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라온은 실비아의 품에 안겨 처음으로 별관을 떠나 지그하르트 본관으로 향했다.
‘저게 본관인가.’
멀리 본관이 보인다. 높이는 하늘과 눈높이가 맞을 정도였고, 너비는 이 먼 곳에서도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
집이 아니라, 성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규모.
‘북방의 지배자답네.’
지그하르트는 하나의 가문임에도 왕국보다 더한 영토와 무력을 보유했다. 괜히 육황의 한 축이 아니었다.
‘다들 저기서 산다는 거지?’
헬렌이 말해주길 실비아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직계들은 전부 본관 가주전 주변에서 산다고 했었다.
실비아만 따로 별관에서 사는 이유가 있겠지만, 그건 알려주지 않았다.
‘판별식이라….’
라온은 본관의 중심에 세워진 가주전을 훑어보면서 오늘 열리는 판별식에 대해 생각했다.
‘별걸 다한다니까.’
하늘을 향해 열린 아이의 두개골은 4살을 기점으로 닫히기 시작하고, 그 순간부터 아이가 가진 마나의 재능은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두개골이 닫힌 아이들을 모아다가 마나에 대한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는 행사가 바로 오늘 열리는 판별식이다.
‘난 뭐가 됐든 상관없지.’
지금의 재능이 미천하다고 해도 ‘불의 고리’가 육체와 마나 감응력을 최고의 상태로 올려줄 것이다. 타고난 재능 따위는 자신과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라온.”
천천히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고 있을 때 실비아가 자신을 살짝 들어 올렸다. 옆을 보니, 어느새 본관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엄마는 라온이 무엇을 해도 상관없어.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주면 돼.”
“응. 알겠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방긋 웃어주었다.
“역시 우리 아들이 제일 귀엽다니까!”
그녀가 또 자신의 뺨에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이리되면 5분 동안은 움직이지 못한다.
“으흠, 실비아 님.”
“아, 미안!”
헬렌의 헛기침에 실비아가 정신을 차렸다. 함께 와서 정말 다행이었다.
“들어가자. 조금 늦었겠어.”
“네.”
그녀는 자신을 안은 채로 가주전으로 들어갔다.
‘음.’
라온은 가주전 내부의 사람들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수준이 높군.’
본관 그것도 가주전이라서 그런지 건물 내부에 평범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무인들만이 아니라, 시종과 시녀들의 눈빛에도 정광이 어려 있었다.
“금방 도착하니까. 조금만 참아.”
“응.”
라온은 실비아와 함께 1층 중앙복도를 걸었다. 그 끝에는 거인이 드나들어도 될 정도로 거대한 철문이 세워져 있었다. 오늘 판별식이 열리는 알현실의 입구였다.
“실비아 지그하르트, 라온 지그하르트, 헬렌 카빈. 확인했습니다.”
알현실을 지키던 무인이 다리를 틀며 문을 열어주었다.
끼이이익!
쇳덩이가 뒤틀리는 듯한 묵중한 소리와 함께 별세계가 열렸다.
천장에서 오색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내리고, 금색의 벽에선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장식품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보기만 해도 억 소리가 나는 이곳이 바로 지그하르트의 가주 글렌을 만날 수 있는 알현실이었다.
쿠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라온에게 화살처럼 꽂혔다.
“실비아? 그럼 저 아이가 실비아의?”
“무슨 어린아이의 얼굴이 저리….”
“금발적안.”
“체구가 작군. 병이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었나?”
“패배자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그렇겠지.”
“패배자가 아니라, 낙오자라고 해야죠.”
처음 보는 사람들이 라온에게 관심을 내비쳤다. 물론 좋은 시선은 아니었다.
어린 몸으로. 아니, 어리기 때문에 라온은 저들이 쏘아내는 비릿한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저런 녀석까지 알현실에 들어오다니.”
“낙오자의 자식까지 판별식을 진행할 필요가 있나?”
“그러게요. 수준 떨어지는 짓인데.”
뭐가 실패자고, 무슨 낙오인지 모르지만, 저들은 실비아와 자신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었다.
‘음….’
라온이 주먹을 꼼지락거렸다. 자신에게 작다고 말한 건 아무렇지 않았지만, 실비아의 욕을 듣고 있으니, 가슴이 갑갑해졌다.
“괜찮아. 라온. 엄마만 보고 있어.”
그녀는 패배자, 도망자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자신을 향해 웃어주었다.
‘역시 이 사람은 강해.’
실비아는 마음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에 울렁이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저들이 직계인가.’
여유를 되찾아 알현실 내부를 훑어보던 라온의 눈이 단상 위에서 멈췄다.
붉은빛 의자에 앉아 있는 7명.
그들은 밑에 있는 사람들과 격이 다른 기운을 두른 채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수준이 달라.’
아래 있는 방계들이 여우와 늑대라면 단상 위 직계들은 이미 하늘에 오른 용처럼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뿜어냈다.
그들은 방계처럼 입을 열지 않았지만,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으로 자신과 실비아를 내려보았다.
‘다 적들뿐인가.’
콩가루 집안이라고 생각할 때 실비아는 단상 위가 아니라, 아래. 그것도 끝자리로 향했다.
‘이상해.’
여러모로 의문이 든다.
일반적으로 가문의 직계와 방계 사이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직계라면 몰라도 방계가 노골적으로 시비를 거는 건 기이한 일이다.
거기다 실비아는 홀로 떨어져 살고, 단상 위에 올라가지 못했다. 직계임에도 모종의 이유로 차별을 받는 게 분명했다.
‘이유가 뭐지?’
도망자나, 낙오자라고 하면 대련이나, 전투에서 패했던 걸지도 모른다.
쿠웅!
실비아가 차별받는 이유를 생각하고 있을 때 알현실의 문 앞에 서 있던 무인들이 들고 있던 창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북방에 군림하는 지그하르트의 온당한 주인. 글렌 지그하르트 가주께서 입장하십니다!”
그 말과 함께 알현실의 거대한 철문이 활짝 열렸다.
고오오오!
공기가 파르르 떨리는 듯한 위압적인 기파와 함께 글렌 지그하르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등장만으로 중력이 무거워지고, 심장이 조여든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긴장감이 등골을 스쳤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단상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던 용들도, 밑에서 이를 드러내던 늑대들도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뚜벅.
그 발소리.
5년 전 들었던 그 딱딱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글렌 지그하르트가 입장했다. 알현실 전체를 짓누르는 절대적인 존재감을 펼치며 단상의 중심에 세워진 금색 옥좌에 앉았다.
“시작하라.”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알현실 중앙에 검이 솟구쳤다. 거인이 들기에도 벅차 보이는 거대한 석검이었다.
‘저게 판별의 검인가.’
저 검은 1000년 전의 물건으로 손을 올리면 그 사람이 가진 마나의 재능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석검의 능력을 이용하여 아이들의 재능을 판단하는 게 오늘 열리는 판별식의 정체였다.
“첫 번째 버렌 지그하르트.”
진행자의 말에 단상의 두 번째 줄에 앉아 있던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푸른 머리칼의 남자아이가 일어섰다.
“검에 손을 올려주십시오.”
그가 단상으로 내려가자, 사회자가 석검을 가리켰다. 버렌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석검에 손을 얹었다.
우우웅!
버렌의 손끝에서 피어난 녹색 빛이 석검 전체를 뒤덮었고, 검병의 끝 부근에선 진한 바람이 피어났다.
“오오!”
“바람이다! 바람이야!”
“검 전체에서 빛이 나는 걸 보니, 마나의 질도 최상급입니다!”
“역시 카룬 님의 자제다운 재능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단상 아래에 선 방계들은 버렌 앞에 앉아 있던 중년인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검사에게 잘 어울리는 좋은 속성이다. 앞으로는 바람을 느끼는 데 집중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글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버렌은 태양을 마주한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고서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 봉신 가문 슬리온의 루난 슬리온.”
“네.”
단상의 우측 끝에 앉아 있던 은발의 여자아이가 조용히 일어섰다.
‘봉신가 슬리온인가.’
왕을 따르는 귀족처럼 봉신 가문은 지그하르트를 따르는 북방의 명가들이었다.
슬리온은 봉신 가문의 대표였기 때문에 직계와 같이 단상 위에 있던 모양이다.
우우웅.
루난이라 불린 여자아이가 덤덤한 눈으로 석검 앞에 다가가 손을 올렸다.
치이잉!
그녀의 손이 석검에 닿자, 뭉툭한 검날의 끝에서 달을 녹인 듯한 은빛이 치솟았다.
솟구친 빛은 검날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검병까지 올라섰고, 검 전체에 은빛의 서리를 만들어냈다.
“서리? 그것도 검 전체라니!”
“버렌 님과 같은 수준의 재능인가….”
“괜히 슬리온이 아니야.”
“슬리온 가에 또 하나의 천재가 나왔군.”
다만 버렌 때와 달리 환호와 박수 소리는 크지 않았다. 봉신 가문과 방계 사이에 경쟁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좋은 속성을 가졌구나. 칼날처럼 예리하게 다듬는다면 어떤 기운도 뚫을 수 있을 게다.”
글렌 지그하르트는 루난에게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감사합니다.”
루난은 큰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꾸벅이고서 고양이처럼 폴짝 뛰어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뒤로 2명의 직계와 수많은 방계, 봉신 가문 아이들이 석검에 손을 올렸지만, 버렌과 루난 정도의 재능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알겠군.’
라온이 손가락을 튕겼다. 다른 사람들의 판별식을 보자, 뭐가 좋고 나쁜지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마나의 순도는 검날의 빛이 어디까지 가느냐고, 마나의 속성은 검병의 끝에서 나타나.’
마나의 질이 뛰어난 경우는 루난이나, 버렌처럼 검 전체가 번쩍이고, 특별한 속성의 마나는 검병을 통해 알 수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라온 지그하르트.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가자. 라온.”
“응.”
고개를 끄덕이자, 실비아가 상큼하게 웃고서 자신을 들어 올렸다.
“다른 친구들이 하는 거 봤지? 똑같이 하면 돼.”
실비아는 석검 앞에 자신을 내려놓은 뒤 시범을 보여주듯 손을 뻗었다,
“응.”
짧게 대답한 뒤 석검을 바라보았다.
‘잘 나오진 않겠지.’
불의 고리가 2성이 되었지만, 마나 회로의 냉기는 질겁할 정도로 많이 남았다.
현재 자신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난 빛을 펼치진 못할 거다.
“후우.”
천천히 숨을 뱉고 석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두웅.
손이 석검에 닿자, 조약돌이 떨어진 연못처럼 심장에 파동이 일어났다. 작았던 고동이 가슴을 넘어 전신을 울렸다.
‘뭐지?’
그 기이한 감각에 손을 빼려고 할 때 눈앞에 환하게 번쩍였다.
은빛 갑옷을 두른 금발의 사내가 보인다.
그의 앞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괴물들이 파도가 되어 밀려오고 있었다.
뭐야 이건….
환상이 분명한데도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감각이 생생했다.
호흡도 제대로 못 하고 손을 떨고 있을 때 남자가 검을 들어 올렸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검날 위로 황금색 불길이 타올랐다.
그가 불꽃에 휩싸인 검을 벼락처럼 내리그었다.
그 순간.
대지 위로 치솟은 금빛의 불길이 세상을 덮었다.
시야 전체에 차오른 금색 화염을 피해 눈을 감았다가 뜨자, 다시 세상이 바뀌고 눈앞에 메시지가 떠 있었다.
[불의 고리(2성)을 습득하고 있습니다.]
[???을 습득하지 못했습니다.]
[성취가 모자랍니다.]
뭔지 모를 메시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석검에서 빛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우우웅.
세차게 올라가던 빛이 힘을 잃고, 검신의 중앙 부분에서 멈춰 섰다.
다른 사람처럼 특별한 능력도, 높은 순도도 없었다. 직계는커녕 방계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재능이었다.
“벌써 끝?”
“중간도 못 간다고?”
“크하하하! 저렇게 적은 건 처음 보는데?”
“마나의 질도 나쁜데다가 아무 능력도 없는 백색이군.”
“외모 빼고는 볼 게 없네.”
“역시 도망자의 자식은 무신께서도 보살피지 않으시나 봐.”
판별식을 지켜본 직계들은 한심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고, 방계들은 대놓고 비웃음 터트렸다.
“…….”
직계와 방계들에게 짧은 조언을 해주던 글렌도 입을 열지 않았다.
“괜찮아. 라온. 잘했어.”
실비아는 항상 보여주는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안았고, 어느새 다가온 헬렌이 입술을 깨물며 귀를 막아주었다.
“후….”
라온이 낮은 숨을 뱉어냈다.
무시는 익숙했다. 인간이 아니라, 개로 사육되고 세뇌까지 받았으니, 감정 따윈 버린 지 오래다. 비난과 모욕 따윈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차피 얻을 것만 얻어서 떠날 몸.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실비아와 시녀들이 자신을 진짜 가족으로 대해줬지만,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리만큼 기분이 가라앉았다.
자신만이 아니라, 실비아와 헬렌까지 비웃는 놈들을 보자, 감전된 듯 가슴이 찌릿했다.
‘좋다.’
라온이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실비아와 시녀들은 처음으로 자신을 인간으로서 대해준 사람들이다.
그들을 비웃는 직계와 방계들에게 타고난 재능이라는 게 얼마나 하찮은 건지 알려주기로 다짐했다.
“판별식은 매번 참여했지만, 저 수준은 처음 보네.”
“진짜 지그하르트 맞아?”
“실비아가 가졌던 재능도 전부 날아갔네요. 가주님과 같은 금발적안 빼고는 볼 게 없어요.”
뚫린 입이라고 멋대로 떠든 놈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했다.
“그만.”
글렌의 서늘한 한 마디에 알현실 전체가 얼어붙었다.
“판별식은 끝났다. 전부 나가도록.”
“가주님?”
“다시 말해야 하나?”
“모두 해산하라.”
글렌의 둘째 아들인 카룬 지그하르트가 일어서자, 다른 사람들도 슬쩍 눈치를 보며 알현실을 나갔다. 물론 들리지 않게 라온과 실비아의 욕을 중얼거리면서.
5분이 지나기도 전에 알현실에 남은 사람은 방의 주인인 글렌 지그하르트와 그의 수석 집사 로엔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글렌은 중앙에 세워진 판별의 검을 보며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님….”
로엔이 그에게 다가가려 할 때였다.
파직!
판별의 검 아랫부분에서 치솟은 빛이 검날을 넘어 검병의 끝까지 차올랐다.
화아아아!
그 빛은 태양처럼 진한 황금색이었고, 검병의 끝에선 이글거리는 불길이 타올랐다.
“금색 불꽃?”
글렌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폭풍이 몰아쳤다.