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돌아왔겠지.’

이해는 간다.

지그하르트의 직계 자리를 스스로 걷어찼다가 돌아왔으니, 방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이유는 합당했다.

‘다만.’

그건 외부의 시선이고, 그들의 사정이다. 실비아의 아들인 라온의 입장에선 그녀가 받는 대우를 참을 수 없었다.

탁.

라온이 실비아와 헬렌의 손을 놓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도, 도련님!”

“라온.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

“괜찮아.”

두 사람에게 고개를 저어 준 뒤 글렌의 정면에 섰다.

“가주님. 말씀하신 대로 다음 달부터 훈련에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손자가 아닌, 벌레를 보는 듯한 그의 눈빛을 마주하며 고개를 숙였다.

“넌 훈련이 있던 것도 모르지 않았나?”

글렌의 셋째 아들이자, 삼촌인 데니어 지그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직계 중 유일하게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던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기초 훈련이라고 해도 환자인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물러나라.”

“괜찮습니다.”

라온이 데니어가 아니라, 글렌을 바라보았다.

“지그하르트라는 이름을 받았으니, 그 값은 해야겠죠. 훈련에 참여하겠습니다.”

아이답지 않은 단호한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에 일순간 변화가 일었다.

작은 돌멩이 정도로 인식하는 듯한 눈빛이지만,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자신은 밑바닥 사냥개에서 최고의 암살자로 올라선 전력이 있고, 대륙 전설에 나오는 불의 고리를 익히고 있다.

그 모든 능력을 살린다면 이 가문에서 우뚝 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복수가 늦어진다? 아니다. 오히려 이게 더 빠른 길일지도 모른다.

꾸욱.

라온이 작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너희가 깔본 돌멩이가 얼마나 단단해질지 보여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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